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8-34
새해 첫 번째 주일 아침,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시간은 우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흐릅니다. 가는 세월을 잡을 수도 없지만, 바쁘다고 하여 세월을 앞당길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에 마디를 만들어 삶에 리듬을 부여합니다. 하루, 한 주일, 한 달, 일 년…. 추상화된 시간에 이렇게 리듬을 부여할 때 우리는 살아갈 방향을 붙잡습니다. 옛사람들은 24절기라는 시간의 마디를 통해 우주와 교감했고, 각 절기마다 해야 할 일을 알았기에 그 삶이 가지런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시간의 마디를 만듭니다. 기독교의 경우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이 그것입니다. 한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의 ‘카렌다’를 살펴야 합니다. 시간의 마디로서의 절기는 우리 삶에 방향을 잡아주고 질서를 부여해줌으로써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게 해줍니다.
우리는 지금 성탄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 1월 6일은 주현절(主顯節)이었습니다. 서방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날이 바로 이 날이라고 합니다.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날이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 되었던 이 날은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가 사람들 앞에 드러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현절을 영어로 ‘Epiphany’라고 하는데, 그 어원인 ‘epiphaneia’는 해가 뜨는 것 혹은 동이 터오르는 새벽녘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산 너머 혹은 수평선 너머로부터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오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절기는 예수님께서 모든 나라와 민족과 세계에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기를 다짐하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인에게 지금은 마냥 설레고 기쁘기만 한 시간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빛의 아들 딸이 되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가며 삽니다. 어떤 때는 우리 마음이 푼푼하고 따뜻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소견이 좁고 날카로워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우리가 빛으로 살 때는 대개 ‘나’를 잊을 때이고, 어둠으로 살 때는 ‘나’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입니다. 나에게 골똘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지 못합니다. 함께 기뻐하지도, 함께 슬퍼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설 때 마치 봄바람을 만난 씨앗처럼 우리 속에 어떤 생동하는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으시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에게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공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와 만나고 나면 인생이 살만해지고 낙심됐던 마음에 희망이 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만난 후에는 왠지 모를 불쾌감이 가슴에 남게 마련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그는 늘 불안합니다. 다른 이들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늘 비판적이고 냉소적입니다. 물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삶이 너무 힘들고 각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기심이라는 동굴에 갇혀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마6:2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주님께 세상 물정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불퉁거리고 싶습니다. ‘누구는 걱정하고 싶어 합니까? 삶이 걱정할 만하니 걱정하는 거지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근거 없는 낙관론에 빠져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경계하시는 것은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조바심치는 마음입니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마 주님께서 ‘너희는 하루에도 20번씩은 걱정하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걱정은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우리 내면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걱정의 뿌리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라는 구호 속에서 우리 영혼은 점점 파리해집니다. 하지만 욕망의 그릇을 작게 하면 걱정은 줄어듭니다. 성경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경건은 큰 이득을 준다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딤전6:7-8). 반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올해 우리가 익혀야 할 삶의 기술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더’가 아니라 ‘덜’의 삶을 터득하면 삶은 축제가 됩니다. 덜 갖고 덜 쓰기로 작정하면 삶이 가벼워집니다.
예수님은 염려와 근심 속에서 생을 낭비하지 말라면서 우리에게 삶의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켜 보이십니다. 그 속에 살면서도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26)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27) 매우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인용할 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습니다. 그런데도 염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끝에 덧붙이신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늘 보던 이 말씀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열왕기상 10장과 만났을 때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솔로몬 시대가 얼마나 화려하고 풍요로웠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방에서 교역을 위해 사람들이 각종 진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솔로몬 왕을 찾아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스바 여왕입니다. 아라비아반도 남쪽 끝, 지금의 예멘 지역에서부터 찾아와 솔로몬을 만난 후 그는 묻는 것마다 막힘없이 대답하는 솔로몬의 지혜에 놀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입은 옷과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과 집기의 화려함에 또 놀랐습니다. 솔로몬은 수백 개의 금 방패를 만들었습니다. 금 방패는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부각시키는 상징물일 것입니다.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거기에다 잘 정련된 금을 입혔습니다. 솔로몬의 보좌는 여섯 개의 계단 위에 놓였는데 이것이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여섯 계단 위에 놓인 그의 보좌는 일곱 번째 계단이 되고, 7은 완전수이니까 솔로몬 왕의 왕권이 온 세계의 중심이고 솔로몬이 세계의 완성자라는 상징적 표현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솔로몬 시대는 황금시대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그런 세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저는 이 경쾌하고도 눈부신 뒤집음에 정신이 다 아뜩해질 정도로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전복적 상상력의 대가이십니다. 모두가 솔로몬을 부러워하고 있는데 ‘그거 부러울 것 없다. 이 꽃 하나의 신비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놀라운 것 아니냐?’ 주님은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백향목처럼 우람하고 기세등등한 사람들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리와 창녀가 오히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회적 통념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셨습니다. ‘솔로몬의 영화로움? 그건 들꽃 한 송이만도 못한 것 아닌가?’ 세상의 모든 권세와 화려함보다도 더 위대한 정신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눈부신 뒤집기 기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결 재미있게, 신명나게, 웃으며 한 세상 살 수 있을 겁니다.
