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록허드슨(한국명: 이종화) 장로에게 靈力을 받곤 했는데.......'록'장로 눈에 북성방이 소돔성이나 고모라성쯤으로 보였는지......잘 나타나질 않네........언능 언능 나타나 설교와 간증으로 '다소' 우리를 지겹고 졸립게 해달라!!!!
떠돌이 교인............
상상할 수 없으실지들 모르겠지만 저는 그야말로 모태신앙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것을 '못된신앙'이라고 말하지만 어찌됐건 저는 교회에서 자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자란 교회는 1956년 4월 22일날 한성고등학교를 빌어 첫예배를 보며 창립되었는데, 우리 아버지(1994년 작고)와 매형 아버지(1978년 작고), 한은영 회장(1987년 작고), 곽종원 총장(상명대학교 총장), 그리고 목사님....다섯분 정도가 주축이 되어 교회를 세우셨던 연고가 있었고, 평소 조용했던 엄마도 교회에는 극성스러우리만큼 열심이었기 때문에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날 때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화여대 넘어가는 아현동 마루터기에 있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아현중앙교회>에서 주욱 살게된 거지요.
부득이한 일이 생겨 대학 졸업할 때 그 교회를 떠나긴 했지만 개국공신의 아들로서의 자긍과 그 울타리에서 자랐던 귀소본능 때문에 언제나 그곳을 내 신앙의 고향으로 알고 삽니다. 물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장로님이 되어 아직도 그 교회에 열심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1980년 3월. 그 교회를 나와 그동안 전전했던 이유와 교회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란 교회를 떠나 이리저리 전전했던 이유는.........
아현중앙교회 대학부 후배들이 시국사건(당시는 긴급조치 9호 위반이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정도였음)으로 10여명이 징역살이를 했고, 한명은 투신자살(이세진, 김의기)을 했는데, 이를 놓고 "급진좌경?한 안희진이 그동안 사회과학 이념서클을 만들어 그 아이들 교육을 책임졌었고, 여러 조직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각종 시위나 농성에 아이들을 투입하여 많은 희생을 당하게 했으며, 정작 자신은 교도소엘 가지 않았다"는 교인들의 성토로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80년 3월에 부득이 자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저는,
-1980년 3월부터 1982년 2월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이화여자대학교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우선 이 교회는 전부 젊은 이들로 구성된 데다가 탈형식으로 내 취향에 꼭 맞았었습니다. 11시 예배시간 전에 2시간씩 했던 김동길 교수의 서양사 겸 성경공부가 무척 좋았고,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이화여대 교목 김흥호 교수의 설교가 좋아 계속 다녔다.(이 인연으로 나는 8개월간 매일 새벽6시에 김교수님으로부터 장자와 노자를 배웠다). 후일 이화여대에 복직한 서광선 교수가 담임목사를 맡으면서 대학교회는 기성교회와 조금도 다름없는 '한국교회'가 되었고....예배장소를 대강당으로 옮기며 교인확장에 열올리는 것을 보고 실망 자퇴함.
-이 때는 내가 연희동에서 살던 시기였는데, 연대 북문 근처에 있던 <기독교장로회 은진교회>를 1982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다녔습니다. 그 기간중에는 미국에 있던 기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만큼 다니지는 않았지요. 학생시절부터 막연하게 끌리던 기장교회를 맛보고자 간 것인데, 감리교를 떠나 처음으로 딴 교단에 간 것이라서 신선미도 있었고, 당시 담임목사이던 강일상 목사의 <新삼위일체론>에 근거한 설교가 너무나 맘에 들어 비교적 오래 나가다가, 기장교회의 고질적인 싸움...교역자와 교인 간의 치열한 싸움....을 수차례 목격하였고, 지나치게 현실정치에의 참여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신앙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견디기 어려워 자퇴함.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김찬국 교수님은 1974년에 징역살이를 시작한 이래 몇번의 해직과 복직, 투옥으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가, 미국유학을 가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양교회>의 배상길 목사의 부탁으로 유학기간동안 그 교회의 설교목사로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1989년 9월부터 나가기 시작하여 김찬국 교수님이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가게 되어 그만두자 나도 따라 자퇴했음.
-목양교회 이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후배가 목회하는 '한울님교회'(광명시)에도 서너달, 역시 후배가 하던 상암교회(쓰레기하치장 동네)에도 서너달 나가다가.......
-1992년 7월부터는 옛날 양동에서 창녀촌선교할 때 내가 도왔던 이상윤 목사가 양동에 설립한 <회원교회>에 잠시 나가다가 이상윤 목사가 협성대학교 교수로 가는 바람에 1994년 6월에 자퇴.
-목동아파트 1416동 1401호(옆집)에 사는 감리교본부 출판국 간사(내게 4년여 원고를 쓸수 있게 해주는 목사)였던 김창범 목사가 소속목사로 되어 있는 <세신교회>에 1994년 6월부터 나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름.....
교회가 12단지에 있기 때문에 가까웠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간섭 받지 않아 좋아서 나갔으나 ....사실은 어느 교회건 籍은 걸어 놓아야 했기에 어영부영.......
낚시 갈 것 다가고....비난 받아 가며 .......현재 성전 뜰만 '가끔' 밟고 옴.
-언젠가 나의 고향으로 가고 싶으나, 가끔 가다 듣게 되는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의 악습과 병폐를 그대로 안고 있을 뿐만아니라 오떤 부분에서는 <계승발전>시켜 연수생을 받을 정도가 되었으니....내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엉터리안박사알씨다클레이아니지니통달지푸라기>가 횡설수설했습니다.
*엉터리안박사---국민학교 때 별명(아는 척, 잘난 척 때문에 생겼음)
*알씨다---중학교 때 별명(박박 대갈통 모양 때문에 생겼음)
*클레이---고등학교 때 별명(학교와 선생과의 분쟁이나 학생들간의 분쟁에 나서서 중재를 한답시고 많이 떠들어서)
*아니지니---외국 놈들이 '안희진' 발음이 너무 어렵다고 하여 anizini라고 스스로 붙여놓은 '거의 '이름'
*통달---어떤 후배가 나의 노가리를 듣다가 모르는 것 없는 줄 알고 순전히 오해로 붙여놓은 별명
*지푸라기---거적이란 별명을 가진 친구의 여러가지 실력을 내심 무시하다가, 어느날 진면목을 발견하고.....나는 거적에 비하면 '지푸라기'다라고 고백하자....주변의 친구들이 붙여놓은 별명.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별명이자, 내 신앙고백이다.
첫댓글 그래~~이종화 목사님이 안보이시네~~~
종교인으로의 갈등이 많았네...고생했네..이말이 적당한건가? 하여튼 희진이를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됐네..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