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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었다.
[아버님은... 아버님께서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적사도에 투옥이 되고 대소림사가 백년 봉문한다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믿고 계십니까? 제삼의음모자들이 노리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정작 대소림사가 아니라 천하무림일 수도 있습니다. 군협천주 철군무의 암살이 그들 음모자들의 소행이라면 그들의 힘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으리만큼 가공할 것입니다. 천하무림이 그들의 손에 떨어진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아버님도 그것을 원치는 않을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이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내셔야 합니다. 아버님만이 그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소림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책임을 지시고 이일을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소림사의 수천 년 깨끗한 이름에 오점이 남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천엽성승은 감동 어린 눈빛으로 단엽을 주시했다.
(아아 몰랐도다. 그동안 노납은 노납의 위대함만을 자부하고 있었을 뿐. 노납보다 위대한 인재가 대소림사에 머물고 있었던 줄은 진정 몰랐도다.)
항시 어리게만 보아온 단엽이다. 그러나 그는 이순간 단엽이 결코 어리지만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그가 자신의 피를 타고난 자식이라는 점에 한 가닥 대견함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 군협칠대무황이 노납을 군협천으로 이송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낸 지금... 너의 말처럼 이 거대한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해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버님의 힘이면 그들을 능히 상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모르는 소리이다. 그들의 합친 힘을 상대할 인물은 이 땅에 없다.]
[그 정도로 그들이 대단합니까?]
천엽성승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천엽성승이 군협칠대무황을 상대할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그러나 그들 간의 결전은 결국은 서로 죽는 비참한 종말을 초래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피하고 있음을...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소자가 아버님을 대신한다면... 그리고 아버님이 소자를 대신한다면...
군협칠대무황과의 결전을 피할 수가 있을 겁니다.]
천엽성승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진하게 떠올랐다.
그때였다.
스스스...
단엽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천엽성승의 모습으로. 그 모습은 겅루 속의 천엽성승의 모습처럼 완벽하게 같았다. 천엽성승은 대경했다. 단
엽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어머님이 제게 남긴 유산입니다. 무면천환기라 하며 누구도 발각할 수 없는 완벽한 역용술이지요.]
그 음성까지도 완벽하게 천엽성승의 것이다. 그 표정과 행동까지도...
[이미 오년의 세월동안 아버님의 모든 것을 보고 자란 단엽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님의 그대로를 완벽하게 흉내 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로 적사도에까지 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무면천환기로써 소자로 변신해 음모를 캐내기를 바랍니다.
순간,
[그... 그럴 수는 없다. 아이야... 너는 어찌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하려 하느냐?]
천엽성승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단엽은 태연하게 말했다.
[죽는 것은 아니지요. 단지 적사도에 가는 것뿐입니다.]
[그...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아버님이 그동안 소자가 저지른 모든 과오를 관용으로 대하셨습니다. 지엄하신 대소림사의 대장로의 신분으로 행세하는 이것도 과오라면 과오입니다. 아버님은 관용으로 대해주셔야 합니다.]
[아이야...]
[이미 굳어진 결심입니다. 허락지 않으신다면 당장 이곳에서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겠습니다.]
단엽의 표정은 굳어졌다.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다는 표정이다.
천엽성승은 탄식을 연거푸 토해냈다.
[아버님이 대소림의 아들이듯 소자 역시 대소림의 아들입니다. 그런 내가 위기에 빠진 대소림사에 작은 힘이나 되겠다는데... 거절하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님에게 드리는 소자의 처음 효도입니다. 어머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도리가 없는가?]
천엽성승의 표정은 처연했다. 적사도, 이곳은 돌아나올 수 없는 살아 있는 지옥이다. 그러나 어쨌든 사마인이라면 당장 죽는 것보다 이곳에서 잠시의 생을 유지하는 것을 더 원할 수도 있다. 비록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해도 당해보지 않고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사마인에 한한 것이다. 만약 단엽이 천엽성승의 신분으로 적사도로 투옥이 될 경우, 단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동안 천엽성승의 판결을 받고 적사도에 투옥이 된 인물이 상당수이다. 지금까지 적사도에 살아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들은 대부분 바로 천엽성승에게 판결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그들은 천엽성승을 무섭게 저주하며 증오한다. 그런 그들에게 단엽이 천엽성승의 신분으로 들어간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단엽은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천엽성승이다.
