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12: 20-33
제가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수없이 불렀던 찬송가들 중에 지금도 부를 때마
다 진한 감동에 빠져들게 하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블랜디(Blandy)가 작곡한 '예수
나를 오라 하네'라는 찬송입니다. 어릴 때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어른들을 따라 불
렀지만 나중에 철이 들어 그 가사에 담겨 있는 심각한 뜻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로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이 찬송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이 찬송의 가사를 한번 보십시
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
네." 원래의 영어 가사를 보면 훨씬 더 실감나는 내용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
라고 하시는 주의 부르심 들리네. 그가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 나는 가리라. 항상 그와
함께 가리라." 2절 가사는 훨씬 더 비장합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
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네." 가사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심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 찬송가 가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을 앞에 놓고, 특히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
할 때 "호산나 이스라엘 왕이여!"라며 환호하던 그 군중들을 앞에 놓고 비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섬기려고 하면 나를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코 단순하다고 볼 수 없
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말씀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쁘게 받지 못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믿음 약한 분들도 상당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일반적으로 현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는 말은
부담 없이 받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까? 주님을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라
고 하면 매우 부담스러워 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락방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크고 작은 일들로 봉사하느라
교회를 제 집 드나들듯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야 한다는 말에는
마음을 활짝 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쉼을 얻기를 바라면서도 예수님이 메
라고 하시는 멍에는 별로 메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가는 일에는 가능하면 뒷전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무리가 뭐라고 소리쳤습니까? 손을 들고 "호산나 이스라
엘의 왕이시여!"하며 환호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팔레스
타인에 있는 작은 영토의 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라는 말이요, 전 우주를 다스리는 영원하신 왕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들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들 예
수님을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왕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섬겨
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고백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분
을 섬기고 따르기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의 백성이 될 자격
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지는 몇몇 대선 주자들 주변에 대학 교수들과 세계
명문대 석박사 학위를 가진 석학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정치학을 전공한 사
람은 정치 분야를 지원하고,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은 경제 분야를 지원하고, 기타 자기
전공을 따라 적절한 영역을 맡아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는 연구 보고서
를 작성하느라 며칠 밤을 새기도 합니다. 월급이나 보수를 받고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무보수로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인물이 대권을 손에 쥘 날이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리게 될 영광이 곧 자신의 영광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줄
지어 서는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왕이 되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그분을 섬
기고 따르기를 자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멋진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도 그의 믿음
을 정상적인 것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도 안 통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과연 이 세상의 대통령에게 우리가 소망을 둘 수 있을까요? 그가 우리의 미래를 책임
질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새 대통령을 뽑아 놓고 반년이
채 가기도 전에 실망하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 꿈
과 미래를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높은 보좌에 앉으
셔서 정의와 사랑과 자비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사망도 없고, 아픔도, 눈물도
없는 그 나라만이 우리의 꿈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따라
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이미 몰락의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분
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 사탄은 자기의 때가
얼마 안 남은 줄 알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들은 사탄의 권세
아래서 온갖 부정과 압제를 자행하며 자기의 욕심을 채웁니다. 그러나 그 역사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정권 치고 무너지지 않는 정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 나라와 그 임금을 위해 몸바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땅에서
들린다'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의미합니
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실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 중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구름 떼와 같이 주님 앞으로 몰려 들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가 대망 하던 하나
님 나라가 우리 눈앞에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완전하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나라 임
금을 위해서 섬기고 따라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수년을 믿었음에도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청산유수처럼 말하지만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십시오.'라는 말을 부담스러워 하는 분이 계신다면 저는 감히 이
렇게 권고하고 싶습니다. "안 믿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세상 끝 날까지 그런 믿음
가지고 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종이 되라
26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예수님은 자기를 둘러싼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네
오'로 '집사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집사는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주님
의 말씀은 다시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이 되어 나를 섬기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를 따르라!" 저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처럼 종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
