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공평동 하나투어 본사에서 만난 박상환 회장. |
“러시아 전통 공예품인 ‘마트료시카’ 인형 10개 주문합니다. 파란색과 황금색으로 디자인한 인형으로요.”
지난해 4월 HT숍(www.htshop.com)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을 쓴 고객은 직접 가지 않고도 러시아 현지에서 마트료시카 인형을 구입했다. HT숍에서는 전 세계 나라별 구매대행 서비스를 한다. 수영복·여행가방 같이 해외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다 서비스 범위를 넓혔다.
HT숍의 강재홍(34) 대표는 하나투어 온라인사업부에서 근무하다 창업했다. 하나투어에는 강 대표처럼 사내벤처를 통해 창업을 준비하는 직원이 꽤 있다. 하나투어에서는 2008년부터 신상품 공모전을 일곱 번 열었다. 직원이 낸 사업 아이디어를 검토하고 가능성이 있으면 프로젝트팀을 꾸려 2년 동안 일할 기회를 준다. 그 후 수익이 나면 별도 회사로 분리해준다. 하나투어가 그 회사 지분 51%를 소유한다. 수익을 내지 못해도 예전 자리로 돌아가 일한다.
하나투어 박상환(54) 회장은 사내벤처를 장려한다. 그 또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1993년 하나투어를 창업했다. 2월 9일 서울 종로구 공평동 하나투어 본사에서 만난 박 회장은 “직원들에게 성장할 기회를 주고 싶다”며 “내가 은퇴한 후에도 실력 있는 직원들이 하나투어를 이끌어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하나투어는 국내 여행업계 1위 기업이다. 전국 5000여 개의 소매여행사를 대상으로 여행상품을 기획·판매한다. 2010년에 1660여 명의 직원이 약 215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0개 계열사와 28곳의 해외 현지 직영법인과 사무소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2010년에 관광 목적으로 출국한 사람 중 15.5%가 하나투어를 이용했다.
박 회장은 하나투어의 성장 비결을 사람에서 찾았다. “돈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서비스 업종인 여행업체에서 가장 큰 자원은 사람입니다.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함께 가는 게 제일 중요하죠.”
경쟁사 구조조정해도 감원 안 해
하나투어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업계 1위로 올라섰다. 감원을 하지 않았던 게 주효했다. 1998년 1~2월에는 패키지 여행 수요가 1년 전의 5%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다. 여행업계 상위 10개 업체 중 다섯 곳이 문을 닫았다. 살아남은 업체들은 인력의 80%를 줄였다. 박 회장은 인력을 감축하지 않았다. “6개월만 버티면 여행 수요가 20%까지는 되살아날 것으로 예측했어요. 그때까지만 버티면 기회가 온다고 봤죠.”
지난해 12월 열린 하나투어 비전 선포식. |
그는 직원들과 고통을 분담했다. 당시 현금이 2억원가량 있었다. 임직원 월급을 주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매달 5000만원으로 6개월을 버티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180명이던 직원을 한 명도 줄이지 않는 대신 월급은 30만원씩만 받자고 했다. 나머지는 버는 만큼 공평하게 나누자고 했다. 그래도 30여 명의 직원이 도중에 포기하고 회사를 떠났다. 박 회장은 “2년 전 끊었던 담배를 그때 다시 피웠다”며 어려웠던 상황을 떠올렸다.
‘항공권 도매사업’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다른 여행사들을 대상으로 항공권 구매 대행을 했다. 당시 항공권 티켓 발권을 맡는 직원의 급여가 높았다. 일정이 같더라도 가격은 더 낮은 티켓을 제시하는 일이 전문기술로 인정받던 때였다. 다른 업체에서는 인건비가 높은 티켓 발권 직원부터 감원했다. 하나투어에는 이 업무를 맡는 직원들이 남아 있었다. “다른 여행사에 대신 발권해줄 테니까 티켓 커미션의 2%만 달라고 했습니다. 거기서는 직원 뽑는 데 돈이 더 드니까 하나투어에 일을 맡겼어요.”
