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세비아 유로파리그 축구 통산 7번째 우승
세비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푸스카스 아레나에서 열린 2022~23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에서 AS로마와 정규시간 전·후반 90분 및 연장전 전·후반 30분 동안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승부차기에서 4-1로 이겼다.
이로써 세비야는 2005~06, 2006~07, 2013~14, 2014~15, 2015~16, 2019~20시즌에 이어 통산 7번째 유로파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세비야는 지금까지 결승에 7번 올라 모두 승리하며 ‘유로파리그의 제왕’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2022년 전국동시 도지사 시장,군수, 시,도의원 선출 지방선거 실시 국민의 힘 압승 민주당 패배
2020년 세종대왕이 보던 밤낮 겸용 시계(일성정시) 발견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 천문과학기술을 실증할 유물들이 출토됐다. 앙부일구, 자격루 등 세종 대에 많은 과학 기기가 만들어졌지만 당대 실물은 전해진 게 거의 없었다.
처음에 임금이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밤낮으로 기상 상태를 알기 위해 천체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해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했는데, 이를 완성해 보고했다
일성정시의는 당시 천문과학기술의 집약체다. 농업이 국가 경제의 기본이던 사회에서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 변화 등을 살펴 시간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국가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또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던 유교에서도 천문학을 제왕의 학문이라고 일컬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성정시의가 제작되기 전 조선은 중국에서 전래된 천체 관측 기기인 혼천의와 간의(簡儀)를 변형해 이용하고 있었다.
혼천의와 간의는 윤일을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윤일은 우리가 세는 1년의 길이와 실제 1년의 길이가 달라 발생하는 오차다. 지구의 공전주기는 약 365.25일로 우리가 아는 1년의 길이인 365일보다 0.25일이 길다. 일성정시의는 주천도분환을 이용해 이를 해결했다. 주천도분환에는 4분의 1도를 기본 단위로 1461개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이를 모두 더하면 365와 4분의 1도인데, 이는 당시에 정확한 1년의 길이를 측정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일성정시의는 매년 동지 자정에 주천도분환을 한 눈금씩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0.25일을 보정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4년에 한 번씩 1일을 추가하지 않고도 윤일 오차를 방지했다. 이 명예교수는 “당시 조선에서 정밀하게 365와 4분의 1도만큼 정밀하게 눈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며 “세종 때 독립적으로 창제한 일성정시의를 보고 영국의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 교수는 서양에도 이런 것은 없다며 극찬했다”고 말했다.
2016 남양주시 지하철 공사현장 가스폭발 4명 사망 10명 부상
2015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첫 사망자 발생
2015년 458명 탄 중국 여객선 ‘둥팡즈싱’호, 양쯔강에서 침몰
2015년 6월1일 오후 9시 30분(현지시각)쯤 중국 양쯔강 중류인 후베이성 젠리(監利)현 인근에서 승객과 승무원 458명을 태운 대형 여객선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호가 침몰했다.
이 선박은 장쑤성 난징(南京)을 출발해 충칭(重慶)으로 향하고 있었다. 1994년 2월 건조됐으며 정원은 534명이다. 승객들은 난징과 창저우(常州), 상하이(上海) 등 지역 여행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상하이 여행사가 조직한 50~80세 연령대의 노인 단체여행객도 타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새벽 “여객선 ‘둥팡즈싱’이 1일 밤 9시 28분(현지 시각)쯤 후베이성 젠리현 인근에서 침몰했다”고 긴급 타전했다. 사고 지점의 수심은 15m다. 이 매체는 사고 직후 헤엄쳐 육지로 나온 선장과 기관장의 말을 인용해 “배가 돌풍(회오리바람)에 휘말려 1~2분 만에 전복됐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6일 양쯔(揚子)강에서 침몰한 여객선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호 사망·실종자가 442명이라고 최종 발표했다. 승객 456명 중 생존자는 14명에 그쳤다. 당국은 침몰 닷새만인 전날 둥팡즈싱호를 인양하고 선박을 대대적으로 수색했으나 추가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 사고는 중국 건국 이후 최악의 해상 참사로 남게 됐다.
2015년 위안부 피해 김복동 할머니, ‘자유 영웅 100인’에 선정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김복동(89)씨가 ‘국경 없는 기자회’와 프랑스 AFP 통신이 함께 선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 100명’(100 heros pour la liberte de la presse)에 뽑혔다. 언론 자유 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는 최근 창립 70주년을 맞아 전 세계 ‘자유 영웅’ 100명을 선정해 그들의 사진이 담긴 화보를 펴냈다. 김씨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과 함께 100인에 포함됐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화보에서 김 할머니가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 수요집회에서 발언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싣고, 그 아래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 끌려가 성 노예로 살았던 아시아 여성 20만명 중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1992년 이래 줄기차게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5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호암상 시상식 참석… ‘첫 대외 행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와병(臥病) 중인 부친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1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湖巖賞)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건희 회장이 맡아온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지난 15일 선임된 이후의 재단 관련 첫 공식 행사다. 이 부회장이 오너 일가(一家)를 대표해 혼자 참석한 데 대해, 재계에서는 사실상 삼성 승계자의 첫 대외 행보로 보고 있다.