피 예수님은 이 세상에 귀족이나 왕자처럼 고귀한 신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으로서 누리던 그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2:6,7)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짓눌리는 우리를 구원하
시기 위해 친히 종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실 동안 하나님
한테 죽도록 충성하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그는 이따금 자신을 가리켜 '종'으로 표현하
시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7절을 보십시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
라." 그는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 종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스승 되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한 평생을 종으로 사셨다면 그의 제자 된 우리 역시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자라면 당연히 스승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으로서 하나님께 얼마나 철저히 순종하셨는지는 본문 2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계셨습니다. 인간 치고 죽음 앞에서 두
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기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두렵고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렇게 기도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자기가 십자
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그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으로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은 더 나아가 자기를 따르는 우리들에
게도 종이 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17장 7절 이하에서 종의 일상을
비유로 들며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비유
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머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머슴'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한
창 바쁜 농번기가 되면 머슴뿐만 아니라 주인까지 하루 종일 들에서 일을 합니다. 해가
져 어두워지면 주인과 머슴이 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주인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우물가
로 가서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상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머슴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가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마루에 걸터앉아 마음
놓고 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여자들은 당장 부엌으로 들어가서 불을 때고 저녁을 지어
야 하고, 남자들은 농기구를 정리해서 헛간에 들이고 장작을 패거나 물을 나르는 등 기
타 허드렛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앉아서 쉬기는커녕 얼굴 한번 제대로 씻을 틈
도 없습니다. 저녁밥이 다 준비되면 상을 차려서 날라야 합니다. 곁에 대기하고 있다가
밥이나 반찬이나 물을 가져오라는 주인의 잔심부름 시중도 들어야 합니다. 머슴들은 주
인 식구들이 식사를 다 끝내고 편안히 쉴 때에야 비로소 부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허
기진 배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유 있게 노닥거리며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먹고 나면 산더미 같은 설거지 그릇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
을 다 끝내야만 드디어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울 수 있습니다. 이게 머슴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머슴은 원래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7장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라." 종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무슨 사례나 칭찬을 바라지 않는 법입니다. 주인이 매정하다
고 섭섭해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섬기는 자가 바로 종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모두가 자기에게 이와 같은 종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지고 섬길 것을 교훈하
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
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위해서 종으로 충성하셨을까요? 요한복음 6장
38-39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충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하사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구원하는 것이었습니
다. 마태복음18장14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
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어린 아이 하나라도 구
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까지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고자 충성을 다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는 이 일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는 오늘 본문 23절에서
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 사람들이 빌립을 통해
면회를 요청해 오자 주님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영
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헬라 사람 몇 사람이 자기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 무슨 대
단한 일이라고 주님이 이렇게 흥분하셨던 것일까요? 장차 이루어질 일을 내다 보셨기 때
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면 그때부
터 모든 민족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백성들
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의 면
회 요청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헬라인은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
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방문은 머지 않아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
게 될 것을 예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이 성취될 그 날이 가까웠음을 보시
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하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그 만큼 소중히 여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서 우리 역시 주님처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아직도 예수를 모른 채
죄에 빠져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원히 저주받은 영혼을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서 하나
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업에 성공해서 이름을 날
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 비교
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보다도 더
앞세워야 할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사가 되어 자기의 젊음을 송두리째 불태우며 복음 전하는 일에 헌
신하는 사람들만큼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교사나 전도자들만큼 큰 존재는 없습니다. 왜
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앞세우는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가정에다 우선권을 두고 정성을 쏟으면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학문에 생명을 걸고 노력하면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학자가 될 수 있
습니다. 사업에 모든 정력과 시간을 쏟으면 기업가로서 기반을 든든히 닦아 남부럽지 않
은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
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일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입니다. 행복한 가정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명성을 얻게 된 학문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사업에