예상대로 시간이 지나자 여행 수요가 살아났다. 1998년 4월부터 패키지 여행 수요가 10~20%씩 늘었다. 다른 여행사에서는 직원이 없어서 여행객이 늘어도 대처하지 못했다. 하나투어에서는 준비된 직원들이 손님을 맞이했다. 그해 5월 직원들에게 월급을 다시 예전처럼 줬다. 이때 하나투어가 업계 1위로 올라섰다. 박 회장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에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유행했을 때도 그는 감원하지 않았다. 3월 SARS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해 3개월 동안 아시아·유럽·북아메리카로 확산됐다. 매출에서 동남아시아와 중국 여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60%가 넘었던 하나투어는 특히 큰 타격을 받았다. 업무가 줄었지만 박 회장은 감원을 하는 대신 비용을 줄였다.
우선 전산시스템을 개선했다. 더욱 효율적으로 정보를 관리하는 만큼 비용이 절감됐다. 하나투어는 1998년 전산시스템을 이용한 실시간 여행상품 예약 현황 조회 서비스를 도입해 운영했다. 무급 휴가 신청도 받았다. 신청을 하는 직원에게 최장 1년까지 무급 휴가를 줬다.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무급 휴가 기간은 근무 연수에 넣어주었다.
SARS가 수그러들자 차츰 여행 수요가 늘었다. 인원 감축 없이 위기를 넘긴 하나투어에 다시 손님이 몰렸다. 박 회장은 “외부 요인으로 여행 수요가 일시적으로 감소할 때도 있었지만 그 후에는 수요가 크게 늘어나곤 했다”며 “이런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면 위기 관리가 조금은 수월해진다”고 설명했다.
2007년 그는 업계 최초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통합정보 시스템인 ERP(전사적 자원관리)를 도입해 대리점·영업부서별 데이터를 분석했다. 영업사원이 비용을 과다하게 쓰는 일을 막고, 의사결정 속도를 당겨 효율성을 높였다.
자투리 공간도 아끼는 임직원
몇 번의 위기를 겪은 하나투어 직원들은 비용 절감에 익숙하다. 하나투어 홍보팀 정기윤 팀장은 “여행업체에서는 임차료와 인건비가 가장 큰 고정비용”이라며 “이 부분을 줄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고 설명했다. 하나투어는 동종업체에 비해 기본급이 낮다. 대신 성과급 비율이 높다. 위기 때는 적게 받고 수익률이 높을 때 더 많이 받는 구조다.
직원들은 임차료 비중을 줄이고자 공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쓴다. 2월 9일 방문한 하나투어 본사 10층에는 화장실 문이 사무실에 있었다. 보통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야 화장실이 있는데 이곳은 달랐다. 정 팀장은 “공간을 알뜰하게 쓰려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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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층 휴게실에는 직원들 회의가 수시로 열렸다. 정 팀장은 “회의 공간이 충분치 않아 휴게실까지 회의실로 쓰는 직원이 많다”고 설명했다. 하나투어에서는 회의실을 많이 만들지 않았다. 임차료를 줄여 고정비용을 최소화해야 위기 때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회사 곳곳에서 회의를 한다. 필요할 때면 박 회장의 집무실도 회의실이 된다.
박 회장 집무실 문패는 앞뒤에 쓰인 글씨가 다르다. 앞면에 ‘Park’s Room’, 뒷면에 ‘Meeting Room’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외 출장이 잦은 박 회장은 집무실을 비울 때가 많다. 직원들은 그가 없을 때면 문패를 뒤집어 ‘Meeting Room’이라고 표시하고 집무실 안에서 회의를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박 회장은 2009년 2월 회장실을 없애기까지 했다. 직원들 사무실에 책상을 놓고 일했다. 정기윤 팀장은 “상황이 나아지자 오히려 직원들이 ‘손님이 왔는데 맞이할 방 하나 없으면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다’며 회장실을 만들자고 설득했다”고 전했다.
