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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스크랩 청춘고백
타잔김°³о♡ 추천 0 조회 109 12.11.11 20: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청춘고백 박시춘 작곡, 손석우 작사, 남인수 노래 (1954)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내고, 좋다할 땐 뿌리치고, 싫다할 땐 매달리고,
   인정사정 보지 않던 죄 많은 청춘입니다. 꽃봉오리 꺾어서 시들게
   버려놓고 본채만채 돌아서던 매정한 청춘입니다. 저 멀리 성당의 종
   소리 들리는 밤에 달을 보고 별을 보고 죄 많은 내 청춘을 고백합니다.
   땅을 치고 가슴 치며 후회하면서 울면서 흐느끼며 참회합니다.

1.헤여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고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내 청춘

   당신은 매정한 사람 당신은 야속하고 무정한 사람. 당신은 나를 버리고,
   그래서 나는 밤거리를 해매는 신세가 되었지만,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는 당신을 동정합니다. 모든 비극은 나 한 사람으로
   끝내고 부디부디 새 사람이 되세요. 참된 인간이 되세요.

2.좋다할 때 뿌리치고 싫다할 때 달겨드는 모를 것 이내 마음
  죄 없는 그 사람 울려 놓고 본체 만체 왜 했던고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내 청춘

 

 

 

 

 

 

 

 

 

남인수(南仁樹, 1918~1962)

 

대중 가수. 한국(韓國) 가요사상(歌謠史上) 제1세대 가수. 세칭(世稱) '가요 황제(歌謠皇帝)'.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晉州) 출생. 아명(兒名)이 '최창수(崔昌洙)'라는 설(說),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강씨 문중(姜氏門中)에 입적(入籍)되었다는 설 등이 구구(區區)하게 전해 온다.

 

본명(本名)은 '강문수(姜文秀)'로, 궁핍(窮乏)한 가정 형편 속에서 불운(不運)의 유년 시절(幼年時節)을 보내고 진주 제2공립심상소학교(現 '진주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이 부분에서도) '가난과 구박을 못 이겨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전구 공장(電球工場)에 취직하였다는 설(說), 이 곳 저 곳 떠돌며 소년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는 설(說), 10대 후반 제철 공장(製鐵工場)에 취업하기도 했다는 설(說), 일본에서 동해상업학교(東海商業學校)를 졸업했다는 설(說) 등(等)이 분분(紛紛)함?,

 

18세(1936) 되던 무렵, 당시 모(某) 항일 운동 비밀 결사 단체(抗日運動秘密結社團體)에 관여하고 있던 한 지인(知人)의 주선(周旋)으로 중국(中國) 항주군관예비학교(杭州軍官豫備學校) 입교(入校)를 은연(隱然)히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一環)으로 중국어(中國語) 공부를 하기 위해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星州)를 들렀다가?이 때 마침 항일(抗日) 문학 서클에 가입해 일제(日帝) 당국의 "要視察者名單"(요시찰자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성주농업학교 학생 이갑룡(李甲龍, 약 2 년 뒤에 가수로 데뷔하게 되는 '백년설'의 초명) 등과도 교유(交遊)하게 됨?,

 

뜻밖에도 그 지인(知人)의 피검(被檢) 소식(消息)을 접(接)하게 되어 면회차(面會次) 대구(大邱)에 나와 있던 중, 인편(人便)으로 기별(寄別)을 띄운 동향(同鄕) 출신(出身) 작곡가(作曲家) 탁성록(卓星祿, ?~?)의 부름을 받고 급거(急遽) 상경(上京),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작사가(作詞家) 박영호(朴英鎬, 예명 '처녀림·불사조' 등), 작곡가(作曲家) 박시춘(朴是春, 1913~1996) 등을 만나게 되고, 그의 노래 솜씨에 쾌재(快哉)를 부르며 경탄(警歎)한 두 작가(作家)의 전격적(電擊的)인 발탁(拔擢)으로 '눈물의 해협(海峽)', '비 젖는 부두(埠頭)' 등을 취입(吹入)함으로써 가수 생활로 들어서게 된다.

 

 그 후 작사가(作詞家) 강사랑(姜史浪, 1911~1980)에 의해 오케레코드로 '스카웃'되어 예명(藝名)을 '남인수(南仁樹)'로 하고 '범벅 서울'(1936),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1936)', '항구의 하소'(1937), '눈물의 사막 길'(1937) 등을 발표하여 세인(世人)의 주목(注目)을 받으면서 박시춘(朴是春)과 다시 조우(遭遇), 그가 작곡한 '물방아 사랑'(1937), '인생 극장(人生劇場)'(1937), '유랑 마차(流浪馬車)'(1937), '천 리 타향(千里他鄕)'(1937), '거리의 순정(純情)'(1937), '잘 있거라'(1937), '북국(北國)의 외론(=외로운) [客]'(1937) 등을 잇달아 히트, 일약(一躍) '스타덤'에 올라서게 됨으로써, 차후(此後) 박시춘과 함께 세칭 '명 콤비'로서 한국 대중 가요사(韓國大衆歌謠史)에 우뚝한 산맥(山脈)의 형성을 예고하는 결정적 계기와 발단을 마련하게 된다.

 

 '범벅 서울'은 답답한 시대 현실을 뛰어넘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청춘[젊음]의 열정과 사랑, 술과 낭만이 서양(西洋) 춤과 노래·율동·패션 등으로 '범벅'이 된 채 넘쳐흐르던 1930년대 초·중반 당시 서울의 거리 풍경을 노래한 것이며, '물방아 사랑'은 황금(黃金)에 멍들어 속절없는 사랑에 빠져 버린 기녀(妓女)의 애련(愛戀)을 통해 허망(虛妄)하고 무상(無常)한 세상(世上) 인정(人情)과 사랑[愛戀]의 모습을 노래함으로써 시대상(時代相)과 맞물려 크게 인기를 끌었고, '인생 극장(人生劇場)'은, '백사지(白沙地)' 같은 황폐한 현실 속에서 허황한 꿈[미망(迷妄), 미혹(迷惑), 미신(迷信), 요행수(僥倖數/?幸數) 등]을 좇아 속이고 속으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어리석은 삶과, 변덕(變德)과 풍파(風波)와 암흑(暗黑)의 세상(世上)을 정신없이 휘젓고 더듬으며 가면(假面)을 쓴 채 연극(演劇)을 하듯이 마음에도 없는 비극(悲劇)을 억지로 꾸며서 스스로에게 짐을 지워야 하는 허망(虛妄)한 인생을 노래함으로써, 식민지(植民地) 시대(時代)를 살아 가는 민생(民生)의 허무(虛無)하고 슬픈 정한(情恨)을 은유(隱喩)로 담아 낸다.