이날 이 부회장은 포토라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행사장으로 입장했고 맨 앞줄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 및 고건 전 국무총리 옆자리에서 시상식을 관람했다. 축사나 시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행사가 끝난 뒤 수상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날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수상자 만찬에 참석해 정의화 국회의장과 함께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시상식에 불참한 어머니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여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패션부문 사장 등도 축하 만찬에는 참석했다.
2015년 마치무라 전 일본 중의원 의장 별세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70) 전 일본 중의원 의장은 지난 4월 14일 병원에 입원한 뒤 엿새 만에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그는 “검사 결과는 가벼운 뇌경색이라고 나왔지만 의장의 책무를 생각할 때 (병이 가벼워도) 일에 악영향이 오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한 달여 동안 투병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마치무라 전 의장은 홋카이도 출신 12선 의원으로, 중의원 의장 취임 전에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세이와(淸和)정책연구회’를 이끌었다. 2004년 고이즈미 정권 때와 2007년 1차 아베 정권 때 외무상을 지냈고, 이후 2008년까지 후쿠다 정권에서 관방장관을 맡았다. 2012년 아베 총리와 자민당 총재 자리를 놓고 겨뤘지만, 그때도 뇌경색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5년 소록도 한센인 지원 15년… ‘참길 복지’ 신임 대표 김가범 취임
40년 전통의 봉사 단체 대표에 여성 화가가 취임했다. 사단법인 ‘참길 복지’의 김가범(68·사진) 대표가 6월 1일 3년 임기를 시작했다. ‘참길 복지’는 1973년 아동 봉사로 시작해 2001년부터 전남 소록도 한센인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는 단체다.
김 대표는 취임 행사를 생략했다. “250명 회원이 달마다 1만~2만원씩 내는 후원금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복지회는 여름과 겨울 고등학생·대학생 100여명과 소록도를 찾아가 나흘간 한센인을 돌보고, 한센인 2·3세의 사회 참여를 별도로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 김 대표는 40대에 붓을 잡고 50대에야 첫 전시를 가졌다. 참길복지와는 1998년 인연을 맺었다. “처음엔 누구나 (소록도 봉사를) 꺼려요. 첫 봉사를 마치고 나면 목욕탕에 들러 씻고 나올 정도죠.” 김 대표 역시 그렇게 두려움을 갖고 시작한 봉사가 어느덧 15년이 넘었다. 회원들은 해마다 먹거리와 생필품을 싸들고 소록도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페인트칠을 하고 하수구 청소도 하며 이것저것 거들다 보니 차츰 ‘친구’나 ‘동생’처럼 대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한다.
2010년 '백만 송이 장미' 원곡 가사 쓴 보즈네센스키 별세
가요 '백만 송이 장미'의 러시아 원곡 노랫말을 쓴 것으로 유명한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Voznesensk)가 2010년 6월 1일 77세로 별세했다.
보즈네센스키는 '60년대 아이들'로 불리는, 스탈린 사후에 지적 자유를 누렸던 지식인 세대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크렘린의 정치권력에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니키타 흐루시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부터 추방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9년 에어 프랑스 추락 228명 사망
2008년 프랑스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세상 떠남
2005년 국보 제224호 경회루 일반인에게 공개
경복궁 경회루(慶會樓·국보 제224호)가 44년 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개방시간은 3월부터 10월까지 오전 11시, 오후 2·4시 3회(화요일 휴무)이며, 안내원의 인솔에 따라 경회루 1, 2층을 볼 수 있다. 매회 관람 인원은 60명. 2층 누마루는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게 했다. 광화문 뒤 흥례문 매표실에서 입장시각 20분 전까지 선착순으로 관람권을 구입할 수 있다. 관람료는 5000원(경복궁 관람료 3000원 포함)이다.
경회루는 조선시대 때 국가의 경사를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1395년(태조 4년) 창건된 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7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했다. 빼어난 주변 조경과 잘 어울리는 조선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물에 비친 누각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유홍준(兪弘濬) 문화재청장은 “목조건축은 사람의 손때가 묻어야 오래 보존할 수 있다”며 지난해 11월 시험 개방한 데 이어 이번에 개방을 결정했다.
2005년 영국 퍼시 부부 기네스북 ‘세계 최장 결혼 기록’ 경신
1일로 결혼 80주년을 맞은 노부부의 금실 비결은 “미안해”와 “그래, 여보”라는 말이었다.
영국 히어포드에 사는 퍼시 애로스미스(105)와 플로렌스(100) 부부는 1925년 6월 1일 동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법률사무소 직원이었던 남편 퍼시가 스물다섯 살, 주일학교 교사였던 플로렌스는 스물이었다.
이들은 결혼 2년 후 입주한 히어포드 브라인튼가(街)의 집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이들의 80년 해로(偕老)는 기네스북의 ‘세계 최장 결혼기록’을 경신했다 기존 기네스북 기록은 일본 노부부의 결혼 78주년이었다.
퍼시 할아버지와 플로렌스 할머니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어떻게 80년이나 부부로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플로렌스 할머니는 “미안해(Sorry)”라고 말하는 걸 절대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퍼시는 “그래, 여보(Yes, dear)”라는 두 단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결코 다툰 채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하며 산 것이 축복받은 결혼과 장수의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기네스북의 최장기 결혼기록뿐 아니라, 최고 부부 합산 나이 기록도 깨뜨렸다. 두 사람의 합산 나이는 205세하고도 267일이다. 자녀 셋과 손자·손녀 여섯, 증손자 아홉을 둔 이들은 1일 성대한 가족잔치를 열었다.