그 은총을 누리며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입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 용어 가운데 제 마음속에 크게 와닿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력(浮力)’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부력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부력을 재산(富力)으로 이해하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우리가 물에 빠지면 잠시 동안은 물에 가라앉는 것 같아도,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기면 부력의 작용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하나님께 생을 맡기는 사람은 어느 순간 물속에 가라앉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띄워주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던 어느 시인의 노래를 잊을 수 없습니다. ‘슬픔의 파도에 떠밀려도 기쁨의 해안에 닻 내릴 수 있고/절망의 벼랑에 떨어져도 희망의 빛줄기 잡을 수 있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검질긴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생이 제아무리 힘겨워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감탄하며 삽니다. 저는 올 한 해 우리 맑은샘교회 교우들이 감탄하는 능력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감탄하는 마음을 회복하면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시편 131편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시131:1)
어떻게 보면 너무 소극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교만한 마음, 오만한 길은 다른 것 아닙니다. 나 스스로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가 통제할 수 있습니까? 내가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내 생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부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교만한 이들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다 안다’입니다. 생은 본래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인데, 하나님이 아닌 이상 우리가 어떻게 사람과 세상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무거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큰 것’과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일 때가 많습니다. 큰 일, 놀라운 일을 꿈꾸느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소홀히 합니다. 온 세상의 고민은 다 안고 살면서 가족들의 아픔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교우들의 아픔조차 헤아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과연 잘 사는 것일까요?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내 주변에서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의 꿈은 허구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큰 종이 될 자질도 능력도 없지만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고 싶습니다. 이게 올 한 해 저의 꿈입니다. 빈자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를 자문하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일을 단념하는 일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길입니다.
삶의 변화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마음을 통해 일어납니다. 배고픈 이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한 끼를 금식하거나,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릴 때 우리 식탁은 성찬상이 됩니다. 외로운 이의 벗이 되어주기 위해 분주한 일상의 한 부분을 잘라낼 때 우리의 남은 시간은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 됩니다. 시련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 곁에 다가서기 위해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 우리가 머무는 곳은 성전이 됩니다. ‘너’를 위해 ‘나’를 내줄 때 삶의 비애는 줄어들고 기쁨과 감사는 늘어납니다. 갑진년(甲辰年) 새해에는 우리 모두 이런 값진 생의 비의를 맛보며 살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가르치신 주님은 생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는 것이 참 삶의 길임을 가르쳐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33)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홀히 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습관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구합니다. 이런 욕심 앞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도 맥을 못 춥니다. 자기의 편견과 어리석음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이들일수록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헌신적이고 믿음 좋은 사람인데, 그와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멍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말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을 벗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우리 생각과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치열한 과정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세상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강자들의 음성만 들리는 세상에서 매우 위험한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1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외경인 마카베오서는 엘아자르라는 뛰어난 율법 학자의 순교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했던 그에게 이방의 압제자가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했습니다.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가면서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습니다.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고 그의 인품을 아꼈던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그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준비할 테니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어울리는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2마카베오6:24-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모습은 온 백성과 젊은이들의 가슴에 횃불 하나를 밝혀주었습니다. 이런 지도자, 어디 없을까요? 저는 외경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엘아자르에게서 예수님의 모습도 보고, 스데반의 모습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동행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신 분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도반으로 보내주신 동행입니다. 그렇기에 새해에는 여러분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에 주저함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낯선 이들과 자꾸 만나면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리의 길로 접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사귀면서, 예수님의 그 빛나는 뒤집기 기술을 배운다면 우리는 즐겁고 유쾌하게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한 해 내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새해 첫 주일에 이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걱정이 좀 많은 사람입니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늘 염려하고 걱정하며 조바심을 치며 살았습니다. ‘큰 것’과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있습니다. 실제 큰일, 놀라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꿈꾸느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하며 살았습니다. 올해 저는 퇴임을 합니다. 나이도 60이 됩니다. 자연스레 욕망의 그릇이 작아져 걱정이 줄어들 것이라 기대해 보지만 그동안 삶의 습관대로 벌써 퇴임 후의 삶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에 빠져도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기면 부력의 작용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하나님께 생을 맡기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과거처럼 미래를 걱정하며 오늘을 희생하지 않고 그날그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감탄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율법 학자 엘아자르의 가르침도 가슴에 남습니다. 저에게는 먼저 부르심을 받았고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더이상 염려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즐겁고 유쾌하게 진리의 길을 걷는 2024년, 아니 평생을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