 

 이 해(1937년) 12월에는 '눈물의 해협'을 개사(改詞)한 '애수(哀愁)의 소야곡(小夜曲)'이 출반(出盤)되어 '공전(空前)의 대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이난영(李蘭影) 등과 함께 가요계 최고 스타로 급부상(急浮上), '대중 가수 제1호'라는 채규엽(蔡奎燁), 서너 해 앞서 등장하여 '타향(뒤의 '타향살이')', '짝사랑' 등을 불러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는 고복수(高福壽) 등의 인기(人氣)가 일거(一擧)에 퇴조(退潮)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애수의 소야곡'은, "이 밤"으로 표상(表象)되는 현실(現實), 즉 암흑 시대(暗黑時代)에 부재(不在)하는 "사랑·청춘" 등의 상실(喪失)한 대상(對象)을, "눈물·애타는 숨결·외로운 흐느낌" 속에서 찾아 헤매는 서정적(抒情的) 자아(自我)의 애처롭고 고적(孤寂)한 내면적(內面的) 침잠(沈潛)과 달관(達觀)한 듯한

 

자기 위무(自己慰撫)의 애련(哀憐) 정서(情緖)를 담은 노랫말로써, '상실의 시대'를 사는 민족(民族)의 보편적(普遍的) 정서(情緖)에 직핍(直逼)함은 물론, 이전(以前)의 여느 가수(歌手)와도 확연(確然)히 다른 발군(拔群)의 세련미(洗煉味)·신선미(新鮮味)를 갖춘 미성(美聲)에 실려 은근(慇懃)히 다가드는 애처롭고 구수한 맛과 호소력(呼訴力), 어루만지듯 속삭이듯 울려 오는 가창(歌唱)의 마력(魔力) 등에 의해 "외로이 잠 못 드는" 민족(民族)의 가슴을 촉촉히 적시게 하면서 위안(慰安)의 공감대(共感帶)를 폭넓게 형성(形成)해 냄으로써, 음반 판매고(音盤販賣高)에서도 최고의 기록을 갱신(更新)하며 끝도 없이 애창되었다.

 

 이어서 '미소(微笑의 지평선(地平線)'1938), '장전(長箭) 바닷가'(1938), '꼬집힌 풋사랑'(1938), '청노새 탄식'(1938), '외로운 푸념'(1938), '얼마나 행복일까요'(1938), '울리는 만주선(滿洲線)'(1938), '항구(港口)마다 괄세[恝視]더라'(1938), '기로(岐路)의 황혼(黃昏)'(1938), '제3 일요일(第三日曜日)'(1939), '정한(情恨)의 국경(國境)'(1939), '인생(人生) 간주곡(間奏曲)'(1939), '오로라(aurora)의 눈썰매'(1939), '청춘 야곡(靑春夜曲)'(1939), '감격 시대(感激時代)'(1939), '꿈인가 추억인가'(1939), '뒷골목 청춘'(1939), '초록색 해안선(海岸線)'(1939), '눈물의 태평양(太平洋)'(1939), '항구 일기(港口日記)'(1939), '항구의 청춘시(靑春詩)'(1939), '안개 낀 샹하이(上海)'(1939), '울며 헤진 부산항(釜山港)'(1939) 등 히트 곡을 연발하면서 1930년대를 가요의 황금기로 장식하는 데 주역(主役)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꼬집힌 풋사랑'은 제1절을 통해 가해자(加害者), 즉 배덕(背德)·배신자(背信者)의 내뱉듯 쏟아 내는 자학적(自虐的)인 선언(宣言) 내지 변명(辨明) 같은 것이 계속(繼續)되다가 재2절부터 대사(臺詞) 부분까지는 피해자(被害者), 즉 기녀(妓女)의 처절(悽絶)한 독백(獨白)이 항변(抗辯)인 듯 하소연[호소(呼訴)]인 듯 이어지고, 제3절에 이르러서는 피해자(被害者)의 골수(骨髓)에 사무치는 처절(悽絶)한 회한(悔恨)의 눈물을 내레이션으로 보여 주는바, 일차적(一次的)으로는 기녀(妓女)의 숙명적(宿命的)이고도 기구(岐嶇)한 '풋사랑'을 노래한 듯하면서도,

 

기실(其實) 일본 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의 꾐(속임수)에 넘어가 결국 헤어나지 못할 지경(地境)의 사련(邪戀)['풋사랑']에 범접(犯接), 밀착(密着)해 버린 부일(附日) 매국노(賣國奴)가 그나마 마음의 심층(深層)에 남아 있는 일말(一抹)의 본심(本心) 때문에 느끼는 일제(日帝)에 대한 배신감(背信感)을 숨기지 못한 채 통절(痛切)한 자학적(自虐的) 회한(悔恨)에 젖어 괴로와하는 심경(心境)을 연출자적(演出者的) 관점(觀點)에서 풍자(諷刺)한 것으로 보이는가 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 존재(人間存在)에 잠재(潛在)해 있는 본질적(本質的)·근원적(根源的)인 모순(矛盾)과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인생(人生) 역정(歷程)에서 자칫 빠지기 쉬운 '사랑'의 원죄론적(原罪論的) 공범 의식(共犯意識) 같은 것을 담고 있기도 하는 등의 함의(含意)가 많은데다

 

