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의식이 집안의 문화를 바꾼다♤
내가 6남매(3남3여)의 장남이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아버님께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그때부터 졸지에 가장의 멍에를 둘러 멨다.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가정 형편에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짊어진 운명의 멍에는 내가 감내하며 세상을 헤쳐 나가기엔 많이 벅찼던 시절이었다.
그 암울했던 성장기에 그래도 한줄기 빛과 희망은 나의 위대한 어머니였다.
홀로 6남매를 키우며 가르쳐내야 했던 우리 어머니는 하루하루의 삶이 전투이고 지독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을 만큼의 그런 암흑의 길을 그 작디 작으신 몸으로 하루 하루를 어떻게 헤치며 살아오셨을까를 생각해보면 기적이 아니고는 뭐라 설명을 할 수가 없는 인간극장이었다.
반복되는 날품팔이와 눈꼽만큼이나 작았던 논,밭뙈기 경작을 병행해야 했던 우리 어머니는 해질녁까지는 남의 집 일을 하시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우리 전답으로 뛰어가
일을 하셔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학창시절 나의 주말은 늘 논과 밭에서 보내는 게 일상이 되었고 복합비료는 밑거름, 요소비료는 웃거름, 문고병과 도열병, 흰빛잎마름병, 벼멸구 등을 알아야 했었다.
그렇게 이른 나이에 철이 들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어르신들이 치뤄오셨던 명절 차례문화와 제사문화도 일찌감치 깨우쳤다.
우리집은 아버님이 막내시라서 종가집과 큰집이 한 마을에 따로 있다. 그렇기에 제사도 명절 차례도 아버님 한 분만을 모시면 되지만, 종가집과 큰집 집안의 참례를 다니면서 봐왔던 게 자연스럽게 몸이 받아들이면서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차례와 제사를 모셔왔다. 제사음식도 혹여 빠진 것이 있을세라 꼼꼼하게 체크해가며 준비를 했다.
세 살, 열 살 터울의 남동생 둘 참여는 기본이었고 제수씨 둘도 시집와 지금까지 한번도 거른적 없이 참여를 해왔다.
그렇게 고착화 돼 있던 의식을 바꾼 건 내가 슈퍼에서 식당으로 업종을 전환했던 2전 전부터였다.
제물을 대폭 줄인데다 만들어진 것들을 사와 노동력을 절감하고 참여하는 가족들에게는 부담을 줄여줬고 남는 시간들은 여유를 내주었다. 거기에 더해 주중에 있는 아버님 제사는 주말인 토요일로 당겨서 모시고 동생네 내외들에게는 돌아가며 휴식년을 주기로 했다.
모두가 만족해 하고 쌍수를 들어 적극 찬성을 한다.
2023년 계묘년 새해 설맞이!
진즉 형제자매들에게 통보를 해뒀다.
"올 설 4연휴 중 2박 3일은 팬션 잡아 거기에 모여 아버님 영정 모셔 놓고 주과포만을 놓고 차례를 지내겠노라고 그리고 남는 시간과 일정은 휴식이다"라고...
처음하는 짓이라 어색하기도 하고 아버님께는 대단히 죄송스러운 마음이였으나 어머님을 포함한 모인 3대가족 13인이 모두가 만족을 한다.
그래 맞다.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옛 것들 시대에 맞게 정리해 내려 놓으면 되고 산 사람들 위주가 되어야 되고 주변 대다수의 사람들 의사와 동행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변사면 격포리 궁항마을에 자리한 궁항리조트!
동생들 내외가 머리를 맞대고 고령의 어머니를 배려해 가장 합리적이 지역에 숙소를 예약해 뒀다.
오후 세 시 쯤이 되니 모이기로 한 구성원 3대 가족 열 셋 전원이 참석을 했다.
이때부터는 형제모임의 행정과 재정을 담당하는 영어 선상님인 둘 째 내외가 준비해 온 스케줄대로 움직여 간다.
간단히 다과를 즐긴 후 격포 수산시장으로 향했다.
그 많은 횟집 수조에 담겨 있는 광어 중 제일 큰 게 담겨 있는 집을 택했다.
저울에 올려보니 물 빼고 5.8kg, 큰 놈일수록 kg당 단가가 쎄다는 설명을 하시고 계시는 쥔양반 말 자르고 큰 놈 주시라 전하고 백합, 바지락, 동죽 등 어패류를 삼형제 손에 들 수 있는만큼 씩을 샀다.
삶은 어패류의 짭쪼름 달콤한 맛과 쫄깃한 광어회에 초장을 찍더니 최고령자 89세이신 우리 어머니부터 가장 나이어린 20세의 조카까지 종이컵에 술들이 넘실넘실 대고 알콜의 맛을 본 뇌의 촉각들이 목소리 톤을 높이게 만들어 놓으니 열 세명의 소음이 거짐 난장판이다.
그런데 그 난장판 속에서도 이 소리 각자 한마디씩은 내던지는데 "이야...좋다"이다. 그래 우리 내외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다.
