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의 애환
1. 영도다리
영도다리로 더 잘 알려진 영도대교는 부산 본토와 유인도인 영도 사이를 연결하기 위하여, 1932년 3월 8일 착공 1934년 11월 23일에 개통된 부산 최초의 연륙교이다. 개통 당시 명칭이 부산대교인 이 다리의 길이는 214.63m이며 그중 부산 내륙측은 31.30㎝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을 가능하도록 건설되었다. 그 밖의 부분은 캔틸레버식 강판항교로 하였다. 그리고 항교 아래로 만조시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의 화폐로 총공사비 70만8천원이 투입되었다.
영도다리는 민족의 애환이 짙게 묻어 있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많은 사람들이 투신하기도 했고, 8.15 광복과 한국전쟁 때는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다리 난간 위에 비친 초생달을 보며 하염없는 향수를 달랬던 곳이다. 한국전쟁 피난시절「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대중가요는 피난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곳 다리에서 자살자가 속출하자 「잠깐만」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여지고 경찰관이 배치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학정, 1950년 한국전쟁의 비극을 말없이 지켜본 영도다리는 피난민의 숱한 애환과 이야기만 남긴 채, 1966년 8월 31일 하늘로 치솟던 마지막 도개를 끝으로 9월 1일부터는 폭주하는 차량통행으로 도개를 폐쇄되어 기능이 멈추자 옛 모습을 잃어 버렸다.
2. 40계단
중앙동의 40계단은 영선산(瀛仙山= 雙山)이 깎인 뒤 지금의 영주동에서 옛 부산역과 국제여객부두를 왕래하는 편의를 위해 설치된 계단이다. 이 계단의 층수가 40개라 하여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 계단은 8.15 광복 이후의 귀환동포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주변 언덕에 판자집을 짓고 모여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이 계단을 거쳐야만 했고, 계단 주변에서 노점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이 계단 일대에서 미군부대나 원조물자 등 각처에서 흘러나온 구호물자를 팔는 구호품 장터를 방불케 했다. 또한 암달라상들이 진을 치고 생계의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유명해진 것은 “40계단 층층대에 기대앉은 나그네…”라는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면서부터다. 그러했던 40계단은 주위의 주거지가 잠식하여 지난날에는 4m 가량의 폭이었는데 지금은 폭이 많이 줄어 옛 모습을 잃었다. 그래서 본래의 40계단에서 남쪽으로 25m 떨어진 계단도 현재는 40계단이라 말하고 있다.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있는 계단에 1993년 8월 6일 가로 60㎝, 세로 180㎝, 폭 60㎝의『사십계단기념비(四十階段記念碑)』를 세우고 그 뒤쪽에 대중가요 “경상도 아가씨”의 노래 가사와 계단의 유래를 새겨 넣었다. 중구청에서는 2003년 2월 12일「40계단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소이기도 하였던 40계단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일깨워 주는 곳이다. 40계단기념관은 중구 동광동 5가 44번지에 지상 6층 규모로 건물 5층과 6층에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부산의 시대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공간을 마련하였다.
5층에는 피난민이 넘치던 한국전쟁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데요. 검정고무신과 양철물동이, 그리고 석탄난로 위에서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알루미늄 도시락통, 물지게와 풀빵기계,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40계단에 얽힌 향수와 애환을 지역원로와 문화예술인들이 목소리로 들려주는 옛날 전화기까지 있어 그 느낌은 더욱 생생합니다.
그리고, 6층으로 올라가면 이 지역에 거주했던 옛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옛날 겨울나기 모습을 점토로 재연한 미니어쳐 앞에서는 행복한 추억에도 잠기게 된다. 또 ‘국제영화제의 산실, 중구의 극장’라는 특별전시 코너를 마련해 백 년 전부터 시작된 영화와 부산의 특별한 인연을 확인시키고 있으며, 실물의 영사기가 전시되어 있다.
3층과 4층에는 복합문화시설 공간으로 다양한 문화시설로 꾸며져 있어, 도서와 DVD 등 문화정보자료와 50여석 규모의 영상시설을 갖춘 관람실 등 최첨단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전시회와 세미나를 열 수 있는 다목적실과 문화창작실, 그리고 주부 이용객들을 위한 어린이 놀이방까지 갖추고 있어 문화사랑방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인근의 영도다리, 자갈치시장, 용두산공원, 부산근대역사관, 민주항쟁기념관, 백산기념관 등 역사문화공간은 부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많은 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40계단기념관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관람료는 무료이다. 2004년 5월 중구청에서는 40계단기념비 주변을 조형물 설치와 주변 정비를 통하여 테마거리로 조성하여 시민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3. 보수동 헌책방골목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 사거리 건너 편 좁은 골목길에 집결된 책방을 말한다. 이 헌책방골목은 8.15 광복 직후 지금의 국제시장 부근의 주택가가 철거되면서 빈터였던 곳이다. 일본인들이 남기고간 책을 난전을 펼쳐 책을 팔기 시작하면서 보수동 앞길로 책장사가 한 두사람 옮겨 오면서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미군이 진주하면서 병사들이 읽다만 헌 잡지와 책, 학생들이 보다만 헌 참고서 등이 고물상 등을 통해 수집된 책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피난민이 가져온 귀중한 책들을 생계를 위해 팔았고, 피난 온 선생이나 학생들이 필요에 의해 사들이는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자 본격적인 가건물이 하나 둘 생기면서 헌책방 골목이 자리 잡게 되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은 한때는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헌책들이 이곳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희귀본이나 고문서들의 주요 공급처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문서 등을 수집하려는 수집상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이후 가건물이 계속 늘어나면서 1950년대에는 약 70채가 늘어나 일반 시민들이나 중․고생은 물론 대학생들이 많이 찾는 등 전국에 널리 알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곳 헌책방 골목은 1960~70년대와 같이 활발하지 않지만 희귀본이나 고서나 구하기 위해 수집상들이 가끔 찾고 있다. 신학기 때는 일반서점 보다는 참고서 등을 20~30%를 싸게 구입할 수 있어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찾고 있다.
