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조지야백화점 터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67, 소공동 28-1)
1904년 9월에 경성 남대문통 2정목 123번지에 양복점 가게를 내어 당시 대한제국 황제 및 그 시종 이하의 제복 등 그리고 경찰관, 철도국, 체신국 등 관청의 제복들도 도맡아 수주함으로써 업적을 크게 신장시켰다
1921년 주식회사화하면서 본점을 부산에서 경성으로 옮겼다
1925년에는 백화점이 되면서 건물 확장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어 1929년 9월 3층 규모의 신관을 낙성하게 된다
1934~5년에 남대문로의 점포를 증축해, 1937년 6월에 착공하여 1939년 9월에 12,540㎡(약 3,800평)라고 하는 조선 최대 매장 면적의 빌딩을 준공하여 경성 5대 백화점 가운대 가장 큰 건물이 되었다
해방 후 조지야는 상호를 그대로 이어받아 한국전쟁 이후 미군 PX로 사용하다가 1955년 명칭을 미도파로 변경, 무역협회로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1969년 대한농산(대농)이 미도파백화점으로서 경영을 계승하였다
미도파는 영어 단어'대도시 Metropolitan'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음차해서 표기한 이름이다
미도파(美都波)의 한문은 '아름다운 도시의 물결'이라 풀이 할 수 있고, 음계의 미mi, 도do, 파fa로 읽히기도 하는 기발하고도 낭만적인 이름이다
1997년 IMF 체제하에서 부도를 맞아, 2002년 롯데가 미도파의 경영에 참가하였고, 2003년부터는 롯데미도파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하였지만, 2013년 롯데 쇼핑에 흡수되어 미도파는 소멸하고 건물은 다시 개장하여 롯데 영플라자 명동점이 되었다
미도파는 산하에 여자배구팀이 있었는데, 옛날 실업배구 시절 미도파여자배구단은 1969년 국세청을 시작으로 미도파와 대농으로 팀명을 바뀌면서 1985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184연승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넘겼다
반민특위 터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4, 남대문로2가 9)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제정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발족한 헌법기관이다
1949년 8월 활동을 마칠 때까지 당시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을 독립 청사로 썼다
반민특위가 입주했던 상공부 특허국 청사는 해산 후, 1963년 국민은행 창립으로 본점이 됐다가 1969년경 신관 건축으로 철거되었다
1999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가 빌딩 1층 화단에 반민특위 사무실 터임을 알리는 푯돌(표지석)을 제막했다
(원래는 정문 방향에 세우려 했지만 관계당국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을 의식하며 대로변에 세우지 말아달라고 하자 유치장 구역 터에 세운 것이다)
건물이 리모델링되면서 지하주차장 등지에 두 차례 이전됐고,
국민은행 명동지점이 철거되기 전인 2018년 9월에 촬영한 번만특위 푯돌 - 본래 이곳은 체포된 부역자를 가두던 유치장 자리였다
2017년에 해당 부지가 마스턴투자운용 및 미국 안젤로 고든 등에 팔려 호텔이 신축되면서 용산구 청파동2가에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존됐다가 입구에 세워졌다
1949년 6월 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 대통령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6월9일자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셈이다
지독한 반미·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의중과 맞아떨어졌다
♤ 노덕술, 최운하 김덕기 등의 경찰 간부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톨스토이라고 불렸던 춘원 이광수,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유명한 채만식, 육당 최남선 등 문화계 인사, 종교계 인사 최린 등이 구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수는 적었지만 친일파를 구속하는 등 약간의 성과는 있었으나 처벌에는 실패했다
(1호 체포자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다)
경성전기 터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92, 남대문로 2가 5)
경성전기는 1898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의 후신으로, 서울 종로에 사옥을 두고 있던 경성전기는 부족한 사무공간을 확충하기 위하여 1928년 12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사옥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서울 도심부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무실 건물로, 건립 당시 지하 1층·지상 5층 규모였다가 1965년 2개 층을 증축하였다
연면적은 5,957.1㎡(약 1,800평)이다
한국 최초로 화재와 지진에 잘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엘리베이터와 유리블록 등이 설치되었다
합리주의·기능주의를 중시하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한 건축가 집단인 시카고파의 건축양식에 르네상스 건축의 장식적 요소를 접목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건물 기초부·구조부·지붕부, 내외장 마감 등의 보존관리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961년 조선전업주식회사, 남선전기와 함께 한국전력주식회사(현 한국전력공사)로 통합되어 한국전력주식회사의 본사로 사용되었고, 1991년부터는 한국전력공사의 서울 본부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2020년 3월 문화재 복원 및 재생사업을 통하여 재정비되었다
한국의 대표적 근대 건축물로서 역사·문화적,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2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식산은행 터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81, 소공동 1)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이다
1918년 10월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개를 합병해 설립되었으며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 되었다
1926년에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이어 두번째로 습격하였고, 중일전쟁 이후로는 약 8년 동안의 전시 체제 속에서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본 정부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산업 부문에 이를 공금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0년 2월에 상호가 한국식산은행으로 변경됐으며, 1954년 4월엔 새로 설립된 한국산업은행 등으로 모든 업무를 이관하고 주요 자산을 양도한 뒤 대통령령 제859호 <한국식산은행의청산에관한건>의 제2조에 따라 해산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이 건물이 낡을 대로 낡아서 산업은행 본점 건물을 새로 지으려던 중 롯데그룹의 롯데타운 조성 로비 등에 의해 이 자리를 롯데그룹에 매각하고 관철동 삼일빌딩으로 이전한다
