.1961년 5월 16일 黎明, 필자가 7사단 3연대 1대대 훈련계획에 따라 사창리 계곡의 1중대 주공소대장으로서 목표 고지를 향해 黎明공격을 하며 "돌격앞으로"란 구호를 숨 가뿌게 웨치며 가상적을 처치하고 목표지역에 도착했을 때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
라는 통신병의 안테나에서 "혁명공약" 6개항이란 충격적인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선한 5,16군사혁명의 산실 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가옥이다.
. 주차시설이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토록한 사전 안내에 따라 6호선 신당역 6번출구 신당파출소에서 "박정희 前 대통령 가옥 안내"라는 팜프렡을 입수 걸어서 15분정도 골목길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니 벌서 먼저 온 팀은 내부에서 안내중이었다.
. 외부를 둘러보고 11;00시가 되어 자원봉사자인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에서부터 출발했다. 너무나 검약한 환경이다. 가옥은 대지면적 341㎡(103,2평),건물면적 139㎡(42평)규모로 내부는 응접실, 안방 등 방 3개, 서재, 부엌, 창고, 화장실로 구성돼 있었다. 응접실이 부엌과 자녀방 등 다른 공간과 벽으로 구분된 점이 특이했다. 안방엔 손재봉틀이 있다. 응접실에 탁자와 7개의 의자, 찬장, 선풍기 등이 있다. 찬장 위에 바비인형, 시계, 석고상이 있다. 시계 옆에 ‘神怡心靜’(신이심정)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정신이 온화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뜻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 아궁지에서 불을 때는 재래식 부엌을 마루로 개조하여 당시의 기록등을 보여주는 영상 TV가 있어 당시 뉴스등을 보여주었다. 특히 서재의 동쪽 창을 향해 놓여진 평범한 목조 책상은 나무의자와 함께 5,16군사혁명의 공약, 호소문, 포고령등을 구상 입안했을 역사적 장소로 여겨젔는데 너무나 간소했다.
. 특히 당시 애독되었던 사상계 잡지가 있었고 5,16 군사혁명을 최초 보도한 조선,동아,한국,경향 등 신문에 "今曉三時 軍서 無血 쿠데타"란 표제의 당시 기사가 눈길을 끓었다. 또한 박정희 내외분의 세 자녀와의 사진등은 평범한 시민의 모습이었다. 응접실,안방,자녀들방,부억, 서재,TV영상실등을 살펴보는데 30여분이 소요되었다.
.주변의 주택들은 4,5층 다세대 주택들로 개발되었으나 고박정희 전대통령의 가옥만이 옛 규모대로 보존되어 정부지정문화재(제412호)로 지난 3월17일부터 일반에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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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기념사진>
. 고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여사는 1950년 대구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대구, 광주 등 남편 근무지를 따라 이사 다녔다. 첫딸 박근혜는 1952년 태어났다. 육영수여사는 서울에 온 뒤 1956년 4월 신당동 401-7번지에 최초로 자기 명의의 집을 샀다. 어둡고 습했다. 마당도 좁았다. 육여사는 밝고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했다. 친척을 통해 대출을 받아 1958년 5월16일 450만환에 지금 신당동 가옥을 구입해 이사했다. 1958년 대령 월급이 3만1561환이었다
. 당시의 정치 사회현실은 데모로 하루가 시작되어 데모로 하루가 끝나는 혼란스러웠다. 6,25전후 복구는 남북간에 국력과 군사력 측면에서 심한 격차를 보였고 특히 3,15부정선거로인한 혼란과 4,19혁명으로(고대생 3,000 여명운집) 이승만 대통령 용단의 하야("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라는 민주시민적 사고방식의 용단=1960,4,29)와 하와이 이주사태로 이어젔다. 이어 허정과도정권을 통해 제2공화국 장면정권이 들어 서면서 학생세력의 팽배와 혁신계가 등장하고 민족자주와 통일촉진운동을 웨치며 반공 분단국가의 기틀마저 흔들리는 사태로 전개되었다.
