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차주일
호모 부커스를 위하여
여름의 빛은 지나치게 강렬해서 견디기 힘들다. 어디에나 타오르던 그 빛들 덕분에 우리는 허무주의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집 근처 스타벅스로 나가서 한 나절 내내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책 한 권을 읽다 돌아온다. 폭염이 절정에 달하는 정오에 땡볕은 정수리를 달구고 지열은 뜨거운 입김을 얼굴에 불어준다. 갑자기 솟구치고 이리저리 튀는 빛들, 빛들, 빛들. 쇠꼬챙이처럼 뾰족한 그 빛들이 우리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말랑말랑한 내면을 단단한 벽돌처럼 굽는 여름의 빛이여! 빛의 난장들 속에서 우리는 부조리와 허무주의, 그리고 인생의 굴욕들에 굳세게 맞설 정도로 강했다.
자아의 성장과 도약을 독려하던 여름의 빛들이 사라진다. 동시에 태양과 직사광선을 연주하는 빛의 오케스트라가 끝나고 그 대신 도처에 그늘과 그림자들이 난민처럼 몰려와 자리 잡으면서 침울함이 번진다. 피서 인파가 지나간 해변은 텅 비어 버렸다. 한적한 해변에서는 소년 두어 명이 공을 차고, 질주 본능을 가진 개 한 마리가 신이 나서 달려간다. 해가 떨어지고 해변에 저녁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소년과 개들도 돌아가 해변은 텅 빈다. 해변을 어둠 속에 방치되는 것이다. 햇빛과 인파로 붐비던 초가을의 해변에 서 있으면 여름의 파국은 돌연하게 느껴지고, 마음 한 구석이 묽은 슬픔으로 서늘해진다. 아무도 여름의 파국을 수습할 수 없다. 그 파국을 손 놓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여름의 끝은 아이스커피와 수박과 복숭아, 그리고 몇 권의 책이 주는 달콤함을 더는 누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제 내면의 쇠약과 함께 우울증에 쉽게 감염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계절 끝자락의 멜랑콜리 속에서 우리는 더 자주 죽음과 고통 쪽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자, 저 멀리 떠나는 여름의 등 뒤에서 ‘안녕!’하고 인사를 하자.
여름이 끝나자마자 가을의 저녁들이 긴 팔에 마치 비단인 듯 침묵 두어 필을 안고 온다. 가을이 깊어질 때 모과나무는 노랗게 잘 익은 모과 두어 개를 제 발치에 떨어뜨릴 때 세계의 저변에 도사린 침묵의 한 모서리를 불쑥 드러낸다. 세계와 사람 사이에 길게 침묵은 소리의 부재현상이 아니다. 나는 열 살 때 세계 속에 현존하는 침묵이 고독의 이면임을 깨달았다. 침묵은 텅 빈 충만이고, 고요로 쌓아올린 성채이며, 오로지 침묵으로만 빚어지는 완전한 세계다. 이 침묵은 가을 저녁이 내리는 소슬한 축복이다. 어머니의 침묵, 대지의 침묵, 달의 침묵, 야생 초목의 침묵 따위가 저 먼 곳을 응시하는 소년의 침묵을 감싸고 있다. 이 찰나 풀벌레들이 풀숲에 숨어 맹렬하게 울어댄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가을 저녁을 광범위하게 장악한 거대한 침묵을 부양하는 듯하다.