♤ 롯데백화점이 허가 나는 과정은 불법을 합법으로 만든 기막힌 사연이 있다
1970년대 말 강북억제정책에 따라 도심에는 백화점을 허가해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백화점 대신 쇼핑센터로 허가해준 것이다
그래서 법인명은 ‘롯데백화점’이 아니라 ‘롯데쇼핑’ 이다
동양척식회사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66, 을지로2가 181)
1908년 12월 28일 일본은 조선의 경제수탈을 목적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유사한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했다
동양척식회사는 농민에게는 진보된 농법을 제공하고, 기업가에게는 이자가 싼 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이 회사는 조선의 식민지화에 목적이 있었기에 한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1918년 7만 여 정보토지를 소유함으로서 토지를 빼앗긴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 신세로 전락, 1921년 경작지 1/3 토지 헐값에 매입 또는 강제 몰수 및 빌려준 곡물 20% 고리로 소작민 수탈, 1926년 조선 빈농 29만 9천 여명 토지 상실로 조선에서 축출되어 북간도로 집단 이주 등 악랄한 경제적 수탈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국방부 정훈국에서 이 건물을 사용했고, 그 후 한국전쟁 때 서울을 되찾으면서부터 내무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경찰청으로 독립했지만 전에는 내무부 산하에 경찰청이 있었고, 내무부에서 전국 행정조직을 장악하고 있어 막강한 권력기관으로 행세했으며, 4.19 혁명시 내무부장관 장경근이 발포명령을 하여 데모대 학생들을 쏘아죽이고, 그 후에 장경근은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망가고, 그 이전에는 이기붕이 부통령 되기 전 내무부장관을 하여,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 이강석은 이기붕의 아들이고, 4.19 후에 이강석의 권총으로 이기붕 일가족이 처참하게 자살로 끝나는 등 내무부가 말썽 많은 기관이었고 민중의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그 후 내무부 건물은 한국외환은행에 팔려 1972년에 철거하고 1981년 1월 30일 본점을 신축하였다
2012년 1월 27일 하나금융지주에 인수되어, 2015년 9월 1일 공식 합병된 후 하나은행본점으로 사용 중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장악원 터이기도 하며,
조선 후기의 역관이자 조선 최초의 천주교 희생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터이기도 하다
나석주의사 의거기념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66, 을지로2가 181)
1892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나병헌(羅秉憲)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집안의 농사를 돕고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나석주의 집안은 땅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농부를 때려 치운 뒤 명신학교를 수학하고 북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항일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국내에 돌아와 의거할 기회만 노리던 나석주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청숙의 요청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인 '리중거' 로 위장하여 입국하게 된다
1926년 12월 28일 권총을 신문지로 감싼채 겨드랑이에 끼고 폭탄을 지닌 채로 명동으로 향했고 먼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로비에 들려 중국인 행세를 하며 경비 태세를 탐문했다
이후 맞은편에 있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들러 연말이라 사람이 바글바글한 틈을 타 정신없이 은행 업무를 보던 은행원 뒤로 폭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폭탄은 불발되었고 놀란 직원들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 앞으로 몰렸다
하지만 나석주는 태연하게 "아. 쓰미마셍."하고 조선식산은행 밖으로 자리를 떴고 후에 은행 직원이 폭탄임을 깨닫고 종로경찰서에 신고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으로 몰리자 상대적으로 경비가 한산해진 건너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가서 신문지로 숨겼던 권총으로 1층 수위실의 일본 기자부터 사살한 후 2층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권총으로 사살했는데 먼저 총소리를 듣고 계단을 올라오는 직원 1명을 사살했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가서 오모리 차장과 아야다 과장을 사살했으며 옆 기술과로 들어가 권총을 마구 난사하고 폭탄 1개를 던진 다음 아래층 현관에 있던 일본인 2명에게 권총을 쐈다
살육전을 벌이다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고 탈출할 때가 됐다고 느낀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나와 거리를 내달렸지만 출동한 일본 경찰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석주는 먼저 만난 경기도 경찰 경부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을 사살하며 도주했다
그러다 체력이 다했다고 느꼈는지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미와의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사망 후 나석주의 유해는 가족들이 서울로 와서 인수해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의 묘지에 매장했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의사와 열사의 사전적 의미를 떠나 국가보훈처는
의사 :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열사 : 맨몸으로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그럼 나석주는 열사가 아니라 의사로 칭해야 한다
보다시피 열사로 표시된것은 의사로 수정되어야 한다
군기시 터(구 서울시청)를 출발하여 진고개(혼마치)를 거쳐 나석주의사 의거 터까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희미하게 나마 예전의 건물들이 생각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덕분에 그 때 그 시절의 추억들을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