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을 보면 내 젊은 날의 가족이 보인다.
전국이 강풍과 거센 빗줄기에 몸살을 앓은 탓인지 화채봉 중턱에도 봄의 연푸름과 청량함이 온 누리를 감싼다. 2박 3일 일정 으로 일상 중 막간을 이용하듯 득달같이 달려온 이곳엔 그러기엔 너무나 막중한 한해의 먹거리가 우리의 정성과 손길을 기다 린다. 무의식중 푸는 소박한 여장은 내일 할 일을 염두에 두며 집 안팎 이모저모를 광속으로 살핀 후 그동안 비워둔 집에 며칠 머물 실내 먼지를 말끔히 닦아낸다. 내일은 일찍 기상하여 올 삼월 초 담근 된장을 정심으로, 정성껏 정갈하게 뜰 만반의 준비 에 어느새 어둠에 묻힌 산골짜기의 적막한 밤을 각자의 편안한 자세로 수면을 청한다.
깊은 산골의 여명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눈꼽째기 창을 투시하고 세 자매는 하나 둘 기지개를 켠다. 바로 위 언니는 눈 뜨자 마자 휴대폰에서 기상 정보를 확인한다. 좋은 날씨가 관건인 된장뜨기에 이른 오후에 내린다는 비 소식에 그제야 우린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제각기 맡은 임무수행에 간단한 아침 식사와 봉지 커피 한잔을 빠뜨리지 않는다. 되돌아보면 이곳 된장 담그기 는 순전히 나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된장사랑이 지나친 나의 식성에 친정엄마 계실 땐 친정집 먹거리는 자식들의 먹거리라 는 당연한 권리로 여겨 뻔질나게 퍼다 날랐던 된장, 간장, 고추장이 친정엄마 부재 시에 절로 깨닫게 된 철없던 시절의 자신을 성찰함에 더는 염치없는 행위가 가당치 않다는 뉘우침과 사제품 구입 역시 나의 입맛이 허락하지 않음을 시리도록 절감한다.
다행히 형제자매 절친들이 다 알만큼 나의 된장사랑은 유별났기에 그들도 누군가로부터 얻어온 아니면 직접 담은 먹거리를 주 저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게 양보한 사랑이 있어 나의 된장 사랑이 근근이 버텨오다가 어느 날 문득 조금 남은 된장 그릇을 하염 없이 바라보다가 전율이 오듯 얻어먹는 신세가 아닌, 자급자족이란 풍요로운 된장을 상상케 되고 아울러 할 줄 모른다고 한 번 의 시도도 없었던 나의 무심함을 나무라며 나도 배워보자는 태세전환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옛말에 답답한 놈이 샘을 판다고" 너무도 절실함에, 손끝 매운 바로 위 언니에게 조심스럽게 제의 아닌 부탁을 하게 되고 배려심 넘치는 언니는 언니다운 면모로 한 지역에 거주하는 세 자매와 함께 매해 영월에서 된장 담기 연중행사를 흔쾌히 승낙하고 약속한다.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하 게도 언니는 나와 다르게 된장을 기피하는 식성이다. 겨우 두 살 터울인 언니지만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옛말을 그대로 실감 나 게 행동하는 사람이다.우리 모두를 위해 언제나 자신보다 동생들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배려심과 측은지심은 우리 네 자매중 오 로지 으뜸이듯이 된장 담그기의 진두지휘뿐만 아니라 몸소 담그는 그 모습은 정갈함 그 자체이다.나와 막냇동생은 겨우 들러리 로 머슴 역할을 자처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방해꾼이 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된장을 담았지만 여러 번 실패도 경험했다. 실패의 원인은 집과 영월과의 시간적 거리가 지배적이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현지에 상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도 3년 연속 성공하는 바람에 옛날에 신세 졌던 (얻어먹었던)형제자매 그리고 절친들의 고마움을 되새기며 그동안 얻어먹은 양의 몇 배를 퍼 나르는 중이다. 평소 집에선 접하지 않는 커피지만, 이곳에 오면 형제들과 식사 후 마시는 한잔의 커피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오늘은 서둘러 마무리 해야 할 중차대한 연중행사 로 세 자매의 여유작작은 당초에 접고 일터로 나갈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