내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책읽는 시간이다. 책을 읽는 사이 잠을 자고 끼니를 때우고 사람을 만난다. 내 생활의 초점은 책읽기에 맞춰져 있다. “독서는 물이 흐르듯이 날과 달, 계절과 세월의 교체에 따라 들쭉날쭉 변화무쌍하면서도 출퇴근과 삼시 세끼에 융화된다.” 책읽기는 밥벌이와 같이 사회적 유용성에 연관되어 있고, 그보다는 책읽기가 내밀한 본성으로 체화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는 끊임없이 읽을 책들을 사들여 그것을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둔다. 읽을 만한 책이 없을 때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책에 탐닉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한 정신적 공허감에서 비롯된다. 책읽기는 어떤 유용성이나 지적 생산을 위한 것, 혹은 무지한 영혼의 경작(耕作)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책 그 자체에 대한 탐닉과 중독이 일으키는 충동 때문이다. 내 영혼은 책에 미쳐 탐닉하는 종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탐욕스런 독자라 할지라도 24시간 손에 책을 들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배고프면 주린 위를 채우고 잠이 올 때는 수면을 취하는 생물학적 필요에 굴복한다. 그것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 불가피한 활동이다. 내 책읽기 역시 “들쭉날쭉 변화무쌍”한 것도 사실이다. “독서 자체가 탐닉성과 도약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항상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나타난다) 어떤 책을 읽는 도중에 필요에 의해서든 또 다른 책을 꺼내들기 십상이다.” 나는 대개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주변에 늘어놓고 읽는다. 내 손에 들린 책과 그 주변에 놓인 책들은 엄격한 분류법에 따라 같은 분야에서 선택된 책만이 아니라 그때그때 직관적으로 끌리는 책들이다. 질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하나의 표준이나 엄격한 분류법에 따라 계통화된 수목적 위계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인 ‘리좀’적이다. 나는 아무 매임 없이 다소 무질서한 반-계보적이고, 비-분류적인 책읽기를 선호한다.
책읽기는 통찰과 탐구를 위한 행위이자 지(知)의 유성생식을 위한 행위다. 책은 우리 내면의 타성과 인습을 깨뜨리고 지적 유전자의 분열과 복제를 불러온다. 책읽기는 늘 주체의 능동을 요구한다. 진짜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몸을 갈아 책 속으로 흘려보내는 일이다. 그럴 때만 주체와 대상 간에 시간과 사유의 혼융이 가능해진다. 몰아지경에 이르는 가열함이 없다면 주체는 책의 바깥으로 그저 미끄러져 나간다. 독서 행위는 불멸을 향한 무의식의 가망없는 열망이자 몸짓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면서 불멸의 존재가 되려고 책을 읽는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책읽기가 불가능한 꿈을 향하여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덧없다.
여름의 불볕더위가 물러나고, 수박을 깨는 일도 시들해진다. 여름이 끝남과 동시에 여름의 독서도 끝난다. 9월 햇빛은 열기를 머금고 있지만, 여름은 패전국의 병사들처럼 퇴각을 서두르는 기미가 역력하다. 더위가 한창일 때 서교동의 카페들, 소파와 침대, 고속열차나 고속버스 안, 운니동의 오피스텔, 휴가지의 호텔방 등에서 책을 읽었다. 읽은 책들 중에서 로버트 자레츠키의 『카뮈, 침묵하지 않는 삶』(서민아 옮김, 필로소피, 2015), 리처드 브로우티건의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김성곤 옮김, 비채, 2015),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김이선 옮김, 21세기북스, 2011),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2013) 들이 기억에 남는다. 책읽기는 인생을 감미롭게 하지만 누군가에겐 한없이 힘든 일이다. 왜 책을 읽는가? 지식욕이나 자아 형성, 혹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열린책들, 19쪽) 책읽기는 무수한 삶으로 이끈다. 살아 있으려고, 더 많이 살아 있으려고 책을 읽는다. 책은 나를 춤추게 만든다. 책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주적 음악 듣기,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얽힌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다.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20대 초반 서울의 한 시립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돈도 없고 갈 데도 마땅치 않은 청년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도서관이었다. 누가 말리지만 않는다면 시립도서관 서가에 있는 온갖 책들을 다 읽을 기세였다. 아침에서 저녁 무렵까지 도서관에 머물며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어깨 너머로 환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참고열람실에 앉아 책을 펼치면 내면은 금세 고요로 충만해졌는데, 펼친 책의 양면을 물들이던 그 환한 빛과 책에 집중하는 동안 내면을 풍요롭게 하던 고요를 좋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영혼을 갉아먹는 불안이 만드는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과연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내면에 품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의식을 잠식하는, 무위도식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백수건달로 생을 마치고 말 것이란 불길한 생각들과 싸우고 있었다.