4. 서독병원과 월남 난민수용소
부산여자고등학교(지금은 사하구 하단동으로 이전)는 부산공립고등여학교라는 이름으로 1906년 4월 일본인 여자 교육기관으로 토성동에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서대신동으로 옮겨져 일본인 여자 중심의 학교가 되어 있다가 광복 이후 한국인 여성교육기관이 되었다.
부산여자고등학교가 서대신동에 있을 무렵 학교 건물을 이용해서 한국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서독이 서독병원을 열어 부상병들은 물론 전란을 겪는 영세민들의 진료를 담당하기까지 하였다. 1954년 5월 7일까지 진료는 계속하였다. 1975년 5월 1일 부산여자고등학교는 하단으로 옮겼고, 서대신동의 옛 교사에는 1976년 월남 피난민들의 임시 수용소 이용되었다. 그들 월남 난민 제1진 1,335명은 5월 13일 우리나라 해군 함정편으로 부산항에 도착하여 이곳에 임시 수용되었다. 제2진 215명은 6월 23일 ‘쌍용호’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항해 중 출생한 7명을 합하면 피난 인원은 1,557명이었다.
옛 부산여자고등학교 교사에 수용된 월남 난민들은 이곳에서 따뜻한 부산시민들의 따뜻한 구호를 받기도 하였다. 1976년 10월 말 월남 난민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생업의 길을 찾아 미국에 697명, 한국에 506명, 캐나다에 167명, 프랑스에 53명, 자유중국에 45명, 기타 지역으로 14명이 떠나 정착하였다.
5. 초량 텍사스거리
초량 텍사스거리는 부산시 동구 초량2동 1208번지 주변일대로 부산역 앞 큰길인 중앙로 맞은편이다. 구한말에는 중국영사관이 지금의 영주동과 초량동에 걸쳐있던 자리로 청관(淸館)이 있었다. 지금의 중구 광복동의 용두산 주위는 초량왜관(草梁倭館)이 있었고, 동구 초량동에는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설치되어 왜관에 대별되는 말로 청관이라 한 것이다. 그 청관이 있었던 곳을「청관거리」라 하였고, 주변 일부지역을「텍사스 거리」라 하고 있다.
이 ‘텍사스촌’ 또는 ‘텍사스타운’으로 불리었던 곳은 중구 중앙동에 있었으나, 1953년 11월 27일 중앙동의 옛 부산역전(현 부산역 소화물취급소) 대화재로 그 집들이 불타 없어지자 지금의 자리를 옮겨왔다.
이 텍사스 타운은 주한 유엔군과 외국인의 유흥가로, 1950~60년대만 해도 찬란한 조명과 요란한 대중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짙은 화장을 한 여인들로 흥청거렸다.
그때 여인들은 그 뒤 국제결혼을 하여 이곳을 떠난 사람도 많다. 주둔 미군이 줄어들자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외국선원과 미국군함이 부산항에 입항하면 병사들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한때 부산의 관문인 부산역 주위에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흥가가 있다는 것이 부산의 치욕이라 하여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던 가운데 홍등가로서의 빛은 식어갔다.
1990년대에 들어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자 러시아의 선원과 보따리장수들이 이 텍사스촌을 찾아 상가는 성업을 이루었다. 텍사스촌은 청국인에서 미국인, 동남아의 외국선원, 그리고 이제 러시아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6. 국제시장
국제시장(國際市場)은 부산시 중구 신창동 4가 83번지 일대에 있는 부산 최대 재래시장의 하나이다.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15 광복 이후 본격화 되었다.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른바 전시통제물자를 한꺼번에 팔아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부평동공설시장 일대에 각종 물자가 쏟아져 나오나, 넓은 빈터가 시장터로서 상설시장이 서게 되었다.
이 국제시장 장터는「돗대기시장」,「도떼기시장」이라 한 것은, 이 뜻은 정확하지 않으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데로 싹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시장이거나,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돗대기시장」「도떼기시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8년에는 1층 목조건물 12동을 지어「자유시장」으로 개설하였다. 8.15광복 후 자유민주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시대적 풍조 속에서 명칭을 자유시장이라 한 것 같다.