. 이러한 절대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최후수단으로서 5,16군사혁명을 구상하였던 산실이 바로 이 "신당동 고박정희 전 대통령 가옥"인바 탐방의의를 찾아 보았다. 1960년 국민소득 1인당 80$의 빈국으로서 필리핀,태국이 우리보다 부자였고 베트남이 가난한 우리나라에 쌀을 지원했던 환경에서 2015년현재는 1인당 국민소득 2만8000$에 G-20국가에 우뚝한 환경이되었다.
. 오늘날의 대한만국은 자유민주,시장경제체제의 기틀을 세운 국부 초대 이승만 전대통령과, 5,16군사혁명으로 경제개발과 대북우위군사력 확보의 틀을 구축한 박정희 전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들이다.
. 혹자들은 功-過를 편향되게 보는 시각들도 있으나 이는 매우위험한 편견들로서 해방후 호란스런 좌-우이데오로기 투쟁과 6,25전후 격심한 남북격차에서 적화되지않고 자유-민주-시장경제체제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에 우뚝한 환경으로 있게된것은 두 전대통령의 통치력에 있음을 감사드린다. 1961년 5월16일 黎明공격훈련시 들었던 혁명공약 6개항은 지금 다시 새겨보아도 그 내용이 절박한 국가운명의 가이던스로 여겨진다.
. “떡을 만지는 사람의 손에 떡고물이 묻는 건 당연하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은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부패 정치인으로 몰리던 1980년 3월 ‘떡고물’ 발언을 했다. 계엄사령부는 그해 6월 권력형 축재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후락의 축재 액수가 194억3510만 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떡은 도대체 얼마나 크겠느냐는 억측도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사적 착복을 하지 않았다. 개도국 통치자들 가운데 드물게 깨끗했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동아일보 사설 기사중에서)
. 위 놀설 기사중 군사독재자란 비난의 와중에서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청빈스런 통치철학에 숙주기생한 권력 후계자들,특히 자녀들까지 팀원이된 J,R등 전직대통령의 천문학적 부정축재부패한 모습들에선 국민들의 지탄이 무섭게 회자되고있음도 명심해야 하겠다.
. 오늘의 탐방에선 통치자의 검약과 청빈정신을 깊게 느낄수 있어 좋았으며 탐방후엔 장충동으로 이동하여 이름만 요란한 "평양냉면집"에서 수육과 냉면을 취식하고 동대문쪽으로 이동 "위플래쉬=whiplash"란 영화를 즉 뉴욕음악학교의 악마교수를 만난 신입생 앤드루가 2-3명의 경쟁자와 합창단 드럼연주자의 자리를 확보키위한 피를 토하는 연습과정과 마지막 성공적이며 열광적인 연주모습을 관람하고 하루를 보냈다. 鷄林회원들 즐거운 하루였다.
연파 장병옥 씀
참고적으로 첨언하면
. 고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탐방을 하면서 검약과 청빈의 표상측면에서 가옥전체적 인상의 초점을 파악했으나 실은 허탈한 측면도 지울수 없었다. 너무나 내용물들이 빈약하고 준비성이 부족하고 종사자들도 교육과 내용지식을 겸비토록 하여 배치할것이 요구되었다.
. 군사독재란 어두운면만을 볼것이 아니라 17년 간 功과 過에서 草根木皮로 연명하던 가난을 극복하며 산업개발을 통한 富國强兵의 오늘의 대한민국을 창출해 낸 功의 측면은 불후의 역사결과 물이다. 따라서 17년간의 통치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 수집하여 역사의 흔적들을 전시하여 볼거리가 풍부하도록 역사의 산교육장화 하는것이 꼭 필요했다.
. 특히 가옥의 본 모습은 유지하되 내용물은 알차게 채울것이 요구되었다.스토리는 얼마든지 현 우리의 눈 높이에 맞게 말이다. 이 가옥은 행 불행을 떠나 두 사람의 통치자가 배출된 곳이다. 최근 타계한 싱가폴의 신화적 국부 李光耀의 독재성있는 부국개발과 현 아들 수상, 2대의 총리의 역사와 비견하여 손색이 없는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