타고난 미성(美聲)에 절절(切切)한 호소력(呼訴力)을 담은 독보적(獨步的) 가창력(歌唱力)으로 폭발적(爆發的)인 인기(人氣)를 모았으며, '울리는 만주선(滿洲線)'은 '북국(北國)의 외론 손'과 맥락(脈絡)을 같이하는 노래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931년 9월에 중국 동북 지방 침략 전쟁을 일으켜 괴뢰(傀儡)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일제(日帝)가 스스로 그 행위를 "만주 사변(滿洲事變←支那事變)"으로 개칭한 이후 10 년 간 이어 가는 중국 침략 전쟁의 깊은 수렁,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후방의 보급 창고" 격으로 완전히 병참 기지화(兵站基地化)한 조선 강토(朝鮮疆土),

 

한편으로는 "만주국 건국"과 함께 "대대적으로 장려하는 조선인의 만주 이민 정책" 강제 추진, 유랑인(流浪人)의 자의적(恣意的) 이주(移住)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한 '대규모 강제 집단 이주 정책(大規模强制集團移住政策)' 등을 사회적·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정든 고향 땅을 눈물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떠나야 하는 유랑민(流浪民)의 설움 위에 덮쳐 오는 불확실성(不確實性)과 전도(前途)에 대한 예측 불허(豫測不許)의 만주행(滿洲行) 기차(汽車) 안에서 표출되는 자포자기적(自暴自棄的) 불안 심리(不安心理)와 착잡(錯雜)한 내면적(內面的) 갈등(葛藤) 등을 직·간접적(直間接的)으로 표출(表出)한 노래로서

 

일제(日帝)에 대한 민족적(民族的) 반감(反感)을 대변(代辯)했고, '감격 시대(感激時代)'는 이미 '신춘(新春)의 도래(到來)'를 예언(豫言)했던 '기미년(己未年) 선언(宣言)'의 '감격(感激)'이 있은 이래(以來) 한 동안 침체(沈滯)와 칩거(蟄居)의 시대를 넘어 이제 일제(日帝)의 '중일 전쟁(中日戰爭, 1937.7)' 도발(挑發)로 조선 민중(朝鮮民衆) 사이에서 확신(確信)에 근접하며 예단(豫斷), 회자(膾炙)되던 '일제 패망'―'조국 광복'의 고무적(鼓舞的)인 분위기가 전쟁 경과(經過) 2 년에 가까워지는 시점(時點)에서 더욱 확고(確固)하게 적중(敵中)되어 가는 시대적(時代的) 기운(機運)과 아울러

 

기미년(己未年) 그 해로부터 꼭 20 년 만에 맞이하는 의미(意味) 깊은 새 봄[신춘(新春)]의 도래(到來)라는 새로운 하나의 '감격(感激)'을, "환희(歡喜)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의 "속삭이는 미풍(微風)", "(희망에) 불타는 눈동자", 피압박 민족(被壓迫民族)이 지닌 유일(唯一)한 자산(資産)이라 할 "내일(來日)의 청춘(靑春)"·"정열(情熱)의 바다"·"희망(希望)의 대지(大地)"·"꽃 피는 마을" 등으로 더없이 강렬(强烈)하게 압축(壓縮)된 심상[이미지]의 노랫말을 대륙적(大陸的)인 구도(構圖)와  행진곡풍(行進曲風)의 가락에 얹어 노래함으로써 일제 당국(日帝當局)의 검열(檢閱)의 눈을 보기 좋게 속이고 따돌리며

 

민중(民衆)에게 새로운 '힘[활력(活力)]'을 선사함과 더불어 참신(斬新)한 시의성(時宜性)과 시대 감각(時代感覺)·다의성(多義性) 등을 한껏 뿜어내면서 묘(妙)한 여운(餘韻)을 단 채 '참요(讖謠)'인 듯이 애창(愛唱)되기 시작했다. 또, '울며 헤진 부산항(釜山港)'에는 일제(日帝)의 온갖 수탈(收奪)과, "징병(徵兵)·징용(徵用)·징발(徵發)" 등쌀에 견딜 수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정든 고향 땅을 뒤로한 채 해외(海外)로 떠나고 끌려가는 절박(切迫)한 상황(狀況) 하(下)에 뿌리뽑힌 유랑민(流浪民) 신세(身世)로 전락(轉落)한 이 땅의 가련(可憐)·처절(悽絶)한 식민지(植民地) 민생(民生)의 모습이 투영(投影)되어, 피압박(被壓薄) 민중(民衆)의 한(恨)이 많은 이별(離別) 내지 고별(告別)의 노래로 한(限)없이 불렸다.

 

 1940년대에 들어서 더욱 가속화(加速化)되는 일제(日帝)의 최후(最後) 발악(發惡) 속에서도, '일홈이 기생(妓生)이다'(1940), '꽃없는 화병(畵甁)'(1940), '진주(晋州)의 달밤'(1940), '눈 오는 부두'(1940), '불어라 쌍고동(雙鼓動)'(1940), '인생(人生) 네거리'(1940), '눈 오는 네온가(neon街)'(1940), '무너진 오작교(烏鵲橋)'(1940), '분(粉) 바른 청조(靑鳥)'(1940), '수선화(水仙花)'(1941), '여인 행로(女人行路)'(1941), '추억(追憶)은 상록수(常綠樹)'(1941), '처(妻)의 면영(面影)'(1941), '무정 천 리(無情千里)'(1941), '청춘 항구(靑春港口)'(1941), '집 없는 천사(天使)'(1941), '인생'(1941), '포구(浦口)의 인사(人事)'(1941), '인생 출발'(1941), '비 오는 상삼봉(上三峰)'(1941), '달려라 노새'(1941), '황성(荒城) 옛터'(1941), '지평선(地平線)아(1942)', '낙화유수(落花流水)'(1942), '남매(男妹)'(1942), '인생선(人生線)'(1942), '청년 고향(靑年故鄕)'(1942), '어머님 안심하소서'(1942), '서귀포 칠십 리(西歸浦七十里)'(1943). '남아 일생(男兒一生)'(1943), '일가 친척(一家親戚)'(1943.12) 등의 민족 의식(民族意識)과 시대 감각(時代感覺)·시의성(時宜性)이 탁월(卓越)한 노래 800여 곡을 불러 크게 인기(人氣)를 모으는 동시에, '오케 그랜드쇼'(일명 '조선 악극단')의 톱 스타로 무대에서도 화려한 활동을 펼치는 한편, 남만주(南滿洲)·중국(中國) 일대(一帶)를 누비는 순회 공연(巡廻公演)도 활발하게 병행(竝行)했다.