도서관은 일종의 도피처이자 은신처, 돈이 들지 않는 놀이터, 온갖 박물적 지식이 쌓인 창고였다. 나는 프랑스어를 독학하면서 말라르메, 랭보, 발레리의 시집들을 찾아 읽거나, 니체와 하이데거와 바슐라르의 책들을 읽었다. 어디 그뿐인가. 내 지적 능력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책들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읽어나갔다. 그 책들을 읽으며 푸른노트에 시를 끼적이고, 어설픈 비평 문장들을 썼다. 그 시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서 쓴 시와 문학평론이 몇 해 뒤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내 젊은 날의 추억이 깃든 곳은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그 터에 세워진 정독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서초동의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서관이다. 그 시절 정독도서관은 아침 일찍 나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사십여 년 뒤 나는 작가로 그 시립도서관으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다. 작년 초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중앙북스, 2015)라는 책을 펴낸 뒤 한 온라인서점과 출판사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강연이다. 정독도서관측이 마련한 강연장은 예상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였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의 질문들이 잇달았다. 내게는 여러 모로 가슴이 벅찬 의미심장한 경험이었다.
젊은 날 나는 왜 그토록 책에 바쳤을까? 그 물음 이전에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책은 활자가 찍힌 덩어리, 혹은 낱장들을 묶은 종이 뭉치다. 책은 펼쳐지고 읽히려고 만든 것이다. 장-뤽 낭시에 따르면 책은 “‘목소리’라고 부르는 것의 표식과 흔적”, 말걸기, 부름이며, 일반적으로는 초대, 요청, 부름, 기도의 영역에 속한다. 이것은 펼쳐져 있거나 닫혀 있다. 아니 책은 그 사이 긴장 속에 있다. 그것은 고정적이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움직인다. 책은 사유의 유동한다. 책이 하나의 흐름, 유동, 운동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도, 장르도, 스타일도, 에너지도 규정된 것은 없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모든 정보인식과 인식명령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책은 관념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것이다. 책은 물성의 구현으로서 체적(體積)을 갖는다. 책은 그릇이자 그 용기에 담긴 내용이다. “책은 무엇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책은 본질적으로 누구에게 말한다. 혹은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무엇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무엇에 대해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 책의 운명이다. 앞서 책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까닭에 “책의 존재성, 불안정하고 섬광 같은 진실이 머무는 곳은 바로 이 전환의 속성을 이루는 접속conjonction과 분리disjonction 현상”에 깃든다. 돌이켜보면 나는 거의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책을 읽어왔다. 시립도서관 주변을 낭인으로 떠돌던 사십년 전이나 전업작가로 삶을 꾸리는 지금이나 나는 책을 기적의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한 위대한 지성은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전선도 필요 없고, 배터리도 필요 없고, 스위치나 버튼도 전혀 필요 없으며, 간단하고 휴대 가능하며, 벽난로 앞에 앉아서도 사용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각각의 종이 하나는 수천 비트의 정보를 담고 있다. 그 종이들은 제본이라 일컬어지는 우아한 보호 장치에 의해 정확한 순서로 한데 묶여 있다.”(움베르토 에코, 『책으로 천 년을 사는 방법』) 책은 수저나 포크와 마찬가지로 제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물건이다. 그것의 도움으로 나는 무른 영혼이 단단해진 덕에 교도소나 들락거리는 한심한 인간으로 전락하지 않고, 근사한 책들을 써내고 저작권료로 쌀과 부식을 사고 의료보험이나 공과금을 내며 살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다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못 말리는 독서광 중에 독재자도 있고, 전쟁광도 있으며, 선량한 이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사기꾼이나 잡범도 있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은 대개 뛰어난 독서광이었다. 20세기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고,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보르헤스는 “나는 늘 낙원을 정원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생각했어요.”라고 고백한다. 그는 평생 독서광으로 살았는데, 말년에 눈이 멀었을 때조차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해 독서를 이어갔다. 그는 도서관을 낙원이자 젖을 먹여주는 어머니라고 상상했다. 독학으로 시학자가 된 뒤 『몽상의 시학』 『공간의 시학』 따위를 쓰고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로 활동한 가스통 바슐라르 역시 독서광이었다. 그는 도서관을 천국으로 상상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이 하늘의 도서관에서 읽어야 할 책들을 한 바구니씩 내려달라고 기도한 그에게 책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영국의 비평가 콜린 윌슨은 17세에 정규 학력을 끝냈다.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그는 도서관에서 엄청난 책들을 섭렵하며 독학자로서의 이력을 쌓았다. 그는 반년은 노동을 하고, 나머지 반년은 국립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마침내 『아웃사이더』란 매혹적인 책을 써내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른다. 그에게 도서관은 최고의 대학이고, 도서관을 채운 장서들 한 권 한 권은 훌륭한 가르침을 베푸는 교수들이었다.