이번엔 올해 처음으로 시도했던 천 주머니의 이용으로 메주 두 덩어리씩 넣어 차곡치곡 쌓아둔 단지에서 주머니를 꺼내니 이미 된장은 소금물 속에 제대로 풀어져 젖 먹던 힘을 다해 으깨고 비비고 할 일이 없어 정말 효율적이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된장 단 지를 호시탐탐 노릴 왕파리의 접근을 막기위해 바짝 긴장하고 달리 방법이 없어 세 자매의 몸으로 단지를 에워싸다가 그것도 부 족해 아예 막내는 골프 우산을 들고 와 펼친 우산을 최대한 낮은 자세로 파리가 얼씬 못하도록 철통같은 경비에 온몸을 던진다. 바로 그때 뛰어난 후각을 자랑이라도 하듯 왕파리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고 그 한 마리가 우리 주위를 배회함에 누군가의 찰나적 반사작용에 뚜껑은 닫히고 냅다 실내로 뛰어 들어가 홈키펀지 뭔지를 들고나와 분노의 분사를 몇 차례 하자 순식간에 자취도 없 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 급 황당함을 마주하고 보니 이렇게 간단히 해결할 방법을 두고 우리는 어찌 이리도 고심했을까 하는 벙찐 표정으로 뭔가, 센스가 부족했던 서로를 응시하며 박장대소했지만, (자칫하면 부지불식간 이 귀한 된장 단지가 왕파리의 산실이 될 사고의 고심) 특히 먹거리 근처에서 감히 살충제 사용은 독이라는 고정관념과 찝찝함에 애당초 그 방법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올해는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는 과정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세 자매는 2년 전 그리고 작년에 숙성된 된장 간장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피고, 즐비하게 나열된 된장 용기마다 언니는 인색함 없이 가득가득 담는다. 각자 필요한 만큼의 양과 우리 육 남매 중 함께하지 않은 3형제는 당연하고 그들 자녀까지, 아니 내 친구까지도 마음을 써 초라하지 않은 양의 간장 된장을 퍼 담는 바로 위 언니의 모습에서 은근히 눈치를 아니 볼 수가 없었다. 우리 형제야 당연지사이나, 벌써 여러 차례 퍼 담은 친구들의 된장이다. 이번 역시 내 염두에 둔 또 다른 두 친구를 위한 큰 그릇을 내밀자 이건 또 누구 거? 라는 말 없는 언니의 표정에 미안함에 중언부언하는 내게 "그래, 그런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줘야지."라며 용기에 가득담아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누른다.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단지 뚜껑을 여는 마음은 또다시 어쭙잖은 실수로 한해의 먹거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함과 긴장감의 시 작으로 올해 된장 담그기도 무사히 제대로 완료했다는 자부심에 세 자매의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 순간 된장 뜨기 몰입 으로 인지하지 못 했던 뻐꾸기 울음소리가 이제야 귀에 들린다. 일기 예보는 조금은 엇나간 듯 날씨는 청명했고 햇살은 여전히 해 맑았다. 간간이 골 깊은 곳에서 한 번씩 몰아내는 골짜기의 숨결인 산들바람이 깊은 산중 오후의 적연함을 부추긴다. 끊임없이 이 어지는 뻑뻑꾹~~ 혹은 뻑뻑뻑꾹~~이란 다소 센 느낌의 신랑 뻐꾸기의 요란하지만, 간절히 짝 찾는 이 소리가 온 산으로 퍼질 때 반드시 들려오는 미래 신부 뻐꾸기의 응답은 훨씬 더 예쁘고 매력적인 운율을 탄다. 