1950년 5월「국제시장」으로 개설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용물자와 함께 온갖 상품들이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되었다. 이들 밀수입 상품들은 도떼기시장을 통해 전국 주요시장으로 공급되었다. 시장의 규모가 크고, 외국 물건 등 없는 물품이 없다고 해서,「도떼기시장」이「국제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제시장은 밀수 외국상품은 물론 유엔군 군수물자까지 흔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외국 옷감을 비롯한 장신구와 화장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외국상품의 인기에 편승하여, 가짜 외국 상품들도 많이 거래되었다. 1969년 1월에는「사단법인 국제시장」으로 법인체 등록을 하였다. 현재 건평 3,468.2평, 대지 2,177.2평의 지상 2층의 규모이며, 약 650개 업체에 1,489칸의 점포가 있으며, 종사하는 종업원 수는 1,200~1,300명 정도이다.
1공구는 가방, 문구, 공예품, 2공구는 주방기구, 칠기, 안경점, 3공구는 침구류, 양품점, 4공구는 포목, 주단, 양단, 주방기구, 5․6공구는 가전제품, 기계공구, 포목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방구, 주방기구, 기계공구의 의류, 전기․전자류 등이 주종을 이루는 도․소매업 시장이다.
1953년 2차례의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1992년 4월에도 큰 화재가 있었다. 건물이 낡고, 주차시설이 불편한 점 등 대형시장으로서의 문제점을 많이 안고 있다.
국제시장은 광복동 등의 전문상가와의 경쟁, 건물의 노후화화로 쇠퇴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부산의 상권이 서면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상권이 다소 침체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부산 시장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국제시장의 옛 명성을 찾기 위해서는 시설의 근대화를 통한 유통망 구축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7.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은 부산시 중구 남포동과 충무동 일대에 걸쳐 있는 해안통으로 원래 자갈치란 이름으로 불리던 곳은 옛 부산어시장 제4구판장이 있던 주변을 일컬으며, 부산 지역을 상징하는 곳의 하나이다. 이 시장은 도심과 접하고 있어 시장 기능과 함께 위락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인근의 공동어시장, 국제시장과 함께 부산지역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장이다.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많이 찾고 이용하는 가장 부산다운 시민의 생활의 터전이자 부산자랑의 10가지 중 하나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부산 상징의 대명사처럼 된 자갈치 시장은 어느 시장과는 달리 어패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장으로 정식으로 “부산어패류처리장”이라 불렀다.
자갈치란 이름의 유래는 이곳 해안이 자갈밭을 이루고 있었다는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부산어패류처리장에서 취급하는 활어 중 자갈치란 어종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개항(1876년) 당시만 해도 이곳 해안(남빈해수욕장이 있었음)은 충무동쪽 보수천 하구일대에 주먹만한 옥돌로 된 자갈해안을 이루고 있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개항 이후 인접한 동광동과 광복동이 일본인전관거류지로 형성되면서 이 지역은 부산 주변지역의 어민들이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인들에게 수산물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소규모의 시장이 형성되면서 오늘날의 자갈치시장이 형성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이 남해안 수산물의 유통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1910년 이곳에 부산어시장을 설립, 시장기능을 흡수하려 하였으나 자갈치 시장의 활어 유통기능은 소형선박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명맥을 유지하였다.
자갈치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15년에 남항 건설을 위해「남항수축기성회」가 설립되면서 부터이다. 기성회 설립과 함께 일본인 하시마(迫間房太郞)에 의해 남항 건설의 필요성을 조선총독부에 진정하였으나, 10년이 지나도록 성과가 없었다.
부산상업회의소 회두인 카시이(香稚源太郞)가「남항수축기성회」회장이 되어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후 埋築王이라는 이케다(池田佐忠)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케다는 인천․목포․통영 등지의 여러 항만지역에서 매축공사를 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케다는 민간차원에서 남항을 매축하려고 1925년 5월 현장조사에 들어감으로서 시작되었다. 1926년 에는 설계를 완성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부산남항 건설허가를 조선총독부에 신청하여 1928년 2월 9일 총독부로부터 남항건설 허가를 받았다. 1928년「부산항합자회사」를 설립하였고 11월 9일에는 공사를 해도 좋다는 실행허가를 받았다. 이 공사는 대한해협의 거센 파도가 밀어닥치는 곳이어서 방파제를 쌓는 일이 난공사였다. 남항 건설공사에는 총공사비 5백50만원이 들어갔는데 공사진행 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5년 5월 부산 남항 실지 현장조사를 착수한 이후 1928년 2월 남항 건설공사 허가 신청인가를 받아 부산축항합자회사(자본금 5백만원)를 설립하였다. 1930년 5월 남항방파제, 남포동 해안 매축을 시작하여, 1931년 4월 방파제를 준공, 1931년 8월 방파해벽을 준공하였고, 1932년 12월 해안 매축공사를 제1기공사를 준공하였다. 이 때 매축된 부지는 44,860평이었는데 도로 등에 소요된 부지를 제외한 건축용 부지는 30,898평으로 평당 62원에 거래되었다.
남항매축 2기 공사는 1934년 2월에 지금의 서구청(옛 충무초등학교)~충무동 5가 매축을 착공하여 충무동 일대 수면 34,000평에 도로 등에 소요된 토지를 제외한 유효평수는 22,340평을 매립하였다. 이 공사는 예정보다 늦은 1940경에야 마무리를 보았다.
