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心紋-마음의 무늬, 모습) - 최명익(崔明翊) 바른♥국어
[줄거리] 김명일은 3년 전 상처(喪妻)한 화가이다. 그의 어린 딸은 학교 기숙사에 맡기고 그는 신혼 당시 신축해서 살던 집을 팔고 여행을 떠난다. 그는 그의 친구인 이 군(君)을 만나려고 하얼빈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곳은 여옥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러 온 것이었다.
여옥은 동경에 유학한 문학 소녀였고 청년 투사 현혁의 연인이었으나 명일이 출입하던 다방의 새 마담으로 오게 되어 그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밤과 낮의 모습이 사뭇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여 주관적인 모습과 객관적인 사실이 교차되어 나타나, 명일의 처의 모습과 닮았으나 또 다른 면이 있는 그러한 여인이었다. 여옥은 명일을 사랑하였으나 그가 부인을 못 잊어하는 것을 알고 그녀는 첫정을 주었던 현혁을 찾아 만주로 떠났었다.
명일은 이번 여행에서 여옥을 만날 의도는 없었으나 이 군의 안내로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 곳에서 한때 사회주의 운동가로 유명하였던 현혁과 여옥이 동거하고 있으며 둘 다 아편 중독자가 되어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혁은 화를 내며 명일에게 둘 사이에 개입하지 말고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결국은 아편을 얻기 위해 여옥을 명일에게 양도한다. 그러한 현혁의 행위에 배신감을 느낀 여옥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등장인물]
*나(김명일) : 삼년 전 아내가 죽은 뒤 방탕한 생활을 하던 화가. 여옥과 과거 오룡배에서 함께 지낸 적이 있으며, 하얼빈에서 말없이 자신을 떠났던 여옥을 다시 만남. 자신을 조선에 데려가 달라는 여옥의 부탁을 받고 이를 들어주려고 하였으나, 여옥의 자살로 결국 무위로 돌아감.
*혜숙 : 나의 아내. 삼 년 전에 죽음
*여옥 : 동경 유학시대에 흔히 있는 문학소녀로 어떤 청년 투사의 연인이라는 염문을 가지고 있던 여성. 다방의 마담으로 일하던 도중 나를 만나게 되어 오룡배라는 지역에서 한동안 같이 살기도 함. 조선에 돌아가 새 삶을 살고자 했지만, 결국 자살함
*현혁 : 한때 혁혁한 투사였으나, 지금은 아편 중독자. 여옥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다 나와 여옥이 함께 떠나는 조건으로 돈 삼백 원을 받음
[핵심 정리]
*갈래 : 순수 소설, 심리 소설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배경 : 1930년대 중반, 만주.(특급기차를 주요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끊임없이 떠오르는 인간의 의식의 속성을 빗대고 있음)
*표현 : 서술자의 내면 심리가 섬세하고 과잉되게 표출된 심리주의 소설. 허무주의적 색채가 강함. 의식의 흐름 기법(끊임없이 흐르는 인간의 의식세계를 표현하는 기법) 보임.
*주제 : 현실과 유리된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 식민지 지식인의 무기력한 모습(식민지 지식인을 허무와 타락에 빠지게 하는 부조리한 시대상 반영)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부정적 시대적 현실에 의하여 전락하고 있는 세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있다. 한때 젊은 투사로 사회주의 사상 운동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현혁은 감옥 생활 후 자포자기한 마약중독자로 전락하였고, 여옥도 유학생 문학소녀에서 다방 마담·모델·댄서로 점차 전락하였다. 주인공 나도 아내의 죽음 이후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점차 방랑하는 방탕아로 전락해왔다. 최명익 소설의 주인공들은 흔히 이 <심문>의 주인공 김명일처럼 현실에 절망하는 무기력함을 보인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현재에 비하여 행복하였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파라다이스를 잃고 이들은 모두 현재에서 실락원의 이방의 삶에 고뇌하고 있다. 역사적·사회적 현실의 악화가 이 같은 양상으로 이 소설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시대적 병리 속에서 고뇌하고, 좌절하는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문제]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시속 오십 몇 킬로라는 특급 차창 밖에는, 다리 쉼을 할 만한 정거장도 역시 흘러갈 뿐이었다. 산, 들, 강, 작은 동리, 전선주, 꽤 길게 평행한 신작로의 행인과 소와 말. 그렇게 빨리 흘러가는 푼수로는, 우리가 지나친 공간과 시간 저편 뒤에 가로막힌 어떤 장벽이 있다면, 그것들은 캔버스 위의 한 터치, 또 한 터치의 오일같이 거기 부딪혀서 농후한 한 폭 그림이 될 것이나 아닐까고 나는(서술자, 주인공) 그러한 망상의 그림을 눈앞에 그리며 흘러갔다. 간혹 맞은편 폼에, 부풀 듯이 사람을 가득 실은 열차가 서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시하고 걸핏걸핏 지나치고 마는 이 창 밖의 그것들은, 비질 자국 새로운 폼이나 정연히 빛나는 궤도나 다 흐트러진 폐허 같고, 방금 브레이크 되고 남은 관성과 새 정력으로 피스톤이 들먹거리는 차체도 폐물 같고, 그러한 차체에 빈틈없이 나붙은 얼굴까지도 어중이떠중이 뭉친 조난자같이 보이는 것이고, 그 역시 내가 지나친 공간 시간 저편 뒤에 가로막힌 캔버스 위에 한 터치로 붙어 버릴 것같이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은 무슨 대단하거나 신기로운 관찰은 물론 아니요, 멀리 또는 오래 고향을 떠나는 길도 아니라 슬픈 착각이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영전(榮轉-전보다 좋은 자리로 옮기는 일)이 되었거나, 무슨 사업열에 들떴거나 어떤 희망에 팽창하여 호기와 우월감으로 모든 것을 연민시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정말 그도 저도 될 턱이 없는 내 위인이요 처지의 생각이라 창연(愴然-서운하고 슬픔)하다기에는 너무 실없고 그렇다고 그리 유쾌하달 것도 없는 이런 망상을 무엇이라 명목을 지을 수 없어, 혹시 스피드가 간질여주는 스릴이라는 것인가고 생각하면 그럴 듯도 한 것이다.
결코 이 열차의 성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돌진 맹진하는 차안에 앉았거니 하면 일종의 모험이라는 착각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인 착각인 바에야 안심하고 그런 스릴을 향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거진 십 분의 안전율이 보장하는 모험이라 스릴을 향락하는 일종의 관능 유희다. 명수(名手-명인, 대가)의 바이올린 소리가 한껏 길고 높게 치달아 금시에 숨이 넘어갈 듯한 것을 들을 때, 그 멜로디의 도취와는 달리 이 순간! 다음 순간! 이렇게, 땅 하니 줄이 튀지나 않을까? 하는 소연감(疏然感-초조감)을 아실아실 느껴 보는 것도, 일종의 관능 유희로 그리 경멸할 수 없는 음악 감상술의 하나일 것이다. 그처럼 내가 탄 특급의 속력을 무모(無謀)로 느끼고, 뒤로 뒤로 달아나는 풍경이 더 물러갈 수 없는 장벽에 부딪혀 한 폭 그림이 되고, 폐허에 버려 둔 듯한 열차의 사람들도 한 터치의 오일이 되고 말리라고 망상하는 것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달려가는 이 여행의 스릴로서 내게는 다행일지언정 그리 경멸한 착각만은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나 역시 이렇게 빨리 달아나는 푼수로는 어느 때 어느 장벽에 부딪혀서 어떤 풍속화나 혹은 어떤 인정극 배경의 한 터치의 오일이 되고 말는지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덧 국경이 가까워, 이동 경찰이 차표와 명함을 요구한다. 金明一이라는 단 석자만 박힌 내 명함을 받아 든 경찰은 우선 이런 무의미한 명함을 내놓는 나를 경멸할밖에 없다는 눈치로 직업과 주소와 하얼빈은 왜 가느냐고 물의며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무직업을 염려하고 또 일정한 주소가 없다니 체면에 그럴 법이 있느냐는 듯이 뒤캐어 묻는 바람에, 나는 미술학교를 졸업했으니 화가랄 밖에 없고, 재작년에 상처(喪妻)하고 하나뿐인 딸이 지난봄에 여학교 기숙사로 입사하자 살림을 헤치고는 이리저리 여관 생활을 하는 중이라고, 그러나 지금 가는 하얼빈에는 옛 친군 이군이 착실한 실업가로 성공하였으므로 나도 그를 배워 일정한 직업과 주소를 갖게 될지 모른다고 무슨 큰 포부를 지닌 듯이 그 자리를 꿰맬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내 말이 전연 거짓이랄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일정한 직업과 주소도 없는 지금의 생활이 주체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삼 년 전에 처 혜숙(죽은 나의 부인)이 죽자 나는 어느 중학교의 도화(圖畫-미술) 선생이라는 직업을 그만둔 후에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몇 폭 그렸을 뿐인 화가라는 무직업자였다. 그리고 지난 봄에 딸 경옥이를 기숙사에 들여보내고는, 혜숙이와 신혼 당시에 신축하여 십여 년 살던 집을 팔아 버리었으므로 일정한 주소가 없었다.
내가 늘 집에 있는 것도 아니요, 있더라도 아침이면 경옥이가 학교에 간 후에야 일어나게 되고 밤이면 경옥이가 잠든 후에야 들어오게 되는 불규칙한 내 생활이라, 나와 한집에 있더라도 어미 없는 경옥이는 언제나 쓸쓸하고 늘 외로울밖에 없는 애였다. 그뿐 아니라 차차 자라서 감수성이 예민해 가는 그 애에게 나 같은 아비의 생활이 좋은 영향을 줄 리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 내 누님은 경옥이를 자기 집에 맡기라고도 하는 것이었으나, 마침 경옥이와 같이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여학교에 입학하여 입사하게 된 친한 동무가 있었으므로 경옥이는 즐겨 기숙사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늙은 어멈만이 지키게 되는 집을 그저 둘 필요는 없었다.
1. <보기>는 윗글에 나타난 서사 요소들을 정리한 것이다.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늘어놓은 것은?
<보기> ㉮ 달리는 열차 속에서 상념에 잠긴다. ㉯ 국경을 넘기 전 검문을 받다.
㉰ 미술 학교를 졸업하다. ㉱ 상처를 하다. ㉲ 딸을 기숙사에 보내다.
㉳ 중학교 도화 선생을 그만두다. ㉴ 하얼빈으로 가기로 하다. ㉵ 집을 팔다.
① ㉰-㉱-㉲-㉳-㉴-㉵-㉮-㉯ ② ㉰-㉳-㉱-㉲-㉴-㉵-㉮-㉯
③ ㉰-㉱-㉳-㉲-㉵-㉴-㉮-㉯ ④ ㉰-㉴-㉱-㉳-㉲-㉵-㉮-㉯
⑤ ㉰-㉴-㉱-㉲-㉵-㉳-㉮-㉯
2. 윗글에 나타난 ‘나’의 상황과 <보기>에 제시된 시적 화자의 상황을 비교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東동風풍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 돋 다라라 돋 다라라
東동胡호를 도라보며 東셔胡호로 가쟈스라 /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사臥와
압뫼히 디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춘사(春詞) 3>
간밤의 눈 갠 後(후)에 景경物물이 달랃고야. / 이어라 이어라
압희는 萬만頃경琉류璃리 뒤희는 千천疊텹玉옥山산 /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사臥와
仙션界계인가 佛블界계인가, 人인間간이 아니로다. <동사(冬詞) 4>
① ‘나’나 <보기>의 시적 화자 모두 이동하는 물체 안에서 다른 물체를 바라보고 있다.
② ‘나’는 객체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기>의 시적 화자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③ ‘나’는 객체들과 거리감을 두고 있지만, <보기>의 시적 화자는 객체와 자신을 융합시키고 있다.
④ ‘나’는 자신의 심리를 객체에 투영시키고 있고, <보기>의 시적 화자는 객체를 통해 심리 변화를 겪고 있다.
⑤ ‘나’는 실상(實像) 자체를 바라보고 있고, <보기>의 시적 화자는 실상에 가상(假像)을 덧붙여 바라보고 있다.
3. 윗글의 내용을 고려할 때, <보기>의 A, B에 공통적으로 들어갈 말은?