도서관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을 볼 때 내 눈동자는 갈망으로 타오른다. 나는 세상의 모든 도서관들을 사랑한다. 세상의 도서관들이 베푼 책을 읽을 수 있는 지복들, 그 평화와 안식들을 떠올리면 이것은 얼마나 지당한가. 나는 세상의 모든 도서관들이 베푸는 은덕을 입었다. 그 시절 시립도서관을 향하던 내 발걸음은 얼마나 가볍고, 심장 박동은 설렘으로 얼마나 빨리 뛰었던가! 나는 오래 전부터 제주도에 작은 여행자 도서관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젊은 시절 시립도서관이 내게 기쁨과 보람을 주었듯이, 책을 사랑하는 미지의 젊은이들에게 그것들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다.
라디오 프로듀서이자 독서가인 정혜윤도 『삶을 바꾸는 책읽기』(민음사, 2012)에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답한다. 책읽기에 관한 여덟 가지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폴란드 시인 쉼 보르스카의 시구 “우리 삶은 중간 부분이 펼쳐진 책이다.”를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앞장으로 넘길수록 거슬러 거슬러 수많은 조상들의 삶이 책에 적혀 있겠죠.”(157쪽) 모든 책들은 다양한 형태로 인류의 기억[삶]들을 담는다. 삶이란 기억의 총체이고, 기억을 만드는 일이다. 삶이 기억이라면, 기억을 담은 책은 곧 삶이다. 책은 그 기억들을 담으며,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태어난다. 정혜윤은 책들은 저마다 하나의 영혼을 담고 있고, 영혼의 집적이고, 다른 영혼들을 불러 서로 연결하는 다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삶의 세계에서 크고 작은 부침을 겪는다. 한 순간 추락하고, 곤두박질치고, 여지없이 박살나 깨지는 경험들. 우리는 살아남으려고 난간을 붙든다. 많은 자기 계발서들은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그 해결책이란 임시방편이고, 미봉책이며, 그 본질에서 현실에 대한 기망이다. 단박에 모든 파생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혼란과 소동 속에서 영혼을 견디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어서 어디엔가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책읽기는 그 자체로 휴식이고 자기 성찰적 계기를 가져다준다.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에 형태를 부여하고 고통에 한계를 주고 잘못된 생각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마술 피리입니다. 책은 이 시대에 모든 인유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살을 파먹는 벌레들, 즉 우리 모두 다 앓고 있는 그 온갖 불안과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118쪽) 책읽기는 위로와 즐거움과 인생 지침을 구하는 모험과 상상의 일이지만 그 본질에서 우리 실존이 처한 조건과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책읽기는 인생에 대한 즐거운 도발이자 스스로의 고투이다. 다시 말해 위대한 지성들과 대화를 하며 자기 성찰을 하고, 마침내 인생 개선과 도약을 이루는 기획인 것이다.
『읽는 인간』(오에 겐자부로, 정수윤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5)은 칠순을 넘긴 노작가의 독서 편력을 펼쳐 보여준다. 개인적 회고가 주를 이루는데, 어떤 대목은 매우 진솔하고 감동적이다. 지독히 ‘읽는 인간’으로 일관한 긴 인생과 더불어 읽은 책들을 구체적으로 톺아보며, ‘평생을 이런 책들을 읽으며 살아왔구나’하는 회고, 그리고 ‘그래 분명 이런 인생이었지’ 하는 범속한 깨달음이 감미로운 감정 속에서 번져간다. 지나간 것들은 다 그리운 법이니까. 소설로 써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에게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이 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그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깨어 우는 아들의 침대 곁을 지키며 새벽 4시쯤까지 책을 읽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린 아들은 생리적인 문제가 있어 눈물을 흘리지 않고 소리만 내며 운다.
