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것이 기독교 제자도의 처음과 마지막 이요
가장 근본적 물음이다
(이 서두를 읽으며 깜짝 놀랐다,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마치 세속적인 질문처럼
느껴졌다. 또 기독교안에서 그 질문을 하면 안될것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가.")
예수님이 나를 따르겠는가…
물음을 바꾸면 “무엇을 원한는가?“ 이다.
(와,기발한 사고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날카롭고 통렬한 물음이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분이셔…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왜
다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따르라고 하지?라는 의문조차 불손한것이라고
여겼는데)
우리가 원하는 바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바람과 갈망은 우리의 핵심을 차지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으니
이 제자도는 우리의 마음을 정렬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주목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도는 앎과 믿음의 문제라기 보다 열망과 갈망의 문제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같은 기분이 들지만 구두점을 찍기전에 맞는말을 한다.
성경에도 우리의 믿음을 온도에 비유한다. 차던지 뜨겁던지 하라)
그분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의 사랑이나 갈망을 그분의 사랑이나 갈망에 일치시키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원하는바를 원하고 하나님이 욕망하시는 바를 욕망하고 하나님을 열망하며
갈망하고, 하나님의 모든 것 안에 모든것이 되시는 세상을 간절히 구하라는 명령이다.
그분의 가르침은 차분하고 차거운 성찰과 관조의 집합소를 건드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분은 마음이라는 뜨겁고 열정적인 영역까지 파고들어 오는 선생이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라삐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사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최고의 강사가 아니요. 그분이 세운 사랑학교도 강의실과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자도를 일차적인 교훈에 관한 문제로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대체로 지적활동 지식 습득의 문제인 것처럼 접근해 왔다
(오랫동안 기독교 서적에 흥미를 못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은 뻔한말이 아니길
기대해 보며 살아움직이는 영성과 지성이 번뜩이는 독서가 되길 기대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