<보기> ‘심문’은 1930년대 한국 소설의 중요한 한 흐름을 형성했던 ‘단층(斷層)파’의 대표격이었던 최명익의 소설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최명익의 소설은 방심 상태에서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지속의 상태에서 떠올리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소설들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 달리는 차 안에서 느끼는 ( A )과 그로부터 나타난 절박한 행위에의 구속이 사라진 주체의 회상 작용을 작품의 주요 구조로 하고 있다. 이때의 회상 작용은 자극의 대상과 그러한 자극이 불러일으키는 과거적 기억 혹은 현재의 상태에 대한 반성으로 구성된 것으로 과거의 어느 한 공간과 현재의 공간들이 상호교호하면서 나타나는 뒤엉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차 여행이 이러한 ( B )의 주요한 계기가 된다. 그의 소설 중 ‘승차(乘車)의 형식화’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① 해방감 ② 친근감 ③ 속도감 ④ 소외감 ⑤ 이질감
4. ㉠ 부분을 <보기>의 대화 상황으로 꾸며 보았다. 윗글의 맥락으로 보아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경찰 : 차표와 명함을 보여 주시오. / 나 : 여기 있소.
㉮경찰 : 직업과 주소를 말해 주시오. / ㉯나 : 직업은 없고, 주소는 일정하지 않소.
㉰경찰 : 직업도 없고 주소가 없다……체면이 말이 아니겠구려. / 나 : …….
경찰 : 정말 직업도 없고 주소도 없다는 거요?
㉱나 : 굳이 말한다면 미술 학교를 졸업했으니 화가라고 할 수 있고, 재작년 상처한 후에 딸아이를 기숙사에 보내고 나서는 살림을 헤치고 여기저기 여관 생활을 하다 보니 주소는 없소이다.
경찰 : 그런데 하얼빈에는 왜 가시오?
㉲나 : 내 친구 이모 군이 거기서 실업가로 성공하였다기에 찾아가는 길이오. 나도 거기 가서 친구처럼 하다 보면 직업도 생기고 주소도 생기지 않겠소?
① ㉮ ② ㉯ ③ ㉰ ④ ㉱ ⑤ ㉲
<정답> 1③ 2⑤ 3③ 4③
[나머지 지문] 내가 상처한 후에 늘 재취를 권하던 누님은, 정식 결혼을 할 의사가 없으며, 첩살림이라도 차서 그 집을 팔지 말라고 하였지만, 십여 년 혜숙이의 손때로 길든 옛집에 새 처나 첩이 어색할 것 같고, 그 집에서는 내가 무심히 여보하고 부르는 것이 자연 혜숙일밖에 없을 것이나 네하고 나타나는 것이 딴 여자라면 나의 그 우울은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어린 경옥이 역시 한 성 안에 제가 나서 자란 옛 집이 있으면서 기숙생활을 하거니 생각하면 더 외로워질 것이요, 혹시 외출하는 날 별려서 찾아온 옛 집에 제가 닮지 않은 새 어미의 얼굴을 보게 될 때마다, 제 어머니의 생각이 더한층 새로울 것이다.
이런 심정으로 내가 재취를 않는다면 나는 경옥이와 같이 옛 집을 지키면서 좀 더 그 애 곁을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이었다. 생각만은 그러리라고 애를 써가면서도, 그런 생각으로 학교를 사직까지 하고도, 오히려 그 모든 시간을 여행이라기보다―방랑, 그리고 방탕―술과 계집과 늦잠으로 경옥이를 더욱 외롭게 해온 것이다.
이러한 생활에서도 나는―팔리지 않는―그림을 간혹 그리었고, 그린 혜숙의 초상으로 경옥이의 방을 치장하는 것으로 그 애를 위로하는 보람을 삼아 온 것이다. 그러한 내 생활이다. 이번에도 역시 방랑이나 다름없이 떠난 여행이지만, 근 십 년 전에 만주로 표랑하여 지금은 실업가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이군을 만나서 혹시 생활의 새 자극과 충동을 얻게 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무사히 세관을 치르고 국경을 넘은 나는 식당으로 갔다. 대만원인 식당에 겨우 자리를 얻은 나는 첫눈에도 근엄하달 수밖에 없는 어떤 중년 여자와 마주 앉게 되었다. 가수 미우라의 체격에 수녀 비슷한 양장을 한 그 중년 여자는 국방색 안경알위로, 연방 기울이는 나의 맥주잔을 이따금 넘겨다보는 것이었다.
그런 중년 여자가 뒤적이는 작은 신약전서로 나는 방인시되는 나를 느낄밖에 없었고, 그런 불쾌한 우연을 저주하며 마시는 동안에 창밖의 풍경은 오륭배(五龍背)로 가까워 갔다. 익어 가는 가을의 논과 밭으로 문재 돋친 들 한가운데는 역시 들이면서도 사람의 의도로 표정이 변해 가다, 차차 더 매스러운 손길로 들의 성격이 정원으로 비약하는 초점 위에 온천 호텔 양관이 솟아 있고, 그 주위에는 넘쳐흐르는 온천물로, 청등한 가을 하늘 아래 아지랑이같이 김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들이 닿는 폼에는 유랑에 곤비한 발걸음이나 분망에 긴장한 얼굴이나 찌든 생활의 보따리는 볼 수 없이, 오직 꽃다발 같은 하오리(일본 옷의 겉에 입는 짧은 겉옷)의 부녀와 빛나는 얼굴의 신사 몇 쌍이 오르고 내릴 뿐이었다. 구십 퍼센트의 분망과 유랑과 전쟁과 혹은 위독 사망 등 생활의 음영으로 배를 불리고 무모하게 달아나던 이 시커먼 열차도 이러한 유한에 소홀하지 않은 풍류적인 성격의 일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 열차의 성격을 이용하여 나도 이 오륭배에 소홀하지 않은 인연의 기억을 남긴 것이다.
지난봄에 나는 여옥이를 데리고, 그때도 이 열차로 여기 와서 오래간만에 모델을 두고 (여옥이를) 그려 본 것이었다. 여옥이는 동경 유학시대에 흔히 있는 문학소녀로 그 당시의 어떤 청년 투사의 연인이었다는 염문을 지닌 여자였다.
그때 나는 간혹 출입하던 어느 다방의 새 마담으로 여옥이를 알았고 방종한 내 생활면을 오고 간 그런 종류의 한 여자라는 흥미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여옥이는 건강한 육체미의 모델이라기보다도 어떤 성격미랄까, 그러나 그때처럼 나는 그 모델의 성격을 마스터하지 못하여 애쓴 적은 없었다.
전연 처음 대하는 모델인 때에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성격의 힘에 이끌려서 저절로 운필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모델의 어떤 특징을 고조하여 자유롭게 성격을 창조할 충동과 용기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작자의 해석과 의도로 뚜렷이 산 인물이 그려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때의 여옥이는 그렇지가 못하였다. 아마 뚜렷하게 통일된 인상을 주기에는 나와의 관계가 너무도 산문적이었던 탓일 것이다. 이 산문적이라는 말은 그때 우리 사이의 권태를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권태를 느꼈다기보다 내 흥미가 사라지기 전에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권태라기에는 오히려 그때 여옥이를 보는 내 눈이 때로는 너무도 주관적으로 도취되었고 때로는 객관적으로 여옥이의 정열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림이 되기에는 여옥이의 인상이 너무 산란하였다는 말이다.
침실의 여옥이는 전신 불덩어리의 정열과 그러면서도 난숙한 기교를 갖춘 창부였고, 낮에는 교양인인 듯 영롱한 그 눈이 차게 빛나고 현숙한 주부인 양 단정한 입술을 늘 침묵하였다. 그리고 무엇을 주고받을 때 무심히 닫힌 그의 손가락은 새삼스럽게 그 얼굴을 처다 보게 되도록 싸늘한 것이었다. 그렇게 산뜩한 손은 이지적이랄까, 두 사람만이 거닐던 호젓한 봄 동산에서도 애무를 주저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영롱한 눈과 침묵한 입술, 그 사이에 오연히 높은 코까지 어울려, 어젯밤은 언제더라 하는 듯한 그 표정은 나를 당황케 하였고 마침내는 그 뺨을 갈겨보고 싶도록 냉랭한 여옥이었다.
혹시 나는 여옥이를 정말 사랑하게 될까 봐!
나는 내 손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인 여옥이의 그 싸늘한 손끝의 감촉을 만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으나 자기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여옥이는 금시에 하품이라도 할 듯한 무료한 표정이었다.
나는 간혹 여옥이의 얼굴에서 죽은 내 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반갑고도 슬픈 것이었다. 여옥이의 중정(中正)과 인당(印堂)은 이 십여 년 평생에 한 번도 찌푸려 본 적이 없는 듯한 것이다. 혜숙이 역시 죽은 그 얼굴까지도 가는 주름살 작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너그러운 중정과 인당이었다. 나는 그 생전에,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너그러우면서도 이지적으로 맑은 아내의 인당에 마음 붙이고 응석인 양 방종을 부려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남편을 둔 혜숙이는 한 번도 그 얼굴의 윤곽이 이그러져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러한 아내의 온후한 심정을 그의 귀 탓이거니 생각하기도 하였다.
영롱한 구슬같이 맑고 도타운 그 수주(垂珠)는 마음의 어떠한 물결이든 이모저모를 눌러서 침정하는 모양으로 그의 예절이 더욱 영롱할 뿐 아니라, 방종에 거친 나의 마음도 온후한 보살상의 귀를 우러러보는 때처럼 가라앉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도, 혜숙이의 귀보다 좀 작고 작기는 하나 같은 모양으로 영롱한 여옥이의 귀를 바라볼 때 침실의 여옥이의 열정을 의아히 생각하리만큼 이 낮의 여옥이는 귀엽도록 단아하였다. 여옥이의 그 귀 뿐 아니라 전체로 가냘픈 몸 매무새와 작은 얼굴 도래에, 소복단장을 하여 상덕스러우리만큼 소탈한 한 가지의 백합으로 그릴까? 진한 녹의홍상으로 한 묶음의 장미 꽃다발로 그릴까? 이렇게 그 초상화의 성격을 궁리하면서,
안 그래? 내가 여옥이를 정말 사랑하게 될 것 같잖아? / 고 다시 물었을 때,
글쎄요, 그럼, 낮에요? 밤에요?
여옥이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렇게 묻는 여옥이를, 나만이 밤의 여옥이와 낮의 여옥이가 딴사람이라고 보아 왔지만 여옥이 역시 나를 밤과 낮으로 구별하여 보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본시부터 모호하던 두 사람의 심정의 초점이 더욱 모호해진다기보다도 밤과 낮으로 다른 두 여옥이와 두 나로 분열하고 무너져 가는 마음의 풍경을 멀거니 바라볼 밖에는 별도리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한 모델을 대하는 제작자인 나라, 이중의 관찰과 이중의 인상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몽타주가 현황히 떠오르는 캔버스 위에 애써 초점을 맞추어 한 붓 한 붓 붙여 가노라면, 나타나는 것은 눈앞의 여옥이라기보다, 내 머릿속의 혜숙이에 가까워지므로 나는 화필을 떨어뜨리거나 던질밖에 없었다.
처음 그런 때 여옥이는, / 어디가 편찮으세요?
물었고, 그 다음에는 내가 흰 칠로 화면 얼굴을 뭉갤 때마다 모델로서 자기가 마음에 안 드는가 물었다. 한번은 내가 채 지워 버리지 못한 그림을 보자,
그것은 누구야요……? 아마 선생님의 옛 꿈인 게죠?
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모델대에 서는 여옥이의 눈은 한순간도 초점을 맞추지 않았고 그 입 가장자리에는 인광(燐光)같이 새파란 미소가 흘렀다. 그러한 여옥이는 비록 그 얼굴을 내 붓 끝 앞에 정면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늘 내 눈앞에서 외면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더욱 갈팡질팡하게 되어 마침내는 화를 내서 찢어지라고 화폭을 뭉갤 밖에 없었다.
그런 때면 여옥이는 치맛자락이 제 다리를 휘감으리만큼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미안한 생각에 따라 들어가면 여옥이는 침대에 엎드려 작은 팔목시계의 뒤딱지를 떼들고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시계의 고장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여옥이는 혼자 심심하거나 나와 말다툼이라도 하여 화가 나는 때면 언제나 시계 속을 들여다보거나 귀에 붙이고 소리를 듣거나 하는 버릇이 있었다. 여옥이의 그러한 버릇에 나는 한껏 요망스러운 잔인성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어린애 장난같이 귀엽기도 하여 들여다보고, 그 산뜩한 손끝으로 귀에 대주는 시계 소리를 번갈아 들어 가며 한나절을 보내는 때도 있었다. 그런 때 혹시 여옥이는 마음이 싸라서 하는 말로, 언젠가는 사내 가슴에 귀를 붙이고 밤새도록 심장의 고동을 듣고 나서, 머리가 욱신거려 사흘이나 앓은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 말에 시계 속을 들여다보는 여옥이의 취미가, 혹 여러 개 보석으로 찬란한 시계 속에서 사물거리는 산 기계를 작은 생명같이 사랑하는 연인다운 심정이거나, 시간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걸어가는 치차(톱니바퀴)에 신비를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심장을 들을 사내의 가슴속이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요망스러운 잔인성이거니도 생각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다면 여옥이의 그런 상징적 행동이 궁금하여, 지금 그 시계 속에서 여옥이는 누구의 마음속을 엿보고, 시계 소리에서 누구의 심장을 듣는 것인가고도 생각되었다.