그 옆에 앉아 책을 읽으며, 블레이크 시 중에서도 인간이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에 신경을 쓰게 되었죠. 그러니 아이가 슬퍼한다는 것만으로도 정말이지 다양한 언어가 있고, 그 많은 단어를 블레이크가 쓰고 있다는 걸 자주 생각했습니다.(90쪽)
그 뒤를 이어 ‘블레이크 시 읽기’와 관련된 개인사가 주르륵 나온다. 대학시절 고마바 도서관에서 저녁나절까지 책을 읽는데, 어느 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두꺼운 서양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 책을 뒤적이다가 인상적인 구절에 눈길이 멎는다. 이 구절은 그의 소설에서도 작가가 직접 번역한 문장으로 인용되는데, “인간은 노역해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또한 배워야 하며, 잊어 버려야 하고, 이윽고 돌아가야 한다/본디 그가 왔던 어두운 산골짜기를 향하여, 새로운 노역을 시작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이다. 곧 책의 주인이 돌아왔기에 미처 그게 누구의 시인지, 어떤 시의 두 행인이지 확인하지 못한다. 5년 뒤 일본의 한 서점에서 신착도서를 보다가 『블레이크 시 전집』을 구입한다. 그 책을 읽다가 그 인상적인 두 구절이 블레이크 시였음을 깨닫는다. 블레이크 시 읽기에 빠져서 “희미한 램프를 들고 어둠 속 블레이크의 세계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읽다가, 마침내 ‘연작 단편’을 쓰기에 이른다. 그는 장애를 가친 채 태어난 아들을 아주 사랑한다. “장애를 포함하여 그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인격체입니다. 도리어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즐거워하며 살고 있어요. 기꺼이 학교에 데리고 가기도 했고, 집에서는 집사람이 초보적인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처음 십년 동안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 집은 히카리를 중심으로 하나의 확고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지요.”(94쪽) 블레이크 시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에 그 시와 장애를 안고 성장하며 고립된 채 혼자 속에서 괴로워하는 아들의 얘기를 겹쳐 소설을 써낸 것이다. 블레이크 시와 아들의 얘기는 꽤 길게 이어지는데, 작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는다. 작품 속에 “블레이크와 제 아들이 어떻게 연계되었는지, 그러니까 제 안에 읽는 것과 쓰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식으로 맞닿아 있는지”(96~97쪽)를 밝히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 아들과 동반하여 큰 태풍이 올 무렵 이즈반도로 떠난 여행지에서 겪은 이야기가 소설에 펼쳐지는데―작가는 그것을 직접 체험으로 전달하지 않고 소설의 한 대목으로 대체한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술 취해 인사불성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돌보는 대목을 읽을 때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책은 “산다는 것은 곧 읽는다는 것이다”라고 그 주제를 압축한다. 책들은 저마다 오래된 영혼의 간절한 외침들을 들려준다. 책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독서의 보람이다. 그는 “정녕 제 인생은 책으로 인해 향방이 정해졌음을,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지금 절실히 깨닫고”(18쪽) 있음을 고백한다. 대학교 진학할 무렵 프랑스 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과정과 같이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책들이 있었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은 패망했다,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방침을 세우고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소년 오에 겐자부로는 그즈음 읽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라는 구절을 생의 방침으로 삼겠다고 결심을 한다.
어떤 인생은 수많은 책들이 합작하여 빚어낸다. 거기에는 T.S. 엘리어트의 『네 개의 사중주』, 『포 시집』, 『랭보 시집』, 『오든 시집』, 『블레이크 시집』도 있다. 읽기와 쓰기, 그리고 삶의 경험은 서로 스며들고 영향을 미치며 연계되는 것이다. 작가는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옆 사람이 읽던 블레이크의 시집을 슬쩍 훔쳐 본 뒤 반평생 동안 소설가로 살아가는 제 삶의 방식에 여러 형태로 영향을 끼쳤음을 적는데, 블레이크와 장애를 가진 아들을 연계시킨 소설을 써낸 것이 그 영향의 좋은 예다. 노작가는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와 같은 고전에서 단테의 『신곡』 따위를 거쳐 에드워드 사이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다양한 책들이 있었음을 술회한다.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며 괴로움을 견딘다. 책으로 버티고 책으로 구원 받는 것이다.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에피그램에 몸을 기대어 평생 독서의 길을 걷는데, 그런 태도는 기필코 “오로지 읽고 쓰는 삶”으로 이끌고, 마침내 “쓰는 것으로 완성된 삶”에 귀착한다.
『위험한 독서의 해』(앤디 밀러, 신소희 옮김, 책세상, 2015)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어쨌든 흥미진진했으니까. 무엇보다도 저자의 솔직함이 맘에 든다. 불혹을 코앞에 둔 한 남자가 아들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갔다가 헌책방에서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만나면서 다시 책읽기에 빠져든다. 인생을 구한 걸작 50권이라고? 대체 어떤 책들일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먼저 저자가 쓴 한 대목을 읽어보자.