2005년 페루의 생후 13개월 된 ‘아기 인어공주’ 다리 분리 수술 성공
페루에서 다리가 붙은 채 태어난 생후 13개월짜리 ‘아기 인어공주’ 밀라그로스 세론양이 2005년 6월 1일(현지시간) 페루 수도 리마의 병원에서 다리 분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스페인어로 ‘기적(밀라그로스)’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세론 양은 2004년 4월 27일 페루 우앙카요 마을에서 두 다리가 붙은 ‘인어 증후군’으로 불리는 선천적 기형아로 태어났다. 이 증후군은 신생아 7만 명 당 1명 꼴로 발생하는 것으로 현재 전 세계에 생존해 있는 사례는 3명에 불과하다.
페루 리마의 솔리다리티 병원 정형외과와 심장과, 소아과 전문의 등 11명의 의료진은 이날 4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세론양의 발목부터 넓적다리 부분까지 완전 분리에 성공했다. 이번 수술로 세론양이 정상적인 다리를 가질 수 있게 됐지만 생식기와 소화기 등이 기형이어서 장기를 재건하고 회복하려면 최고 15년 간 교정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2004년 로버트 김 8년 만의 귀환. 정식 출감 전 가택연금
2004년 6월 1일 오전 9시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의 자택으로 돌아온 로버트 김(한국명-김채곤)씨는 그러나 감옥에서 8년을 보낸 사람 같지 않게 표정은 온화하고 밝았다. 김씨는 이날부터 정식 출감 전 집에서 생활하는 가택연금(Home Confinement)에 들어갔다. 만기 출소는 7월 27일. 출소 뒤에도 3년 동안은 집 근처 일정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보호관찰을 받아야했다.
로버트 김 사건은 8년 전인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24일 당시 미 해군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로버트 김씨는 스파이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김씨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미국의 ‘국가 기밀’ 을 넘겨줬다는 것이었다. 김씨가 전달한 정보들은 주로 북한 관련 고급 정보였다. 국내에서는 김씨 후원회가 결성되는 등 구명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졌으나 정부는 이 사건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로버트 김씨는 전남 여수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24세 때 유학차 도미(渡美), 4년 후 미 항공우주국(NASA)에 취직했고 미국 시민권도 얻었다. 그는 이어 1996년 9월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체포될 때까지 1978년부터 19년 동안 미 해군 정보국에서 군사 기밀을 다루는 정보분석관으로 근무해왔다.
한편, 6월 4일. 장남의 출소를 손꼽아 기다리다 지난 2월 별세한 부친 전 한국은행 부총재 김상영씨를 따라 어머니 황태남씨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에 로버트 김은 미 법무부 감찰관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감찰관은 전례에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2004년 한국, 군(軍) 첫 ‘부부원사’ 탄생
군 부사관(옛 하사관)의 최고 계급인 원사 부부가 처음으로 탄생했다. 육군 특수전사령부 7공수특전여단 소속 김영우(46) 원사의 부인인 국방부 여군발전단 고충처리과 이현숙(43) 상사가 6월 1일 진급해 원사가 됨으로써, 창군 이래 첫 부부 원사가 됐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검은 베레’ 시절인 1989년 7월. 이들은 모두 공수부대원으로 창공에서 낙하산에 의지해 ‘안 되면 되게 하라. 귀신처럼 접근해서 번개같이 쳐라’ 를 목청껏 외쳤다. 13공수여단에 근무하던 김씨와 특전사 여군중대의 이씨는 부대 상관의 소개로 알게 된 뒤 10개월간 사귄 끝에 1990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식장에선 “보아라! 장한 모습 검은 베레모…” 로 시작하는 ‘검은 베레’ 가 축가로 불려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04년 이라크 임시정부 출범, 신임 대통령에 알 야와르 피선
가지 야와르 대통령과 이야드 알라위 총리를 정점(頂點)으로 한 이라크 임시정부가 내년 1월까지의 한시적 권한을 갖고 1일 공식 출범했다.
같은 날 미국과 영국은 다국적군의 임무 기한을 늦어도 2006년 1월 이라크의 새 헌법이 비준돼 ‘정치 과정이 완료되는 시점’ 까지로 명시한 새 이라크 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임시 정부는 그러나 이날 해산한 이라크통치위원회(IGC)의 흔적을 내각 곳곳에 그대로 담고 있어, 임시정부 구성을 위임받았던 라흐다르 브라히미 유엔 특사의 “전문 기술 관료로 구성하겠다” 는 애초 의지와는 거리가 먼 ‘정치 내각’ 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지 야와르와 부통령 중 1명인 이브라힘 알 자파리, 실제로 행정 권한을 행사할 총리인 이야드 알라위 총리 등 최고위직은 모두 IGC 위원 출신이다. 지난 1년간 이라크인들은 “미군정이 구성한 IGC가 친미(親美) 성향의 해외 망명 정객 출신으로만 구성돼, 미국의 입김에 크게 좌우된다” 고 불신했었다. 이 탓에 IGC 위원들은 “새 정부는 이라크인이 주도해 뽑아야 한다” 고 주장했고, 결국 자신들이 임시정부의 또 다른 한계는 ‘되찾은’ 주권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 임시정부는 새 헌법이 가결될 때까지 이라크를 지배할 임시행정법을 수정할 권한이 없다.