뻐 꾹~~뻐 꾹~~ 나 여기 있어 라고.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암수의 대화는 곧 사랑으로 이어지고, 머지않아 사랑의 결실을 유감없이 어느 둥지에 탁란할 것이다. 조류 의 탁란은 아직도 수수께끼지만 상식적인 생각으론 그 방식 또한 엄마뻐꾸기의 쉽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야생의 세 계는 신비하지만 생각하면 너무도 엉뚱하고 얄미운 녀석들이지 않은가. 그뿐인가? 탁란한 어미 뻐꾸기는 탁란한 둥지 부근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새끼를 걱정함인지, 아니면 서로 주고받는 혈육의 대화인지 알 수 없으나, 날마다 뻐 꾹 뻐 꾹 울어대는 어 미 소리에 부화 후 몇 주 지나 이소 시기가되면 뻐꾸기 새끼는 미련없이 둥지를 털고 나와 저쪽 소나무에서 기다리고 있던 뻐꾸기 어미 따라 멀리멀리 날아가 버린다. 이 골짜기에서는 그들의 이소와 한 해의 뻐꾸기 철인 유월이 지나면 더는 뻐꾸기 소리는 들리 지 않는다. 우리 역시 이른 봄부터 이곳을 들락날락하다가 깊은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방문을 마치고 다음 봄을 기다린다.
우리의 건강이 유지되고 우리 자신의 운신이 가능할 때까진 이곳 된장 담그기는 지속되겠지만, 우리 세 자매 중 한 사람이라도 건 강에 이상이 온다면 이곳에서 우리의 된장 담그기도 끝날 것이다. 우리 세 자매는 오가는 고속도로에서 많은 대화 중 뒷자리 상석 에 앉은 막냇동생에게 늘 말한다. 우리가 이보다 더 늙어 손수 운전이 어렵게 되면 막내의 몫이라고 얘기하면 수락하는 그녀의 대 답에는 언제나 목이 메어 있다. 내 사랑하는 막냇동생과 그리고 바로 위 언니 함께하지 않는 큰 언니까지 모두 건강하게 아름다운 삶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의 삶에서 봄의 의미는 또 다른 한 해의 희망과 꿈을 품게 하는 시작의 의미듯이, 자연 생태계 역시 생명을 움트고 생장 할 에너지 공급의 원천이듯 비록 탁란이지만, 뻐꾸기 가족의 한해도 이 산골 어디에선가 무사히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작년에는 채취한 쑥을 다듬어 부침개와 쑥국을 잘 끓여 먹었는데 올해는 아예 쑥 채취를 포기했다. 그 이유는 이 동네 거주하는 주민이 뱀에게 물려 오랜 시간 고생했다는 이야기에 용감한 나지만 몸을 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 사랑하는 막냇동생과 바로 위 언니의 다정한 모습
해발 750고지인 오르막의 맨 끝 꼭대기에 영월 집이 보인다.
작년 봄 영월에서 세 자매가 동네 한 바퀴 돌고 집으로 가는 오르막 오솔길에 언니의 예쁜 뒷모습
언니와 막냇동생이 된장 단지를 점검하는 모습을 실내에서 창을 통해 한 컷한 풍경.
자연의 싱그러움이 넘치는 한적한 산골에 두 여인의 모습이 그림 같지 않은가. ㅎㅎ
세 자매의 정성과 자연속에 숙성된 된장 간장이 어찌 맛있지 않을까.
푸른 오월의 눈부심에 여전히 사랑스러운 두 여인.
귀가 중 유명한 서민 한우 식당에 들러 세 자매가 900그램 한우와 냉면을 맛있게 먹었다. 물론 고기의 절반은 내가 먹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이 조그마한 연못엔 고기뿐만 아니라 제법 운치 있는 물레방아도 돌아간다.
그리고 나와 50여 년을 함께한 나의 사랑, 나의 소리들.
Dvořák: Cypresses B.152 - 5. Andante · Hagen Quart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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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고운 작품 즐감하고 추천드리고 갑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