남항의 매축은 우리나라 최대 어항․어업전진기지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두말할 나이도 없었다. 이와 같이 새로 마련된 호안의 길이는 약 1,026m로서 그 중에서 호안 석축이 약 286m였고, 하역장은 길이가 약 450m였으며, 보수천 기슭의 호안의 길이가 약 230m였다. 새로 마련된 물양장은 남항의 이용가치를 높여 주었으며, 물양장의 넓이는 약 12m의 해안도로를 따라 넓이 약 6m로 비탈지게 간지석(間支石)을 깔아 하역작업이 편리하도록 시설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남포동 자갈치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남항은 우리나라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시장이 개설된 것은 1924년 8월 남빈시장(南賓市場, 현 자갈치시장)으로 개설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 이 해안지역은 연안 여객선이 정박하는 내항의 기능과 연근해 어선들의 수산물 집산지로서의 어항기능, 노점상들의 활어판매 등의 시장기능이 혼재하면서 현재와 같은 지리적 구체성을 지닌 시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오늘날의 자갈치 시장으로 불리고 있는 곳은 “자갈치어패류처리장”이 들어서 있는 중구 남포동을 중심으로 하는 갯가 시장으로 본래 이 자리는 “자갈치 어패류처리장”이 가건물로 들어서 있었던 곳이다. 그러던 가건물 어패류처리장 인근에 즐비하던 판자집 가게들은 한국전쟁 이후 판자집 가게 철거계획에 따라 철거되었고, 1961년 5.16군사 쿠테타가 발생한 이후 판자집 가게가 정비되어(1968. 8. 3) 말쑥한 “자갈치 어패류처리장”으로 신장개업(1974. 2. 16)을 하게 되면서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1985년 큰 화재로 말미암아 점포 231개소가 소실되었고, 1986년 1월에 현대식 건물로 개축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이것이 오늘의 “부산어패류처리장”이다.
부산 어패류처리장(활어장) 2층에는 생선 횟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싱싱한 생선회를 싼값으로 맛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어패류처리장 서쪽 도로에서 파는 “판대기장수” 아주머니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시장 동쪽에는 꿈틀거리는 곰장어를 구워 파는 “판대기장수” 아주머니들이 있고, 날해삼과 날멍게를 내주는 “판대기장수”들, 삶은 고래고기를 그 자리에서 썰어 내주는 “판대기장수”들, 미역이나 톳나물과 청각을 파는 “판대기장수”들이 촘촘이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진귀한 모습은 이곳 자갈치 시장이 아니고서는 전국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산만이 가지는 바다 내음이 물신 풍기는 곳이다. 자갈치 시장에서 유통되는 수산물은 크게 어패류, 활어, 건어물류로 구분된다.
어패류중 40~50%는 공동어시장에서, 나머지는 수협과 인근 냉동어시장으로부터 공급되고 있다. 활어는 주로 소형선박에 의해 연근해에서 잡히는 어류들이 시장 서쪽의 부두에서 상인들과 직거래로 공급된다. 건어물은 주로 남포동 1가에 집중되어 유통되어 지고 있다.
이곳의 상인들은 중개상을 통해 혹은 산지에 직접 가서 물건을 구입한다. 취급 품목은 명태(강원도), 멸치(충무, 거제, 남해), 오징어(속초, 포클랜드) 등이며, 농산물은 대추(밀양), 곳감(상주, 영동, 강릉), 밤(하동) 등이 취급되고 있다. 한편, 부산어패류 종합시장은 노점상들의 철거와 함께 1970년 10월 신축되어 시장기능을 담당하다가 1986년 4월 화재로 인하여 시설을 보강하여 현재와 같이 개장되고 있다. 1층에는 활어부 5개소, 전복부 87개소, 선어부 69개소, 잡어부 103개소 등으로 총 374개 점포가 있고, 2층에는 식당부, 식품부, 건어부 등의 484개 점포가 영업하고 있다. 또한 어패류처리장 동쪽에는 가게 앞에 수조를 차려 놓고 싱싱한 활어를 전시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돋구는 것은 물론 한꺼번에 손님을 받는 모습은 자갈치 시장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대식 건물인 “신동아수산센터”가 들어서 자갈치시장의 명성을 더하고 있으며, 1층에는 활어의 판매와 즉석에서 싱싱하고 맛있는 회를 맛볼 수 있으며, 2․3층에는 건어물 및 해산물 판매와 생선 횟집이 자리하고 있어 새로운 자갈치 시장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자갈치 시장에는 어쩌다 한 두사람의 남정네가 끼어 있을 뿐이고 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아낙네들이다. 더욱이 노점상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아낙네들인 것이다. 그래서 “자갈치 아지매” 또는 “자갈치 아줌마”라고 하면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이 자갈치 시장의 특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움은 없어나,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다이나믹한 “자갈치 아지매”들은 부산 사람의 특유한 기질을 상징하는 가장 부산다운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자갈치 시장은 살아있는「부산의 축도요. 부산시민의 생활상을 대변 해주는 현장」이기도 하여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03년 12월 부산 명물로 재탄생하기 위해 자갈치시장 재개발 사업 착공하여 갈매기형상의 건물을 신축하고 있다.