2003년 세계최대 수력댐 중국 ‘싼샤(三峽)댐’ 저수시작
환경 파괴와 유적지 수몰 등 수많은 우려 속에 2003년 6월 1일 세계 최대의 수력댐인 중국 싼샤(三峽)댐이 저수를 시작했다. 이날 0시부터 물을 채우기 시작, 수위는 전날보다 8m 상승한 해발 106m에 달했다. 싼샤댐은 일일 수면 상승폭 5m 이하를 유지하며 서서히 물을 채워나가 15일 최고 수위 135m에 이르자 저수 작업을 끝냈다. 저수가 끝난 다음날인 16일부터는 선박 통행이 시작되고 8월엔 발전기가 가동됨으로써 싼샤댐은 저수·통항(通航)·발전의 3대 기능을 모두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최종 완공은 최고 수위가 175m에 이르게 될 2009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15일 저수가 끝난 후 댐 상류에 길이 약 400km, 폭 최고 3km의 거대한 저수지가 형성되어 중국 경제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그 역할이 기대됐다.
그러나 주위의 수많은 유적들도 차례로 수몰되는 처지에 빠졌다. 1일 오전 이미 한(漢)대 건축물과 협곡 절벽의 잔교(棧橋)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또 유비가 숨진 백제성과 장비 사당인 장비묘, 절벽 누각 석보채, 굴원 기념관도 곧 수몰되거나 일부 피해를 입게 됐다.
쓰촨(四川)성 펑제(奉節)현에 있는 백제성은 유비가 오(吳)의 군대에 쫓겨 피신했다 임종을 맞은 곳이며, 윈양(雲陽)현의 석보채는 이백(이白)·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소동파(蘇東坡) 등 수많은 시인들이 머물며 명작을 남겼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저지대에 위치한 인근 신·구석기 유적지들은 지난달 본격적인 저수 준비를 위해 수위를 올리면서 이미 물속에 잠겼다. 일부 유적은 수중박물관으로 보호되거나 해체된 뒤 다른 장소로 옮겨졌지만 역사적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싼샤댐 때문에 수몰되거나 이전되는 문물은 모두 1087곳에 달했다.
2003년 일본 스모계 스타 다카노하나 은퇴
일본식 스모계의 간판 스타였던 다카노하나(貴花,본명-하나다고지)가 1일 스모계의 은퇴식에 해당하는 `단발식(斷髮式)`을 갖고 모래판에 작별을 고했다. 일본 현역 스모 선수들은 반드시 머리를 기른 후 상투를 틀듯이 말아 올리는 `촌마게`를 하도록 돼 있으며, 은퇴를 할 때는 이 `촌마게`를 자르는 단발식을 연다.
스모의 최고계급인 요코즈나(橫綱)의 단발식은 스모계 전체의 큰 행사다. 이날 단박식이 열린 도쿄 국기관에는 1만1000여명의 팬들이 몰려, 부친이자 스승인 후타고 야마(二子山)가 촌마게를 자르는 순간 "다카노하나 고맙다"는 함성을 보냈다.
다카노하나는 1988년 데뷔 직후부터 `스모계의 프린스`로 불리며 일본 온 국민의 인기를 모아온 스타 선수다. 다카노하나 현역 시절 22개 대회를 우승, 우승 횟수 역대 4위를 기록했으나, 2001년 5월 부상 이후 약 1년간 결장(缺場)하는 등 내리막길을 걸었었다. 다카노하나는 1990년대 초반 `산타페`라는 누드 사진집으로 선풍을 일으킨 모델 미야자와 리에와 약혼했지만, 씨름계의 반대로 파혼하는 등, 스캔들을 뿌리기도 했다. 그는 통산 성적 794승 262패 201휴장을 기록했다.
2002년 김남수 주교 사망
김남수 주교가 2002년 6월 1일 향년 80세로 선종했다. 김 주교는 동갑인 김수환 추기경, 두 살 아래인 윤공희 대주교 등과 함께 20세기 한국 천주교를 대표했던 인물이다.
김 주교는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 대표인 주교회의 의장을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 간이나 역임했으며, 1980년대 초에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장을 맡아 103위(位) 성인에 대한 시성(諡聖) 추진 등을 주관했다. 또 주교가 되기 전인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실무적인 일을 총괄하는 등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천주교의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그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면서 진보적 입장의 윤 대주교, 중도적 입장의 김 추기경과 함께 삼각 축을 형성했다.
만주 간도에서 태어난 김 주교는 이 지역을 관할하던 베네딕도 수도회가 설립한 함경남도 덕원신학고등학교와 덕원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서품을 받았다. 이어 서울 혜화동 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나 우르바노 대학에서 `불교의 근본교리`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1953년 귀국 후에는 경북 왜관 순심고와 부산 대양중 교장, 부산 양정동-서면 교회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다. 주교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던 1974년 주교로 서임돼 수원교구장에 임명됐다. 이후 1997년 수원교구장 자리를 최덕기 주교에게 물려주고 정년 퇴임할 때까지 23년간 재임했다.