 

 이 즈음을 전후하여서는,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할 때마다 청중(聽衆)의 "재창['앙코르']" 요청(要請)이 쇄도(殺到)하는 가운데 진행자(進行者)가 다음 순서(順序)로 넘어가게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인기(人氣)가 가(可)히 폭발적(爆發的)이었다. '황성 옛터'는 15 년 전인 1926년, 당시로서는 '아마추어'에 불과한 '막간(幕間)의 여가수(女歌手)' 이애리수(李愛利秀)가 처음 부르기 시작하여 1932년에 빅터레코드에서 취입했던 '황성(荒城)의 적(跡)'을, 1941년 12월에 이 노래의 작사자(作詞者)인 왕 평(王平)의 사후(死後) 업적(業績)을 기리고 추모(追慕)하는 뜻으로 취입하는 음반(오케레코드)

 

'오호(嗚呼)라 왕 평(王平)'의 출반을 계기로 제명(題名)을 "황성 옛터"로 바꾸고 본격적(本格的)인 '프로 가수'의 목소리로 새롭게 취입함으로써 노래의 분위기가 남성(男聲)으로 일신(一新)되어 더욱 중량감(重量感)을 싣고 널리 불리는 기반(基盤)을 마련했으며, '낙화유수(落花流水)'는 자연의 순환 이치에 따라 도래(到來)한 춘삼월(春三月)의 풍정(風情)을 맞아 피어오르는 청춘(靑春)의 꿈과 낭만이라는 풍부(豊富)한 서정성(抒情性)·풍류성(風流性)의 이면(裏面)으로 숨길 수 없이 엄습(掩襲)해 오는 인생(人生)과 세월(歲月)의 덧없음[무상감(無常感)]·서글픔 등이 시대상(時代相)과 결합(結合)되어 폭(幅) 넓은 공감(共感)을 환기(喚起)함으로써 널리 불리는 명가요(名歌謠)가 되었고,

 

'서귀포 칠십 리(西歸浦七十里)'는 본래의 순결하고 정갈한 제 모습만큼은 기필코 지니고 있어야 할 조국 강토(祖國疆土)의 궁벽(窮僻)한 무명(無名) 어촌(漁村) 서귀포(西歸浦)도 불행(不幸)한 시대(時代)의 마수(魔手)가 할퀸 상흔(傷痕)에서 초연(超然)히 온존(溫存)할 수 없는 애처롭고 적막(寂寞)한 현실과 서글픈 심사(心思), 상실(喪失)해 가는 것에 대한 애달픈 향수(鄕愁), 형언(形言)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그리움[憧憬]의 정서(情緖) 등을 착잡(錯雜)하게 압축(壓縮)해 있는 노랫말과 구슬픈 서정적(抒情的) 가락에 실어 전(傳)한 것으로 식민지 시대(植民地時代) 최후(最後)의 대표적(代表的) 저항 가요(抵抗歌謠)인 동시에 불후(不朽)의 명가요(名歌謠)가 되었으며, '청년 고향(靑年故鄕)', '어머님 안심(安心)하소서', '남아 일생(男兒一生)', '일가 친척(一家親戚)' 역시 고향(故鄕)과 모정(母情)을 향한 귀소 의식(歸巢意識), 민족(民族)[피붙이]의 뿌리에 대한 짙은 애착(愛着)을 드러냄으로써 역시 일제 강점기 최후의 저항 가요가 됨은 물론이다.

 

 이보다 수년(數年) 앞서 패색(敗色)이 짙어 오던 일제(日帝)는, 드디어 1941년 말(末)에 '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 신질서(新秩序) 구축(構築)'이라는 참람(僭濫)한 구호(口號)를 앞세우고 단말마적(斷末魔的) 발악(發惡)을 가장(假裝)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1941.12.)'을 도발(挑發), 이 땅의 애국 지사·민족 지도자 들은 물론 문화 예술인들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간교(奸巧)한 폭압(暴壓)의 감시망(監視網)을 쳐 놓고는, 일찌감치(1937년 '중일전쟁' 시국) '전시 동원 체제'임을 내세워, 소위(所謂) '시국가(時局歌)'·'국민가(國民歌)'·'국민 가요(國民歌謠)'·'애국가(愛國歌)'·'주제가(主題歌)'·'개병가(皆兵歌)' 등의 이름으로 '서양 음악(양악)'계를 폭압(暴壓) 강제(强制)한 뒤에는,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중 음악'계에 대해서도 '유행가(流行歌)'라는 장르 구분을 전면(全面) 철폐(撤廢)하는 와중(渦中)에 급조(急조)된 '가요곡(歌謠曲, 오케·태평레코드 등)', '신가요(新歌謠, 콜럼비아레코드 등)' 따위의 이름으로 그들 '전시 동원 체제(戰時動員體制)의 시국(時局)'을 찬양(讚揚), 고무(鼓舞)하는 목적 가요(目的歌謠) 제작에 혈안(血眼)이 됨으로써, 드디어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대중 연예인(작사·작곡가·가수)들에게도 생사(生死)의 기로(岐路)를 헤매게 하는 '기예증(技藝證)' 발급 제도, 피를 말리는 검열(檢閱) 제도(制度)에다, '징병제(徵兵制) 실시와 징용(徵用)·정신대(挺身隊) 징발(徵發)' 등의 온갖 간악(奸惡)하고 비열(卑劣)한 위협 수단을 구사(驅使),

 

나라 잃은 설움을 안은 채 의지할 곳 없는 대중 연예인(大衆演藝人)들도 강제 동원(强制動員)되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의 설움과 시대(時代)의 울분(鬱憤)을 은밀(隱密)히 담은 '유행가(流行歌)' 성격(性格)의 노래를 교차(交叉), 혼효(混淆)시켜 취입(吹入)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이전(以前)부터 참요(讖謠)인 양 불러 오던 노래 모양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촌극(寸劇) 연출'의 곤욕(困辱)을 감내(堪耐)해야 했고, 이후(1944)부터는 일체(一切)의 음반 취입을 봉쇄(封鎖)당한 채, 광복(光復) 때까지 간헐적(間歇的)인 공연 활동으로 간신히 버텨 내는 암흑기(暗黑期) 속의 암흑기(暗黑期)를 헤매야만 했다.