내가 매일의 삶이라는 시련에 대처해나가는 동안, 출퇴근하고 사무실에서 일하고 초보 아빠가 되고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살아나 내게 말을 걸어오는 책. 따라서 『위험한 독서의 해』는 걸작들에 대한 책이자, 걸작들을 읽고 그것들에 대해 쓰는 동안 인생이 내게 어떻게 딴지를 걸어왔는지를 밝히는 책이라고 하겠다. 이 책이 걸작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기계에 발동이 걸릴지, 이 기계가 살아나 독자에게 말을 걸어올 것인지에 달려 있으리라.(22쪽)
이것은 책에 관한 책, “내 삶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라고 믿는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책들과 소통한 기록, ‘인생 개선 독서 프로젝트’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재치 있는 보고서다. 권말에 붙인 인생 개선 도서목록,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 100권, 앞으로 더 읽으려는 책들 목록은 덤이다. 한때 영문학도이자 책벌레였던 그는 육아와 직장생활과 일상의 잡무들에 짓눌려 책과 멀어진 채 표류한다. 그런 자신에 화들짝 놀라 다시 책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책 한 권으로 삶의 방향이 선회하는 순간이다. 지금껏 읽지 않은 게 창피한 책들―주로 고전이라는 하는 것들― 목록을 쭉 적자. 그리고 하루에 50쪽씩 읽자! 이 일은 쉬운 게 아니다. 그는 금방 곤경에 처한다. “일주일 동안 간신히 100쪽 가량을 넘긴 후 나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갑자기 수십 가지 일들이 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오븐 청소든, 오랫동안 미뤄왔던 서류 정리든, 그놈의 끔찍한 책을 집어드는 것만 아니면 뭐든 좋았다.”(66쪽) 가까스로 책 한 권을 읽어낸 뒤 그는 ‘인생개선 도서목록’을 만들고 책읽기로 진격한다. 블로그를 열고 읽은 책들의 느낌과 생각을 올린다. “에든버러에서 돌아오는 일곱 시간 동안 나는 줄곧 책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시피 했다. 공항 라운지에서 맞게 된 연착 사태도 반가웠고, 히스로 공항에서 환승 항공편을 놓친 일도 감사했으며, 도로시아 브룩과 윌 래디슬로가 어떤 결말을 맺는지 알기 위해 뼛속까지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반시간 동안 기차역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고 나서 희열을 느끼며 집까지 걸어왔다. 그렇다. 나는 문자 그대로 희열을 느꼈다. 위대한 예술이 내 눈앞에 있고, 그에 답해 내 가슴이 열렸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확신하고 있었다.”(69쪽) 독서의 제일의적 가치는 바로 이런 희열이다. 위대한 것과의 만남을 통해 얻는 희열!
책을 읽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의 핵심은 ‘뇌에서 일어나는 시냅스의 재배치 작용’이다. 책에 흥미를 읽고 집중하며 빠져드는 동안 뇌가 바뀌고, 사고와 선택, 실천의 영역이 달라지고, 이 변화들이 모여 주체를 바꾼다. 이게 책이 일으키는 기적이다. 『위험한 독서의 해』는 “독서를 일종의 종교”라고 받아들인 이가 겪은 기적의 체험들을 간증한다. 아울러 스스로 작성한 걸작들에 대한 책이자, 그것들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고, 그것들을 읽는 동안 제 인생이 어떻게 딴지를 걸어왔는지를 유머와 솔직함으로 버무려 밝혀 드러내는 책이다. 사족.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한 생각. 고전이란 아무도 읽지 않았는데, 누구나 다 읽었다고 간주되는 책이다. 고전 읽기는 누구에게나 버거운 일이다. 고전을 읽는 게 힘들다면 직접 고전이 되는 책을 써라! 고전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고전을 읽어야 한다. 이제 고전을 읽어야 할 강력한 동기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항상 고전을 읽는 사람은 고전을 쓰려는 사람들이다. 당신이 고전을 읽지 못한 것은 당신에게 고전을 쓰려는 강렬한 동기부여가 없었기 때문이다.ㅎ?모 부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