2001년 네팔 디펜드라 왕세자, 국왕 일가족 등 9명 살해
2001년 6월 1일 네팔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가 부모인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리야 왕비를 비롯, 왕자·공주 등 국왕 일가 9명을 총으로 살해하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사귀어 오던 애인과의 결혼을 자신의 어머니가 반대하자 순간을 참지 못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범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네팔 국가평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 국왕의 섭정이었던 갸넨드라 공을 새 국왕에 추대한다고 선포했으나, 사고경위를 믿지 않는 국민들은 “정확한 사건 진상을 밝히라”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디펜드라 왕세자는 밤 9시쯤 나라얀히티궁 왕족 가족실에서 빠져나갔다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M-16 소총과 우지(Uzi) 기관단총을 들고 나타났다. 이때만 해도 참석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디펜드라는 먼저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을 총으로 쏴 죽이고, 응접실에 있던 왕족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디펜드라는 자동 총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총구가 위아래로 향하며 천장과 바닥 양탄자에도 총탄이 박혔다. 이어 정원으로 나간 디펜드라는 뒤따라온 어머니와 남동생을 죽였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총질을 한 뒤 머리를 쏴 자살했다는 것이다. 목격자의 친척은 디펜드라가 살려달라는 숙모와 여자 사촌에게도 총을 쐈고, 15분여 총을 난사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표정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고 전했다. 당시 모임에는 왕족 30여명이 참석해 있었는데, 왕세자의 총에 9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했다.
2001년 일본 법원, 원폭 피해 한국인에 첫 배상 판결
일본 오사카 지방법원은 1일 한국으로 이주해 의료보험이 말소된 한국인 원폭 피해자 곽기훈씨에게 오사카 지방정부는 200만엔(약 216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법원이 해외 거주 원폭 피해자의 피해 배상권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국내 거주 외국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만 치료비를 제공해왔다.
재판부는 지난 1988년 한국으로 이주한 곽씨의 의료보험을 말소해 치료비 혜택을 주지 않은 지방정부 조치는 잘못이라며 위로금 17만엔과 1999년 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치료비(매월 3만4000엔) 등 모두 200여만엔을 제공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곽씨가 요구한 정신적 피해 위자료 200만엔 지급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장인 미우라 준 판사는 판결문에서 “곽씨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지 않은 지방정부 조치는 인종과 종교, 성별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헌법 제14조에 위반된다” 고 밝혔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징용병으로 일본군에 복무하다 피해를 본 곽씨는 1988년 한국 이주 후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자 같은 해 10월 오사카지방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01년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작가 행크 케트첨 사망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Dennis and Menace)’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행크 케트첨(81)이 2001년 6월 1일 심장병과 암으로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의 자택에서 숨졌다.
1951년 3월 처음 등장한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주근깨 투성이 얼굴의 다섯 살 난 장난꾸러기로, 어른들도 깜짝 놀랄 기지를 발휘해 이웃의 성미 까다로운 윌슨 아저씨를 골려주는 역할로 50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개구쟁이였던 케트첨의 네살배기 아들 데니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만화가 히트를 치면서 지난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미 CBS 방송에서 TV 연속극으로 만들어졌으며, 1993년에는 영화도 나왔다. ‘개구장이 데니스’는 케트첨이 숨진 순간에도 전세계 48개국 1000여개의 신문에 19개 언어로 연재되고 있었다. 케트첨은 1920년 3월 14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개구쟁이 데니스`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개인적으로는 1959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 부인 앨리스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두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나는 등 불운한 삶을 살았다.
2000년 라틴재즈 `살사의 황제` 티토 푸엔테 사망
1998년 유물복원 1인자 ‘마이더스의 손’ 이상수씨 별세
1998년 6월 1일 52세의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 이상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은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처리 분야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평생 ‘보존기술자’ 라는 명칭에 자부심을 지녔던 장인(匠人)이었다. 그는 부식되기 쉬운 철기유물 보존처리 등에서 특히 1인자로 꼽혔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감은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치, 금령총 출토 말탄 사람의 토기,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향로 등 숱한 국보급 유물이 그의 손을 거쳐 원형의 색과 빛깔을 찾았다. 1973년 출토 직후 자작나무판의 균열로 퍼즐조각처럼 조각난 천마도 역시 그의 손을 거쳐 출토 직후의 원형을 찾았다. 문화재계에선 이런 그를 두고 ‘마이더스의 손’ 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그가 개발한 보존처리기술 중 찜통의 원리를 이용, 철기유물을 푹 쪄서 염분을 빼내는 방법은 보존과학이 우리보다 훨씬 앞선 일본에서조차 도입할 정도였다.