그때 여옥이를 따라 들어온 나는 넓은 더블 베드 요 속에 잠기고 남은 여옥이의 잔등이와 허리와 다리의 매끄러운 선을 그리고 그 손에 든 것을 시계 대신에, 소프트 쓴 인형을 크게 그려 만화를 만들까 망설이면서, / 여옥인 시계 속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
하고 중얼거리듯이 물어 보았던 것이다. 그 말에 여옥이는,
선생님은 나를 모델로 세워 놓고 누굴 그리세요? / 하는 것이었다.
……. / 부인을 그리시지요? 아마.
여옥인 옛날 애인을 생각하나? 그럼. / 그렇다면 뉘 탓일까요?
내 탓일까? / 그럼 내 탓인가요?
……. / 흥! 미안하게 된걸요. 그렇게 못 잊으시는 부인의 꿈을 도와 드리진 못하구 훼방을 놓아서…….
이렇게 말하자 여옥이는 시계를 방바닥에 팽개치고 엎드려서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때 나는 말로 여옥이를 위로하려고는 않았으나 끝없이 미안하였다. 이지적으로 명철하다기보다 요기롭도록 예민한 여옥이의 신경을 내 향락의 한 자극제로만 여겨온 것이 미안하고 죄송스럽기도 하였다. 낮과 밤이 다른 여옥이는 여옥이가 그런 것이 아니라, 맹목적이어야 할 사랑과 순정을 못 가지는 나의 태도에 여옥이도 할 수 없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관계이므로 낮에 냉랭한 여옥이의 태도는 밤의 정열의 육체적 반동이 아니라 여옥이의 열정을 순정으로 받아 주지 않는 나에게 대한 반항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히스테릭한 여옥이의 열정을 순정으로 존중하여야 할 것이요, 낮에 보는 여옥이의 인당과 귀에 혜숙이의 그것을 이중 노출로 보는 환상을 버리고 여옥이 그대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여옥이도 나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하므로 결혼을 전제로 하는 사이는 물론 아니지만, 그러니만큼 나는 더욱 인격적으로 여옥이의 열정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눈으로 여옥이를 그리려고 부족한 화구를 사러 그 이튿날 안동으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돌아온즉 여옥이는 낮에 북행차로 혼자 떠나고 말았던 것이었다. 여옥에게 맡겼던 지갑과 같이 호텔 지배인이 내주는 편지에는, 이렇게 돌연히 떠나고 싶은 생각이 스스로 놀랍기도 하였사오나 돌이켜 생각하오면 본시 그런 신세로 그렇게 지내 온 몸이라 갈 길을 가는 듯도 하올시다. 저로서도 무엇을 구하여 가는지 전혀 지향 없는 길이오니 애써 찾아 주지 마시옵소서. 얼마의 여비를 가져갑니다. 그리고 주신 반지도 가지고 갑니다. 여옥 배(拜) 하였을 뿐이었다. 그때 여옥이는 이 차를 탔을 것이다. 찾지 말아 달라는 여옥이의 편지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럴 염치조차 없는 듯하였고, 오히려 무거운 짐이나 부린 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헤어진 여옥이라 그 후에 무슨 소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한 월여 후에, 하얼빈 이군의 편지 끝에, 어느 카바레의 댄서인 경옥이라는 미인이 군과 소홀하지 않은 사이던 모양이니 멀리서나마 군의 만년 염복을 위하여 축배를 드네, 한 의외의 문구로 여옥이의 거취를 짐작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내 여행이 결코 여옥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아니다. 연래로 이군이 편지마다 오라는 것이요 나 역시 가고 싶던 하얼빈이라 가는 것이지만, 일부러 여옥이를 만날 욕심도 흥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애써 피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담담히 생각하기는 하면서도, 그러나 담담히 생각하려는 노력같이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여옥이에 대한 내 생각이 담담하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나를 반겨 맞아 줄 이군만이 기다리는 하얼빈이 아니라, 애욕때문이랄까! 복잡한 심리적 암투를 하다가 달아난 여옥이가 있는 곳이라 생각하면, 이국적 호기심을 만족할 수 있고, 옛 친구를 만나는 기쁨만이 기다리는 하얼빈이 아니요, 혹시 어떤 음울한 숙명까지도 나를 노리고 있을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숙명이란 이렇다 할 원인이 없는 결과만을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것이다. 원인이 있다하더라도, 지금 마주 앉은 중년 여사의 신약전서에 있을 죄는 죽음을 낳고라는 죄와 같이 추상적인 것으로, 그런 추상적 원인 죽음이라는 사실적 결과를 맺게 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는 그런 숙명 앞에 그저 전율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무서운 숙명이 나를 기다리는지도 모를 하얼빈이라고 생각하면 그곳으로 이렇게 달아나는 이 열차는 그런 숙명과 같이 음모한 괴물일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좀 취한 머릿속에 또 한 가지 이런 스릴을 느끼었다. 그러면서 큰 고래 입 속으로 양양히 헤엄쳐 들어가는 물고기들을 상상하며 그런 물고기의 어느 한 부분인지도 모르는 피시 프라이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며 마주 볼 때, 나보다 한 접시 앞선 중년 여자는 소위 어느 한 부분인지도 모를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 입술에 맺힌 핏물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하얼빈. / 내 이번 여행은, 앞서도 한 말이지만 역시 전과 다름없는 방랑이라 어떤 기대를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같이 우울한 여행일 줄은 몰랐다. 가는 차 중에서 일종의 모험이니 무서운 숙명과의 음모니 하여 즐겨 꾸민 망상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었고, 어김없이 들어맞는 예감이었던 것이다.
물론 하얼빈서 이군을 만났고, 그의 십 년 풍상과 지금의 성공을 사업과 장차의 경륜을 듣고 보아 의지의 표본인 이군을 탄복하고 축하하는 바이지만, 나의 이 여행기는, 그런 건전하고 명랑한 기록은 아니다.
내가 치우쳐 침울한 이야기만을 즐겨 한다거나 이야기로서의 소설적 흥미와 효과만을 탐내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이군의 성공담은 이야기의 주인공격인 나라는 나와는 별개의 것이 되고 말았으리만큼 이 하얼빈서 나는 나와 너무나 관련이 깊은 사건에 붙들리고 말았으므로 우선 그 이야기를 할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여옥이의 이야기다.
이군의 안내로 하얼빈 구경을 나섰다.
천생 소비자인 자네라, 하얼빈의 소비면부터 안내하세.
하는 이군을 따라 이름난 카바레, 레스토랑, 댄스 홀, 그리고 우리가 하얼빈으로 연상하는 소위 에로 그로를 구경하는 동안에 밤이 되고 두 사람은 좀 취하였던 것이다.
……누구라던가? 그 미인 말일세. 자나 만나 봐야지 않나!
여옥이 말인가? 글쎄……. / 글쎄라니…….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로,
타향(他鄕)에 봉고인(逢古人)이라고 이런 데서 만나면 다아 반갑다네. 자, 가세.
하고 이군은 나를 끌었다. 그러나 금시에, / 내가 어니서 만났더라?
여옥이가 어디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모양으로 중얼거리던 이군은 언젠가 그때도 역시 구경 온 손님을 데리고 갔던 어느 카바레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선 댄서라, 이야기를 붙인 것이 여옥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향에서 온 여자라기에 자연 이야기가 벌어져 마침내 나와의 관계도 짐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군은 나와 여옥이가 어떻게 헤어지게 된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여옥이가 지내는 형편이 어떤가고 묻는 내 말에 그때 만나 본 것뿐이라 알 수 없지만 그런 삼류 사류 카바레의 댄서라 물론 수입은 많을 리 없고, 혹 파트롱이 있다면 몰라도 겨우 먹고 지내는 정도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만나면 반가울 사이니, 내일은 하루 여옥이를 앞세우고 그 방면의 생활 내막을 엿보아 두라고 하였다.
아마 여긴 듯하다고 하면서 뒷골목 보도 밑에서 음악이 들리는 지하실 카바레를 헛들어갔다. 서너 집 만에야 여옥이를 발견하였다.
높은 천장 찬란한 샹들리에, 거울 같은 마룻바닥, 휘황한 파노라마, 그 속에서 음악의 물결을 헤엄치는 무희들, 이렇게 내 눈이 어느덧 높아진 탓인지, 여옥이가 있는 카바레는 너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사오 명밖에 안 되는 밴드의 소란한 재즈와 구두 바닥에 즈벅거리는 술 냄새로 머리가 아팠다. 이 구석 저 구석에 서너 패 손님이 있을 뿐, 텅 빈 듯한 홀 저편 모퉁이에는 십여 명 댄서들이 뭉켜 있었다. 그 중에는 호복을 입은 것도 있고, 기모노를 걸친 백인 계집에도 있었다. 전갈하는 만주인 보이를 따라 우리 테이블에 가까이 온 여옥이는 나를 바라보자 눈을 크게 뜨고 한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반가운 손님 모셔 왔죠? 자, 앉으시우.
이러한 이군의 말에, 그를 알아보고 비로소 자기 앞에 나타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모양으로 여옥이는 다시 침착한 태도를 회복하여 우리 앞에 와 앉으며,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 하고 숙인 머리를 한참이나 들지 않았다.
이군은 또 술을 청하였다. 이군은, 나와 여옥이의 관계를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만주 십 년에 체득한 대륙적 신경으로 그러한 여옥이의 태도나 나의 어색한 표정 같은 것은 개의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쾌하게 웃고 마시면서, 내일은 내가 영시로부터 한시까지 여옥이를 찾아갈 것과 여옥이는 여옥이로서 내게 보이고 싶은 곳을 안내할 것과, 자기는 세시나 네시까지 전화를 기다릴 터이니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자고 이군은 작정하고 말았다. 그 작정에 여옥이는 특별히 안내할 곳은 없지만 내가 간다면 그 시간에 기다리겠다고 하며 내 여관에서 자기 아파트까지의 지도를 그리고 주소를 적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정한 시간에 여옥이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독자 중에는 이 그래서나 역시……라는 말에 불쾌를 느끼고, 그만 것을 동기나 이유로 행동하는 나를 경멸하는 이가 있을는지 모를 것이다. 사실은 나는 그러한 독자를 상대로 이 여행기를 쓰는 것이다. ) 그때 내게는 굳이 여옥이를 찾지 않고 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는 어젯밤에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나를 기다린다고 한 여옥이가 인사성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혹시 조용한 기회를 지어 지난봄의 자기 소행을 사과하려는 것이나 아닐까고도 생각되었던 것이다. 물론 사과하고 말고가 없을 일이나, 그도 아니라면, 피차에 긴한 이야기도 없을 처지에 여옥이의 자존심을 일부러 구차한 자기 생활면을 보이려고 나를 집으로 오라고 할 리도 없을 것이다. 사실 어젯밤에 본 여옥이는 반년이 되나마나 한 동안에 생활에 퍽 시달린 사람같이 초췌하고 차가운 하늘빛 양장도 따뜻한 맛이 없고 고운 때가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빨갛게 손톱을 물들인 손가락에 그런 직업 여자에게는 큰 장식일 것이건만, 내가 주었던 반지가 없는 것만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의 생활이 구차하게 상상될밖에 없는 것이다.
들어선 여옥이의 살림은 사실 거친 것이었다. 방 한가운데는 사기 재떨이만을 올려놓은 둥근 탁자와 서너 개 나무의자가 벌리어 있고, 거리 편으로 잇대어 난 단 두 폭의 벼락닫이 창 밑에는 유난히 닳아 모서리에는 소가 비죽이 나온 장의자가 길게 누운 듯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사실 길게 누운 듯이라 할밖에 없이 그 작은 방에는 어울리지 않게 큰 것이었고, 진한 자줏빛 유단이나 육중한 나무다리의 미츠러운 결태와 은은한 조각이 장중하고 호화스럽던 가구였다. 그리고 화문이 다 낡은 맞은편 담과 방 윗목을 병풍 치듯 건너 막은 판장 담 모퉁이에는 역시 낡은 삼면 경대가 비슷이 서 있었다. 체두리 나무의 칠이 벗고 조각의 획이 긁히고 거울면 한복판에는 고 두터운 유리가 국살진 듯이 수은이 들뜨고 밀린 것이나, 본체재만은 역시 호화롭고 장중한 것이었다. 그런 경대나 장의자가 여옥이의 손때로 그렇게 낡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당초에 여옥이 같이 가냘픈 몸집, 가볍게 떠도는 생활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부터가 아닐 것이었다.
