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농사를 지어봐야 발전이 없습니다. 큰 도시로 나가 농사일만큼 돈을 벌어 보내드리겠습니다.”
“경험도 없는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도시에서 돈을 벌어? 나와 같이 농사나 짓자.”
큰형이 대학을 다닐 때라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3년 동안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던 소년은 아버지를 설득했다. 7남매 중 다섯째인 그는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식량이 부족해 하루에 많아야 두 끼를 먹었다. 미군에서 원조받은 밀가루에 산나물을 섞어서 찐 음식으로 끼니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중학교에 가지 못했어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산에 있는 속옷 도매상인 동양상회에 가보라고 했다. 동양상회 주인의 아내가 그의 먼 친척이었다. 소년은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났다.
세정그룹 박순호(65) 회장 이야기다. 박 회장은 어릴 때 그랬듯 지금껏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편한 길을 가지 않았다. 1월 17일 부산 동래구 온천동 자택에서 만난 박 회장은 “위기 상황에서도 남다른 생각을 했었기에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만큼 성장했다”고 말했다.
세정그룹은 1974년 동춘섬유공업사로 시작했다. 지금은 패션을 중심으로 10개 계열사로 성장했다. 세정을 포함해 패션 부문 3개 회사가 인디안·올리비아로렌·니(NII) 등 브랜드 10여 개를 보유한다. 세정그룹은 지난 37년 동안 흑자 경영을 유지했다. 지난해 600여 명의 임직원이 약 9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인디안이 약 40%로 가장 높다. 올리비아로렌은 20%, 니는 10%가량이다.
본사는 부산 금정구 부곡동에 있다. 박 회장이 부산에서 패션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이렇게 크게 성공하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늘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부산에서 성공한 향토 기업으로 남겠다”고 언제나 강조한다. 그러나 부산에서 패션사업을 하기는 쉽지 않다. 부산에서는 고급 인력을 구하고, 최근 트렌드 정보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도 본사를 서울로 옮기고 싶습니다. 뱉은 말이 있어서 가지는 못하지만요.” 박 회장은 서울 대치동에 지사를 두고 부족한 점을 채운다.
박 회장은 어릴 때부터 옷을 애지중지하며 입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직접 옷을 만들어 입혔다. 가끔 옷을 사주기도 했다. 그는 동양상회에서 일하면서 옷으로 사업을 해보겠다는 꿈을 키웠다. “안 입고는 못 살잖아요. 제가 옷을 좋아하니 저한테 맞는 사업이란 생각도 들었죠.”
거래처 꼼꼼히 살핀 점원
그는 눈에 띄는 직원이었다. 부산 서울상회로 자리를 옮겨 일할 때는 쉬는 날에도 거래처를 찾아다녔다. 외상을 준 거래처가 지방에도 있어 마산·진해·밀양도 갔다. 직접 가서 장사를 제대로 하는지 파악하고, 앞으로 계속 거래를 해야 할지, 줄여야 할지를 살폈다. 손님 수, 주인이 장사를 하는 모습이나 그의 인성까지도 노트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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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태아생명보호를 위한 바자회에 참여한 박순호 회장 부부 | |
6년 정도 경력을 쌓은 박 회장은 1968년 ‘동춘상회’라는 작은 메리야스 도매상을 열었다. 시장 근처에 있는 영세 메리야스 공장 제품을 중앙시장 안에 있는 메리야스 소매상 60여 곳에 팔았다. 그는 마산·밀양·진주를 돌아다니며 서울상회와 거래했던 사람들에게 독립했다고 알렸다. 평소 그를 신뢰하던 점주들이 자연스레 새로운 거래처가 됐다.
개업 6개월 후 기대 이상의 이익이 생겼다. 그런데 혼수 전문 의류도매시장으로 유명한 부산진시장이 현대식으로 개조해 문을 열면서 매출이 급격히 줄었다. 박 회장은 부산진시장으로 가게를 옮겼다. 하지만 매출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박 회장은 그때 새로운 결심을 했다. “직접 제품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큰 사업을 하려면 도소매업보다는 제조업이 낫다고 판단했어요.”
그는 시장조사를 하러 서울에 갔다. 서울 성동구 왕십리시장에서 서민용 치마를 만드는 친구에게서 남대문시장에서 독립문 PAT 면 티셔츠가 아주 잘 팔린다는 정보를 얻었다.
박 회장은 독립문 PAT 공장을 견학하며 제조시설과 직조방법을 살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시장조사도 했다. 그는 부산 기계제작소에서 독립문 PAT 면 티셔츠를 보여주며 원단을 짜는 편직기 제작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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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호 회장 가족. 수녀인 둘째 딸(오른쪽에서 네 번째)이 함께했다. | |
부산 문현동에 자리를 잡고 처음 개발한 제품은 폴라 스타일의 티셔츠였다. 브랜드 이름은 ‘인디안’이었다. 처음 만든 제품을 팔러 서울로 가기 전에 들렀던 서점에서 인디안 추장 사진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
“맨주먹으로 황야와도 같은 의류시장에 도전하는 저와 광활한 평야를 바라보는 인디안 추장의 모습이 흡사했어요.”