최종학력은 철도고등학교. 지난 1971년 중앙박물관 미술부 유물실측요원으로 박물관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 보았던 최순우 전 관장이 보존처리기술을 공부할 것을 권유, 1974년 대만 고궁 박물원 연수를 시작으로 보존과학기술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1998년 러시아,북한 어선 13척 나포
1997년 서울, 인천, 경기도 제외한 전국 아파트분양가 전면 자율화 실시
1997년 일본, 스톡옵션제 전면허용 실시
1997년 북한, 나진, 선봉 주민 자영업 허용.화폐체계 단일화 실시
1996년 보건복지부, 금연구역서 흡연시 2~3만원 범칙금 부과
1996년 건교부, 도쿄-베이징간 운항기 서울 통과 허용
1996년 러시아, 루블화 규제 완전 철폐
1991년 김용강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0년 한국 네트워크, 인터넷에 처음 연결됨으로 한국 인터넷시대 개막
1990년 6월 1일.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자계산소 빌딩에서 작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이벤트가 열렸다. KAIST 전길남 교수가 썬 스팍1이라는 워크스테이션을 켜자 국내 HANA망(KAIST 및 연구기관들끼리 연결 된 것)과 미국 하와이대학간에 설치된 56Kbps 인터넷 전용선을 따라 이메일과 데이터 파일이 흐르기 시작했다. 국내 네트워크가 인터넷에 직접 연결돼 국제사회에 처음 출생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국내 인터넷의 효시는 1982년 서울대 전자계산기학과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경북 구미)간 전용회선으로 연결한 SDN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인터넷 표준 규약인 TCP/IP를 이용하고 있었지만 미국과는 연결되지 않는 국내 온라인망이었다. 미국은 군사적인 이유로 전용회선 접속을 불허했고 국제전화를 이용하는 이메일은 비용이 너무 비싸 인터넷 선구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KAIST와 한국통신을 중심으로 약 1억5천만원을 각출, 해외 인터넷에 직접 접속하는 HANA망 구축 프로젝트를 계획해 오늘에 이르렀다.
1988년 미-소양국, 중단거리 핵미사일(INF) 폐기조약 비준서 교환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1988년 6월 1일 모스크바에서 만나 지난 1987년 12월 8일 조인한 유럽과 아시아지역에 배치된 중단거리 핵미사일(INF)폐기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1985년 11월 첫 회담이 열린 후 2년 7개월 만이었다. 첫 회담의 의제는 공격용 전략무기 50% 감축, 유럽배치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제거, 미국이 추진중이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한 협의였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SDI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답보상태에 빠졌던 군축회담의 전기는 1987년 2월 고르바초프가 유럽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제거를 다른 의제와 분리, 협상할 수 있다고 한걸음 물러난 데서 마련됐다. 이로인해 두 정상은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4%(소련 1천8백46기, 미국 8백46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이 협정은 미소양국이 핵무기개발경쟁 이래 처음으로 핵감축시대를 열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87년 라시드 카라미 레바논총리, 군헬리콥터 탑승중 폭탄폭발로 사망
1987년 중앙기상대, 비 눈 여부에대한 확률예보제 실시
1985년 화장품, 밀가루 등 65개 품목 수입 자유화
1983년 김정일 중국 방문(~12일)
북한 김정일이 호요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초청으로 1983년 6월 1일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방중 초기에는 북경에 머물며 등소평을 비롯한 중국 수뇌부와 회동했으며 이후 상해와 남경 등 지방도시를 둘러봤다.
그의 중국 방문목적은 중국의 현대화 계획 추진상황과 성과를 직접 시찰하고 중국 지도층과의 친분유지를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이번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대외관계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그해 9월 7일 건국 35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중국 공산당 대표단을 김정일이 평양역에서 맞이했다고 보도했다.
1982년 경기도 성남시 부근서 군수송기 추락. 장병 53명 사망
1981년 대구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국내 최대 점자도서관 개관
1981년 교보문고 개점
1980년 CNN 방송 개국
미국의 `유선TV황제`로 불리는 테드 터너가 세계최초로 24시간 뉴스만을 방송하는 CNN(Cable News Network)을 설립, 1980년 6월 1일 미국 애틀랜타 본사에서 첫 전파를 발사했다. CNN이 낸 첫 뉴스는 텍사스주 포트워크에서 발생한 흑인지도자 저격사건이었다. 이어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팀의 중심타자 레지 잭슨 구타사건을 생생한 화면으로 제공해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세계 뉴스를 현장에서 보도한다는 CNN의 전략은 돌발사고에서 강점을 드러냈다.
1981년의 레이건 대통령의 피격사건과 같은 해 바티칸에서 일어난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저격사건 보도는 CNN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CNN은 너무나 미국이익의 대변자이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3천만 달러의 예산과 2백만가구를 대상으로 첫 전파를 발사할 당시만 해도 CNN은 황당무개한 벤처사업으로 평가받았으나 지금은 언론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 걸프전은 CNN의 존재를 전세계에 확인시켜 주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군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장면이 생방송을 통해 안방에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이때 전세계에서 10억명 이상이 CNN 화면을 지켜봤다. CNN은 현장의 생생한 보도를 토대로 성장을 거듭해 2000년 당시 10억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했고 직원수만 4천명이 넘었다.
1979년 짐바브웨-로디지아 공화국 발족
1978년 제11회 월드컵 아르헨티나서 개막
1977년 한국은행 새 5,000원권 발행
1973년 호남매일 폐간
1973년 불국사의 법음종 첫 타종, 종 무게 7,500kg/높이 2.8m/종소리여운 3분10초 세계최장
1973년 가정의례준칙 발효
1973년 가격표시제 실시
1973년 그리스, 공화제 선언
1972년 군납(軍納) 부정사건
육군 보안사령부는 1972년 6월 1일 군납 부정사건과 관련, 국방부 조달본부 제1국장 김용찬 준장과 전 제1국장 하중원 준장 등 장성 2명과 구매1과장 김흥만 대령, 전 구매1과장 조병모 대령, 구매장교 박성환 중령 등 6명을 수뢰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또 군납부정과 관련, 23개 민간업체 직원 34명을 뇌물공여 혐의로 서울지검에 넘기고 죄질이 가벼운 하급장교 30여명은 경고조치했다.