서 이룬 성공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 있고 보람있는 것이 되려면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그 일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까? 이웃 사람들이 우
리 가정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자녀들을 잘 키우려고 합니까? 이 자녀가 다음에 자라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면 그를 통
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온 누리에 충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사
업을 하기 위해 밤낮 정신없이 뛰어다닙니까?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면 그 물질 가지고
복음 사업을 위해서 기쁘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불신자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와 같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우리의 사업이나 가정, 학문과 연계가 될 때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
니다. 골로새서 3장24에서 바울은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노예가 섬기는 자는 자기 주인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후에 자기 동료들을 예수 믿게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좀 똑똑한 사람들은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주인의 자녀들을 예수 믿게 했습니다. 이 자녀들을 통해서 주인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300년 동안 기독교를 핍박했지만 이러한 복
음 사역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중에는 천하의 박해자 네로 황제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서
도 예수 믿는 자가 상당수가 생겨났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
게까지 복음이 전달된 루트는 바로 이들 노예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퍼지게 된
복음은 드디어 300년 후에 대제국 로마를 완전히 삼키기에 이르렀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신분과 직업이 비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하나
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삶을 이용하니까 노예 생활 자체
가 주님을 섬기는 가치 있는 삶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업, 재능, 젊음, 재물이 주님께서 죽도록
충성하셨던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직간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
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미 있는 삶이요, 주님을 섬기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세상을 구원하는 일과는 별로 관계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당신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루기 위해 예수님처럼 종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 나중에 주님 앞에 무슨 면목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썩는 밀 알이 되라
둘째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처럼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
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한 알의 썩는 밀 알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시 말해
서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24-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
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것이 예수님이 종으로 충성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썩는 밀 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늦가을이 되면 아버지께서 밭에 보리 종자를 뿌리는 것을 많
이 보았습니다. 씨앗들은 흙 속에 떨어져 있다가 혹한이 되기 전에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잎새들은 작고 가냘픈 모습으로 한겨울을 난 다음 봄기운이 도는
2월 말경부터 왕성하게 자라납니다. 저는 가끔 호기심을 못 이겨 4,5센티미터에 불과한
새싹들을 쑥 뽑아 보았습니다. 그러면 뿌리 채 딸려 올라옵니다. 그 뿌리에는 종자로 뿌
려졌던 보리 껍질이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손으로 만져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종자 속에 있던 알맹이는 새싹을 내는데 자양분으로 다 사용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
게 자기가 썩어 싹을 틔운 한 알의 밀 알은 사오월이 되면 누런 보리 이삭들을 풍성히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보리 알 때문에 그
런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니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보리보다 밀을 많이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썩는 밀 알의 비유를 가지고 자기를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
를 가지는 말씀인지를 설명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
니다. "나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썩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내
가 십자가에 죽노라. 내가 죽어야만 세상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구름 떼와 같이 많
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십자가를 무서
워하여 회피한다면 이 세상에서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 말씀대로 행
동에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인 우리한테 자기의 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
내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처럼 너희도 많을 열매를 얻기 위해
한 알의 썩는 밀 알이 되어 죽어야 한다." '나를 따르라'는 말속에는 이러한 요구가 담
겨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알의 썩어지는 밀 알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
문 25절을 보세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썩는 밀 알이 된
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좀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프쉬케
'(psyche)인데, '목숨'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도 '자아', '뜻', '의지', '소원'이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은 우리의 뜻이나 소원
을 부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는 이것을 '자기를 부인하
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기 위해 자
기의 소원이나 뜻은 다 부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면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썩는 밀 알이 되는 길입
니다.
찰스 스터드는 100여 년 전에 영국에 살았던 사람으로 갑부의 아들이자, 캠브리지 대
학을 나온 수재요,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크리켓의 대스타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식사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야말로 부와 명예를 한 몸에 누리던 젊은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
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무
디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자연히 그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의 삶은 놀랍게 변했습니다. 자기가 이제껏 누려왔던 인
기나 명문 대학 출신이라는 자부심, 집안이 부유하다는데서 오는 만족감 같은 것들이 너
무나 시시하게 여겨졌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 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깨달음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의 젊음을 바치고자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
다.