이국적인 느낌의 인디안 티셔츠는 재래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박 회장은 1974년 부산 연제구 거제리시장으로 공장을 옮기고 ‘동춘섬유공업사’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의 사업이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첫 고비는 1977년에 왔다. 그해 봄 상품으로 만든 긴소매 티셔츠가 크게 인기를 끌자 박 회장은 봄 상품과 같은 원단으로 반소매 티셔츠도 대량 생산해 여름 상품으로 출시했다. 그런데 이 상품은 인기를 끌지 못했다. 두꺼운 원단이 봄 상품에는 적절했지만, 여름용 티셔츠에는 맞지 않았다. 공장과 사무실 가득 재고품이 쌓였다.
박 회장은 그해 가을 심각한 경영 압박에 시달렸다. 문제의 원단을 제조한 업체에 지급해야 할 원단 대금은 3000만원이 넘었다. 동춘섬유의 전 재산을 매각해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원단 제조사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동춘섬유 공장을 차압하겠다고 했다.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 고민하던 박 회장은 엉뚱한 제안을 했다. “동춘섬유를 차압해도 받을 돈의 10분의 1도 건지지 못합니다. 다시 면 원단을 짜주세요. 2년 안에 빚을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지만 차압을 해도 대금 회수를 못 하기는 사실이었다. 원단 제조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이 업체에서는 최신형 환편직기로 수출용 원단을 만들었다.
박 회장은 그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수출용 원단에 줄무늬를 넣는 식으로 변화를 줘 인디안 제품에 맞는 새로운 원단을 만들도록 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그 시절에 새벽 4시에 통금이 풀리고 난 뒤 집에 들어간 적이 많았다. 밤잠 줄이고 개발한 새 원단으로 디자인한 제품은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IMF 외환위기 때인 1998년도 박 회장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기다. 그는 이때도 남다른 생각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위기는 1998년 2월 영업을 개시한 세정텔레콤에서 시작됐다. “1997년 6월 무선호출기(삐삐)사업권을 받았는데 그해 11월 IMF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1년 6개월 후에는 016·017·018 번호로 시작되는 개인휴대통신(PCS)사업이 커지면서 무선호출기사업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연 30%씩 성장하던 세정의 성장세까지 IMF 외환위기로 멈췄다. 이동통신사업 성격상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데 매출이 제자리라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글 신버들 월간중앙 기자 [willow@joongang.co.kr]
사진 이찬원 월간중앙 사진팀 부장 [leon@joongang.co.kr]
경기불황을 돌파하고자 1998년부터 경쟁사들은 50% 할인 마케팅을 전개했다. 세정은 이와 달리 각 매장에서 수집해놓은 고객 명단을 근거로 고객들에게 5000원 할인권을 발송했다. “50% 할인은 ‘제 살 깎아먹기’나 다름없었어요. 정찰 판매라는 이미지를 살려놔야 위기가 지난 후 달려나간다는 생각에 파격할인 대신 금액할인권제도를 도입했습니다.”
5000원 할인권이 성과를 거두자 추석 무렵에는 5000원 할인권을 쓴 사람과 10만원 이상 구매했던 고객을 대상으로 1만원 할인권을 보냈다. 회수율이 54%에 이를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대기업들 포기한 점포 인수
급한 불은 껐지만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추락하는 위기 상황에서 경쟁사들은 너나 없이 구조조정에 몰두했다. 제일모직이나 LG패션과 같은 대형 회사들이 부진한 브랜드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주요 상권의 가두점이 빈 상태로 남았다. 대기업들은 가두점은 영업하기 힘들다며 백화점에 매장을 내기도 했다.
세정은 경쟁사와는 달리 가두점 수를 크게 늘렸다. 대기업 브랜드가 철수한 주요 상권의 가두점이 빈 점포로 남고 점포 임차료도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주요 상권에 점포를 많이 갖고 있지 못했던 세정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박 회장은 공격적으로 주요 상권 매장을 확보했다.