8. 깡통시장(부평시장)
부평시장(富平市場)이라고 하면 잘 몰라도 깡통시장하면 부산시민이나, 전쟁을 겪은 세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부평공설시장이 개설되기 이전까지는 닷새마다 열리던「5일장」이었다. 부평시장은 1910년 6월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한 소매시장인「日韓市場」으로 개설되었다. 이후 공설시장의 기능을 갖춘 것은 1915년 9월 부산부(釜山府)에서「日韓市場」을 사들여 설비를 확충하여「부평동 공설시장」을 개설하면서부터이다. 부산부에서는 지속적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22년 1,283평 부지에 495평의 신축건물을 짓고 시장규모를 크게 늘렸다.
당시 공설시장은 상품별 점포가 90여 개에 달하였고, 시장 외곽 공터에 노점상을 허락하였다. 노점상에는 우리나라 영세상인들이 주류를 이루어 청과물 등을 팔았다고 한다. 공설시장 상인들은 주로 일본인들로 새로운 생필품이 가장 먼저 판매되는 등 다른 시장보다는 물건값이 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부평시장이 많은 이름 중 하필 ‘깡통시장’이란 이름이 붙게 된 데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즉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등 각종 과자류 등을 노점상들이 내다 놓고 팔면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깡통시장 크게 번창하게 된 것은 170년대 베트남전쟁 참전 귀환병사로부터 미군 전투식량(속칭 씨레이션) 등이 반입된 이후부터였다.
한때는 밀수품 때문에 단속의 된서리를 맞기도 했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다. 수입의 자유화로 ‘외제’라는 수식어가 흡인력을 잃었고, 가격이 뻔해 흥정의 맛도 예전만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밀이수건’에서 최첨단 디지털카메라까지 없는 게 없는 도깨비시장으로서의 매력은 살아있다. 무엇보다도 단돈 1만원을 갖고도 재미있게 쇼핑을 즐길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로 또 다른 묘미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못 구할 게 없다. 원조품목인 ‘씨레이션’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동물 박제까지 정말 수천수만 가지다. 중국․일본산 인형, 플라스틱 시계부터 오메가, 로렉스 등 내로라하는 최고급품까지 없는 게 없다. 물건값을 30~60%까지 깎아 준다니 귀가 솔깃하다. 또한 이국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인도에서 수입된 옷과 반지 등 액세서리, 디지털 카메라와 벽걸이형 TV, DVD플레이어 등 첨단 전자제품이 가득하다. 또한 깡통시장 명성에 걸맞게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골목길 한가운데 노점상들이 줄지어 앉았는데, 유부 주머니 속에 당면 등 속을 넣고 미나리로 묶은 뒤 어묵처럼 끓인 유부전골은 혀끝에 감도는 달콤한 여운이 기가 막히다. 또한 뭍에서 나는 것이라면 무엇으로라도 죽을 쑤어 파는 ‘죽집골목’이 있어 입맛대로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는 시장상인들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깡통시장에서는 그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의 투박한 모습도 놓칠 수 없는 모습이다. 시장을 개척한 초창기 멤버들은 대부분 식품점을 운영한다. 깡통하면 역시 ‘씨레이션’이기 때문이다. 엄마를 따라 나섰다가 유모차 안에서 곤히 잠든 어린아이가 귀엽고, 손수레를 밀고 다니는 할머니의 거친 손등이 가슴 찡하다. ‘눈 밝은 사람, 동작 빠른 사람만 돈벌어 갑니다!’라고 외치는 노점상의 호객소리에 인간미가 묻어나는 곳이 깡통시장이다.
9. 국제 여객부두(부관역락선)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은 1905년 1월 1일부터 부산(초량)과 서울(영등포)간 경부선 철도가 개통에 이어 부관연락선(취항 당시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공식명칭은 관부연락선이었음) 이 운항되면서 일본 구주(九州)의 동해철도선(東海鐵道線)과 산양철도(山陽鐵道)가 이 부관연락선과 연계가 되었다. 이 부관연락선으로 맨 처음 취항한 것은 1905년 9월 11일 산양기선주식회사(山陽汽船株式會社) 소속의 일기환(壹岐丸, 1,680톤)이었다. 부관연락선은 일본의 산양철도를 거쳐 한국침략의 거점지인 대판(大阪)과 신호(神戶)를 연결하게 되어 있었다.
이어 11월에는 대마환(對馬丸, 1,602톤)의 취항으로 부산과 시모노세끼에서 매일 출항하게 되었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 동경에서 기차표 한 장으로 조선의 서울까지 올 수 있었다. 이를 여객선이라 하지 않고 연락선이라 한 것은 일본의 산양선 철도와 조선의 경부선철도 사이를 연락하는 배라 해서 연락선이라 했다. 당시에는 산양철도, 부관연락선, 경부․경의선 철도는 일본 국유의 철도원 소관아래 있었다.