몇 달 전 다시 꾸민 하나투어 회장실은 다른 기업 회장실에 비해 작았다. 요즘 박 회장은 아침에 출근해 오후 2시쯤 퇴근한다. 2005년 도입한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 제도에 따라 그의 근무 시간도 줄었다. 하나투어에서는 65세까지 정년을 보장하는 대신, 50세부터 임금과 근무 시간을 5년 단위로 단계적으로 줄인다. 여행업계에서 ‘일자리 나누기’를 도입한 곳은 하나투어가 최초다.
박 회장은 “55세는 그냥 놀기에 너무 젊은 나이”라며 “경험 많은 직원이 정년 때문에 그만두면 회사 입장에서도 상당히 손해”라고 했다.
일자리 나누기 제도 도입 후 박 회장은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를 했다. 대학원에서 호텔관광학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즘에는 퇴근 후 운동을 한다. 등산을 자주 하려고 종로구 평창동으로 이사했다. 대학 시절에 만난 부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대학 졸업 후 고려여행사 해외부에서 일할 때는 해외 출장이 잦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딸, 아들을 낳을 때도 옆에 있어 주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지금도 그 일로 많이 서운해해요.” 요즘에는 주말에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다닌 맏딸 현경(26) 씨는 박 회장과 함께 하나투어에서 일한다. 중학교 때부터 해외에서 공부를 한 아들 민재(22) 씨는 군복무 중이다.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난 박 회장은 대학에 가기 전에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아버지의 수입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가족을 먹여 살렸죠.” 박 회장의 할아버지는 1900년대 초반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박 회장의 아버지는 풍족하게 자랐다. 중학교 때에는 서울로 유학을 갔다. 그런데 졸업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막내아들을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데려왔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더 공부를 시키지 않았어요. 유산만으로도 편히 살 수 있다고 보셨던 거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 회장은 대학 진학을 못하고, 5남매를 어렵게 키우는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께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상황이 안 되는데도 어머니는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셨습니다.”
박 회장은 밥벌이가 쉬운 ‘영어’를 전공으로 골랐다. 그중에서도 학과로 모집을 하는 영어교육과에 진학했다. 학부로 모집하는 곳에 갔다가 성적이 나빠 나중에 영어 전공을 못하는 경우를 막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교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무역학을 부전공해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했다. 졸업 후 무역회사 입사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 “외국인을 많이 만나는 여행사도 좋겠다 싶어서 차선책으로 여행사에 지원했어요.” 박 회장은 1981년 고려여행사에 입사했다. 다음해 국외 여행 안내원 자격증을 따고 70여 개국에서 한국인 관광객 여행가이드를 했다. 패키지 투어를 비롯한 여행상품 개발도 맡았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자 그는 창업을 결심했다.
“여행사업이 크게 성장한다고 봤어요. 제도가 바뀌었는데도 변화하려 들지 않던 회사에서 벗어나 새롭게 일하기로 했습니다.”
동료 네 명과 공동투자를 해 1989년 국일여행사를 창업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상장을 해 사업 규모를 키우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후 막상 박 회장이 상장을 제안하자 동업자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상장을 하려면 기업공개를 통해 투명성을 갖춰야 했다. 하지만 국일여행사를 포함한 여행업체에는 투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당시 관광법규에는 내국인 대상 해외 여행상품 판매에서 10% 이상 수익을 내면 안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여행업체 중에는 10명 이상 단체 관광객일 경우 수익을 10% 이상 내고, 10%가 넘는 부분은 매출에서 누락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박 회장은 “회사를 키우려면 기업을 공개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세무 관계를 명확히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독립을 준비했다. 1993년 국일여행사의 자회사인 국진여행사를 맡아 운영했다. 1995년에는 자본을 분리하고 하나투어로 회사 이름을 바꾸면서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자본금은 직원들과 함께 마련했다. 그가 1억원을 내고, 나머지 2억5000만원은 직원들이 모았다. 그는 근로자가 자기 회사 주식을 보유하도록 하는 우리사주제를 직원들에게 제안했다. 각자 최소 500만원 규모의 주식을 보유하자고 설득했다고 한다. 임직원 20명이 그에게 힘을 보탰다.