 

 광복(光復)이 되자, 극심한 자재난(資材難)으로 음반 제작이 불가능한 현실 여건 속에서도 활동은 바로 이어져 가요계 최초로 '희망 삼천 리(希望三千里)'(1945)를 불러 '조국 광복의 환희 속의 새로운 결의(決意)'를 다지는가 하면, '가거라 삼팔선(三八線)'(1946)으로 느닷없이 다가오는 조국 강토(祖國疆土)의 분단(民族分斷)과 민족 이산(民族離散)의 통한(痛恨)을 노래하여 온 겨레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동시에, 제국주의(帝國主義)가 일으킨 '회오리 바람'이 그친 뒤에 잠이 든 듯 고요해진 아시아의 밤을 헤치고 대륙(大陸) 북방(北方)의 끝없는 벌판을 징기스칸의 꿈을 싣고 한없이 가고 싶다는 '몽고(蒙古)의 밤'(1947)에 이어, 이른바 '찬탁(贊託)'·'반탁(反託)' 등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좌우' 이념) 대립으로 정치적(政治的) 분열(分裂)마저 더욱 심각(深刻)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는 '달도 하나 해도 하나'(1947)로써 이 겨레가 하나의 혈맥(血脈)으로 뻗어내린 단일 민족(單一民族)이요

 

단일 역사(單一歷史)를 지녀 온 터에 결코 '둘'이 될 수 없음을 호소(呼訴)하여 또 한 번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가 하면, '망향(望鄕)의 사나이'(1948), '흘러온 남매(男妹)'(1948), '흘겨본 삼팔선(三八線)'(1948) 등의 '연타(連打)'로 분단 상황(分斷狀況)의 비극(悲劇)에 대한 통한(痛限)을 줄기차게 반추(反芻)하기도 하고, 크게 잘못된 이데올로기 대립('여순반란사건(麗順叛亂事件)')의 희생물(犧牲物)로 전락(轉落)한 어느 아낙네의 피맺힌 절규(絶叫)와 넋두리를 대변(代辯)한 '여수 야화(麗水夜話)'(1949)를 비롯하여, '해 같은 마음'(1949), '고향 산천(故鄕山川)'(1949) 등으로 절실(切實)한 현실 인식(現實認識)과 시대상(時代相)을 예리(銳利)하고 적확(的確)하게 집어 내 반영하는 그의 특징은 한결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950년에 발발(勃發)한 동족 상잔(同族)의 비극(悲劇) '6·25' 전란 중(戰亂中)에도 '한(恨) 많은 누님'(1950), '4백 환(四百?)의 인생 비극(일명 '한 많은 네 청춘')'(1950), '향수(鄕愁)(1952)', '청춘 무성(靑春茂盛)'(1952) 등으로 시대(時代)의 아픔과 삶의 정한(情恨)을 노래하면서도 그것을 희망(希望)과 의지(意志)의 환기(喚起)로 극복(克服)해 나가려는 몸부림 속에서, 1953년에는, 오랜 동안의 피란(피난)살이를 끝낸 후의 환도(還都)·환고향(還故鄕)과 이별(離別)의 희비(喜悲)가 교차(交叉)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담은 또 하나의 대표적 절창(絶唱) '이별(離別)의 부산 정거장(釜山停車場)'의 '빅 히트'로 전후(戰後)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피폐(疲弊)한 사회적(社會的) 여건(與件) 속에서도 음반(音盤) 판매고(販賣高) 10만여 장을 훌쩍 뛰어넘은 경이(驚異)로운 기록(오늘날의 2천만 장에 필적할 만함)을 세우며 건재(健在)를 과시(誇示)함은 물론,

 

 다시 한 번 거의 '절대적(絶對的)'이라 할 인기(人氣)로 '제2기 황금 시대'를 만들어 가게 되는바, 연타(連打)하게 되는 '고향은 내 사랑'(1953), '추억(追憶)에 운다'(1953), '미련(未練)만 남았소'(1953), '청춘 고백(靑春告白)'(1953), '고향의 그림자'(1954), '기다리겠어요'(1954), '가을인가 가을'(1954), '추억(追憶)의 소야곡'(1955), '휴전선(休戰線) 엘레지'(1955), '내 고향 진주(晋州)'(1956), '산유화(山有花)'(1956), '청춘 무정(靑春無情)'(1956),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재취입 음반 표제 '임의 통곡')'(1956), '무정 열차(無情列車)'(1956), '작별(作別)'(1956), '춘정(春情=눈물진 봄아가씨)'(1956), '낭자(娘子)의 눈물'(1957), '어린 결심'(1957), '불효자의 하소'(1957), '다정(多情)도 병(病)이런가'(1957), '울리는 경부선(京釜線)'(1958), '고향 친구'(1958), '인생의 귀향지'(1959), '4월의 깃발'(1961), '무너진 사랑탑'(1961), '눈 감아 드리오리'(1962) 등의 수많은 히트 곡들이 이를 더욱 확고히 뒷받침해 준다.

 

 민족(民族)의 극한적(極限的)인 수난 시대를 살아 오는 와중(渦中)에서 울분(鬱憤)으로 응어리진 지식(知識)·문화 예술인(文化藝術人)들 사이에 유행(流行)처럼 만연(蔓延)되었던 폐결핵(肺結核)을 시대와 역사의 짐인 양 온몸으로 안은 채 버티어 오다 1962년 6월 26일 타계하기까지 30 년 가까운 그의 가요 인생은 한결같이 찬란(燦爛)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오거니와, 최초(最初)의 '한국연예협회장(韓國演藝協會葬)'으로 치러진 그의 영결식(永訣式)과 장의 행렬(葬儀行列) 또한 모든 가요계(歌謠界) 인사(人事)·연예인(演藝人),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수많은 일반 국민(一般國民)들로 충무로(忠武路) 상가(喪家)에서부터 태고사(='조계사', 당시 중동고·숙명여중고 앞) 영결식장은 물론, 장지(葬地)로 향하는 홍제동(弘濟洞) 고개 너머까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던 것으로 또한 유명하다.