단엽 역시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한데도, 그가 적사도를 굳이 고집하는 것은 바로 천엽성승을 대신하여 죽겠다는 것이다. 이미 그의 결심은 굳어졌고, 천엽성승이 그것을 회유시키기에는 늦어 있었다. 천엽성승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런 그의 노안에서는 뿌연 물안개가 스며 나온다.
(헛허... 이것도 운명인가?)
소리 없는 그의 웃음. 그것은 통곡보다 더한 슬픔이었다. 아들을 죽음으로 보내야 하는 아비의 심사. 아비의 죽음을 대신하겠다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처연한 심정. 그러나 결국 천엽성승은 단엽의 고집에 꺾이고 만다.
이렇게 하여 천엽성승이 단엽이 되고 단엽이 천엽성승이 되는 일대의 대사건은 결정이 되고 만다.
잠시 후, 단엽은 천엽성승에게 자신의 무면천환기를 전수했다. 그리고 천엽성승은 불문최고의 기학인 단엽천불수를 전한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무림은 삼천 년 무림사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평화의 기운에 젖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안으로는 이렇듯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으니... 아마도 이해의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다.
유난히도 더디게 찾아오는 여명, 그러나 희끄무레한 어둠을 헤치며 불그레한 적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천은 삽시간에 황금빛에 젖어들며 한꺼번에 밝아온다.
뎅... 뎅... 뎅...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대소림사의 범종소리.
[좋은 아침이로군.]
천엽성승은 느릿하게 합장하며 뜨락으로 내려섰다. 그의 전신은 아침 안개와 황금빛에 젖어 신비롭다.
이때다 그의 면전으로 소리 없이 나타나는 인영이 있었다.
예황 부소영. 바로 군협칠대무황 가운데 일인이었다.
[모든 준비가 다 된 것이오.]
천엽성승은 예황 부소영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며 물었다.
[아직 한 가지 남았습니다.]
예황 부소영은 공손히 대답했다.
[아... 그렇군. 아직 남은 일이 있었군.]
천엽성승은 그 한 가지 일이 무엇이라는 것이 생각났다는 듯 나직이 탄성
을 발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작하시오.]
마치 남의 일처럼 여유 있게 말한다. 예황 부소영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저런 여유는 그가 천엽성승이기에 나오는 것인가?)
그녀는 새삼 천엽성승을 주시했다. 한없이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한 인간
으로서... 한 여인으로서... 그러나 오늘 그녀는 이 존경했던 사람에게 차
마 못할 짓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녀의 입에서 긴 탄식과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온 것은 그때인 듯 싶다.
[죄송합니다.]
말과 함께 가볍게 철비파를 퉁겼다.
디딩...
천엽성승의 몸에 벼락을 맞은 듯격렬한 떨림이 그 순간 일었다. 그것은 실로 찰나지간의 일이었다.
[헛허... 그대의 비파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아름답군.]
천엽성승은 차분한 시선으로 예황 부소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노납의 모든 무공은 폐지된 것인가?]
그의 표정은 허탈한 가운데 지극히 평온하게 보였다. 한데, 천엽성승의 무공이 폐지가 되다니? 그렇다면 예황 부소영의 철비파가 퉁겨지고 천엽성승의 몸이 격렬한 떨림이 일었던 지극히 찰나적인 순간에 천엽성승의 무공은 폐지된 것이란 말인가?
예황 부소영은 말이 없었다. 다만 고뇌의 표정만을 떠올린 채 막연히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천엽성승은 다시 물었다.
[이제 노납이 해야 할일이 무엇이오? 그리고 군협육대무황의 모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이오?]
한데 그의 말이 떨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또 다시 소리 없이 그의 면전으로 나타나는 육인이 있었다. 그리고 한대의 거대한 팔두마차가 있다.
육인
그들은 바로 군협육대무황이었다.
선두의 인물은 단아한 문사 차림의 중년인, 물처럼 고요한 기도가 흐르는 이 인물은 천황 혁련궁이다. 그리고 그의 뒤엔 선남선녀가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으로 보인다. 사내는 완숙한 기품의 소유자였으며, 여인은 성숙한 기품이 흐르는 뛰어난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용황 천문평, 봉황 제갈옥으로 불리운다. 마차의 마부석에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있는 한 사람, 깡마른 체구의 평범한 중년인, 그는 비황 허무행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각기 검과 도를 품에 비스듬히 안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인물, 바로 검황 염무정과 도황 독고풍이다.