부관연락선이란 말 자체에도 이미 일본의 조선과 대륙으로 침략을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상의 우월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만주의 여순(旅順)․대련(大連)부근 조차는 물론 장춘~여순간의 철도를 러시아에서 양도받으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일본은 1905년 조선의 정치․외교를 보호한다는 이른바『을사조약』을 체결로 대륙침략 야욕이 구체화되면서 부관연락선 운항이 다시 가속화되었다. 1908년에는 1천 9백톤급의 살마환(薩摩丸)을 취항시켰고, 1911년에는 1천 9백톤급 매향환(梅香丸)과 앵환(櫻丸)을 취항시켜 부산과 하관에서 아침과 저녁 두 번씩 출항하는 선편이 늘어났다. 1912년에는 매향환이 일본 門司港에서 침몰되자 홍제환(弘濟丸)을 취항케 했을 뿐 아니라, 1913년 1월 3천톤급 고려환(高麗丸)과 4월 신라환(新羅丸)의 취항으로 크게 증강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승객은 일본인으로 1908년 약 12만명(1,226회 취항)이었던 것이 1912년 약 20만명(1,416회 취항)으로 급증하게 된 것은 본격적인 대륙침략이 시작되었다. 1912년 이전까지는 연락선이 닿는 자리는 지금의 연안여객부두 안쪽 자리쯤이었다가 1912년 제1부두가 개장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가속화 되면서 1922년 5월 11일에는 3천6백톤급의 경복환(景福丸)과 11월 22일 덕수환(德壽丸)과, 1923년 3월 12일 창경환(昌慶丸)을 취항하자 종전의 여객선인 고려환(高麗丸)과 신라환(新羅丸) 두 척을 화물선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선박 증가는 중일전쟁(1937년)이 일어나면서 병력 및 군사물자의 수송과 함께 일본인을 이주시켜 식민정책을 강화하자는 데 있었다.
태평양전쟁을 앞둔 1936년 11월 16일에는 7천5백톤급의 금강환(金剛丸)과 1937년 1월 31일 흥안환(興安丸)을 취항시켜 시속 16노트로 종전의 11시간의 운항시간을 7시간 30분으로 단축시켰고, 1942년 9월 27일에는 7천 5백톤짜리 천산환(天山丸)과 1943년 4월 12일 곤윤환(崑崙丸)을 추가 취항시켰다.
이러한 연락선의 증강은 대륙의 침략 과정과 병행되어 갔지만, 부산항을 찾는 일본인은 조선 또는 대륙침략의 책략을 수행하기 위해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었다. 그 반면 부산항에서 떠나는 사람으로는 일본 유학으로 떠나는 우리나라 유학생(일본유학생수는 1926년 3,945명, 1930년 약 4,000명, 1935년 4,944명, 1938년 12,356명, 1942년 29,427명)도 있었지만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농토를 잃고 탄광의 광부로, 부두의 노무자로 가족을 두고 삶의 길을 찾아 단신으로 떠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제의 강점이후 10여년간 부산에서 일본으로 노동자가 되어 이 연락선을 타고 간 사람은 70만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 약 40%는 경상남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 일본으로의 도항하는 사람이 매년 증가하면서 1927년에는 14만 8천여 명이나 되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전환될 무렵에는 징용․보국대․징병․학병․여자정신대로 본의 아닌 타의로 끌려가는 우리나라 사람의 수가 날로 많아져 갔다. 강제징용의 예만 해도 1940년에는 1,892명이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1년 뒤인 1941년에는 6,898명으로 4배 가까이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 10월 15일 밤에는 下關을 출항한 7천5백톤급 곤륜환(崑崙丸)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544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이 사건 후에는 전쟁 수행상 다급한 수송이 요구되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야간운항을 줄이고 낮에만 수상기의 엄호를 받고 운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6월 30일부터 태평양전쟁으로 전세악화로 관부연락선 항로가 폐지되었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연락선의 구실은 사라지고 한동안 미군의 통제아래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본인 귀환민과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우리나라 귀환동포 수송을 부정기적으로 담당하다가 이후 운항이 중단되었다. 1960년대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1964년 부산과 대판 사이에「아리랑호」가 운항하다가 부관연락선이 끊어진지 25년이 지난 1970년에야 부관페리호(3,875톤)가 다시 부산과 하관 사이를 운항하게 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과의 정기여객선의 운항으로 앞으로 중국관광객도 부산을 많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부두의 총면적은 4만㎡이며, 여기에 마련되어 있는 건물면적은 1만1천7백81㎡이다. 여기에는 컨테이너 야드 1만3천2백㎡와 차량 통관장 3천1백19㎡가 마련되어 있다. 둘째, 터미널 건물(3층)은 출입국 대합실과 통관장 그리고 귀빈실을 갖추고 있고 아울러 선박회사의 사무실로도 이용되고 있다. 셋째, 안벽은 320㎡로서 연간 소형컨테이너 약 6만개를 처리할 수 있다.
10. 유엔기념공원
유엔기념공원(UN記念公園)은 부산광역시 대연동 779번지 일대의 면적 144,146㎡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에 의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한 16개국 전투지원국과 5개국 의료지원국의 유엔군 장병의 전사한 영령을 안치한 곳이다.
1951년 1월 18일에 묘지를 조성 설치하고, 1955년 11월 15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에서 오직 하나 뿐인 유엔관리의 묘지로, 1959년 유엔과 우리정부 사이에 묘지의 영구적인 관리 및 사용을 위한 협정이 성립되었으며, 1974년에는 관리권이 영령을 안치한 참전국 11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기념관리위원회에 이관되었다. 현재 이곳에 안치된 영령은 영국 885, 터어키 462, 캐나다 378, 오스트레일리아 281, 네덜란드 117, 프랑스 44, 뉴질랜드 34, 미국 36, 남아프리카공화국 11, 노르웨이 1, 대한민국 36, 무명용사 4, 비전투원 11기로서 총 2,300기가 안치되어 있다.