계속되는 경기불황으로 대리점 점주들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칠 때 박 회장은 성과형 마진제를 도입했다. 많이 팔면 팔수록 마진을 높여주는 제도였다. 이 제도를 도입하자 매장 간 경쟁이 생기면서 효과가 나타났다. 1999년 춘하 시즌에는 영 캐주얼 니(NII)를 론칭했다. 위기라 경쟁사들이 투자를 줄일 때 오히려 투자를 늘려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았다. 니는 론칭 3년 만에 매출 1000억원의 브랜드로 성장했다. 세정그룹 홍보 관계자는 “IMF체제 이후 패션시장은 소비심리가 급격히 위축되기도 했지만 소비자의 연령과 취향, 요구 사항이 다양해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특정 연령층과 고객의 취향을 겨냥한 니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2001년에는 세정텔레콤의 이름을 세정21로 바꾸었다. 사업 영역은 무선호출기사업에서 이월상품 의류유통업체로 변경했다. 1997년 무선호출기사업권을 따냈던 전국의 16개 기업 중 남아 있는 곳은 세정텔레콤이 유일하다. 다른 15개 기업은 부도를 내고 이제는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박 회장은 당시 감자를 통해 회사를 유지했다. 새로운 투자자도 찾았다. 세정21은 2009년에 1037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박 회장은 무선호출기사업 투자금 300억원을 잃지 않고 오히려 수익을 냈다.
IMF 외환위기 때 기반을 다진 가두점 제도는 지금도 세정그룹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박 회장은 “세정그룹 전국 대리점 수가 1200개가 넘는다”며 “거기서 발생한 매출의 일정 부분이 전부 본사 몫”이라고 설명했다.
무일푼에서 시작한 그는 매출 1조원을 넘보는 그룹의 회장으로 성장했다. 그는 “돈보다는 일을 앞에 두고 살아왔다”며 “돈을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면 성장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가게 점원으로 일할 때 사장에게 월급을 올려달라고 말해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오히려 제가 일할 때 사장이 만족할까를 생각했어요.”
박 회장의 부인 심현녀(63) 씨가 보기에도 남편은 정말 일을 좋아한다. 심씨는 동춘상회 초기에 일을 같이했던 이가 전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분이 ‘박 사장은 일을 너무 좋아하고, 나는 돈을 너무 좋아했다’며 ‘돈 좋아하는 나는 망하고, 일 좋아하는 박 사장은 성공했다’고 말했어요.”
동춘상회를 운영하던 시절 박 회장은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박 회장 부부를 맺어준 이는 그의 장모다. 장모는 동춘상회가 있던 부산의 한 시장에서 나와서 일을 보며 사윗감으로 그를 눈여겨봤다. 어느 날 다방에서 그는 장모와 먼저 선을 봤다. 선배의 권유로 할 수 없이 다방에 나갔던 박 회장은 사업과 집안 이야기를 하면서 결혼할 사정이 아니라고 했다. “그때 장모는 생년월일을 물으며 결혼이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못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그는 곧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결혼을 했다.
부인의 가장 큰 장점으로 박 회장은 ‘나누는 마음’을 꼽았다. 심씨는 가족 생일마다 음식을 마련해 고아원을 방문하며 나눔을 실천했다. 어느 이웃이 그렇게 하기에 이 일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가난하게 살았던 기억이 있는 심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게 된다”고 말했다.
부인 따라 봉사활동 시작
박 회장은 부인을 따라 삼랑진 평화의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한 신부가 만든 이 마을엔 노숙자·독거노인·장애인 등 약 500명이 산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평화의 마을 주민들 아침식사를 챙겼고, 퇴근 후에는 반찬거리와 옷가지를 들고 마을을 다시 찾았다.
요즘에는 일이 바빠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하지는 못한다. 대신 부인의 나눔활동에는 아낌없이 자금을 보탠다. 일례로 그는 세정그룹의 이름으로 ‘태아생명보호를 위한 마리아수녀회 자선바자회’에 지난 11년 동안 매년 참여했다. 세정그룹 10여 개 패션 브랜드를 70~8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해 수익금을 마리아수녀회에 기탁했다.
글 신버들 월간중앙 기자 [willow@joongang.co.kr]
사진 이찬원 월간중앙 사진팀 부장 [leon@joongang.co.kr]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agazine.joinsmsn.com%2F_data%2Fphoto%2F2011%2F02%2F18174138.jpg)
부산에 있는 자택에서 박순호 회장 부부를 만났다. | |
부인은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부산 송도 소년의 집 후원회장이기도 하다. 소년의 집은 한국·필리핀·멕시코·과테말라·브라질의 도시 10여 곳에 있다. 의료·교육시설과 기숙사를 갖추고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돌본다.
부산 송도 소년의 집 학생들은 지난해 2월에 미국 뉴욕에 있는 카네기홀에서 관현악 공연을 했다. 박 회장은 이 공연을 보지 못해 아쉬워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1600여 명의 관객이 기립박수를 쳤답니다. 공연을 위해 연습을 많이 했어요. 한 명도 빗나가지 않고 잘 자랐습니다.”
지난해 3월에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아시아판이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을 ‘기부영웅’으로 선정했다. 1997년 이후 사재를 털어 기부에 적극 나선 점을 인정받았다.