군협칠대무황, 현무림의 사마인에게 있어서 공포와 전율 그 자체이던 이들이 천엽성승의 면전에 소리없이 나타났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직 하나의 이유 뿐이다. 천엽성승. 이 무림의 대역죄인을 군협천으로 압송하기 위함이다.
잠시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묘한 침묵이다.
지금까지 그들 관계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상하 관계를 유지했다. 천엽성승은 대과헌의 헌주로서 사마인을 심판했고, 군협칠대무황은 사마인들을 대과헌으로 잡아오는 임무와 무림칠대뇌옥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아오지 않았던가.
기실 대과헌과 군협칠대무황의 이런 긴밀한 관계는 이백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백년 전 당시 대과헌이 처음 대소림사에 탄생이 되었고 더불어 제일대 군협칠대무황이 탄생이 되었다.
제일대 군협칠대무황, 당시 무림의 절대기재들이었다. 그리고 현 제삼대 군협칠대무황의 사조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군협천 사상 최강의 무강이라는 군협칠대정종절예를 연성한 그들의 무공은 가히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들은 오직 군협천주의 명만을 받는다. 군협천주의 명으로 수많은 죄인들을 대과헌으로 잡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들을 무림칠대뇌옥으로 수송할 때만 대과헌주의 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제일대 군협칠대무황, 제이대 군협칠대무황, 그리고 현재 제삼대 군협칠대무황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백년의 세월 동안 그들과 대과헌과는 단 한 번의 불화도 없었으며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 왔다.
한데 지금, 그 관계가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삼대 군협칠대무황은 대과헌의 헌주인 천엽성승을 잡아들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고 천엽성승은 그들에게 명을 내릴 권한을 상실한 채 죄인으로서 군협천으로 이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제 친구가 오늘은 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득 천황 현련궁이 침묵을 깨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시지요. 성승.]
[아미타불...]
천엽성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로 다가갔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그럴 수는 없소. 아미타불..]
은은히 분노가 서린 우렁찬 불호성이 뜨락을 길게 울리는 것이다. 이어 장내에 나타나는 세 명의 노승.
그들의 일신에서 감히 인간으로서는 항거할 수 없는 충격적인 위엄이 흐르고 있었는데... 바로, 소림장문인 무운선사와 장경각의 주지인 무경신승, 법불원의 주지인 무해신승이었다.
분노,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분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출현에 장내는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당겨진다.
천엽성승은 합장했다.
[장문인, 무슨 일이십니까?]
소림장문인 무운선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천엽성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사숙조께서는 떠나실 수 없습니다. 진실을 진실로 믿어주지 않는 무리에게 사숙조를 내맡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천엽성승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어찌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힘으로 맞서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래서 피를 부르고, 그 피의 대가로 진실을 사려하십니까? 부질없는 일이오.]
천엽성승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 주위에 소림백팔나한대진을 펼친 이상... 이들 군협칠대무황은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상대는 천마교가 아니라 군협천이오. 장문인은 잠시 군협천의 존재를 망각하신 모양이군요. 군협천은 오백 년 난세를 평화로인 이끈 위대한 정파의 하늘이오. 그들을 상대로 피를 뿌린다는 것은 파멸만을 초래할 뿐이오. 그렇게 해서 대소림사의 명예와 진실을 찾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군협천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천하정파인과의 싸움을 뜻하며, 그것은 무림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림장문인 무운선사가 이 사실을 모를리 만무하다. 다만, 그는 분노하고 있었고 잠시 그것으로 인해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천엽성승은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여운처럼 던져지는 그의 말,
[백년봉문을 선언하시오. 그것만이 소림의 진실과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오.]
비틀... 무운선사는 쓰러질 듯 휘청였다. 그의 표정은 처연했으며 노안에는 눈물마저 스며든다.
[아미타불...]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군협칠대무황과 천엽성승을 태운 마차가 망막에서 멀어진 때까지도...
그는 오직 바라만 볼 뿐이었다. 문득, 그는 털썩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그리고 통곡처럼 흘러나오는 그의 탄식...
[아아... 이것으로써 소림의 위대한 혼은 사라지는가? 정녕 사라지는가?]
