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이재명의사 의거 터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명동2가 1-1)
이재명이 이완용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힌 장소이다
이재명(李在明, 1887~1910)은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평안북도 선천 출생이다
평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로 갔다가, 1906년 3월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그러나 곧 제 1·2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 체결되자 귀국한 후 항일운동을 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그러던 중,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순종(純宗)의 평양 순행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이재명은 1909년 1월 동지들과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자 평양역에서 대기하였으나 안창호(安昌湖)의 만류로 단념하였다
이어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소식을 듣고는 친일매국노의 처단을 계획하여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있을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군밤장수로 가장하여 성당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식을 마치고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제지하려는 박원문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이재명의 공격에 혼비백산한 이완용이 도망하려 하자 다시 어깨 등 3곳을 더 찔렀다
그러나 이완용이 중상에서 살아남으면서 매국노 처단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애국적인 변호사 안병찬의 성의 있는 변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재명은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재명은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체제의 정식 발족을 코앞에 둔 1910년 9월 30일 경성감옥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1962년 이재명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윤선도 집터 (서울시 중구 명동길 73, 명동1가 1-3)
1587년(선조 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 - 동숭동 인근)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孤山) 윤선도가 8살 때 작은아버지인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던 숙부의 집이 있던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 ‘윤선도의 집은 명례방 종현(鐘峴)에 있다. 주춧돌에 먹으로 쓴 ‘여산부동(如山不動)’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바람과 비에 씻기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명례방이란 지금의 서울 명동이고, 종현은 명동성당 고갯길을 말한다)
♤ 보길도 (전남 완도군 보길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선도는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가다가 길이 막혀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인조(仁祖)가 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하여 이듬해 2월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보길도(甫吉島)에 잠시 내렸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섬에 눌러앉았다
윤선도는 자신이 머물던 마을 일대를 ‘부용동(芙蓉洞)’ 이라 하고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선도는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많은 시가들을 지었다
- 세연정
- 동천석실
- 곡수당
- 낙서재
♤ 어부사시사
1651년(효종 2년)에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이 작품은 계절마다 펼쳐지는 어촌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부 생활의 흥취를 출항에서 귀항까지 어부의 하루 일과를 시간 순서로 읊은 것인데, 세속을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삶의 경지를 격조 높고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 윤선도 고택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 해남읍 연동리 82)
고산 윤선도는 42세때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효종은 즉위 후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효종이 죽자 1668년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온 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로, 원래는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다
이회영 · 이시영 6형제 집터 (서울시 중구 명동11길 14, 명동1가 1-6)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우당(友堂)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 집터가 6천평이었다고 하니 부근에 있던 윤선도 집터도 이회영 집안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 6형제 이야기
이회영 · 이시영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 시영과 호영 사이에 딸 순영이 있다)는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인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조선시대 8대에 걸쳐 정승과 판서를 지낸 조선 최고의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기자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소유한 토지와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 만주에 있는 서간도로 망명을 떠나게 되는데 형제들이 급하게 재산을 처리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했는데도 약 40만 원이 모였다