처음 이곳에 유엔묘지가 설치될 때에는 묘지의 수는 미국 등 16개국 11,000기이었으나 이디오피아․태국․그리스․룩셈부르크․콜롬비아 등 5개국 전몰장병 묘를 이곳에서 본국으로 이장해갔기 때문에 현재의 기수(基數)로 줄었다.
이 묘지는 20개의 묘소로 구획되어 있으며 각 묘소는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회원국에 봉납되어 해당국가의 국기를 게양하고 각 나라의 국명이 청동비(靑銅碑)로서 표시되어 있다. 다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동일 구획의 묘소를 사용하고 있다. 각 묘소는 그들 나라의 종교 의식에 따라 적절히 표기되어 있으며, 전몰장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해마다 많은 참배객과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1965~1972년까지 연평균 8만 6천명(외국인 6천명), 1971~1981년까지는 연평균 24만 5천명(외국인 364명) 정도의 참배객이 다녀갔으며 관광명소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최근에는 일반시민들은 물론 학생들이 많이 찾고 있는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유엔공원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참전용사들의 자유수호 의지를 선양하고, 민족적 비극과 참전실상을 통한 반공안보 의식을 일깨우는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1. 용두산공원
용두산공원(龍頭山公園)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남포동․창선동․대청동․동광동 등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 49m의 구릉성 산지이다. 부산시민들은 물론 외국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부산 제일의 휴식공간이자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다. 부산항 일대와 주요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용두산은 부산의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때인 1678년(숙종 4년)에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현 동구 수정동시장 부근)에서 옮겨와 초량왜관(草梁倭館, 현 용두산 복병산일대)이 설치되면서 항거왜인의 거주 및 통상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1876년 개항과 동시에 일본전관거류지가 설치되었다. 옛 문헌자료인『동래부지(1740)』산천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산(松峴山) 또는 초량소산(草梁小山)이라 불러졌다고 한다.
이후『草梁日錄(草梁館記)』『朝鮮事務書』등의 일본측 기록에서는 ‘복병산의 남쪽에 있는 소사(小山)으로서 중산(中山)이라 칭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용두산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朝鮮歸好餘錄(1878년, 일본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그리고 1899년 산 정상에 신사를 크게 지어 그 이름을 “龍頭山神社”라고 칭함으로써 용두산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장으로 개항되면서 초량왜관 일대가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되면서 용두산 일대가 거의 일본인 거리로 탈바꿈하였다. 일제는 1916년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11,976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하고, 매년 시설을 하였으며, 1923년 산 중턱에 자동차 도로를 개통하여 많은 나무를 심어 산림이 울창하였다. 1945년 4월에 용두산 일대 12,000평이 공원지대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이 산이 용두산이라 불리게 된 것은 산의 모양이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그 용꼬리인 용미산(龍尾山)은 舊 부산시청(현 롯데월드 자리)이 있던 자리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용두산 신사가 헐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월남한 피난민들이 영도다리,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부산역과 더불어 피난민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용두산 주위에 판자촌이 형성되어 산 정상까지 난립하였다. 1953년 11월 27일 발생한 부산대화재로 용두산공원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1954년 12월 10일 용두산 일대에 대화재로 인해 판자집 등 가옥 1,093동 소실되고 나무가 없는 벗은 산이 되었다. 1955년 3월 21일에서 26일까지 부산시내 공공기관에서 1,500만원의 예산으로 3,000주의 상록수와 활엽수를 심기도 했다.
1955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인 우남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60년 4. 19혁명 이후 용두산 공원으로 그 명칭이 환원되었다. 1966년 2월 9일 건설부 고시 제2186호로 용두산을 근린공원으로 고시하였는데 그 면적이 69,119㎡이었다.
「용두산 엘레지」가 그 대표적이다. 노랫말로는 한국전쟁 당시 용두산 공원과 관련하여 피난민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 고봉산이 부른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을 변치말자..... 일백구십 사계단에.....” 라고 하여 당시 피난민들의 생활상을 노래하고 있다. 지금은 노래말에 있는 194계단은 에스컬레이트가 설치되어 공원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1683년(숙종 9년)에 세운「約條制札碑(시 기념물 제17호)」, 1870년대 세운「斥和碑(시 기념물 제18호)」가 세워졌으나, 1978년 시립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용두산공원은 1972년 6월 26일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가 1994년 5월 해제되었다. 공원내 주요 기념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산타워(1972. 10. 4~1973. 10. 11, (주)도원관광)은 부산을 상징하는 탑으로 해발 69m 높이 120m이다. 타워 꼭대기 전망대의 모습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보개(寶蓋)를 형상화 하였다. 엘리베이트를 타고 전망대에서 바라다보는 시가지와 부산항 전경은 낯에는 바다까지 확 틔어 보이는 시원함과 밤에는 휘황찬란한 도심 야경이 은하수 별빛처럼 황홀한 광경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또한 맑은 날에는 수평선 위에 대마도의 모습이 바다에 비치어 보인다.