언제부터인가... 한쌍의 눈이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엽성승이 뜨락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줄곧 지켜보는 그 눈의 주인은 십오세 가량의 어린 중이었다.
바로 단엽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뜨락의 한편에 있는 한 노송의 무성한 가지 위.
[장하다. 나의 아들아...]
그는 처량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희디흰 두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이 아비 이제 너의 이름으로 대소림에 덮인 음모를 파헤치리라.]
수수수.... 눈물처럼 낙엽이 떨어져 내린다.
[이 아비는 이제 남은 생명 너를 대신하여 불태우리라... 아들아.. 나의 아들아... 내 살아 있으나 너의 이름으로 살아있고... 내 존재하나 너의 혼으로 존재하도다.]
날리운다. 낙엽이... 그리고 처량한 단엽, 아닌 천엽성승의 음성이... 낙
엽이 떨어진다. 단엽이 아닌 천엽성승의 눈물이...
여명이 움터오는 이 아침, 단엽이 떠나고 천엽성승이 통곡하는 날이었다.
두두두... 달린다. 마차는 숭산을 빠져나와 거침없이 통곡하는 날이었다.
계곡을 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밤낮을 달렸다. 마차 안의 천엽성승, 아니 단엽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마차가 향하는 곳이 동쪽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군협천은 군산에 있고 그곳이라면 남쪽으로 가야하거
늘 동쪽이라니?)
의심나기가 무섭게 그는 소리쳤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오?]
천홍 혁련궁의 담담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적사도로 가는 겁니다.]
단엽은 크게 놀랐다. 다시 천황 혁련궁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군협천 대신 적사도로 직접 수송하라는 명이 새로이 내려졌습니다.]
[누구의 명이오?]
단엽은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군협천주의 명이십니다.]
단엽은 침음했다. 이미 적사도로 가는 것은 각오한 그이다. 적사도로 가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대소림사를 일방적으로 죄인들의 집단으로 몰아넣는 것도 그렇지만... 단 한미다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적사도로 급히 수송하는 이 행위는 더욱 이상하다.)
무엇이 군협천주로 하여금 그리 급하게 만든 것인가. 예황 부소영, 결코 꾸미지 않은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이 여인의 표정은 지극히 어두웠다.
이 정도의 용모에 이정도의 무공을 지닌 여인이라면 중원의 수많은 기남들이 한번쯤 접근을 시도해 봄직도 하다. 일신에 젖어 있는 온화한 기품과 사람을 끄는 매력 이것을 마다할 사내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사내들이그녀에게 접근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사내들을 거절했다. 결코 사내들에게 어떤 부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 그녀가 아니었었건만 그녀는 사내에게만은 냉정했다. 이미, 오래 전에 그녀는 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없이 고아하고 수려하며 누구에게나 자상한 사람. 그러나 그는 예황 부소영으로서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직 그녀만의 사랑으로 끝나야 하는...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한 채 그녀는 모든 사내들을 거부해 왔던 것이다. 지금도 그녀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서글픈 심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데 문득, 툭...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 하나가 있었다.
천황 혁련궁의 손이었다. 두 사람이 탄 말은 머리를 나란히 한 채 무섭게 질주했다.
[소영,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느냐?]
천황 혁련궁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예황 부소영은 흠칫하더니 상대가 천황 혁련궁임을 알고는 서글프게 웃었다.
[사형,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무슨 말이냐?]
천황 혁련궁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황 부소영은 탄식했다.
[그는 결코 대역죄인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사형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소영, 너는 지금 감정에 치우쳐 있다.]
[사... 사형...]
[이미 그에 대한 결정은 내려졌다. 그 결정은 군협천주께서 직접 내리신 것이다.]
예황 부소영은 푹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 투명한 이슬이 맺힌다.
[군협천주의 명은 곧 진리이며 법이다. 네가 감정에 치우쳐 잠시나마 그 사실을 잊었다면 그것은 너의 잘못이다. 그 분이 그를 대역죄인이라 한 이상... 그는 대역죄인인 것이다. 그 이상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철비파를 꼬옥 잡은 손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은 연민을 담은채 마차로 향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천황 혁련궁은 탄식한다.
[네가 그를 사랑함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처음부터 빗나간 것이었다. 나이를 떠나서 그는 불문에 몸을 담고 있지 않느냐. 잊어야 한다. 소영... 될 수 있으면 빨리..]