김 준장 등은 1969년말부터 약3년 동안 군작업복, 천막, 내의, 드럼통, 농구화 등 26개 품목을 군납하는 과정에서 불량품을 눈감아 주거나 납품가격을 시가보다 높여주는 조건으로 1억6천여만원을 받았다. 한편 육군보통군법회의는 6월 29일 선고공판을 열고, 하 준장에게 사형, 김 준장에게 무기징역, 김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5년, 조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1972년 이라크, 석유국유화 발표
1971년 소흑산도 근해 무장간첩선 사건
1971년 충남 청양에서 백제요 10개 발굴
1970년 소련 2인승우주선 소유즈 9호 발사, 최장우주비행 기록 세우고 6월 18일 귀환.
1970년 페루 북부에 진도 7.7 강진 66,794명 사망
1969년 미국 노동운동가 루이스 사망
1968년 미국 교육자 헬렌 켈러 사망
1968년 여의도 윤중제 준공식
1968년 6월 1일 서울시가 수해를 방지하고 현대식 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7,533m의 윤중제를 축조하여 한강의 기적이 열매를 맺게됐다. 이날 오전 10시15분쯤 공사현장에서 베풀어진 윤중제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릇, 삼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1만여명이 참석했다.
여의도 윤중제공사는 서울시 한강개발의 일환으로 2월 20일 착공, 1백여일 만에 준공하게 됐다. 시당국은 이 공사를 위해 1월 4일 한강건설사업소를 신설, 전 하수과장이던 이종윤씨를 소장으로 기용하고, 50명의 직원을 한강건설사업소 건설요원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본격화한 한강개발공사는 한강의 한복판에 버려진 달걀모양의 여의도를 개발키로 하고 26억원의 예산을 책정, 우선 7억원의 돈으로 여의도 둘레에 제방을 쌓는 윤중제공사를 시작했다.
서울시는 윤중제준공을 1968년 말까지 계획했었으나 서울시장의 강한 의지와 한강건설사업소장의 밤낮없는 투지로 예정기일의 80%를 앞당겨 준공, 한국 기술진의 새기록을 수립했다. 이 공사에는 연인원 52만명이 동원되었다. 20∼30m 폭의 윤중제 위에는 길이 7.5km의 4차선도로가 마련되었고 둘레에는 15년생 수양버들이 7m 간격으로 1천그루가 심어졌다. 가로등은 30m간격으로 1개씩 506개가 가설돼있으며 윤중제 강변둘레에는 2m폭으로 36만7천2백35장의 잔디가 곱게 깔렸다.
1967년 신민당 국회위원후보 김재화,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
1966년 월남파병 전투사단 백마부대 창설
1965년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태풍으로 3만명 사망
1965년 청소년 선도위원 밤 10시 사랑의 종치기 시작
1965년 일본 복강현 광산폭발사고 236명 사망
1964년 제1전투비행단 창설
1962년 김상동, 조중서등 민주당계 41명 반정부음모혐의로 피검
1961년 ROTC 창설, 1기생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집
1960년대 초, 당시 매우 불안정한 국가 안보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당시 정부는 자주 국방력 확보 차원에서 시급히 군사력을 증가시켜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입장에 처하였고 이의 일환으로 대학에 재학중인 우수 학생들을 선발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시켜 군의 초급지휘자로 활용하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서 당시 군의 지휘체계상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초급지휘자들의 자질문제를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자원으로 단기간내 대거 충원하여 상비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키고, 현역복무후에는 이들을 예비군지휘자로 편입시킴으로써 예비전력을 실질적으로 전력화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이와같은 대규모적인 군 장교 충원에 소요되는 양성교육예산 부담을 현격히 경감시킬 수 있는 등의 다면적인 정책 목표를 가지고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ROTC 제도는 대학재학생중에서 우수자를 선발하여 2년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대학의 전공 학문 완성과 더불어 소정의 군사지식과 실무능력을 갖춘 문무겸전의 우수한 장교를 양성하여 활용할 수 있는 효율성이 매우 높은 제도로서 미국의 ROTC 제도를 모델로 하여 시행되었다
1961년 대학생 교복착용, 중고생 삭발령
1960년 동아대생, 부산일보 집단습격 인쇄시설 파괴
1960년 과정(過政), 부정축재 자수기간 설정(~20일)
1959년 한국-중국 과학협조 협정
1959년 제5차 아시아 민족 반공 대회, 서울서 개최
1958년 공산당 기관지 `홍기`창간
1958년 프랑스, 드골내각 성립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프랑스는 전쟁의 위기를 잘 극복해 재빨리 민주적인 새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전후를 주도하면서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해방한 후 알제리에서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를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로 개조하여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파리해방과 함께 파리에 돌아온 그는 전후 프랑스 최고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전후체제의 향방을 둘러싸고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당과 대립, 총리직에서 물러나 프랑스국민연합을 조직했다가 해산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알제리 재류군(在留軍)등의 반란 위기에 즈음해 다시 등장하여 1958년 6월 1일 내각을 결성,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1957년 KBS 제1방송 종일방송 실시
1957년 국립극장, 구 명동예술회관으로 이전
국립극장이 1957년 6월 1일 명동에 있는 구 명동예술회관으로 이전했다. 당시 예술인들은 700석 규모의 좌석을 메운 관객들과 함께 연극,무용,창 등 문화의 꽃을 이곳에서 피웠다. 이 건물은 이후 1973년 10월 국립극장이 중구 장충동으로 옮겨질 때까지 이 나라 예술의 산실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 1975년 10월 당시 대한투자금융에 21억원에 팔렸다.