 

 광복 후(光復後)부터는 작곡가 박시춘(朴是春)과 함께 '제7천국', '은방울 쇼' 등을 조직, 운영하기도 하고, 직접 음반사('아세아레코드사')를 설립(1949), 운영하는 등 '쇼 비지니스 맨'으로서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6·25 전란 중에는 국방부(國防部) 정훈국(政訓局) 선전과(宣傳課) 직속(直屬) 문예 중대 제2소대 소속 문관(文官)으로 종군(從軍)하면서 군을 위문하는 데 앞장섰고, 전란(戰亂) 이듬해(1951)에는 백인엽(白仁燁) 장군 휘하의 제주도 모슬포 제1훈련장에 입대하여 '늦깎이 군대 생활'도 했다.

 

'대한(한국)가수협회' 초대 회장(1958),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1960), '한국무대예술협회' 이사(理事),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1961) 등을 역임하였으며, 역사상(歷史上) 박해(迫害)와 수난(受難)이 극심(極甚)했던 시대를 헤치면서 1,000여 곡이 넘는 방대(尨大)한 가요를 불러 남겼을뿐더러, 30 년 가까이 침체기(沈滯期) 없는 히트곡 연발의 찬란(燦爛)한 활약상(活躍相)을 펼쳤다는 면에서 '가요사상(歌謠史上)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록을 남긴 가수(歌手)'였기에,일찍이 호칭이나 별칭에도 매우 까다롭고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던 그 시대에 어느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이해 관계을 초월, '가요 황제(歌謠皇帝)'라는 세평(世評)이 저절로 따라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특히 일제 강점(日帝强占)의 시대(時代)에 그가 부른 노랫말의 대부분을 작사(作詞)했던 시인(詩人) 조명암(趙鳴岩, 본명은 조영출, 예명이 조명암·금운탄·이가실·김다인 등)을 비롯, 박영호(朴英鎬, 예명 '처녀림·불사조' 등) 등의 광복 직후(光復直後) 월북 사건(越北事件)이 있고, 대한민국(=남한 단독) 정부 수립 직후(1948. 11~12), '승공(勝共)·멸공(滅共)'의 기치(旗幟)를 높이 든 자유당 정권(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치안관계법'에 의한 '가거라 삼팔선' 제1절 끝 부분 노랫말("헤맨다") 시비(是非) 및 개사(改詞) 강요(强要) 등과 '월북 작가(越北作家)'―광복 직후, '이북(以北) 땅이 문화 예술 활동의 천국(天國)이 될 것'이라는 공산당의 선전(宣傳)·선동술(煽動術)에 속아서 북(北)으로 간 대부분의 문화 예술인―관여 작품의 상당수에 대한 금지 조치의 발동(發動) 등 가요에 대한 당국(當局)의 직·간접적 간섭에 이어,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표방하며 등장한 5·16 군사 정권(박정희)이 1960년대 초·중반(1965.3.)부터 1970년대 중반(1974.4.∼1975.6.)에 이르기까지 '방송윤리위원회'(약칭 '방륜')·'예술문화윤리위원회(약칭 '예륜')'·'공연윤리위원회'(약칭 '공륜')·'방송심의위원회'(약칭 '방심') 등의 이름으로 이른바 '가요 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구체적·조직적으로 '월북 작가(越北作家)'가 관여(關與)한 가요(歌謠)부터 무조건(無條件) 금지(禁止)하는 바람에,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인생 극장(人生劇場)', '천 리 타향(千里他鄕)', '물방아 사랑', '잘 있거라', '꼬집힌 풋사랑', '청노새 탄식', '항구마다 괄세(←괄시)더라', '기로(岐路)의 황혼(黃昏)', '청춘 야곡(靑春夜曲)', '안개 낀 샹하이', '울며 헤진 부산항(釜山港)', '눈 오는 네온가', '무정 천 리', '청춘 항구', '포구(浦口)의 인사', '인생 출발', '낙화유수(落花流水)', '남매(男妹)', '인생선(人生線)', '어머님 안심하소서', '서귀포 칠십 리', '남아 일생(男兒一生)' 등 한 세대를 울렸던 그의 수많은 절창(絶唱) 명가요(名歌謠)들이

 

'모든 방송(放送)·음반(音盤) 및 가요 관계 출판물(出版物) 제작(製作)·유포(流布) 금지(禁止)'라는 제재(制裁)의 철퇴(鐵槌)를 맞아 사라지게 될 운명(運命)에 처하게 되자, 이에 위기 의식을 느끼며 명가요들을 지켜야 한다는 뜻을 가진 반야월(半夜月. '진방남'(가수). '추미림, 박남포, 허구, 고향초, 남궁 려, 백구몽, 옥단춘, 금동선'(작사가) 등의 예명을 지님) 등 가요계의 일부 유명 작사가(作詞家)나 작곡가들은 원작자(월북 작가)의 이름을 사실상의 가공 인물(架空人物) 이름로 바꾸는가 하면 노랫말에 나오는 삼팔선(三八線) 이북(以北)의 지명(地名)까지 금기(禁忌) 대상(對象)에 넣고

 

남한(南韓)의 지명으로 급조(急造)하는 등의 개·보사(改補詞) 및 편곡(編曲)을 서둘러 단행(斷行)하게 됨으로써 1980년대 말(1988.5.)까지 무려(無慮) 한 세대(世代)가 훨씬 넘는 기간(期間)에 걸쳐 한국 가요사(韓國歌謠史)는 정통 명맥(正統命脈)이 단절(斷絶)되다시피 하는 일대 훼손(一大毁損)의 비색(丕塞)한 운명(運命)을 맞게 된다. 반면(反面)에, 애당초 대중적(大衆的) 호응(呼應)을 크게 받지 못했던 노래가 그런 와중(渦中)의 틈새[공간]를 비집고 예외(例外)처럼 뒤늦은 유행(流行)의 물결을 타는 이변(異變)이 나타나기도 하는데?대표적인 예(例)로서는, 당시 이북(以北)의 지명(地名)이 등장하면서도 유일하게 개사(改詞) 대상(對象) 리스트에 오르지도 못할 만큼 관심 밖이었으나,