[죄송합니다. 사형.]
예황 부소영은 다시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녀의 처량한 표정은 천황 혁련궁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그는 탄식했다.
[마지막 가는 길이다. 함께 있고 싶다면 함께 있어도 좋다.]
예황 부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어, 그녀는 창만한 비애가 담긴 시선으로 천황 혁련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의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단엽은 흠칫했다. 느닷없이 부소영이 마차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합장하며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예황 부소영을 주시했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로 저 여인이 나를 찾는 것인가?)
이 순간 단엽은 한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면전의 여인이 찾은 것은 천엽성승이지 단엽은 아니라는 것을...
[시장은 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황 부소영이 내뱉은 최초의 말이었다.
[아미타불...]
단엽은 단지 불호성만을 흘렸다. 그는 상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가 군협칠대무황 가운데 일인인 예황 부소영이라는 것 외에는...
상대의 접근 목적도 확실히 모른다. 그렇다면 침묵이 최선이다. 지금의 그는 단엽이 아닌 천엽성승이고... 섣불리 입을 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인 것이다.
[여기 약간의 음식이 있습니다. 먼 길을 가야하니 억지로라도 드시지요.]
그녀는 만두 몇개를 꺼내놓았다. 단엽은 여인의 태도가 예사로운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지금의 두 사람은 적대관계이다. 헌데, 그녀가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며 부드럽기 이를 데가 없다. 그는 정중히 물었다.
[노납이 누구이오? 노납은 천엽성승이라는 대역죄인이오. 그렇지 않소?]
[서... 성승...]
[부시주의 호의는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나가시오. 노납에게 음식을 주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로도 당신은 대역죄인으로 몰릴 수가 있소. 더욱이나 나와 자리를 함께함은...]
예황 부소영은 와락 단엽의 품에 몸을 던졌다.
(어...?)
단엽은 기겁을 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예황 부소영의 이런 행동을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예황 부소영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 단엽은 당혹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부..부시주...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부시주께서는 지금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서..성승... 소녀는 당신을 사랑하옵니다.]
단엽은 어이가 없었다.
(이 여인이 아버님을 사랑했었단 말인가?)
천엽성승은 자신에 관한 일을 모두 단엽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과의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황 부소영은 더욱 깊이 단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성숙할대로 성숙한 여인의 몸, 야릇한 감촉이 안개처럼 단엽에게로 밀려든다. 단엽은 자신의 손이 어느새 예황 부소영의 흑발을 쓸어내리고 있음을 느끼고는 흠칫했다.
(빌어먹을... 이럴 때 옛날 버릇이 나올 것은 뭐람...)
그는 당황하여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불호성을 흘렸다.
[아미타불... 부시주, 지금 부시주는 무언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소. 노납의 세수 백 삼십이 넘었소. 더욱이나 불문에 몸을 담고 있거늘... 사랑
이라니... 당치도 않소이다.]
예황 부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길게 탄식했다. 단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 유난
히 흰 얼굴 속의 까아만 두 눈은 젖어 있었다. 뽀아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그 눈은 너무나 슬프게 울고 있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운명이었습니다. 당신을 처음 본 그 순
간 사랑을 느낀 것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리고 잊으려고도 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군.)
[잠을 자도... 밥을 먹어도... 걸음을 걸을 때도... 오직 소녀에게는 당신뿐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병도 중병이다.)
[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좋았습니다. 오직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어쩌다가 당신의 눈길이 우연히 소녀에게 향하는 날이면... 그날은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말하고 싶다. 나는 천엽성승이 아니고 단엽이라고...)
[소녀, 죽는 그 순간까지 이 사랑을 혼자 간직하려 했으나... 성승의 불
행을 보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황 부소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이런 추태를 보이게 된 것이지요.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아미타불]
단엽은 그녀를 가만히 떼어놓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랑이란 뜬구름과 같은 것이오. 또한 인생이란 꿈과도 같은 것... 흐르는 구름은 머물지 않고 꿈이란 깨어나기 마련이오. 모두가 지나면 허무하고 덧없는 것... 아미타불... 지금은 아프고 슬프나 허무하고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오.]
단엽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예황 부소영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흠칫했다.
(빌어먹을... 그냥 말이나 할 것이지... 손은 왜 거기로 가나?)
