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老 교수의 봄날 / 최미아
첫째 수요일(꿈빛도서관)
회원 열 명 남짓, 대부분 퇴직 공무원이다. 나도 정년퇴임하고 나갔으니 15년째다. 가장 연장자가 96세고 평균 연령이 85세쯤 된다. 독서모임인데 독후감이나 산문을 써도 되고 그냥 참석만 해도 된다. 도서관에서 장소도 제공해주고 프린트도 해준다. 나는 지난 2월에 타계한 오탁번 시인의 명복을 빌면서 <오탁번 시에 나타난 고유어>를 가져갔다. 그의 작품 속에는 우리말 어휘가 풍부하다. 그 중에서 120여 개만 살펴 본 글이다. 코로나19도 굳건히 이겨내고 다시 만난 어제의 용사들이 반가웠다.
둘째 화요일(이화묵자)
소설 모임이다. 이제는 공부보다 사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해서 ‘주부토(부천시 삼국시대 이름)’라는 고상한 이름에서 둘째 주 화요일에 만나서 묵고 놀자라는 ‘이화묵자’로 개명했다. 물론 소설 쓰면 합평도 한다. 다섯 명인데 강화에 신 선생, 강남에 강 선생, 중간에 세 명이 사니까 주로 중간에서 만난다. 세미나 명목으로 한 번씩 강화에 가서 일박하면서 심도 있게 공부도 한다. 오늘은 강 선생이 신춘문예 당선 기념으로 한턱 쐈다. 기분 좋게 축하연을 하고 신 선생이 몫몫이 싸 온 쑥떡을 들고 와 저녁으로 먹었다.
셋째 목요일(활량리)
활량리에 갔다. ‘활량리’는 돌맞이역에 있는 한식집 이름이다. 주인장은 동네 터줏대감으로, 옛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목요일마다 서울식 추어탕을 한다. 서울식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쓴다. 그곳에 가면 막은데미, 다릿굴, 안감내, 부석굴, 치마바위, 참내, 고갯말 등 어릴 적 정겨운 지명이 각 방에서 쏟아져 나온다. 죽마고우인 흥선이, 인흥이와 오늘도 활량리에서 추어탕을 먹었다. 인흥이는 장모님 수발 때문에 삼년 전 동두천으로 이사했다. 흥선이만 비록 산비탈 연립주택에서 어렵사리 사는 처지지만 우리들의 고향 막은데미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사업을 벌였다가 파산하여 큰 빚을 떠안게 되었다. 흥선이는 하는 수 없이 집을 처분하여 아들 빚을 청산하고 인흥이가 사는 동두천으로 떠난다고 했다. 우리는 어둑발이 내리도록 소주를 들면서 활량리에 앉아 있었다.
셋째 토요일(하우고개)
수필 공부하는 날이다. 올해 27년째다. 유치원 아이들 손잡고 왔던 제자들도 이제 환갑이 넘었다. 일로향실 찻집, 수제비집, 문학도서관을 거쳐 이제는 마을공동체인 모지리에서 만난다. 오늘은 모두 글을 써 왔다. 고지식한 성격 때문에 합평회 때 힘들어하는 제자들도 있었으리라. 그래도 지금까지 같이해 온 제자들이 책도 내고 여기저기 활동하는 거 보면 세월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 뿌듯하다. 지난달 내 팔순 때는 제자들이 한흑구문학상 시상식, 시문학파문학관, 원서문학관 등 추억이 담긴 영상을 만들어 주었다. 또 평소 얌전하던 제자들이 재롱잔치를 찐하게 해서 손님들께 큰 웃음을 선사했다.
25일(B대학)
B대학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이다. 한 사람은 총무과장을 지냈고 다른 한 사람은 인쇄실에서 일했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일을 했는데 어떻게 친구가 되었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는 예비군 시절부터 서로 죽이 잘 맞았다. 퇴직 후에도 매월 연금이 나오는 25일에 만난다. 원미산 한 바퀴를 돌고 소머리국밥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신다. 오늘은 비가 내려 바로 국밥집으로 갔다. 인쇄실장이던 윤 선생 이야기다. 윤 선생은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근처 공원으로 출근한다. 매점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가격이 한결같이 500원이었다. 어느 날 매점 주인이 바뀌면서 천 원으로 찻값이 대폭 인상되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은 불매운동에 돌입하였다. 일주일이 되는 날 매점 주인은 가격을 종전대로 환원하였다. 공원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평범해 보이는 이 얘기에 나는 민초들에게 감춰진 혁명의 불씨를 감지했다.
넷째 금요일(복사골)
복사골문학회 원년 회원 10명이 모이는 날이다. 서른 해가 훌쩍 넘었다. 한창 나이 때 글벗으로 만나 지난 반생을 길벗으로 살았다. 곤드레밥을 먹고 옆 카페에 가서 차를 마셨다. 지난번에 시인 안 선생에게 향가를 모티브로 한 현대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詩作을 권유했다. 오늘 안 선생이 신향가新鄕歌 <연꽃으로 피다>(서동요),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헌화가), <어떤 이별>(제망매가), 세 편을 들고 왔다. 인생의 고갯마루에서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니 한 일이라고는 별반 없고 회한만 가득하다. 그런 중에도 딱 하나 재능 있는 사람들의 문제文才를 알아보고 고무 격려한 작은 공은 있지 않을까 싶다. 안 선생의 시가 반갑고 고맙다.
나는 교수님이 셋째 토요일에 만나는 ‘하우고개’ 회원이다. 27년째이지만 배움이 짧아 아직 하산을 못하고 있다. 지난봄에 교수님은 팔순 기념으로 산문집을 출간하시고 잔치를 하셨다. 우리는 뽀글이 가발과 몸빼 바지를 입고 재롱잔치를 해드렸다. 지난 세월에 보답하는 길은 그것뿐이라는 듯 마음껏 망가졌다. 평생 이태준 연구와 소설어 어휘사전을 펴내시면서 학자로 살아오신 교수님. 이문구 선생께서 ‘진국’이라고 인정하신 교수님, 얼마나 놀라셨을까.
교수님, 이제 진정 되셨지요. 교수님의 봄날이 계속되길 빌면서 우리도 이제 묵자클럽으로 바꿔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