용두산의 대표적 상징물인 용상에는 “비청룡이 날아가는 기상을 하고 있으며, 좌대는 통일의 꿈과 번영의 의욕이 세계로 뻗는 항도 부산의 큰 뜻을 새기고 수천년을 이어온 조상들의 높은 얼과 정신을 받들어 동백꽃과 오륙도가 상징하는 부산시민의 슬기와 기상을 영원히 기리고자 세웠다”고 세겨져 있다.
부산타워 주변의 팔각정(3층, 2,478㎡) 2층에는 시민휴게실(1,805㎡)이, 1층에는 바다 속의 신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해양 수족관이 눈길을 끈다. 광장 뒤에는 어린이를 위한 과학전시관과 외국인을 위한 토산품 판매장이 있다. 문화공간인 용두산미술관(1992. 3 개관)에서는 언제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공원 진입로(약 1㎞)는 대청동(부산근대역사관)에서 오르는 길목에는 은행나무 터널이 있어 가을단풍의 진미를 느낄 수 있는, 한 편의 시(詩)를 연상케 한다. 또한 부산시에서는 시민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1993~1994년에 걸쳐 시인 청마 유치진의 시비 등 9인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동광동으로 통하는 길은 계단으로 피난민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계단이 있다. 공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도로는 광복동을 비롯한 5군데로 구 미화당백화점으로 연결되는 구름다리(1956. 5. 21 준공, 높이 12m, 폭 2.7m)가 있다.
공원의 정상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1955. 12. 22, 높이 12m, 경상남도)이 세워져 위기에 처한 때 나라를 구한 민족의 태양으로 먼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동상 앞에는 직경 5m의 꽃시계(1973, 삼화모방)가 아름다운 꽃 속에서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좌측에 있던 한국전쟁 당시 평화를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산하 한 부산․경남지방의 군경․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충혼탑(1957)과 영안실이 있었으나, 1983년 9월 11일 中央公園(舊 大廳公園)으로 이전하였다. 동상 우측에는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항거 하다가 순절한 4.19 민주혁명희생자위령탑(1961, 높이 11m, 국제신문사)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외에도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2,000여수), 공원안내도, 국민교육헌장비, 자연보호헌장비(1979, 중구라이온스클럽), 어린이헌장비(1961. 5. 1),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비천하는 청룡상, 조국 독립을 위해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자금 조달을 주도했던 백산상회 설립하여 대한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1989. 9. 9)이 설치되어 있다.
광복동에서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용두산공원”이라 새긴 표지석을 보노라면 이곳이 용두산이구나 느껴진다. 공원의 많은 수목들이 혼재하고 있으나, 그 옛날 울창했던 장송들은 온데간데없고, 녹지공간은 약 70여종의 상록수와 활엽수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수종은 은행나무, 느티나무, 히말라야시다, 측백, 편백, 해송, 무궁화, 벗나무, 개나리, 광나무, 쥐똥나무, 가시나무, 꽝꽝나무, 향나무, 동백나무, 연산홍, 철죽, 사철나무, 목련, 팽나무, 푸조나무, 개서나무, 단풍나무, 참나무류, 청오동, 식나무, 산호수, 장미, 플라다스나무, 배롱나무, 종려나무, 가래나무, 조릿대 등이 울창하게 들어차 있다. 수림 사이로 공원을 우회하는 산책로가 있고 산책로 주위에는 관광객이 휴식할 수 있는 등가대 혹은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이 공원은 시민들이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장 적당할 뿐만 아니라 특히, 외국인의 이용도가 높으며, 노인들의 휴양지 및 인근 주민들의 산책로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12. 부산역(부산 정거장)
경부선(京釜線, 1901. 8.~1904. 11. 10)은 부산(초량)과 서울(영등포)에서 동시에 공사를 착공, 준공하여 1905년 1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1908년에는 초량에서 부산역(지금의 부산역 소화물 취급소 자리)까지 연장하여 동년 4월 1일 임시 부산역사에서 철도업무를 개시하였다. 1909년 1월 8일 순종황제의 순행이 있어 처음으로 궁정열차를 부산까지 운행하였다.
부산역사(釜山驛舍)는 1908년 6월에 착공하여, 1910년 10월 31일 준공하였다. 건물은 외관 장식은 붉은 벽돌로 벽돌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 겹의 테두리를 둘렀고, 처마 밑에는 벽돌과 화강암을 엇갈린 사라센 계통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지붕은 둠(Doum)형으로 슬레이트로 이었고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角塔)이 있었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최종 종착지로 함경도 함흥 등지에서 부산항으로, 또한 전국 각지에서 피난열차에 몸을 싣고 남으로 내려와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피난행렬 속에서 부모 형제들과 생이별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고 한다. 당시 피난시절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생이별한 가족들의 그리워하였는지는 당시 유행하였던 대중가요의 가사속에서 느낄 수 있다.「굳세어라 금순아」「용두산 엘레지」「이별의 부산정거장」등이 대표적인 노래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역과 관련하여 피난민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 남인수가 부른「이별의 부산정거장」은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라는 가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당시 피난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이 1,000만명에 이른다.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려던 부산역사(釜山驛舍)는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중앙동․동광동․영주동 일대가 초토화되면서 부산우편국과 부산일보사 사옥 등과 함께 애석하게도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 1965년 11월 구 초량역과 함께 부산진역으로 통합되었다가, 1969년 6월 지금의 부산역사가 준공되면서 영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