제버릇 개 못 준다고 지금 단엽이 그 꼴이다. 그는 슬며시 손을 떼며 엄숙히 말했다.
[노납의 말을 억지로 이해하려고는 마시오.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터이니...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예황 부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흐트러진 흑발과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야속한 사람. 목석같은 사람. 결국 당신은 영원히 타인이시로군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그녀는 한동안... 참으로 한동안 단엽을 바라본 후 몸을 돌려 마차를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휴우...]
단엽은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몰랐다. 정말이지 몰랐다. 저 여인이 아버님을 사모하고 있었을 줄은..)
그는 혀를 내둘렀다.
(하여튼 놀라운 일이야... 머리 깎은 중을 사랑하는 미친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한데 왜 이렇게 허전한 것이지? 어허... 정말 병이다. 치마 두른 여인이라면 가리지 않는 나도 병은 병이야.)
단엽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 온통 예황 부소영의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윤기 나는 흑발과 그 물컹한 감촉으로... 단엽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어 그녀의 생각을 지우며 은근히 걱정스럽다는 듯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기억나는 대로 불경의 몇 구절을 응용하여 그럴 듯하게 타이르긴 했는데 과연 먹혀 들었을지가 의문이로군. 행여 그것으로 나의 정체가 들통이 난 것은 아닐지...)
광활한 평원, 완만한 계곡과 구릉을 낀 드넓은 벌판이었다. 보이는 것은 무성한 잡초뿐이었다.
두두두... 한대의 팔두마차가 무섭게 이 평원의 중앙을 질주했다.
휘이잉~ 누런 먼지바람이 마차를 삼킬 듯 휘몰아쳤다. 신선한 가을 바람... 그러나 이 바람은 웬지 불길함을 느끼게 했다.
[적이다.]
천황 혁련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마부석의 비황 허무행에게 마차의 속도를 줄이게 했다. 그러자, 다섯 필의 말을 나누어 타고 마차의 양쪽을 따르던 군협오대무황이 천황 혁련궁의 곁으로 말을 몰고 다가섰다.
[숫자는 모든 아흔 아홉 명, 상대해 보지 않은 이상 단언할 수는 없지만 모두 섬뜩할 만큼 무서운 자들이에요.]
봉황 제갈옥의 말이었다.
군협칠대무황 가운데 가장 지혜가 출중한 여인.
상황판단이 정확하고 어떤 상황하에서도 절대 흔들림이 없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다. 한데, 그녀의 표정은 이 순간 어딘지 안정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뭔가 사태가 심각함을 말하고 있었다.
군협칠대무황, 그들의 표정은 모두 침중하고 약간씩 긴장되어 있었다. 긴장하지 않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마차 안의 단엽뿐이리라.
보이는 것이 없다. 있다면 흔들리는 잡초뿐이다.
한데, 이들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싸움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해온 이들이. 적수를 찾을 수가 없어 고독을 느낄 정도로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들인 이들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용황 천문평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들의 기도는 매우 독특하여 일반무림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오. 어떤 특수한 훈련을 거친 자들 같은데...]
마차는 속도를 줄인 가운데에도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마차 주위의 공기는 점점 어두워진다. 이때, 마부석의 비황 허무행이 권태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오직 하나이겠지. 바로 이안의 천엽성승.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그리고 죽이면 되는 것이지.]
평소에는 지극히 게으르고 느린 인물, 그러나 그가 일단 움직이면 군협칠대무황 가운데 가장 빠르다. 그의 신법은 그런 만큼 천하일절로 통하고 있었다.
[후후.천엽성승을 노리는 인물이라면, 대소림사의 인물일 수도 있겠군.]
검황 염무정이 검을 쓰다듬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천황 혁련궁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소림사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렇듯 어리석지가 않다.]
[그렇다면?]
예황 부소영의 이미가 꿈틀거렸다. 천황 혁련궁이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한데, 이 말이 막 떨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스스스... 잡초가 갈라진다.
정확히 아흔 아홉 방향에서 아니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
파아아... 정확히 아흔 아홉 자루의 기형의 장도가 군협칠대무황을 노리고 무섭게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장도는 섬뜻한 핏빛이었으며 살을 에이는 도기를 뿌려냈다.
순간,
[시작하라.]