방 윗목을 가로막고, 그런 장중한 가구가 차지하고 남은 좁은 방이라, 더욱 길길이 높아 보이는 침침한 천장을 쳐다보는 나는, 하얼빈의 여옥이는 이다지도 황폐한 생활자던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가구를 주워들은 것이 여옥이의 취미였다면 그 역시 하잘것없는 위인이라고도 생각하였다.
여옥이는 내가 기억하는 그 몸매의 선을 그대로 내비치듯이 달라붙는 초록빛 호복을 입고 붉은 장의자에 파묻히듯이 앉아서 열어 놓은 창틀 위에 팔굽이를 세운 손끝에 담배를 피워 들었다. 짧은 호복 소매 밖의 그 손목은 가늘고 시들어서 한 가닥 황촉을 세운 듯하고 그 손끝의 물들인 손톱은 홍옥같이 빛나는 것이다. 그런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바라볼 뿐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여옥이도 무슨 생각에 잠기는 모양이었다. 본시 그런 여옥인 줄 아는 나라 실례랄 것도 없이 나는 나대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거리 맞은 집 유리창은 좀 기운 햇볕에 눈부시었다. 고기비늘 무늬로 깔아 놓은 화강석 보도에 메마른 구둣발 소리가 소란하고 불리는 먼지조차 금싸라기같이 반짝이는 째인 햇볕 속을 붉고 파란 원색 옷의 양녀들이 오고 간다. 높은 건축의 골짜구니라 그런지, 걸싼 양녀들은 헤엄치는 열대어나 금붕어같이 매츠럽고 민첩하다. 그러한 인어의 거리에 무더기무더기 모여 앉은 쿨리(부두의 노동자)떼는 바다 밑에 깔린 바윗돌같이 봄이 가건 겨울이 오건 무심하고, 바뀌는 계절도, 역사의 파도까지도 그들을 어쩌는 수 없는 존재같이 생각되었다. 그러한 창 밖에 눈이 팔려 있을 때 들창 위에 달아 놓은 조롱에서 새가 울었다. 쳐다보는 조롱의 설핀 댓살을 격하여 맑은 하늘의 한 폭이 멀리 바라보였다. 종달새도 발돋움을 하듯이 맨 윗가름대에 올라서서 쫑쫑쫑. 쪼르르릉 쫑쫑. 을 연달아 울어 가며 목을 세우고 관을 세우고 가름대 위를 초조히 오고 간다. 금시에 날아 보고 싶어서, 날갯죽지가 미미적거리는 모양이나, 그저 혀를 차고 말 듯, 쫑 쫑. 외마디 소리를 해가며 가름대 층계를 오르내릴 뿐이다. 나는 그러한 종달새 소리에 알 수 없이 초조해지는 듯한 이야기 실마리조차 골라 낼 수 없이 무료한 동안이 길었다. 여옥이는 간간이 손수건을 내어 콧물을 씻어 가며 초록빛 호복자락으로 손톱을 닦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직업 탓이려니도 생각하지만, 그러나 천한 취미로 물들여진 여옥이의 손톱이 닦을수록 더 영롱해지는 것을 보던 눈에 종달새의 며느리발톱이 띄자 깜짝 놀랄밖에 없었다. 그것은 병신스럽게 한 치가 긴 것이었다. 나는 길게 드리운 호복 소매 속에 언제나 감추어 두는 왕(王)이나 진(陳)이라는 대인(大人)들의 손톱을 연상하였으므로, / 이건 만주 종달샌가? / 물었다.
글쎄요, 예서 산 거라니까, 아마 만주 칠걸요. / …….
뒷발톱이 어지간히 길죠? / 병신스럽구 징그러운걸.
병신이라면 병신이지만, 그래도 배안엣병신은 아니래요. 제 손톱두 그렇구요.
여옥이는 빨간 손톱을 가지런히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종달새의 발톱은 왕대인이나 진대인 같이 치레로 기른 것은 아니지만 누가 깎아 주지도 않고 조롱 속에서 닳지도 않아서 자랄 대로 자랄밖에 없는 것이고 또 길면 길수록 오래 사람의 손을 태운 표적이 되어 값이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 저 발톱만치 길이 들었다면 들었고, 사람의 손에서 병신이 된 게라면 병신이구…… 환경이나 처지의 힘이랄까요!
여옥이는 이러한 자기 말에 소름이 끼치는 듯이 오싹 몸짓을 하고는 또 콧물을 씻어 가며 조롱을 쳐다본다.
나는 그 종달새 역시 여옥이의 손에서 뒷발톱이 그렇게 길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되어, 혹시 이 방에는 또 다른 누가 있지나 않은가고 새삼스럽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여옥이는 재채기를 연거푸 하며 눈물과 콧물을 씻는 것이었다. / 감기가 든 모양인데, 추운가?
아뇨. / 하는 여옥이는 새삼스럽게 나의 얼굴을 쳐다보고, 수줍은 듯이 인작 내리까는 그 눈에는, 그리고 그 입술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알 수 없는 미소는 오륭배에서 꿈을 그려요? 하던 때의 웃음 같기도 하였으나 지금의 여옥이가 새삼스럽게 예전의 그 웃음으로 나를 빈정거릴 리는 없을 것이다. 다시 보아도 그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혹시! 지금 여옥이는 밤과 낮을 혼동하는 것이나 아닌가? 그것은 여옥이의 밤의 웃음 비슷한 것이므로 나는 이렇게까지도 생각하였다. 이렇게 쌀쌀하다리만큼 청등한 낮에는 볼 수 없던 웃음이므로 혹시 여옥이는 제 말대로, 이 하얼빈, 그리고 지금 그의 처지의 힘으로 홱 변하여 이런 때도 무절제한 충동을 느끼게 되고, 또 충동하려 드는 요망한 웃음이나 아닐까? 이렇게 혹시! 설마 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
여옥이는 역시 같은 웃음을 띤, 그리고 좀 더 가늘게 뜬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몸을 차차 기울여 마침내 장의자 팔걸이에 어깨를 기대고 반쯤 누워 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나는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그 퇴폐적 작태를 경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되어 짐짓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때, 눈동자가 내비칠 듯이 엷은 여옥이의 눈꺼풀이 떨리며 한 방울 눈물이 쏙 비어져 눈썹 끝에 맺히자 하하 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그 엷은 어깨를 흔들며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오싹 등골에 소름이 끼쳐서 머리를 싸쥐고 눈을 감았을 때, 머리 위의 조롱이 푸득거리며 찍찍 하는 쥐소리 같은 것이 크게 들리었다. 놀라 쳐다본즉, 종달새가 가름대에서 떨어져 조롱 바닥에서 몸부림을 하는 것이었다. 새는 다시 날려고 애써 몸을 솟구다가는 또 떨어지고 그때마다 그 긴 발톱과 모지라진 날개로 헤적이면서 쥐소리 같은 암담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새는 몇 번인가 조롱이 흔들리도록 몸을 솟구다 못하여 그만 제 똥 위에 다리를 뻗고 눈을 감아 버린다. 아직도 들먹거리는 새의 가슴을. 나는 그 암담한 광경을 그저 멍히 보고만 있을 때, / 그 조롱 이리 내려 주세요, 네, 어서 좀.
하며 여옥이는 내 팔을 잡아 흔드는 것이다.
한 손에 그 조롱을 든 여옥이는 한 손으로 쓸어 더듬듯이 담을 의지하고 방 윗목에 쳐놓은 판장 병풍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침실인 듯한 그 안에서는 판장 위로 담배연기가 무럭무럭 떠오르기 시작하고, 무슨 동물성 기름을 타치는 듯한 냄새가 풍기었다. 그러자 푸드득거리는 날개 소리가 나고 쫑쫑 하는 맑은 소리가 들리었다.
다시 살아난 조롱을 들고 나와 제자리에 걸어 놓고 앉은 여옥이는, / 지금 제가 웃지요?
하고 어색한 듯이 빨개진 얼굴의 웃음을 더욱 뚜렷이 지어 보이며,
……웃잖아요? 이렇게 뻔뻔스럽게. / 하고는 웃음소리까지 내었다.
……. / 사실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 말을 몰랐다.
웃잖으면 어떡해요? / 하고 여옥이는 조롱을 툭 쳐서 빙그르 돌리며,
너나 내나 그새를 못 참아서 이 망신이냐? / 하였다.
거리에 나선 나는 여옥이가 안내하는 대로 카바레나 레스토랑에서 센 워커와 진한 커피를 조금씩 맛볼 뿐이었다. 나 역시 너무 강한 자극물이 싫고 으리으리할 뿐 아니라 마주 앉은 여옥이는 그런 것에 입술을 적실 뿐으로도 기침을 하므로 더욱 마실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여옥이는 몇 번 코를 풀고 나서 핸드백에 든 흰 약(모르핀)을 내어 담배에 찍어 피우며, 그때마다. 웃긴 왜 싱겁게. 하고 싶도록 외면을 하고 싱글거리는 것이다.
지나가던 길에 들러 본 박물관에서는 나 역시 여옥이에 덩달아 재채기만을 하고 나왔다. 우중충한 집 속에 연대순으로 진열된 도자기나 불상이나 맘모스의 해골이 나가 지니고 있는 오랜 시간이 휘잉한 찬바람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차근차근히 보고 싶은 이 역사를 이렇게 설질러 놓으면 또다시 와볼 용기가 있을까고도 염려되었다. 이 박물관뿐 아니라 여옥이를 앞세우고 다닌다면 나의 하얼빈 구경은 모두가 이 모양일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대체 나는 여옥이와 아직 어떤 인연이 남았을까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 이번엔 송화강엘 가세요.
하고 앞서는 여옥이를 또 따라갈밖에 없었다.
아직도 노서아 사람과 유태인이 많이 살 뿐 아니라 하얼빈으로 연상하는 에로 그로의 이국적 향락과 소비기관이 집중되었다는 기다이스캬야를 거쳐 송화강 부두로 나갔다. 여옥이의 퍼머넌트 한편에 붙인 모자의 새 것이 내 뺨을 스치도록 나란히 걸으면서도,
대동강의 한 삼 배? 한 오 배? 혹시 한 십 배 될지 몰라도. / 글쎄, 장히 넓군요.
이런 삭막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내 키보다도, 마음 눈을 더 높이 쳐들고 내려다보며 이 계집애의 운명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고, 여옥이를 동정하기보다 오히려 여옥이를 멀찍이 떠밀어 세워 놓고 왼 공론을 하는 듯한 내 마음씨였다. 무료한 침묵이 주체스러워 그저 걷기만 한다.
부두의 쿨리들은 욱 몰려와서는 오리떼같이 뜬 경묘한 배를 가리키고, 강 건너 수영장을 손질하며 선유를 강권한다. 그들의 생활에 흔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우리 깐에 이렇게 웃을 젠 얼마나 좋겠느냐는 듯이 손짓을 해가며 알 수 없는 말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옥이는 배 타보세요? 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내젓고 그래도 따라오면 부요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기까지 하였다.
곤하시죠? / 머, 괜찮소.
이렇게 대답은 하고도 여옥이가 자주 손수건을 꺼내는 것을 생각하자,
참, 이군이 기다리겠군요. / 하고 마차를 불렀다.
아파트 현관에 닿았을 때는 네 시가 퍽 지났다. 여옥이가 전차를 탈 동안 자기 방에서 기다리라고 하며 같이 층계를 올라갔다. 컴컴한 복도를 서너 칸 걸어 방문 앞에 선 여옥이가 핸드백에서 열쇠를 뒤질 때, 그 문은 우리 앞에 저절로 풀썩 열리었다. 불의의 일이라 나는 놀랄밖에 없었다. 한걸음 앞섰던 여옥이도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어서 이리 들어오시죠.
무겁게 울리는 듯한 녹슨 음성이 들리었다. 짧은 가을해가 높은 건축 저편으로 완전히 기울어 굴속같이 음침한 방 한가운데, 길고 해쓱한 유령 같은 얼굴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자아 들어가세요. / 여옥이의 또렷한 음성에 한순간 잊었던 나를 발견하고 나는 비로소 걸음을 옮겨 방 안에 들어 섰다.
인사하시죠. 이이는……. / 이렇게 소개하려던 여옥이의 말을 앞질러서 그 남자는,
머어 소개 않아두 김명일씬 줄 짐작하지…… 자아, 앉으시우.
하고 자기가 먼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옥이는 기가 질린 듯이 더 말이 없고 그 남자는 자기소개를 하려는 기색도 없이 담배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인사를, 미처 생각 못 했거나, 또는 짐짓 않더라도 나 역시 그 남자가 혹시 여옥이의 옛 애인이던 현모(玄某)가 아닐까고 짐작되었다.
