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명동성당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명동2가 1-1)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본산이다
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무염시태, 無染始胎) 복되신 동정 마리아로
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원죄없이 잉태된 마리아 대성당' 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고, 줄여서 '명동대성당', '명동성당'으로 부른다
1898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유적지로 건축 양식은 네오 고딕이며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의 높이는 23m, 신랑 높이 약 19m, 탑의 최고 높이는 46.7m, 성당의 전체 길이가 약 68m, 폭 28m다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E. J. G. Coste) 신부가 후에 명동성당을 설계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1892년 5월 8일 정초식을 가졌으나 도중 코스트가 사망하여 푸아넬(Victor Louis Poisnel)이 이어받아 1898년에 완성하였다
때문에 구조적, 양식적으로 약현성당과 유사한 편이다
20여종의 붉은색, 회색의 구운 벽돌을 섞어 지었다
이 당시의 이름은 종현성당(鐘峴聖堂)이었다
종현은 명동 성당이 세워진 장소를 말한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군 양호가 이곳(당시 북달재, 북고개)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는 종을 가져다 달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이름을 명동성당으로 바꾸었다
성당이 있는 명동 언덕은 한국 천주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으로 '명례방'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 천주교 전례가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김범우 토마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베드로, 정약전 안드레아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고 포도청 당국이 이를 적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명문가 자제라서 적당히 훈방 조치됐지만, 김범우는 중인 계급이라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이들이 뿌린 씨앗은 밀알이 되어 김범우가 사망한지 100년이 흐른 1887년에 김범우의 집이 있던 일대의 대지를 매입 완료한후 명동성당 건립을 위한 첫삽을 뜨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성당 인근에 주둔하던 인민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군 측에서 "명동 일대를 싹 폭격한 뒤에 성당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국가톨릭에 제안하였지만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등 한국가톨릭에서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이후 1947년, 1973년, 2009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실내 천장에 리브볼트(Ribbed vault)를 사용한 점은 고딕양식에 충실한 점이지만, 전형적인 고딕성당은 볼트가 석재로 되어 있는 반면, 명동성당의 볼트와 종탑 지붕은 하중을 줄이기 위해 목재로 되어 있다
성당이 건설되다가 붕괴 사고가 발생했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1924년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수입되어 처음으로 성당 내에 설치되었다
다만 이 당시의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14사도(12사도 및 바오로와 바르나바) 벽화
석굴암을 모티브로 후에 추가된 벽화이다
♤ 명동지하성당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1900년 9월 5일에는, 1899년에 왜고개(瓦峴, 현 용산 군종 교구청 인근)에서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베르뇌(Berneux, 張)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와, 1882년에 남포 서들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성 다블뤼(Daveluy, 安)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유해를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어 1901년 11월 2일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주교와 모방신부, 샤스탕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된것을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가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다시 1901년에 이곳 명동성당 지하 묘지로 모셔졌다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을 왜고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들 중 훗날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의 유해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성당 지하 묘지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성스러운 곳이다
또 지금까지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순교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의 유해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문화관 꼬스트홀
가톨릭대학 의학부(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와 부속 간호학교 및 간호학과(현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에서 초창기 교육시설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가톨릭대학 의학부는 1954년 5월 3일 성신대학 의학부로 개교 한 후 1959년 2월 12일 교명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1968년 2월 17일 종로구 경운동 신축 교사(校舍)로 이전하였고,
부속 간호학교는 성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가 1862년 1월 의학부 부속 간호학교로 승격 된 후, 다시 1963년 12월 간호학과로 승격인가 되어 1968년 2월 의학부와 함께 종로구 경운동 신축 교사(校舍)로 이전하였다
♤ 계성여자고등학교
1944년 9월 8일에 개교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의 일반계 사립 미션스쿨 고등학교로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다
명동성당 옆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2011년에 명동성당과 계성여고, 가톨릭회관 등의 부지를 아울러 개발하는 ‘명동성당 특별구역 세부개발계획(이하 명동성당 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2016년 3월 1일에 성북구 길음동으로 이전하였고 이때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학교 이름도 ‘계성고등학교’로 바꾸었다
계성여고 명동 교사 동쪽에는 같은 재단의 계성초등학교도 있었으나 고등학교가 옮기기 훨씬 전인 2006년에 서초구 반포동으로 이사갔다
초등학교 건물은 서울대교구청 별관으로 사용 중이다
(같은 재단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으니 중학교도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계성여자중학교는 1987년에 폐교됐다)
♤ 성모병원
1935년 3월 11일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에서 당시 일본인 소유의 무라가미병원을 매입하고, 이듬해 정식 개원했다
이후 1954년 4월 8일 성신대학 의학부(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가 설립되면서 의대부속 병원으로 승격되었다
1961년 명동성당 인근에 새 병동을 완공하여 당시 사립대학 종합병원으로서는 가장 많은 병상수를 보유한 종합병원이 되었다
1986년 7월, 명동성모병원 시대를 마감하고 여의도 신축병원으로 이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 명동성모병원은 이후 가톨릭회관으로 개원했다
병원 명칭은 1996년 6월 1일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으로 변경되었다가, 이후 2010년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으로 개칭되었다
1990년대에는 건강증진센터와 뇌신경센터, 심장혈관센터, 내시경수술센터 등을 개설했으며, 2000년대에는 새로운 수술법을 도입하고, 다양한 연구센터를 갖추게 되었다
2016년 3월부터 서울성모병원과 통합 운영되고 있다
♤ 민주항쟁의 현장
명동성당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였다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 반발해 ‘6·10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 진압으로 내몰린 시위대가 성당으로 모여들면서 성당은 경찰과 시위대의 대치 현장이 됐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차장이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했지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며 이를 제지하면서 6월 민주항쟁이 계속될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저 유명한 말씀 “그 사람들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려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려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다음에야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경찰들의 성당 진입을 막았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명동성당에 이웃한 계성여고의 학생들이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농성자들에게 담을 넘겨 보내줬다
여고생들은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담벼락 너머로 농성자들에게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농성에 참여했던 언니오빠들은 목이 메어 차마 그 도시락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여성용품과 여성속옷을 모아 전달해주기도 했다
이밖에 1975년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세웅, 김승훈 신부 등이 발표한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사건’, 1979년의 ‘오원춘 납치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 시위 현장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 그러나 한국천주교는 18살에 세례를 받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천주교가 금하는 ‘살인 행위’라며 1993년까지 신자로 인정하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