(지금 가치로 치면 약 600억원 이상인데 제 값대로 받았다면 약 2조 원 정도라고 한다)
이 자금은 만주 한인촌 건설, 독립군 양성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 건설과 유지 등 모두 독립자금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는 하나의 공동체였다
항일전사인 김좌진과 이범석, 김산을 비롯한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독립 의지를 불태운 것은 이회영 ·이시영 6형제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이회영 ·이시영 6형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여 년이 되자 재정이 고갈되어 중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조국의 광복을 지켜 본 이시영 초대부통령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쓸쓸하고 비참하게 생을 보냈다
남양주의 대부호로 99칸의 대궐집과 개인 절(사찰)도 소유했던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책임질 정도의 갑부였지만 상하이의 빈민가를 떠돌다 아사하였고,
여섯째 이호영은 일본 순사에게 가족이 몰살당하며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으며, 6형제 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시는 이회영은 66세 노년의 나이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해방 후에 이승만대통령은 독립운동을 위해 팔았던 토지를 다시 되돌려 준다고 제안했지만 이시영 초대부통령은 단번에 거절하였다)
명치좌 (서울시 중구 명동길 35, 명동1가 54)
명치좌는 부민관과 더불어 서울에 남아있는 피식민지 집회문화시설이다
건축주는 일본인 이시바시(石橋良祐)였고, 건축가는 다마타(玉田橘治)로 국도극장과 같은 해인 1935년 11월 9일 영화관으로 착공하여 다음해 1936년 10월 7일 준공 하였다
부민관, 약초극장, 황금좌 등과 함께 1930년대의 일본인들을 위한 위락 시설로 지어진 것으로 주로 일본영화만 상영했다
집은 특이하게 모서리를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출입구 전면에 곡면을 차용,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강조하였다
부지 1670㎡(505평)에 건평 1048㎡(317평), 연 면적 2457㎡(743.413평)로 당시 45만 원을 들여 지었다
지하 1층에, 지상 1∼4층까지가 통층인 액자형 무대(Proscenium)를 갖춘 극장이다
1층 외부는 이용객을 위한 서비스 입면으로 2층과의 경계에 인조석 다듬돌(Cast Stone)로 짧은 처마를 냈다
해방 후 이 집은 국제극장, 시공관(市公館)으로 극장이란 명맥을 이어가지만,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다
1957년 이를 복구하여 명동예술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국립극장으로 사용하다, 남산으로 국립극장이 이전한 후 금융회사(대한투자금융) 소유가 된다
1975년에는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로 변질되었다
내부 개조는 물론 헐릴 뻔한 위기에 내몰리자 명동상가번영회 등이 서명운동을 벌여 간신히 살아 문화관광부가 2004년 인수하여 시설을 복원,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하는 곡절을 겪었다
2009년 리모델링은 1층 입면을 바꾸고 2층과의 사이 다듬돌 자리에 경관조명을 설치해 현대적 세련미를 더했다
이때 552석 규모 연극전용 극장으로 재탄생한다
1930년대 중반, 비록 일본인 손에서 태어났으나 여느 극장과 다른 모습으로 분명 한단계 수준 높은 건축과 영화 문화를 보여줬다
은성주점 터 (서울시 중구 명동3길 2, 명동1가 59-7)
은성주점은 탤런트 최불암(본명 최영한)의 어머니 이명숙(1986년 작고)씨가 1953년 이은성이란 이름으로 연 막걸리 주점이다
최불암의 부친(최철)은 만주에서 가져온 돈으로 해방 직후 인천에 영화사(건설영화사)와 신문사(인천일보)를 차렸으나 직접 제작한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6살에 불과했던 최불암은 부친의 영정을 들고 영화 시사회에 참석해야 했다
1973년 개발 붐과 땅값의 상승으로 밀려나 문을 닫기 전까지 소설가 이봉구와 시인 오상순 변영로 김수영 박인환 천상병, 작곡가 윤용하, 그리고 수필가 전혜린 등이 즐겨 찾았다
문인들은 주로 외상으로 술을 마셨는데, 장부에는 모두 실명이 아닌 별호와 별칭으로 적어놓았다
당시 외상 장부에 실명을 적는다는것은 문인들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존종하기 위한 마음이었다
시인 김수영은 은성주점에서 시상을 가다듬었고, 작곡가 윤용하는 <보리밭>의 악상을 다듬었다
31세 나이로 요절한 시인 박인환이 은성주점에서 즉석으로 지은 시 <세월이 가면>은 작곡가 이진섭이 곡을 붙혀서 노래로 만들어졌는데, 명동의 노래라고 일컬어졌다
박인희의 노래 ‘세월이 가면’이 은성주점에서 탄생했다는 말도 있다
1956년 어느 날 박인환 일행이 찾아와 외상도 갚지 않은 채 또 술을 달라고 했다
이명숙씨가 오늘은 외상을 갚아야 술을 내놓겠다고 하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펜을 꺼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이렇게 시를 만들자 동석했던 작곡가 이진섭이 곡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만든 곳이 은성주점이 아니라 인근 경상도집이라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경상도집에서 박인환이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가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다는 말을 듣고는 즉석에서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곡을 잠시 후 합류한 테너 임만섭이 큰 소리로 부르자 거리의 행인들이 몰려 환호했다고 한다
이봉구가 쓴 ‘명동백작’이라는 책에는 경상도집도 은성주점도 아닌 ‘명동 한 복판 빈대떡 집’이라고 나온다
누구는 그 집이 경상도집이라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그 뒤 명동의 상징 노래가 됐지만 1956년 3월 17일을 유난히 좋아했던 시인 이상(李箱)의 기일로 알고(실재로는 4월17일 이었다 함) 오후부터 지인들과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하다 1956년 3월 20일 오후 9시경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31살)
첫댓글 옛 시공관(국립극장)이 생각납니다. 학창시절에 즐겨 걷던 길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