이런 때 담배란 참 요긴한 것이었다. 자기소개도 않고 인사말도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는 그 남자의 거만하다기보다 모욕적 태도에(그렇다고 단박 싸움을 걸 계제도 아니라) 나도 담배를 붙여서 그의 얼굴 편으로 길게 뿜는 것으로 이 무언극의 상대역을 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세운 손끝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를 별로 빨지도 않고 무슨 생각으로 차차 골똘히 잠겨 들어가는 얼굴이었다. 생면 손님을 눈앞에 앉혀 놓고 혼자 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은 더욱 나를 무시하는 배짱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느끼는 모욕감은 더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나를 모욕하는 수단으로 그런다기보다도, 이 남자가 내 짐작에 틀리지 않은 현모라면 이 삼각관계(?)의 한 점이 되는 그로서 자연 어떤 생각에 잠기는 것도 무리한 일이 아니라고도 생각되었다. 사실 그렇다면 모욕감으로 혼자 흥분하고 있는 나보다 그는 퍽 침착한 사람이라고도 생각되었다.
그 남자는 꽤 벗어진 이마로 더욱 길고 여위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이 석고상같이 굳어져 있다가 다 탄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나 좁은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검푸른 무명 호복이 파리한 어깨에서 발뒤꿈치까지 일직선으로 흘러서 더 수척하고 길어만 보이는 그 체격은, 더욱더 짙어 가는 방 안의 어둠을 휘감은 듯하였다. 그보다도 어둠이 길게 엉기고 뭉치어서 내 눈앞에 흐느적거리는 것같이도 생각되는 것이다.
불은 왜 안 켜나? 나는 어둠이 주는 그런 착각이 싫고 그 남자의 길고 빠른 백골같은 손끝이 비수로 변하지나 않을까도 생각하며, 그저 연달아 담배를 피울밖에 도리가 없었다.
혹시 여옥군한테 들어 짐작하실는지 모르지만 나는 현일영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내 앞에 발을 멈추고 이렇게 말을 시작한 그는 다시 걸으며,
아주 보잘것없는 낙오자지요. 낙오자라기보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아편 중독자지요…… 그러나 한때 나는 젊은 투사로 지도 이론 분자로 혁혁한 적이 있었더랍니다.
여기까지 하던 말을 그친 현은 문 옆의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켰다. 켰더라도, 천장 한가운데 드리운 줄에 갓도 없이 매달린 작은 전구의 불빛은 여간 희미하지 않았다. 현의 장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호복 안섶 자락에서 뒤져 흰 약을 궐련에 찍어서 빨기 시작하였다. 그 누르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판장 병풍 뒤에서도 떠오르는 것이었다. 여옥이가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삼면 경대 위에 들여다 놓았던 조롱에서는 은방울을 굴리는 듯이 종달새가 반겨 울었다.
아마 방면은 달랐어도 현혁이라면 짐작하실 걸요. 한때 좌익 이론의 헤게모니를 잡았던 유명한 현혁이 말입니다. 현혁이 하면 그때 지식계급으로는 모르는 이가 없을 만치 유명한 현혁이었으니까요. 언제나 현혁이 신변에는 현혁이를 숭배하는 청년들이 현혁이를 따라다녔지요.
이러한 현의 말에 하도 자주 나오는 현혁이를 나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간혹 본 기억이 있다. 나는 한 번도 유명해 본 경험이 없어 그런지는 모르나, 그렇게 씹고 씹듯이 불러 보고 싶도록 매력이 있는 현혁일까고 이상스럽게 들리었다. 혹 현이 취한 탓일까? 모르핀도 취하면 술과 같이 흥분하는가 하여 침침한 전등 빛에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현의 얼굴은 더욱 해쓱하게 쪼들어지고 눈은 더 가늘어진 듯하였다.
여옥이도 그렇게 유명한 현혁이를 숭배하던 학생 중의 하나였답니다. 그때 패기만만한 현혁이는 연애에도 패자였지요. 연애도 정치입니다. 정치는 투쟁, 극복입니다. 여자란 남자의 투쟁력과 극복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숭배하고 열복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니 부부니 하는 형식은 문제가 아니지요. 여옥이는 오륙 년이나 현혁이가 감옥으로 방랑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떨어져 있었지만 종시 현혁이를 잊지 못하고 이렇게 따라온 것입니다. 따라와서는 여급으로 댄서로 나를 벌어 먹이지요. 지금의 현일영이는 계집이 벌어 주는 돈으로 이렇게 아편까지 먹습니다. 왜 아편을 먹는가 하겠지만 지금은 이것이 밥보다도 소중하고, 없으면 반나절도 살 수 없으니까, 계집이 벌어 준 돈이니 어떠니 하는 체면이나 의리 문제는 벌써 지나친 일입니다. 그럼 왜 당초에 아편을 시작했는가고 대들겠지요…….
그때 판장 병풍 뒤에서 흐득흐득 느끼는 여옥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었다. 말을 멈춘 현은 약을 피우던 담배 꽁다리를 던져 버리고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다시 거닐며 말을 계속한다.
……김 선생도 으레 그렇게 물으실 겝니다. 지금은 다 나를 버렸지만 옛날 친구나 동지들이 그랬고 다시 만난 여옥이도 그렇게 묻고 대들고, 울고 야단을 치고 이제라도 끊으라고 애걸을 했지요. 간혹 제 정신이 든 때마다 나 역시 내게 묻고 대들고 울고 야단을 치는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아편을 먹는 이유랄 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병, 빈곤, 고독, 절망, 자포자기, 이런 이유랄까, 핑계랄까. 아마 그 중에 제일 큰 이유나 동기랄 것은 자포자기겠지요. 신병, 빈곤, 고독, 절망, 이런 순서로 꼽아 내려가다가 흔히들 자포자기 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신병이나 빈곤은 그리 쉽게 마음으로 안 되는 것이지만, 자포자기를 하고 않는 것은 각자 그 사람에게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못지않은 역경에서도 칠전팔기란 말 그대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친구도 많았습니다. 이 말은 결코 야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만은 자포자기를 하였습니다. 비록 신병이 있고 빈곤하더라도, 시작을 않았으면 그만일 아편을 자포자기로 시작했지요. 그래서 지금은 아주 건질 수 없는 말기 중독자가 되고 말았죠.
말하자면 아무런 시대나 환경이라도, 사람을 타락시킬 힘은 없다고 봅니다. 그 반대로 타락하는 사람은 어떤 시대나 환경에서든지 저 스스로 타락하고야 말, 성경적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환경을 저주하거나 주제넘게 시대를 원망할 이유도 용기도 없습니다. 오직 내 약한, 자포자기하게 된 내 성격을 저주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에는 그런 반성을 하는 것도 지난스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런 반성이 지금 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말을 내가 하고 보면 도리어 우스운 말이 되고 마는군요.
내가 지금 초면인 김 선생 앞에서 이같이 장황히 지껄인 것은 혹시 옛날의 내 교양의 찌꺼기나마 자랑하고 싶은 허영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도 이런 과거의 교양이랄까 지식을 씹으려 즐기는 수단이겠지요.
현은 더 말할 수도, 거닐 수도 없이 피곤한 모양으로 장의자에 몸을 던지듯이 주저앉아서 두 손으로 이마를 받들어 짚고, 아직도 그치지 않은 여옥이의 느껴 우는 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다가 또 흰 약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실 나는 지금 이렇게 모르핀 연기와 추억의 꿈을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반성에는 지쳤고, 자책에는 양심이랄 게, 이성이 마비되고 말았지만, 옛날 현혁의 명성을 더 히로익하게 꾸미고, 그리 풍부하달 수도 없는 로맨스를 연문학적으로 과장해서 씹어 가며, 호수 같은 시간 위에 떠도는 것입니다. 그러는 내게도, 여옥이가 김 선생을 버리고 내 품속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옥이로서는 제 첫사랑의 추억으로 그랬겠지만, 나는 옛날의 혁혁하고 유명하던 현혁이, 즉 나의 패기와 극복력에 이끌린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지금 여옥이에게 물어 보아도 알 것입니다. 그래서 내 과거의 기억은 더 찬란해지고 내 꿈의 양식은 더 풍부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처지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 곁에 여옥이만 있어 주면 나는 죽는 날까지 행복일 것입니다. 여옥이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내 옆을 떠나지 않겠지요. 꼭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여옥이를 놓쳐 버렸던 김 선생이 돌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지금 와서 선생님이 아무리 금력으로 유혹한댔자, 사내다운 매력이 없는 김 선생을 따라갈 여옥이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결코 내가…….
현은 벌떡 일어나서 내 앞에 다가선다.
이미 내가 만만히 놓아주질 않는단 말이요, 네? 이 내가 말이오. 알아듣겠소?
이렇게, 흥분으로 떨리는 높은 음성으로 말하는 현은 두 팔로 탁자를 짚고 들이댄 얼굴에 살기등등한 눈으로 나를 노리며,
네? 알아듣느냐 말요. 이 내가 만만히 놓아 주질 않는단 말요.
이렇게 버럭 고함을 지르며 현은 주먹으로 제 가슴과 탁자를 두들기었다.
좀 전의 예감이 종내 이렇게 실현되고야 마는 것을 눈앞에 보고 있는 나는 그저 난처할 뿐이었다. 이렇게 발작된 현의 병적 흥분과 오해를 풀려면 장황한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나,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으므로 나는 할 수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모로 서며,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노리는 현의 눈을 마주 노려볼밖에 없었다. 짧은 동안이었다.
금시에 현은 파리한 어깨가 들먹거리고 숨이 가빠지는 것이었다. 그때, 어느 결에 튀어나온 여옥이가 두 사람 사이에 막아서며 허전 허전한 현의 허리를 붙안아 의자에 주저앉히고 그 무릎에 쓰러져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모자를 집으려다가 현의 코언저리에 번쩍번쩍 흐르는 눈물을 보게 되자 나는 웬 까닭인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섰을 밖에 없었다. 그러한 그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차마 버려두고 나올 수 없었음인지, 혹은 더덮인 영마같이 뭉켜 앉은 그들의 눈물에 냉담한 호기심을 느낀 탓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그때 나는 그들 앞에 의자를 당겨 놓고 다시 앉았던 것이다.
입때껏 나는 현의 장황한 독백을 들을 뿐, 그의 착잡한 심리적 독백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오해를 풀려고도 않고 훌쩍 일어서 가버리면 너무 심한 모욕이 아닐까 하여, 간명하게 변명할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도 하였다. 내가 여옥이를 유혹하러 왔다는 현의 오해를 풀려면, 다른 말보다도, 지금 나는 결코 여옥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랑 여부가 없이 아무런 호기심까지도 느끼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의 흥분이 단순한 오해가 아니요, 영락한 자신과 나와의 대조로 인한 자굴적 질투이기도 할 것이므로, 변명하려면 이렇게까지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내 말이 현의 흥분과 오해를 풀기에는 효과적이겠지만, 그러나 본인 여옥이 앞에서는 그런 말은 삼가야 할 것이다. 여옥이의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위해서만도 그러려니와, 그러한 솔직한 내 말이, 어떻게 되면 현의 자존심까지도 상할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런 주저로 미처 할 말이 없이 그저 담배만 피우며, 이따금 쫑쫑거리는 새소리를 듣고 있을 때 눈물 젖은 여옥이의 음성으로,
지금 이런 나를 가지구, 누가 유혹을 하느니 질투를 하느니, 모두 우스운 일이 아니야요? 김 선생님은 어서 돌아가세요.
하고 여옥이는 마침 자리를 일어 옷자락을 터는 것이다.
나는 더 주저할 것도 없이 되었으므로 모자를 집어 들고 나왔다.
내가 현의 오해를 풀자면 더듬고, 에둘러 중언부언 늘어놓아야 할 말을 단 한마디로 포개 놓고 마는 여옥이의 그 총명이 다시금 놀라웠다. 그러나 여옥이의 그런 말에 내 마음이 경쾌하다기보다, 그 총명과 직감력으로 여옥이는 더욱더 불행한 여자가 되는 것이라고 오히려 우울할밖에 없었다.