 

1957년 1월 중순부터 '음악방송위원회'('가요심사위원회'의 전신)를 구성하고 대중 가요 심의 제도(大衆歌謠審議制度)를 북한 방랑기') 시그널 뮤직으로 채택, 감미로운 아코디언 선율에 실어서 거의 매일 방송 전파를 타게 함으로써 널리 알려처음으로 만들었던 KBS('서울중앙방송국')가 일찌감치(1964.5.18.) 라디오의 일일(日日) 반공(反共) 단막극(정식 명칭 '5 분 드라마 김삿갓 지게 된 '눈물 젖은 두만강'(1938, 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을 비롯하여, 후배 가수 김용만(金用萬, 1950년대 후반 등장. '효녀 심청'. '남원의 애수'. '청산유수', '여반장', '삼등인생', '정열의 차차차', '인생은 물레방아' 등 히트곡 다수),

 

1960년대중반에 대거 등장하여 인기를 얻기 시작한 남성 중창단('봉봉4중창단'·'불루벨즈'·'쟈니부라더스')들에 의해 리바이벌됨으로써 널리 불리게 된 '바다의 교향시(交響詩)'(1938) 등을 들 수 있는바, 이는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의 명가요들에 익숙한 구세대(舊世代)의 갈증(渴症)을 그나마 풀어 줄 수 있는 '대타(代打)' 격(格)으로서 늦바람을 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過程)에서 정작, 이전(以前)의 명가요들은 대중의 뇌리(腦裏)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듯한 세월이 이어지다가, 해금(解禁)된 1980년대 말(末)부터 표면적으로는 명맥(命脈)이 간신히 되살아난 것이지만, 이미 훼손(毁損), 단절(斷絶)되다시피 한 가요사(歌謠史)를 복원(復元)하는 데 그 역량의 한계를 특히 많이 안고 있는 전파 매체(라디오·텔레비전 등)의 '한국적(韓國的) 속성(屬性)'이라든지 '모창 음반'의 횡행(橫行)으로 대중의 귀를 뜨이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가,

 

곧(199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면서) 이어지는 '노래방 문화'의 확산과 함께 그의 많은 명가요들의 이름이 다시 부각(浮刻)되기는 했으나, 노래 자체는 이미 생소(生疎)해진 상태가 되었고, 게다가 '다투어부르기 좋아하는 쪽'에 속하는 세대로의 급속한 교체(交替)가 진행되면서 이미 창법(唱法)이 단조롭고 안이(安易)한 곡(曲)의 노래가 휩쓸고 있는 시대로 접어든데다, 그의 노래는 특히 '흉내내어부르기[모창(模唱)]'도 어렵거니와 여간 뛰어난 가창력(歌唱力)이 아니고서는 노래 자체를 망쳐 놓기 십상(十常)인 고난도(高難度)의 다이내믹한 가락이 대부분이라는 특성 등의 허다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많은 노래가 더욱 오랜 세월 동안 묻혀 버린 듯한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실로 반 세기(半世紀)가 넘게 경과(經過)해 버린 1990년대 후반부터 소수(小數)의 특정(特定) 음반사(音盤社)들에 의해 SP음반(속칭 '유성기판') 수집(蒐集)과 원음(原音)의 복각(復刻)이 '불완전(不完全)하게나마' 이루어진 것을 기폭제(起爆劑)로 하여 제2세대(第二世代) '올드 팬'을 비롯한 메니어(mania) 층(層)이 두껍게 형성(形成)되면서 다시 각광(脚光)과 주목(注目)을 받게 된다.

 

 그는 타고난 미성(美聲)에다 폭발(爆發)하는 듯한 발성법(發聲法), 듣는 이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가창력(歌唱力)으로 타(他)의 추격(追擊)을 불허(不許)함으로써, '가요 황제(歌謠皇帝)'라는 자연스런 애칭 외에, '가요계(歌謠界)의 기린아(麒麟兒)', '불세출(不世出)의―100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가수(歌手)', '영원 불멸(永遠不滅)의 청년 가수(靑年歌手)', '만년 가수(萬年歌手)', '서정 가요(抒情歌謠)의 대부(代父)', '가수(歌手)의 상징(象徵)', '가요사(歌謠史)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할 거성(巨星) 가수(歌手)' 등의 전설적(傳說的)인 세평(世評)들과 더불어 '판소리 등 국악(國樂) 명창(名唱)들까지도 주눅들게 하는 목소리'라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특히 "일본 본토에서는 왜 이만한 가수가 나오지 않는지 통한(痛恨)할 노릇이다.

 