먹고마시자판이 끝나자 다음 스케줄은 윷판이다.
세 가족(각 4인) 대항전인데 윷가락 하나의 길이가 근 1m는 될법하다. 4인이 동시에 윷가락 1개씩을 들고 시작과 함께 던진다(누구든 가족들 모이면 이 윷놀이 꼭 실현해 보시길용).
한 두어 시간을 얼마나 웃고 떠들면서 게임을 즐겼는지 다들 목이 쇠어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즐기는 데다 열정을 쏟았는지 알수가 있겠다.
다음은 아랫층 노래방 대형룸으로 이동했다.
열 세명이서 한 곡씩을 불렀는데도 후다닥 한 시간씩이 지난다.
이곳은 3세대 조카님들의 독무대인데 참 잘들 놀고 노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
숙소로 올라와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 날은 설날...
아버님 영정 앞에 모셔 놓고 주과포에 전, 나물을 차린 후 차례를 지냈다.
제주 한 잔 따라 올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차례를 지내겠노라고 마음 속으로 전해 드리면서 간곡히 이해를 구했다.
아침 먹고는 곧바로 세배다.
울어머니!
자식 셋에 며느리 셋, 손주들 여섯의 세뱃돈 챙기시느라 주머니와 손지갑 불나기 직전이다.
다음은 변산해수찜,
새로 난 길로 육짱 지나다니면서 위치만 확인했을 뿐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젖은 몸 헹구고 나오는 데까지 두어 시간이 걸리는데 이 곳 프로그램도 가족들에게 대 히트이다.
6~70도의 뜨거워진 바닷물에 수건을 적셔 몸의 체온을 올리고 몸 속 노폐물을 빼내는데 물이 식으면 족욕으로까지 이어지는 마무리의 과정이다. 캬하아... 다음에 또 방문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다음은 선유도 방문...
자주 방문해서 먹어봤던 꽃게탕집 점심...
쭈그러진 양은냄비에 끓여져 나오는 꽃게탕의 국물이 언제나 한결 같고 맛이 일품이다.
우리 가족들...
간만 좀 적당하다면 음식을 가리는 성격들이 아니기에 식당 얘기는 여기서 끝...
추운 날들로 짚라인은 2월까지 휴장이고 삼륜,사륜 오토바이 투어는 추워서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해수욕장 백사장이라도 좀 걷자했더니 울엄니 曰... "그르케도 헐 일이 없깐디 이 춘디 저그럴 걸어? 잔소리 말고 따순 집으로 얼렁 가자잉!"
어제 오후에는 해넘이를 볼 수 있게 날이 맑더니만 설날에는 하루 내내 흐려서 해돋이와 넘넘이를 볼 수가 없다. 내일 아침은 날이 좋아져 해돋이를 볼 수가 있었음 좋겠다.
일정에 피곤들했던지 저녁들을 먹고나서는 다들 자자는 분위기라 누워들 있다. 그런데 유독 울 어머니만이 돌아디니시며 설잠든 모두를 건들면서는 재우지를 않는다.
한 30여분을 시달리다 그 등쌀을 못이겨내고는 죄다 일어나 몸에 재 충전들을 한다.
다 일어나니 어머님 한 말씀 하신다.
"잠은 낼 자도 되는디 이 죤디까지 와가꼬 이 죤 날 엎어져 잠을 자아?"다.
ㅎㅎㅎ 맞습니다.
한 잔씩 목축임을 한 후 어제 윷놀이의 짜릿함이 아직도 생생한지라 각각 5만원씩을 걸고 게임에 들어 갔다.
왁자지껄, 박장대소!
어제 첫 날이였으니 그렇게 짜릿함이 있었겠지...는 나의 오판이였다.
윷가락이 떨어지는 순간 세 가족들 말들을 잡고, 몰고, 내달리며 집중들 하는데 울엄니가 이 광경을 더 보시고 싶어서 잠을 못들게 그러셨을까???
노곤한 몸 회복들 시키느라 푹 자고들 일어나 해맞이에 나섰다.
동해의 첫 해맞이와는 좀 다르겠지만, 동해나 서해나 해가 뜨는 걸 보는 게 해맞이다.
나는 늘 기원하는 내용이 한결 같이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
이고 太平聖代(태평성대)이다.
올 한 해에도 가정이 늘 화목한 가운데 우리 국민들도 태평하기를 기원했다.
일정 마지막 날...
아침먹고 치운 후 산소로 행했다.
아버님 산소 찾아 성묘 후 각자의 보금자리로 향하기 전 모두가 손을 얹고서 파이팅을 외치며 후일을 기약했다.
89세 울 어머니!
한 해 한 해 해가 바뀔 때마다 한겨울 산소의 뙷장처럼 마른풀이 되어 가심을 느낀다.
그렇지만 다행이다.
옛 날 그 지긋지긋한 고생함을 보상이라도 받으시려는 듯 지금까지는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편이시다.
만수무강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