그날 밤에 만난 이군은, 일이 끝나서 네 시까지 내 전화를 기다리다 못해, 아파트 사무실에 전화로 여옥이를 찾았더니 웬 남자의 음성으로 여옥이가 들어오면 전할 터이니 무슨 말이냐고 묻기에, 무심히 내 이름을 일러 주고, 지금 여옥씨와 같이 나갔을 모양이니 돌아오면 이라는 사람이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라고 한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이라면, 현이 첫눈에 나를 알아본 것이 조금도 신비로울 것은 없었다. 시초가 그렇다면 갑자기 우리 앞에 열린 문이나, 홀연히 나타난 그러한 인물의 괴이한 독백이나 흥분이나, 그리고 활극 일순 전에 수탄(愁嘆)으로 끝난 그 일막극은 모두가 몰락한 정치 청년이 꾸며 놓은 가소로운 멜로 드라마였던 것이 아닐까? 사실 그렇다면 그때 일종의 괴기와 압박감을 느끼고 마침내는 슬픈 인생의 매력에 감동(?)했던 나는, 그들이 피운 마약에 오히려 내가 취하였던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본시 나의 버릇인 급성 신경쇠약으로 또 판단력을 잃고 만 나는 마주 앉은 이군이 미처 권할 사이도 없이 연장 잔을 기울이면서 그때의 여옥이의 눈물과 총명한 말까지도? 이렇게 속에 걸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은 모두가 다 현이 자작자연한 엉터리 희극이었다고만 치우쳐 설명하는 것으로 그때 흔들린 내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제 권모술수에 빠져서 솔직한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소위 정치가 타입의 인물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현을 조소하는 것이었으나, 그러한 내 조소에 천박한 여운을 들을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나는 그런 여운을 안 들으려고 더욱 크게 웃을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이 둥그래진 이군이, 봉변은 하구두, 옛 애인을 만나 대단히 유쾌한 모양일세.
하도록 나는 유쾌한 듯이 웃었던 모양이다.
그 이튿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 보이가, 벌써부터 로비에서 기다린 손님이라고 안내한 것은 여옥이었다.
정오의 양기가 가득 찬 방 안에 들어선 여옥이는 분홍 저고리에 초록 치마가 오륭배 적 차림이요, 풍기는 향료까지도 새로운 추억이었다. 오직 그 눈만이 정기를 잃었을 뿐이다.
어제는 나 때문에 두 분을 괴롭혀서 미안하외다.
하는 내 말은 어색하도록 경어로 나왔다. / 천만에요.
역시 어색하도록 공손히 시작된 여옥이의 말은 이러하였다.
그러한 제 생활을 애써 숨기려고 한 것만도 아니지만, 잠시 다녀가는 나에게 알릴 필요도 없던 일이, 그만 공교롭게 그 모양으로 알려져서 도리어 미안하다고 하였다.
이미 탄로된 일이라 더 숨길 필요도 없으므로 저간 지내 온 이야기를 다 하고, 또 부탁도 있으니 들어달라고 하는 여옥이는,
중독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몰염치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잠시 손을 내밀어 준다면 여옥이는 내 손을 붙잡아 의지하고 지금의 생활에서 자기를 건져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가 중독자의 몰염치로 이런 말씀을 하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옥이는 또 이런 말을 앞세우고, 아직 자기의 몰염치를 자각할 수 있고, 애써 자기를 건져야겠다는 의지가 남아 있는 이때를 놓치면 영 자기는 폐인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괸다.
그러한 여옥이의 말을 듣고 눈물을 보니 나는, 언제나 나의 의식을 분열시키고야 말던, 그 역시 분열된 의식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여옥이의 표정이 갱생에 대한 열정과 동경을 초점으로 통일된 것을 발견하고, 지금의 여옥이면 역력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제 장의자에서도 여옥이의 눈물을 보았지만 그것은 역시 병적 권태에 물들고 니힐한 웃음에 떨리는 눈물이었다.
지금 한 초점으로 통일된 의식과 순화한 정서로 맺힌 맑은 눈물을 바라보는 나는 여옥이가 잠시 내밀어 달라는 손을 어떻게, 얼마나 잠시 내밀어야 하는 것이며 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를 전혀 알 수 없지만 당장 그런 조건을 묻는 것은 너무 타산적으로, 혹시 여옥이의 자존심을 건드려 존중해야 할 그 결심을 비누 풍선같이 깨치게 될지도 모르므로 나는 우선,
참 좋은 결심입니다. 그래야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해야지요.
할밖에 없었다. 그러한 내 말에 눈물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여옥이는 자기 무릎에 얼굴을 묻고 느끼어 우는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떨리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다,
자아 이젠, 어떻게 할 방도를 의논해야지 않소? / 하였다.
……네, 감사합니다. / 눈물을 씻고 난 여옥이는 창 밖에 내다보며,
무엇보다 저는 이곳을 떠나야 해요. 할 수만 있다면 저를 데리시구 조선으로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 그러한 여옥이의 말에, / ……?
나는 그저 잠잠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전같이, 결코, 그런 염치없는 생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병인을. 사실 병인이니까요. 한 정신병자를 감시하시는 셈치시구 저를 조선까지 데려다만 주세요. 저 혼자서는 무섭기는 하면서도, 그 마약의 매력과, 또…… 그런 것을 저버리고 이겨 나갈 자신이 없을 듯해요.
마약의 매력과 또…… 이렇게 여옥이가 주저하다 흐려 버리고 만 그런 것이란 무엇일까? 현? 현에 대한 애착일까? 나는 이런 의문에 어젯저녁에 현의 무릎에 쓰러져 울던 여옥이의 모양을 다시 눈앞에 그릴밖에 없었다. 그때. 아무리 내가 더덮인 영마 무더기라고 경멸의 눈으로 보면서도, 낙척, 패부, 그리고 절망과 눈물에 젖은 슬픈 인생에도 황홀한 매력과 감격한 인정을 은연중 느끼는 듯하고 그들 중에 나만이 그런 감격과 인정의 문 밖에 호젓이 서 있는 듯한 고독감을 느끼기도 하였던 것이다. 나의 그런 느낌이 혹시 여옥이에 대한 미련의 질투나 아닐까고 생각되자 천만에 하고 떨어 버렸던 생각이다.
어제 보신 바와 같이, 현은 한 과대망상광일 뿐 아니라, 제게는 무서운 악마같이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제가 모르핀을 시작하여 된 것도 현이 강제로 그런 것이죠.
이렇게 다시 시작된 여옥이의 이야기는, 사실 현혁이라면, 조선은 물론 일본의 동지 간에도 주목되던 이론분자였고, 심각한 지하운동에도 민활히 활동한 사람이었다. 그때 여옥이는 현의 애인이었지만, 현은 감옥으로, 출옥 후에는 정처 없는 방랑으로 오륙 년간의 소식을 몰랐다. 그 동안 본시 고아인 여옥이는 여급으로, 티룸 마담으로 전전하다가 평양까지 와서 나를 알게 되었다. 그 얼마 후에 우연히 만난, 동경시대의 현의 친구에게 현이 하얼빈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오륙 년이라는 세월을 격하여 현을 따라갈 몸도 처지도 못 되므로 용기는 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륭배가 얼마 멀지는 않아도, 아마 국경을 넘었다는 생각만으로도 하얼빈이 지척같이 생각되었던 게죠…… 그러구 또, 그때는 그럴만도 하게 되잖았어요!
하는 여옥이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나 역시 따라 웃을밖에 없었다. 서로 어이없는 일이었다는 듯이 웃고 나서,
지금 이런 말을 한 대서 부질없는 말이지만, 그때 일은 전연 내 잘못이지요. 너무 진실성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여옥 씨가, 그런 내 태도에 모욕감을 느끼셨을 것도, 그래서 달아나신 것도 여옥씨다운 총명한 행동이었지요.
이런 내 말에 여옥이는 금시에 또 솟는 눈물을 씻었다.
……그때 선생님의 심정도 당연히 그랬을 게죠. 만일 그 반대로, 그대 선생님이 진정으로 저를 사랑하셨다면, 저는 도리어 감당할 수 없어서 더 송구스러웠을 게죠.
잠시 말을 끊고 주저하던 여옥이는, / ……또, 참을 수가 없구먼요.
하고 핸드백에서 마약을 내어 피워 물고 외면한 얼굴에 눈물이 어린다.
여옥이는 그만큼이라도 내 앞에 터놓은 마음이라 부끄러움을 싱글싱글한 웃음으로 가릴 처지가 아니므로, 그만 눈물이 나는 모양이었다.
지금 제 말씀같이 그렇게는 생각하면서도, 그때 선생님이 저를 사랑하시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림을 위해서만이라도 옛 환상을 버리시려고 애쓰시면서도 못 하시는 것을 볼 때 저는 저대로 자존심은 상하고, 그러니 자연 반발적으로 저도 옛날 꿈을 그리게 될밖에 없었어…….
그래서 달려와 이곳에서 만난 현은, 명색 어느 변호사와 사무원이지만, 정한 수입도 없고 하는 일도 없는 하잘것없는 중독자였다는 것이다. 현은 다년간 혹사한 신경과 불규칙한 생활로 언제나 아픈 안면신경통과 자주 발작하는 위경련으로, 없는 돈에 가장 수월하고 즉효적인 약으로 시작한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옥이는 현을 애걸하다시피 달래고 얼러서 모르핀 환자 수용소까지 데리고 갔으나, 한번은 문 앞까지 가서 현이 뿌리치고 달아났고 한번은 여옥이가 현에게 설복되어 그저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 아편이 도리어 설복되다니요?
내가 묻는 말에, / 참 괴상한 일 같지만, 거역할 수 없는 사정이었어요.
그 사정이란 것은 지금 마약에 눌리어 있는 현의 신경통과 위경련은 마약의 힘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전보다 몇 배의 고통과 발작을 일으켜서 그 병만으로도 지금이나 다름없는 폐인이 될밖에 없고, 따라서 생명도 중독으로 죽으나 다름없이 짧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죽는 날까지 고통이나 없이 살겠다는 것이요, 그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재의 자기 생활을 혼자서나마 합리화하고 살자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결론의 예측이나 이상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그 오류가 증명되어 왔고, 진리는 오직 과거로만 입증되는 것이므로, 현재나 더욱이 미래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활은 그런 이상을 목표로 한다거나, 그런 진리라는 관념의 율제를 받아야 할 의무도 없을 것이요, 따라서 엄숙하달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허무한 미래로 사색적 모험을 하기보다도 거짓 없는 과거로 향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아편 연기 속에서 지난 꿈을 전망하는 것이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스러운지 모른다고 하며 현은 여옥이에게도 마약을 권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옥이가 그런 말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오직 두 사람의 생활을 위하여 홀의 댄서로 카바레의 여급으로 피로한 밤낮을 지낼 뿐이었다. 그러한 생활에 밤 세 시 네 시까지 지친 몸으로 곤히 잠들었다가도, 혹시 심한 기침에 몸을 뒤치다 눈을 뜨게 되면 현은 그때도 일어나 앉아서 모르핀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은 얼굴에 더운 김이 훅훅 끼치는 것을 느끼며 자꾸 기침이 나면서도 가위에 눌린 듯이 목이 답답하고 움직일 수 없이 사지에 맥이 풀리어, 간신히 눈만을 떴을 때…… 깊은 안개 속으로 보이는 듯한 현의 얼굴이 막다른 담과 같이 눈앞에 크게 막히고 그 입으로 뿜어내는 마약 연기를 여옥이 코로 불어넣고 있었다. 그런 줄 알자 여옥이는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려 하였다. 그러나 현에게 붙잡힌 손목을 용이히 뿌리칠 기력도 없이, 그저 현이 무서워 떨리고, 야속한 설움에 그저 주저앉아 울밖에 없었다. 여옥이는 그때 그러한 광경을 지옥으로 느끼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은 가장 엄숙한 음성으로,
미안하다. 내가 죽일 놈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너 없이는 살 수 없는 위인이 아니냐.
하면서, 그대로 두면 여옥이는 언제든지, 혹시 내일이나 모레라도 현을 버리고 달아날는지 모르므로, 현은 잠시도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은 중독자가 되어 현이 죽는 날까지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울며 애걸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그러한 현의 말이, 여옥이 없이는 못 살으리만큼 여옥이를 사랑한다는 뜻인지, 여옥이가 벌어 먹이지 않으면 못 산다는 말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면서도 어느 편이건, 여옥이는 그저 현이 애처롭게 불쌍하게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 웃지 마세요. 여자란 아마, 저 없이는 못 산다면, 몸에 휘감긴 상사구렁이도 미워는 못 하나 봐요.
하고 여옥이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옥이는 현이 권하는 대로 무서운 중독자가 되어 가면서도, 한 남자의, 더욱이 첫정을 바쳤던, 사람의 마음을 아직도 완전히 붙잡고 있다는 여자의 자존심이랄까?로 만족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시다면, 지금 조선으로 나가실 결심은? 또 현씨는 어떻게 하시구서?
비로소 나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생각을 물을 수가 있었다. / 네에, 제 말씀을 들으세요.