이 건물에서는 오태석의 `환절기`와 차범석의 `산불` 등이 공전의 히트를 쳤고 번역극으로는 `안네프랑크의 일기`가 인기를 끌었다. 이 건물에는 당시 시대상이 녹아있다.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로 악명을 떨쳤던 유지광이 해방이후 이 극장의 문지기를 봤으며 장면 전부통령이 이곳에서 저격당하기도 했다.
1957년 한국-미국, 유엔군 주둔지 자문위 설치에 합의
1953년 대구일보 창간
1952년 미국 교육학자 존 듀이 사망
1950년 6년제 의무교육 실시
1948년 군정재제 폐지
1944년 개마고원 유격대장 김봉 대장 별세
6.25가 발발하기 전 백두산 자락 험산준령에서 청년유격대를 이끌고 북한 정권에 대항했던 한 전설적인 인물이 오갈 데 없는 무의탁노인 수용시설에서 1994년 6월 1일 쓸쓸히 눈을 감았다. 북한군에겐 증오의 대상이었던 백두산 호랑이 김봉. 그도 처음엔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까지 했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곧 이념의 허구에 회의를 느낀 그는 1948년 11월 지하조직 서북광복동지회를 만들어 반김일성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적색기관에 복무하는 양심분자에 고함` 이라는 삐라 등을 곳곳에 뿌리다 조직이 발각돼 산으로 들어갔다. 백산, 두문봉 등 해발 2천m 안팎의 높은 산과 봉우리가 즐비한 개마고원은 게릴라전에 최적이었다. 화전민 움막을 근거지로 삼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사냥용 엽총 등으로 무장, 유격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마을 곳곳에는 김봉을 생포하는 자에겐 현상금과 훈장을 준다는 김일성 명의의 공고문이 나붙을 정도였다. 1971년 잡지에 응모한 그의 투쟁수기에 감명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개마고원 자유의병` 이란 친필휘호를 선사했다.
그러나 김씨 자신의 말년은 비참했다. 군번없는 반공유격대원에게는 보훈혜택도 돌아오지 않았다. 1985년 잇달아 중풍으로 쓰러진 김씨 부부는 양로원, 단칸 월세방을 전전하다 1993년 2월 결국 가평 꽃동네에 찾아들어 이곳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1943년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사망
1939년 조선, 주민등록실시
1934년 독일.유고슬라비아 통상협정 조인
1928년 최초로 과학적인 용도의 유인정류장을 만든 소련의 우주비행사 도브로볼스키 출생
1927년 이기연, 단오절비행대회서 기체고장으로 추락사
1926년 미국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 출생
1925년 미국의 28대 부통령 마셜 사망
1923년 일본해군, 중국 장사에 상륙, 배일운동 탄압(장사사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개최
1922년 월간 `부인` 창간
1918년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 출생
1910년 영국 탐험가 스코트, 남극탐험을 위해 영국 출발
1909년 미국 뉴욕서 전미흑인위원회(NNC)가 결성
1908년 김기중 등에 의해 기호학교 설립
1907년 서울-평양 시외전화 개통
1906년 미국-일본 해저전선 준공
1901년 용산 전환국 은화 주조 개시
1878년 영국 계관(桂冠)시인 메이스필드 출생
1873년 캐나다 정치가 조셉 하우 사망
1871(조선 고종 8) 강화 해협에서 한미간 포격전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자살
1863년 근대올림픽 경기의 창시자 쿠베르탱 출생
1780년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출생
1613년 광해군, 원군(院君) 김제남에 사사(賜死)
1406년 조선, 일식 발생
1270년(고려 원종 11) 삼별초의 난 발생
1270년부터 1273년 까지 강화도 중신의 삼별초군이 몽고에 대향해 일으킨 의거이다
삼별초는 좌,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라 부른다
송도 방범대인 야별초로 시작, 소속인원이 늘어나자 좌,우별초로 편성하였으며
신의군은 몽고군과의 전쟁 중에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이들로 조직되었음
강화도로 옮긴 고려 조정에 대해 몽고가 항복을 종용하자 원종 임금과 문신들은 항복하고 1270. 5.27에 개경으로 갔다
이에 대해 무신은 반대하였으며, 삼별초는 반대세력에 가담하였따
무신과 삼별초는 6월 1일 몽고에 항쟁하기로 결의하고 지휘자인 배중손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고 1,000여척의 배로 진도로 옮겨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항몽투쟁 벌였다
고려와 몽고연합군이 진도를 점령하자 김통정이 잔여 세력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 항파두리 성 쌓고 항거하였다
1273년 4월28일 여몽연합군 1만여명이 제주도에 상륙하고 삼별초는 패배하자 김통정과 70여명만 남은 삼별초군은 한라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매 죽은 사건이다
1145년 고려, 일식 발생
818년 신라, 일식 발생
92년 백제, 일식 발생
34년 신라, 일식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