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고 그는 3만 파운드가 넘는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파운드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엄
청난 유산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은 유산을 몽땅 무디성경학교
와 조지 뮬러의 고아원과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단체에 헌금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만
나 결혼하게 된 아내와 함께 중국에서 18년 동안을 선교사로 헌신했으며, 이후 6년 동안
을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습니다.
이렇게 장기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하다 부부가 다 중한 병을 얻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들은 요양차 영국에 귀국했습니다. 영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
느 날 스터드는 어떤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곳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보고 적지 않은 충
격을 받았습니다. 그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식인종이 선교사를 기
다립니다!" 당시 그는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천식을 앓게 되어 15년 동안을 고생해온 터라 몸이 몹시 허약해져 있었습니
다. 게다가 나이도 벌써50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그의 부인조차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
님께서 자기를 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신다는 그의 확신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만
류하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천식으로 인해 지난 15년 동안 겪은 고
통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은 죽음의 고
통이나 다를 바 없었소. 더군다나 내 몸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태요. 왜 내게 이
제는 쉬고 싶다는 그런 유혹이 없었겠소?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나는 잠시라도 쉴 수
가 없소."
그는 병든 아내를 영국에 남겨둔 채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났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도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가복음 8장 35절 말씀을 굳게 붙잡았습니
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렇게 자기를 완전
히 제단에 올려놓는 신실한 종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대우하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한
번은 그가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정글을 헤치고 지나가게 되었는데, 29마리의 당나귀 중
25마리가 죽고 4마리만 살아 남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와중
에서도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정글에서 그를 지켜
보호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70세가 되기까지 무려 20년 동안을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하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사역은 그가 창설한 WEC선교회에 소
속된 1,800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영국에 있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에게 건강을
줄 수 없는 의사를 멀리하고 예수님께 상의해 보는 게 어떻소? 사랑하는 이여. 예수님께
가서 그 분께 당신을 드리시오. 그러면 나와 함께 세계를 돌며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오. 반드시 그러리라는 것을 믿고 있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
에 나와 당신이 살아야 할 다른 길은 없다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제자도의 알파와 오메가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
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
은 내가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뜻, 나의 꿈, 나의 욕심, 나의 고집, 그 무엇이든
지 주님의 뜻에 반하는 것은 다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더 높은 생의 기쁨을 위해서는
땅에 속한 것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부인하
라고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자기 목숨까지라도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 영광을 버리라고 합니다. 주님의 뜻을 위해 내 뜻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의 짧은 한 생을 주님
의 제단에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썩는 밀 알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을 섬기
기 위해서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 년을 믿
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요,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요15:8).
주님은 이와 같이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두 가지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
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도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께서 귀하
게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도 이와 비슷한 약속을 들려주십니다. "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
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주님이 영광을 누리는
곳에서 주님을 위해 썩는 밀 알처럼 헌신한 자들도 그 영광에 함께 동참하게 해 주신다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종입니다. 예
수님은 자기가 썩는 밀 알로 희생한 것처럼 우리도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
은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부이든, 학생이든, 사회인이든, 직장인이든 상관
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귀한 일에 쓰임 받
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한번밖에 없는 우리 인생입니다. 이 세상의 망할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다가올 영원한 나라를 위해 열매 맺는 일에 헌신하겠습니
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
시는 그 일을 시작합시다. 우리의 젊음과 지식, 재물, 시간, 이 모든 것을 세상을 구원
하는 일을 위해 사용합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빛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가장 영광스러운 일에 부름 받은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함부로 살다 그만 둘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
르는 제자로서 그 신분에 걸맞는 인생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하시는 칭찬을 꼭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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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