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사적지
유관순열사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설립된 유관순열사사적지
유관순 열사는 1902년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에 재학 중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귀향하여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을 일으켜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1919년 8월,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뒤 일제의 악독한 고문에 못이겨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열사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69년 추모각을 건립하고 1972년부터 매년 9월 28일에는 유관순 열사 추모제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되고 있다.
주변엔 열사가 거사를 알리고자 봉화하였다는 봉화지와 봉화탑, 열사의 생가와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 등이 있다.
유관순열사 생가
독립기념관
개설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복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겨레의 전당이다.
연원 및 변천
국민운동으로 추진되어 1987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으며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을 세우자는 논의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1946년 천도교회관에서 사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기념관 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과,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주최 ‘광복30주년기념심포지엄’에서 정식 안건으로 토의, 합의하여 정부에 건의한 바도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에 실린 식민지 서술 부분이 한국 국민의 분노를 일으켜, 이에 한국 국민이 국민운동으로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정부에서는 소요 부지인 400만㎡을 매입하여 제공하였다.
국민성금 490억 2432만 5009원(1986년 4월 8일 기준)을 모금하는 한편, 국내외로 독립기념관에 전시할 자료와 유물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1986년 4월 8일「독립기념관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그 해 5월 9일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원래는 1986년 8월 15일에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월 4일 뜻하지 않은 화재가 일어나 1년을 늦추어 개관하였다.
현황
총 9만여 점의 유물이 전시, 보존되고 있으며 주요 시설물은 다음과 같다.
제1전시관(겨레의 뿌리)은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유산과 국난 극복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우리 겨레는 수 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여 발전시켰고 외부의 침략에 맞서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이 땅을 지켜왔다. 자랑스러운 민족문화 전통이 국난극복과 항일독립운동의 저력임을 알 수 있다.
제2전시관(겨레의 시련)은 1860년대부터 1940년대, 즉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를 주제로 하고 있다. 변화의 물결이 들이 닥쳤던 개항기와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개혁기를 지나 우리 민족의 긴 역사가 일제의 침략으로 단절되고 국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련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주변국의 역사왜곡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제3전시관(나라지키기)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대표되는 구한말의 국권 회복운동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일제에 항거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기와 중기, 후기 의병전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 의거를 비롯하여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매국노와 침략자들을 처단하는 의사와 열사들의 투쟁과정을 볼 수 있다.
제4전시관(겨레의 함성)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식민통치에 맞서 우리나라가 독립국이고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평화적인 만세운동으로 선언한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3·1운동의 배경부터 진행과정, 일제의 탄압과 3·1운동이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까지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제5전시관(나라 되찾기)은 일제강점기에 조국독립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만주지역을 근거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의 활동과 개인 또는 단체를 이루어 일제의 침략기관과 주요 인물을 처단한 의열투쟁, 그리고 중국 관내에서 조직되어 활동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 등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제6전시관(새나라 세우기)은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민중의 항일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전개된 국학수호운동, 민족교육 등과 학생·여성·노동자·농민 등 다양한 세력이 주체로 참여한 민족독립운동,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제7전시관(함께하는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조국광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전개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체험전시관이다. 이곳에서 관람객은 직접 독립운동가가 되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과 다양한 문화운동 등에 자유롭게 참여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합쳐 조국광복을 맞이했고 그 원동력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음을 체험해볼 수 있어 이채롭다.
위의 7개 전시관 외에 본관(겨레의 집)과 입체영상관이 있고, 야외에는 독립운동사의 중요 인물과 단체들의 어록비(語錄碑)와 각종 조각물이 있어 독립기념관에 걸맞는 환경으로 다듬어져 있다.
북관대첩비
높이 2.75m의 북관대첩비 복제비는 원래의 비신과 유사한 충남 보령 웅천산 애석을 사용했고 머릿돌과 받침돌은 황해도 해주산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의병단의 활약상을 담은 1천500여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북평사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해 숙종 34년(1708)에 세워진 대표적인 국난극복의 승전비로, 2005년 10월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아 2006년 3월 북한으로 인도했다.
현충사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국한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706년에 창건하고, 이듬해 ‘顯忠祠’라 사액(賜額)되었다.
그 뒤 일본의 국권 침탈로 돌볼 수 없게 되어 한때 퇴락했으나, 1932년에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와 동아일보사가 성금을 모아 중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마쳤다.
경역 면적은 16만 3096평이고, 주요 시설로 본전(本殿)·구본전(舊本殿)·유물관·고택(古宅)·활터·홍살문(紅―門)·정려(旌閭), 이면(李葂)의 묘소 등이 있다. 본전은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지금의 영정은 1953년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것으로,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구본전은 본전을 신축할 때 배전(拜殿)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사적비(事蹟碑)와 함께 유물관 옆으로 이전하였다. 고택은 이순신이 자라난 집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왔으며, 몇 차례 중수 또는 개수되었다. 활터는 옛집 옆에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으로 이순신이 활을 쏘며 무예를 닦던 곳이다. 홍살문은 사당 경내를 표시하는 정문으로 1932년 중건 때의 자리에 있다.
정려에는 이순신과 조카 이완(李莞), 4대손 이홍무(李弘茂), 5대손 이봉상(李鳳祥), 효자 이제빈(李悌彬) 등 5인의 편액(扁額)을 보존하고 있다. 이면은 이순신의 셋째아들인데 임진왜란 때 21세로 이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가 왜군을 막기 위해 싸우다 전사하였다.
유물관에 전시된 주요 유물로는 『난중일기(亂中日記)』·서간첩(書簡帖)·임진장초(壬辰狀草), 장검(長劒)·옥로(玉鷺)·요대(腰帶)·도배(桃盃),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 : 都督印·令牌·鬼刀·斬刀·督戰旗·紅小令旗·藍小令旗·曲喇叺]·교지(敎旨)·각종 무기·거북선 모형·유적 사진·해전도(海戰圖)·거북선도[龜船圖]·십경도병풍(十景圖屛風)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유물관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경상남도 통영시의 충렬사(忠烈祠)에 전시되어 있다.
이순신묘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는,
조선의 명장이자 민족의 성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안장된 묘소.
사적 제112호 아산 이충무공 묘(牙山 李忠武公墓)로 지정되어 있다.
충무공은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직책을 거쳤는데,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전라좌수사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충무공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들었다.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노량·당포·한산도 등 여러 곳에서 적을 무찌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그러다가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을 맞고 숨졌으나,사실을 숨기고 조카인 완이 대신 지휘하여 왜적은 큰 피해를 입고 도망을 갔다.아산군 금성산에 무덤을 만들었다가16년 후인 광해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무덤 주위에는 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향로석이 있으며,동자상1쌍·망주석1쌍·석상1쌍·문인석1쌍·광명등·묘비석이 있다.무덤 앞에는 정조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御製碑)와 비각이 있다.
선조31년(1598)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투 도중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자,시신을 처음에는 노량해전의 전장이던 남해의 관음포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순신 재직 시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로 옮겼다.그해 말(대략 음력으로12월 즈음)에 시신을 육로로 이용해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하여 이듬해 선조32년(1599) 2월 인근 금성산(음봉면 산정리)에 모셨다가,이순신이 선무공신 칭호를 받고 좌의정으로 추증되자 광해군6년(1614)에 현재의 삼거리 어라산 자락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이후 정조18년(1794)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정조가 어제신도비를 하사하였는데,임금이 신하에게 신도비를 직접 내린 경우는 이순신이 유일하다.해방 이후인1973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에 맞춰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사진: 이석염(향매실),이재실 회원
편집: 박 성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