하고 계속한 여옥이의 말은, 그런 생각으로 의지하는 현을 받들어 지내 가면서도 문득문득 일생의 파멸이라는 생각이 들 적마다, 여옥이는 전율에 떨고 울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혹시 그러한 여옥이를 보게 되면 현은. 왜? 아직도 딴 세상에 미련이 남았나? 내가 짐스러운가? 물론 그렇겠지만 병신 자식을 둔 어머니의 운명으로 알고 얼마 머지않아서 죽을 나이니까, 좀만 더 참으면 오래잖아 자유로운 몸이 될 터이니까. 현은 여옥이를 위로하는 셈인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여옥이는, 여옥이 없이는 못 산다는 현의 말뜻이 어떤 것인지 짐작되어, 차차 파멸에 대한 공포가 더 커가서 울게 되는 때가 많아졌다. 이즈음에는 여옥이가 울 때마다, 현은 그렇게 내가 여옥이의 젊은 육체의 자유까지를 구속하려는 것은 아니니 자기 앞에서 그렇게 울어 보이지는 말아 달라고 성을 내는 것이다. 현의 그런 말이 본시부터의 심정인지, 나날이 쇠약해 가는 생리적 타격으로 변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여옥이에 대한 현의 생각을 너무도 분명히 알게 되어 한없이 슬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옥이는,
선생님이 어떻게 들어시라고 하는 말씀은 결코 아니지만, 여자로서 선생님에게 업신여김을 받은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만이라도, 현이 내게 의지하는 것이 어떤 심정이건, 그 마음만은 내가 지니려는 노력을 해왔지요만.
현은 훔쳐 낼 처지가 아니고 필요도 없으련만 여옥이 모르게 돈을 뒤져내기도 하고, 심지어 여옥이가 다니는 홀이나 카바레 주인에게 선채할 수 있는 대로 돈을 취해 가지고는 겨우 지내 가는 구차한 살림이라 물론 집에 많은 돈이 있을 리 없고 선채를 한 대도 중독자에게 큰돈을 취해 줄 이도 없지만 돈이 없어질 때까지는 흰약보다 더 좋다는 아편을 빨 수 있는 비밀여관에 틀어박혀서 집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현이 어제 집에 있는 것은 여옥이로서도 의외였다.
그러나 여옥이는 어젯밤까지도, 현을 버리고까지 제 몸만을 건져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현의 말대로 병신 자식을 둔 어머니의 운명으로 남은 반생을 단념하고 현이 사는 날까지 현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젯밤에 내가 나오자 김명일이가 여옥이를 따라온 것이 아니냐고, 하도 여러 번 재차 묻는 현의 말씨나 태도가 단순한 질투나 시기라고 할 수 없으므로 짐짓 여옥이는,
아마 그런지도 모를걸요.
해보았더니 현은 으레 그럴 것이라고 자기의 추측이 어김없는 것을 자긍하듯이 만족해하며,
그럼 여옥이도 역시 김명일이를 못 잊어하지? 아마. / …….
그러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내가 니힐한 에고이스트라도 송장이 다된 나만을 위해서 여옥이를 희생할 염치도 없으니까.
하면서 자기 앞에서 김명일이가 아직도 여옥이를 사랑한다고 언명하면 현은 두말없이 물러설 터이니 여옥이의 심정부터 솔직히 말하라고 다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옥이의 심정부터 솔직히 말하라고 다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옥이는, 그럼 당신은 내가 없어도 살수가 있느냐? 이젠 내가 소용이 없느냐고 되물었더니, 현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며 자기 욕심만 같아서는 죽는 날까지 여옥이가 있어 주었으면 그 이상 행복이 없지만, 아직 장래가 투철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눈앞에 뻔히 보면서야 산송장인 자기 욕심만 채우잘 수도 없으므로, 두 사람은 자기 앞에서 솔직한 대답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옥이는, 나에게만 솔직한 대답을 강요하지 말고, 당신부터. 당신은 나보다 돈이 필요해서 김명일 씨가 나를 사랑한다고만 하면 그 말을 빌미로 잡아 가지고 돈을 강청할 심사가 아닌가! 좀 솔직히 말해 보라고 하였던 것은 현은 하도 의외의 말이라는 듯이 펄쩍 뛰며, 비록 지금 여지없이 타락하였지만, 아직도 현혁이의 자존심만은 남아서 제 계집을 팔아먹게까지는 안 되었다고 하며 여옥이의 말이 너무 야속하다는 듯이 현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건 사실 여옥 씨가 너무 현씨의 심정을 야속하게만 곡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물었다. / 혹 그런지도 모르죠. / 하는 여옥이는 곧 말머리를 돌려서,
선생님은 지금 저와 같이 가셔서, 현이 묻는 대로 아직도 저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해 주세요. 쑥스러운 일 같지만 그 한마디 말씀으로 저는 현에게서 벗어나 갱생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구 이것 가지셨다 현이 요구하면 내주세요.
하면서 여옥이는 핸드백에서 백 원 지폐 석 장을 내 손바닥에 놓았다.
이 돈은 선생님이 주셨던 보석을 지금 팔아 온 것입니다.
하는 여옥이는 내가 준 다이아반지를 수식물로만 아껴 지니고 있었다기보다 어느 때 닥쳐올지 모를 불행을 위하여 현도 모르게 간직히 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돈이 현의 장비였구나! 그러나 지금은 여옥이의 몸값이 되는구나! 생각하면서도,
설마…… 현씨가……. / 이렇게 시작하려는 나의 말을 앞질러서,
죄송하지만 지금 곧 가주셨으면……. / 하고 여옥이는 먼저 일어선다.
이 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여옥이의 단호한 기상에 주저할 여유가 없었다.
마차 위에서 여옥이의 몸은 가볍게 흔들리지만 그 마음은 호수같이 가라앉은 모양으로, 어느 한곳을, 아마 때진 결심으로 한 점 구름 같은 잡념도 없이 맑은 호수 같은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러한 여옥이 옆에 앉은 나는 그에게 미안하면서도, 아까 중동무이된 설마……현씨가…… 하던 나의 의문을 현이 설마 돈을 요구할라구요? 하고 계속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문의 형식으로 여옥이의 자존심을 위한 인사말이었고, 오히려 의문은, 혹시. 만일 현이 의외로 담박하게 돈 이야기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만다면, 그때의 여옥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더 궁금한 의문이다.
물론 현이 돈을 요구할 것이라 예측하는 것이요, 그 예측이 맞는다면 여옥이를 돈으로 바꾸는 현을 여옥이도 마음 가뜬히 버리고 나를 따라 조선으로 가는 것이 정한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외에도 현이 여옥이의 행복만을 위하여 여옥이를 버린다면 그때의 여옥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녕 여옥이는 다시 현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현이 돈을 요구하든 말든, 지금의 결심대로 여옥이가 나와 같이 조선으로 간다면 이 연극은 제법 막이 닫히고 끝나는 것이지만, 만일 여옥이가 다시 현을 따라가고 만다면, 나는 중토막에서 히로인이 뛰어들어가고 만 무대에서 혼자 어떤 제스처를 해야 할 일일까? 또, 그것은 결과라 기다려 봐야 할 것이나 그 전에 그 그로한 인물 현 앞에서, 결혼식도 아닌데 여옥이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네 대답해야 할 것은 또 얼마나 싱거운 희극일까? 이런 생각에 자연 싱글거려지는 내 옆의 여옥이는 또 얼마나 새색시같이 얌전한가! 생각하면 본무대에 오르기 전에 하나미치(일본 연극에서 배우들이 다니는 통로)인 이 하얼빈 거리에서부터 희극은 연출된 것이라고 더욱 싱글거리자, 그렇게 싱글거리는 나를 본 집시 계집애는 부리나케 손을 벌리고 웃으며 따라온다.
나는 포켓에서 잡히는 돈 한 푼과 같이 웃음도 집어던지고, 한순간 후에 좌우될 운명으로 긴장하고 슬픈 여옥이와 같이 긴장하여, 내 생활에도 적지 않게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 일을 생각해 보려는 사이에 마차는 현관에 닿고 말았다. 막상 그 문 밖에 서게 되자 나는 지나치게 긴장하여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심호흡을 할 때 여옥이는 앞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이리 들어오시죠.
어젯저녁과 꼭 같은 말소리가 나며 현은 문어귀까지 나와서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림에서 본 유령의 손같이 희고 매듭이 올근볼근한 긴 손이 반가울 리 없으나 마지못하여 잡은 장바닥에 의외로 눅직한 온기가 무슨 권모술수 같아서 더욱 불쾌하였다.
어제는 퍽 놀랐을걸요.
사실은 사실이지만 무엇이라 대답할 말이 없는 인사이므로 묵살하고 말았다.
자아, 앉으세요. / 현은 또 이렇게 나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먼저 털썩 앉았다.
묽은 구름이 엉긴 초가을 북만(北滿) 하늘은 백동색(白銅色)으로, 해 안 드는 방안은 물속같이 냉랭하다. 마주 앉아 낮에 보는 현의 벗어진 이마와 뺨가죽은 낡은 양피같이 윤기 없고 구겨졌다. 나는 그의 성긴 머리털 속에서 방금 날아올 듯한 비듬에서 눈을 돌리며 그저 지나는 말로, / 만주는 사시는 재미가 어떠십니까? / 하고 물었다.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물으시는 것은 실례죠, 허허. / ?
송화강을 보셨나요? / 네에, 어제 잠깐.
대학에서는 만주 농사 경제사를 연구한 적도 있었죠. 하나 지금은…… 이걸 좀 보시우.
현은 담에 붙여 놓은 낡은 만주 지도 앞에 가서,
지도를 이렇게 붙여 놓고 보면 송화강이 이렇게 동북으로 치흐른다기보다 오호츠크 바닷물이 흑룡강으로 흘러 들어와서 한 갈래는 송화강이 되어 만주로 흘러내려와 이렇게 여러 줄기로 갈리고 갈려서 나중에는 지도에 그릴 수도 없을 만치 작은 도랑이 되고 만나면 어떻습니까, 재미나잖아요?
하고는 허허 웃었다. 나도 따라 웃는 것이 인사겠으나 그만두었다. 부질없는 말을 물어서 이런 객설을 듣게 되었다고 후회하면서, 대체 이 현이라는 인물은 어디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디로 번지어 어떤 결론을 낼는지 모를 자라고, 나는 이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더욱 창망할 것을 미리부터 염려하며 무료히 담배만을 피웠다.
여옥이도 무료히 장의자에 앉아서 조롱을 내려놓고 모르핀 연기를 뿜어 주고 있었다.
한동안 호신을, 닳아 처진 리놀륨 바닥에 철떡거리며 나와 여옥이 사이를 왔다갔다 거닐던 현은 역시 거닐면서,
이렇게 두 분이 같이 오셨을 적엔, 여옥이에게 내 말을 들으시구 오신 것이니까 일부러 김 선생의 말씀을 들어 보잘 것도 없겠지요. 어제 나는 김 선생 앞에서 흥분하고 눈물까지 보였고, 여옥이는 아시다시피 소리 내 울었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왜 이렇게 슬퍼하는가고 생각하였지요. 영락, 폐인, 절망, 이런 것들은 어제도 말씀한 것같이 새삼스럽게 지금 설움이 될 리는 없고, 오직 우리 앞에 나타난 김 선생의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나는 자연 머리를 들어 크게 치뜬 눈으로 그를 바라볼밖에 없었다.
가만, 제 말씀을 들으시죠. / 현은 역시 거닐면서,
처음에는, 여옥이가 김 선생을 버리고 내게로 돌아왔지만, 이 생활을 슬퍼하고 후회하는 지금의 여옥이라, 김 선생이 그런 여옥이를 내게서 빼앗기는 여반장이리만치, 지금의 나는 김 선생의 적수가 아니라는 생각과, 설사 여옥이가 김 선생의 유혹을. 어폐가 있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뿌리치고 여전히 내 곁에 있어 준대도, 김 선생이 나타나기 전과는 다른 여옥일 것입니다. 여옥이의 본시 슬픈 체관은 더욱 슬픈 체관일 것이고, 내게 대한 동정은 더 의식적 노력이 될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옥이의 강인한 희생의 신세를 지게 된다는 고통, 그리고 김 선생 같으신 신사가 아직도 못 잊으시고 여기까지 따라올 만치 아담한 여옥이를 나는 아낄 줄 모르고 폐인을 만들어 놓았거니 하는 자책과, 그보다도 새삼스럽게 더욱 나를 원망하게 될 여옥이의 심정. 이러한 가지가지의 우리의 심리적 고통은 우리 앞에 나타난 김 선생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일까요? 설사 김 선생이 여옥이를 찾아 온 것이 아니요 단지 우리 앞에 우연히 나타난 것이라 하더래도, 우선 여옥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내가 애써 잊어버리려던 내 자존심과 반성력을 일부러 일으켜 세워 가지고 때리고 휘둘러서 비록 인간답지는 못하더라도 그런대로 평온하던 우리 두 사람의 생활을 김 선생이 여지없이 흩트려 놓고 만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김 선생,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중독자의 착각일까요, 김 선생?