박 회장은 2009년에 아내, 막내딸 부부와 함께 필리핀에 있는 소년의 집에 다녀왔다. 세정그룹의 바자회 참여활동을 본 마리아수녀회의 한 수녀가 그를 초대했다. 박 회장은 “필리핀에서는 자식이 소년의 집에 들어가면 그날부터 행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가정을 봤다”며 “소년의 집이 무척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필리핀 소년의 집 학생들의 취업률은 90%가 넘는다. 소년의 집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나눔활동을 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 세 딸도 나눔에 익숙하다. 그중 둘째 딸 주영(36) 씨는 2005년에 수녀가 됐다. 그가 수녀가 되겠다 했을 때 박 회장 부부는 말렸다. 심씨는 “수녀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일을 하고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딸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둘째 딸과 함께 성지순례를 갔을 때 박 회장은 부인에게 “한길을 정하면 피땀 나게 뛰는 나를 닮은 둘째가 수녀원에 들어가면 절대 안 나올 것”이라고 했다. 심씨는 “그때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고 했다.
박 회장은 딸이 대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던 날을 떠올렸다. “부산에서 대구까지 배웅하면서 계속 울었어요. 정말 가는구나 싶었죠.” 한동안은 딸을 만나러 가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 찾아갔다 ‘큰 기업 회장 딸’이라는 소문이 나서 둘째 딸이 곤란해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종신서원을 한 주영 씨는 경남 창원의 한 성당에서 일한다. 심씨는 “이제는 둘째 딸이 큰일이 있을 땐 집에 올 수도 있다”며 좋아했다.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박 회장은 부인, 큰딸 부부와 함께 산다. 큰딸 민주(38) 씨는 세정 광고 홍보담당 이사고, 막내딸 이라(33) 씨는 브랜드 ‘니’를 맡는 세정과 미래 대표다. 막내딸 부부는 한 달에 열흘 정도는 부산 박 회장 집에서, 나머지는 서울에서 보낸다. 손자 셋, 손녀 한 명, 두 딸 부부가 모이는 날이면 넓은 집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1월 17일 오전에 방문한 박 회장 자택에는 따뜻한 아침 햇살이 들었다. 자택 부지는 한 고등학교 교장이 화초를 가꾸고 물고기를 키우던 땅이다. 박 회장은 11년 전에 이 땅을 골라 집을 지었다. 집이 총 세 채다. 2년 전에 지은 한 채는 수녀들이 쓰는 피정의 집으로 꾸몄다. 볕이 가득 들어오도록 창을 크게 만들었다.
자택 한편에는 330㎡(약 100평) 규모의 텃밭도 있었다. 밭 관리자는 “날이 따뜻해지면 박 회장은 여기에 무와 배추를 심어 가꾼다”고 전했다. 채소 가꾸기에 집중하는 시기에는 하루에 2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심씨는 “대부분의 집안일을 혼자서 하는 나를 도와 남편이 장을 볼 때도 있다”며 “남편이 무척 가정적”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지난해 12월 연금 기부를 시작했다. 부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전개하는 ‘행복한 연금나눔 캠페인’에서 ‘은빛연금 1호’ 기부자로 나섰다. ‘행복한 연금나눔 캠페인’은 국민연금을 비롯한 공무원연금·군인연금·개인연금 등 각종 연금으로 주변의 이웃을 돕는 나눔 방식이다.
박 회장은 자신의 국민연금 지급이 시작되는 지난해 12월부터 3년 동안 받을 연금을 부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액 기탁한다. 그는 “노후생활을 돕는 연금을 기부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꼭 필요한 돈을 더 어려운 사람에게 전한다면 더 의미가 클 것 같다”며 “연금 기부 사례가 더 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그는 실버타운 만들 준비를 했다. 생활관·병원과 함께 간단히 채소를 가꾸는 텃밭도 두려고 한다. 몇 년 동안 부지를 찾아 부산 인근을 돌았다. 그런데 아직 적절한 땅을 찾지 못했다. 손해만 볼 거라며 말리는 이도 많다. 그는 그래도 땅 찾기를 계속한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독거노인이 모여 여생을 편안히 보낼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브랜드 수출이 꿈
박 회장은 최근 1년 동안 새 브랜드 출시 준비에 집중했다. 20, 30, 40대 남녀를 타깃으로 한 브랜드다. 그는 “미국 의류 브랜드인 바나나리퍼블릭이나 갭처럼 쉽게 접근할 만한 브랜드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처럼 저가 전략보다는 크게 가격 저항이 없는 선에서 품질을 높이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번 봄여름 시즌에 새 브랜드 제품이 출시될 예정이다.
박 회장은 새 브랜드에 큰 소망을 담았다. “한국에서 이 브랜드 반응이 좋으면, 아시아를 시작으로 전 세계로 수출하고 싶습니다. 로열티를 받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브랜드를 갖는 게 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