천황 혁련궁의 음성이 떨어졌다.
[후후...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참이었다.]
도황 독고풍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를 허공에 뿌렸다.
스... 응...
그의 예리한 도날이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덮쳐드는 장도들을 향해 날아왔다.
가공하리만큼 빠른 쾌도였다. 하나, 그의 도는 빈 바람만을 베고 말았을 뿐이었다.
[어..?]
그는 경악했다. 이런 경우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리라. 한데 그 순간, 그의 뒤쪽에서 가공할 만한 도기가 짓쳐드는 것이다.
[윽...!]
도황 독고풍은 신음성을 발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피한다고 피했으나 그의 옷자락이 십자로 찢겨나간 채 너덜거렸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이... 이런 죽일 놈들...]
그는 분노로 인해 이빨을 갈며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만의 낭패는 아니었다. 군협칠대무황 모두가 동시에 당한 낭패였던 것이다.
구십 구인, 그들은 똑같이 흑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기괴한 도법은 군협칠대무황으로서는 처음 대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때였다.
[섣불리 행동마라. 이들은 완벽한 합벽진을 펼치고 있다.]
천황 혁련궁이 가공할만한 장력을 뻗어내며 소리쳤다. 순간, 나머지 군협칠대무황의 신형이 빠르게 천황 혁련궁의 곁으로 내려섰다.
[마차를 중심으로 군협무상대라진을 펼쳐라.]
다시 천황 혁련궁의 말이 떨어지자 마치 부챗살처럼 그들은 마차를 중심으로 섰다. 순간,
[으악!]
최초의 비명이었다. 아흔 아홉명의 흑포복면인 가운데 일인의 목이 검황 염무정의 검에 그대로 피를 뿌리며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미타불... 뉘시오?]
단엽은 경악했다.
그의 면전 어느새 한명의 복면인이 나타나 있지 않은가?
일신에 희디흰 백포를 걸쳤으며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단엽이 볼 수 있는 것은 두 눈 뿐이었다. 그의 깊은 눈은 늪과 같아서 어떤 투시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고요한 가운데 상대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는 항거불능의 기도가 흐른다.
단엽은 상대의 기도에 피가 굳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말없이 복면을 벗었다. 순간, 복면 속에서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완숙한 기품. 전신에서 흐르는 귀풍은 형언할 수 없이 신비스럽다.
[나를 알아보시겠소?]
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다.. 당신은?]
[그렇소. 철군무요.]
[아...]
단엽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사람이 군협천주 철군무란 말인가?)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상대, 그러나 그는 틀림없는 군협천주 철군무였다. 군협천의 이십일 대 천주, 저 위대한 정파의 하늘이 지금 단엽의 면전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아...암살당한 것이 아니었던 말인가?)
단엽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전후 사정이야 어
찌 됐든 그는 아는 체를 해야 했다.
[아미타불... 오랜만이오. 천주.]
[반갑소. 성승.]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내밀어 굳게 손을 잡았다. 단엽은 정색하고 물었다.
[아미타불... 어찌된 일이시오. 암살당한 것이 아니었소.]
[아니오.]
[아미타불... 그렇다면?]
[단지 암살을 가장하였던 것 뿐이오. 그러나 본인의 암살을 이용하여 성승을 이런 음모 속으로 몰아넣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 죄송하오.]
[모두가 불존의 뜻인 게요. 한데 그들이라면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오?]
군협천주 철군무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은 무섭게 침잠되어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란... 이 모든 음모의 주모자들을 말함이오. 본인이 암살을 가장한 것은 바로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이었던 것이오.]
단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음모자가 있음은 이미 짐작했던 바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소이다.]
[말씀하시오.]
[그동안... 노납이 받은 모든 자료에는 분명하게 군협천주인이 찍혀 있었소이다. 그리고 이번의 노납이 받은 노납에 대한 자료에도 군협천주인은 찍혀 있었소.]
[그럴 것이오.]
[그렇다면 이 자료들은 천주께서 직접 보내신 것이오? 아미타불... 군협천주인은 군협천의 최고신물이자 당신을 대표하는 것이라 알고 있소. 그것은 오직 군협천주인 당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그것이 찍힌 모든 문서와 명령하달서는 천주께서 직접 내뱉은 말처럼 지고한 효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거역함은 천주, 당신을 거역함과 같은 것이라 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