하나투어 유니폼은 자주색이다. 박 회장은 “사업 초기에 영업직원 수가 적은 단점을 보완하고자 눈에 띄는 색으로 썼다”고 설명했다. 당시 경쟁사의 유니폼은 남색이었다. 하나투어 영업직원들은 자주색 옷을 입고 고객을 만나며 상대적으로 더 강한 인상을 줬다.
여행업계 최초 상장
박 회장은 2000년 코스닥 상장을 통해 사업 규모를 키웠다. 여행업계 최초의 상장이었다. 상장이 쉽지는 않았다. 여행업을 소비향락산업으로 취급한 금융감독위원회와 증권협회에서 제동을 걸었다. 여행사 상장 사례가 없어 주간사 선정과 유가증권 신고서 작성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벤처 붐이 일었던 2000년 하나투어는 코스닥위원회에서 어렵게 등록예비심사를 받았다.
심사위원 중에 ‘여행사도 상장을 하냐’고 비아냥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코스닥 등록 심사기준의 요건은 투명성과 성장성이었다. 하나투어는 세무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해왔다. 문제는 성장성이었다. 박 회장은 당시 “한국은 여건이 비슷한 다른 나라에 비해 출국자 비율이 아직 낮다”며 “국내 여행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2001년에는 자기 회사 주식을 일정 가격에 매수하는 권리를 주는 ‘스톡옵션’ 제도를 도입했다. 박 회장은 2007년까지 전 직원에게 직급과 영업 능력에 따라 스톡옵션을 줬다. 지금은 팀장 이상 직원들로 범위를 줄였다. 다른 임직원의 지분율이 높아지면서 박 회장의 지분율은 떨어졌다. 하지만 박 회장은 “내 지분율 크기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며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함께 기업을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쟁력 있는 상품은 하나투어의 자산이다. 박 회장은 초창기부터 상품 개발과 서비스 향상을 강조했다. 몇 년 전부터는 중소 여행사·숙박업체·식당 등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국내 여행상품 콘텐츠를 강화했다. 2007년에는 전국을 연계하는 정기 내륙 버스투어 상품을 내놓았다. 지난해에는 국내 업체들이 숙박시설, 지역축제 상품, 맛집 같은 다양한 상품을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박 회장은 글로벌 사업 강화에 관심이 많다. 중국의 13억 명, 일본의 1억3000만 명을 타깃으로 비즈니스를 확장할 계획이다. 중국·일본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을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여행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제3국 여행상품도 준비한다. 박 회장은 지난해 초 중국·일본을 포함한 지역별 본부장을 해외에 상주시켜 현지 마케팅을 강화했다.
문화공연 기획은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한 방법이다. 하나투어는 지난해 4월 일본에서 인기 높은 이병헌이 출연한 TV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 여행 패키지를 내놓았다. 박 회장은 “이병헌 팬미팅을 중국·싱가포르에서 열어 관광객을 유치해도 된다”고 설명했다.
자유여행 상품 개발 강화
하나투어는 자유여행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고려해 ‘팝콘’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자유여행자에게 에어텔·배낭여행·호텔·현지투어 정보를 제공하는 상품이다. 박 회장은 “최근 몇 년 동안 외부 요인으로 패키지 여행 수요가 줄 때도 자유여행 수요는 줄지 않았다”며 “앞으로 자유여행 수요는 더욱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는 패키지 투어 상품의 매출 비중이 제일 높다. 직원 중에는 자유여행보다는 안정적인 패키지 투어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이도 있다. 박 회장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변화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의 사무실에는 ‘공변자무발전(恐變者無發展)’이라는 글자가 쓰인 액자가 걸려 있다. 그의 좌우명이다. “변화할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어요.”
박 회장은 하루에 평균 5시간 정도만 푹 잔다. 회사 일에 신경이 쓰여 깊이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다. 힘들 때면 부인에게 “이제 그만둘까?”라고 농담도 한다. 박 회장은 그러면 부인이 “그렇게 할 수 있겠어?”라고 되묻는다고 했다.
“직원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하자고 해놨어요. 저 없이도 회사가 꾸준히 성장하게끔 직원들에게 힘을 실어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