이렇게 묻는 현은 내 앞에 의자를 당겨 놓고 앉아서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 바를 몰랐다. 내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었더라도 결과로는, 그들의 생활을 흐트러놓은 셈이라는 현에게 사실 여옥이를 유혹, 현의 말대로, 하러 온 길이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있더라도 여옥이와의 언약이 있는 나는 지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현이 당장 묻는 것은 내가 그들의 생활을 흩트려 놓은 셈이냐 아니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단지 그뿐이겠지요. / 할밖에 없었다. / 그뿐?
현은 눈을 치떠 노리듯이 한순간 나를 바라보다가,
아마 김 선생으로선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 고의건 우연이건 간에 김 선생 자신이 의식적으로 나를 모욕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실 터이니까. 단지 그뿐이라고 아무런 책임감도 안 느끼시겠지요. 그러나 내가 모욕을 당하고, 여옥이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우리 생활이 흐트러진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안 그럴까요?
……. / 사실 그렇다더라도 그것이 내 책임일까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사실입니다. 김 선생의 의식적 모욕이 아니라고, 우리 앞에 나타난 김 선생으로 해서 이렇게 우리가 받는 모욕감과 고통을 어떻게 합니까? 김 선생 때문에 받는 이 모욕감이 김 선생의 책임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김 선생의 책임이라고만도 할 수 없겠지요. 이런 내 모욕감은 김 선생과의 대조로서 비교도 안 되는 약자의 모욕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다시 당자가 되어 김 선생에게서 받은 모욕과 박해를 설욕할 수가 있을까요? 지금 김 선생은 내게 여옥이를 내놓으라고 내 앞에 버티고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박해와 모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렇지만 나는 설욕할 만한 강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피로써 피를 씻는다는 격으로. 그렇다고 김 선생의 모욕을 모욕으로 갚을 수 없는 나는, 나 자신을 내가 철저히 모욕하는 것으로 받은 모욕감을 씻어 볼밖에 없습니다. 그러자면 김 선생에게 자진하여 여옥이를 내주는 것입니다. 김 선생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여옥이를 그대로 내 옆에 두고두고 모욕감을 느끼기보다, 내가 자굴해서 물러가는 것이 오히려 내 맘이 편하겠지요. 그렇다고 김 선생을 따라가는 여옥이의 행복을 위한다거나, 김 선생의 연애를 축복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아침까지도 여옥이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게 그런 인간다운 생각조차 남았을 리가 없지요. 그저 김 선생과 겨룰 수 없는 폐인의 자굴입니다. ……나는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가겠습니다. / 하며 현은 일어선다.
나는 그의 그런 장황한 이야기가 그런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 의외였다. 사실 현은 그러한 자기의 결론 그대로 행동할 것인가고, 망연히 그를 바라볼 때, 아까부터 장의자에 엎드려 소리 없이 울던 여옥이가 일어선 현의 앞에 막아선다.
머어 이제 더 할 말도 없을 것이고, 이렇게 김 선생을 모셔 온 것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까, 여옥이가 이제 무슨 말을 한다면 제 마음을 속이고 또 나를 속이는 것뿐이니까…….
현은 이렇게 말하면서 여옥이를 비켜 서 내 앞에 다가서며,
김 선생, 스스로 나를 모욕하려는 나는 철저히 할밖에 없습니다…… 지금 김 선생은 이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 하고 현은 호복 안섶을 뒤져서 열쇠 하나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는다.
이것은 여옥이와 내가 하나씩 가진 이 방의 열쇠입니다. 지금 내게는 소용없는 것이지만 김 선생은 필요할 것입니다……이 열쇠를 사주시오. 천 원이고 만 원이고,
김 선생에게는 필요한 것이니까 사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현은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의외리만큼 현은 너무 태연한 얼굴이었다.
하기는 그의 장황한 이야기의 결론으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번 여옥이를 쳐다볼밖에 없었다. 그러나 쳐다본 여옥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돈을 주고받는 것을 차마 못 보는 뿐일 것이다. 나는 더 주저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까 여옥이가 준 지폐 석 장을 그 열쇠 위에 던졌다. / 고맙습니다.
현은, 많다 적다는 말도 없이, 오히려 의외로 많은 돈에 버럭 탐이 난 듯이 덥석 움켜쥐고,
이것으로, 나 자신을 모욕할 대로 해서 만족합니다. 자아, 나는 갑니다.
하고 현은 도망이나 하듯이 문 밖으로 나가 버리었다.
철떡철떡 하는 호신 끄는 소리마저 사라지자 여옥이는 의자에 쓰러져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들먹거리는 여옥이의 어깨를 바라볼 뿐 나는 위로할 말도 없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얼마 후에 눈물을 씻고 일어나 앉은 여옥이는,
죄송하올시다. 여기 일은 될 대로 끝난 셈입니다. 현도. 현에게는 돈은 곧 아편이니까요. 아편이 풍부해졌다고 만족할 것입니다. 현은 본시 지식인이던 사람이 벌써 중독자의 필연적 증상이랄 수 있는 파렴치를 애써 변호해 보려고 그같이 궤변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말에 스스로 흥분하고 슬퍼도 했지만, 지금쯤은 멀쩡히 잊어버리고 그저 제 생활이 풍족하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저는 또 제 일을…… ” 새로운 눈물을 씻었다.
그래서 나는 슬픔과 흥분으로 피곤한 여옥이를 우선 누워서 쉬라고 이르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니 어느덧 밤이었다. 나 역시 피곤하여 이군을 찾을 생각도 없이 반주로 좀 취한 김에 일찍이 자리에 들고 말았다. 그러나 흥분하였던 탓인지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어렴풋한 머릿속에, 당장 잘 생각하려고도 않는 생각들이 짤막짤막 뒤섞여 떠오를 뿐이다. 여옥이는 장차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할 셈인가, 정말 나를 따라 조선으로 나가는가, 내가 데리고 가는가, 나가면 어떻게 하나, 우선 입원시킬밖에 없다. 그래 완인이 되면? 그 후의 여옥이는 또 어떤 길을 밟게 될까? 혹시 또 나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일이라니 알 수 있을라구. 이런 뒤숭숭한 생각이 자꾸 반복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이 풀깃 드는 듯할 때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나는 듯하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역시 누가 문을 두들기는 것이었다. 보이의 안내로 백인 애 메신저가 들어와 네모난 서양 봉투의 묵직한 편지를 주고 간다. 여옥이의 편지였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내일 아침 좀 일찍이 저를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 제가 없이 문이 걸렸더라도, 제 방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옵소서. 열쇠를 동봉하옵니다.
이런 간단한 사연에, 아까의 그 열쇠가 들어 있었다.
무슨 일일까? 할 말이 있으면 잘 아는 길이라 자기가 오면 그만인데, 일부러 메신저를 보내고, 나를 오라고.
혹시 앓는가? 앓아서 못 올 사람이라면 이른 아침에 혹 제가 없이……라는 것은 웬일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일 가보면 알 일이라고 다시 자리에 들어 자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자 이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젯밤에도 전화로 나를 찾았으나 잔다기에 오지 않았다고 하며 지금 가도 좋으냐고 묻는다. 그러나 여옥이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므로 볼일을 보고 내가 찾아가마 하였더니. 자네가 하얼빈서 볼일이 무엇이냐고 하며 아마 여옥 씨부터 찾아뵙는 판이냐고 껄껄대는 큰 웃음소리를 방송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런가 보다고 웃었다.
상쾌하게 맑은 날씨였다. 내가 여옥이의 아파트에 가기는 아홉시였다. 방문 밖에서 기침을 하고 문을 두들기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사실 열쇠가 필요했구나…… 하고,
언제나 찬찬한 여옥이가 고마운 듯한 당치 않은 착각에 열리는 쇳소리도 경쾌하게 들으며 방안에 들어섰다.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묵직하게 가슴에 안기는 듯이 틈틈하다. 밤 자고 난 창문을 열지 않아서 그런가 하였으나, 그 느긋한 마약 냄새도 식어 날아 버린 듯하고 사람의 온기도 느낄 수 없이 냉랭한 바람이 휘잉 하면서도 가슴이 틉틉하고 불쾌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옥이를 기다려야 할 것이므로 장의자에 앉아 담배를 붙였다. 창을 열고 내다보며 이 맑은 날 잘 울 종달새를 생각하고 방 안을 둘러보았으나 조롱은 없었다. 그때였다. 침실이라고 생각되는 판장 병풍 뒤에서 푸득거리는 소리와, 이어서 찍찍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첫날 와서 들은 그 암담한 비명이었다. 그대로 두면 또 제 똥 위에 다리를 뻗고 누워 버릴 것이다. 여옥이가 와서 마약을 뿜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 버릴 것이다. 또 몸을 솟구는 모양으로 푸득거리고 쥐소리를 지른다. 여옥이는 어디를 갔나? 나는 초조한 생각에, 별 도리는 없을 줄 알면서도 보기라도 할밖에 없었다.
판장문을 열었다. 그 안에 여옥이가 있었다. 비좁은 침실이라 빼곡 찬 더블 배드 한가운데 그린 듯이 누운 여옥이는 잠들어 있었다. 조롱도 그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내 앞에 내놓인 여옥이의 한 팔은, 그 빨간 손톱으로 찢어지도록 침대 요를 한줌 긁어쥐고 있었다. 그 손 아래 침대 밑에는 겉봉에 김명일 선생 전이라 쓴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여옥이의 손은 본시 이 편지를 쥐고 있던 모양으로 편지는 구겨졌다.
나는 조용히 장의자로 돌아와 그 편지를 뜯었다.
아무리 염치없는 저이지만 선생님에게 이런 괴로움까지는 안 끼치려고, 송화강, 철도를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인적이 부절하고 경계가 엄하와 실패할 염려가 없지 않사오므로, 이런 추한 모양을 보이게 되옵니다.
혹 선생님이 떠나신 후에나, 또는 지금 멀찍이 떠나서 죽을 곳을 찾을까도 생각하였사오나, 죽음을 지니고 어디를 가거나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만한 힘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무 외롭고 무서웠습니다. 야속한 생각이오나, 시체나마 생전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손으로 처리된다고 생각하오면, 너무 외롭고 무서웠습니다.
선생님의 괴로우심을 만 번 생각하면서도 믿고 이렇게 갑니다. 저는 갱생을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본국으로 가겠다 말씀드린 것은 본심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설마…… 현이…… 하실 때, 저 역시 그런 의문이 있었사옵고, 만일 현이 그런 만일의 태도를 갖는다면 저는 또 현을 따라갈 것이 아닐까 염려되도록 명확한 결심이 없었다면 없었고, 또 그만치 갱생을 동경하였던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은 제가 예상한 태도로 나갔습니다. 그것이 현의 본심이라기보다 병(고칠 수 없는)인 줄 아옵는 고로, 현에게 버림받은 것이 분해서 죽는 것은 아니외다. 그저 외롭습니다. 지금 제가 다신 현을 따라간대도, 이미 저를 사랑하기를 잊은 현은 기회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열쇠를 팔 것이외다.
그렇다고 저의 지금 병(중독)을 고친댔자 다시 맑아진 새 정신으로 보게 될 세상은 생소하고 광막하기만 하여 저는 더욱 외로울 것만 같습니다. 갱생을 꿈꾸던 것도 한때의 흥분인 듯하올시다. 지금 무엇을 숨기오리까. 요사한 말씀이오나 저는 선생님의 심정을 완전히 붙잡을 수 없음을 슬퍼하면서도 선생님을 잊으려고 노력할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제가 이제 다시 선생님을 따라가 완인이 된댔자, 제 앞에 무슨 희망이 있을 것입니까. 내내 선생님 기체 만강하시옵소서.
-6일 밤 6시 여옥 상
나는 여옥이의 유서를 읽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한 점의 티나 가는 한 줄기 주름살도 없는 여옥이의 인당을 들여다보면서 죽은 내 처 혜숙이의 그것을 보는 듯이 반갑기도 하였다.
그 영롱한 인당에 그들의 아름다운 심문(心紋)이 비치어 보이는 것이다.
여옥이는 그러한 제 심정을 바칠 곳이 없어 죽었거니! 나는 그러한 여옥이의 심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거니! 하는 생각에 자연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싸늘한 여옥이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 주면서 갱생을 위하여 따라 나서기보다,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이 여옥이의 여옥이다운 운명이라고도 생각하였다. 《문장》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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