참으로 100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가수다."라고 한 '일본 엔카[演歌]의 대부(代父)'라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의 자조(自嘲) 섞인 언급(言及) 등은 유명하다. 고음(高音)에서는 쇳소리가 울리듯 쟁쟁(錚錚)하고 카랑카랑하게 듣는이의 폐부(肺腑)를 파고드는가 하면, 저음(低音)에서는 속삭이듯 흐느끼듯 하면서 부드러움과 감미(甘味)로움을 안겨 주는 매혹적(魅惑的)인 미성(美聲), 폭발적(爆發的)이고 정열적(情熱的)이며 순발력(瞬發力)이 뛰어난 창법(唱法), 무려(無慮) '세[三] 옥타브(octave)'까지 거침없이 넘나드는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발성 능력(發聲能力), 정확한 가사 전달력(발음) 등은 거의 완벽성(完璧性)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評價)될뿐더러, 절망(絶望)과 실의(失意)에 빠졌거나 현실 생활(現實生活)에 지친 민중(民衆)에게는 활력(活力)을 실어 주는 마력(魔力)을 발휘(發揮)함으로써, 질곡(桎梏)의 시대(時代)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부터 그의 인기(人氣)는 거의 '절대적(絶對的)'이었다는 말로 흔히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사후(死後)에는 자연(自然)히 그의 노래를 모창(模唱)하는 후배(後輩) 가수(歌手)들, 이를테면 남강수(南江樹)?1950년대 말(末)에 미도파레코드사('지구레코드'의 前身)에서 '추억의 소야곡' 재취입(모창)을 위해 기용(起用)한 가수로서 초기에는 '이청봉(李淸峰)'으로 음반 레이블에 자세한 배경과 함께 기재되었던 가수?를 비롯해서(아예 '남인수'라는 이름으로 모창 음반을 내고 있음), 김광남(金光男), 고대원(高大遠) 등이 대거(大擧) 등장(登場)하여 '모창 음반(模唱音盤)'을 끊임없이 내놓음으로써 대중(大衆)의 귀를 현혹시키는가 하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음반사를 가리지 않으며 '남인수'라는 이름을 내걸고 음반에 그 목소리가 실린 무명(無名)의 모창 가수(模唱歌手)도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방송극(放送劇, 방송 드라마)이나 영화(映畵), 심지어 '…기록(記錄)', '…실록(實錄)' 하는 것들을 포함한 '다큐멘터리' 등에 삽입(揷入)되는 노래는 물론, 스테레오 시스템이 일반적 추세로 자리잡는 70∼80년대에는 거의 모든 방송(放送)에서 "남인수"의 이름을 빌린 정체(正體) 모를 목소리들이, 늘어지고 쳐진 목소리와 창법에 실려서 "남인수 노래(목소리)"로 둔갑(遁甲)한 채 판을 쳤거니와, 젊은 방송 제작자나 진행자 들은 이를 모른 채 "남인수 선생의 노래"라고 소개하면서 방송 전파에 싣는 '진풍경(珍風景)'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첨언(添言)해서 두말할 것도 없이, '남인수 모창 음반', 즉 '가짜 남인수 음반'은, 말하자면, 오늘날 여전히 기승(氣勝)을 부리고 있는 '익명(匿名)의 모창 가수(模唱歌手)를 이용한 음반(音盤) 제작(製作)·발매(發賣) 등의 원조(元祖)' 격(格)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후(死後)인 1960년대 초반부터, 각각(各各)의 음반사(音盤社)들끼리 그의 최종(最終) 취입곡(吹入曲)임을 내세우며 경쟁적(競爭的)으로 대표 타이틀에 올린 노래들이 출반(출盤)되기 시작했는데, 그 곡목(曲目)들로는, '4·19' 의거(義擧)에 목숨 바친 어린 학생들의 넋을 기린 '사월(四月)의 깃발'(미도파레코드 출반)을 비롯하여, '눈 감아 드리오리'와 '불효자(不孝子)는 떠납니다'(이상 아세아레코드사 출반), '한 많은 네 청춘'(프린스레코드사 출반), '고향등(故鄕燈)'(LKL레코드사 출반), '꽃 피는 청춘 마을'(오스카레코드사 출반) 등이 있거니와, 물론 어느것이 그의 최후 취입곡(最後吹入曲)인가를 확실하게 판단활 수 있는 자료는 현재로서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한 동안은, 그를 기리는 추모(追慕)의 열기(熱氣)가 고조(高調)되어, 1960년대 중반(中盤)부터, '선창(船艙)' 등을 부른 고운봉(高雲峰),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을 부른 박재홍(朴載弘) 등 후배 인기 가수들에 의해 가요계 최초로 '남인수 노래비' 건립안(建立案)이 제기되고, 1968년에는 '남양흥업'이란 영화사에 의해, 분단 상황(分斷狀況)에서 이산(離散)의 고통(苦痛)과 고독(孤獨)·모진 세파(世波)를 헤쳐 오며 '노래 인생'을 함께하던 이난영(李蘭影)과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강산 낙화유수'(감독 조길현, 극본 이두현, 제작 이지룡, 김진규·문정숙·김성호 등 출연)라는 영화가 제작, 개봉되기도 했으며,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여성 듀엣 '은방울자매'는 '진주의 눈물'(야인초 작사, 남기남 작곡)이란 노래을 불러 그를 기리기도 했다. 1981년에는 생전(生前)부터 그를 흠모(欽慕)하는 가수(歌手) 신해성(申海星)의 주도(主導)로 '예도 매미회'('남인수 기념 사업회'의 전신)가 결성되면서 '남인수 노래비' 건립(建立) 사업에 가속도(加速度)가 붙어 마침내 1987년 4월 5일에는 '애수(哀愁)의 소야곡(小夜曲)' 노래비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밤나무골 유원지에 건립되었다(1998년에는 제 8회 '남인수 가요제'를 계기로 하여 '서울 드림랜드'로 이전, 현재에 이름). 이보다 앞서(1980), 가수 신해성은 '아, 그 이름 남인수'(신해성 작사 , 박남춘 작곡)라는 노래를 취입하여 그를 기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그의 주도(主導)로 1991년(6. 26)부터는 해마다 '남인수 가요제'가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획기적인 일은, 2000년(9월)의 '남인수 팬클럽'('가요황제 남인수 전승 보전회'의 전신) 결성 초기부터 '남인수 전집'(제1차분, CD 8 장 및 172 쪽 분량의 책자 1 권)을 발간, 그가 취입해 남긴 가요(歌謠) 가운데, 우선 227 곡을 발굴, 정리하였다는 점이며, 2001년(6. 26)에는 세계적으로도 아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중 가수로서도 처음인, 한 독지가(篤志家)에 의한 '남인수(南仁樹) 동상(銅像)'의 건립?'진양호'(진주 남강 댐) 호반(湖畔)?이라 할 것이다.

 

 유적지로는 생가(生家. 진주시 하촌동 195번지 소재)가 아직 남아 있으며(문화재청(文化財廳)에 의한 '근대 문화 유산' 등록, '문화재 153호' 지정 고시<2005년 4월 15일자>), 진양 강씨(晉陽姜氏) 문중(門中) 소유의 산(山.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 소재)에 묘소(墓所)가 있다(2004년 4월, '남인수 팬클럽'에 의한 묘소 정화와 추모비 건립 완료).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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