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를 읽고
얼마 전 배움터 공부 모임에서 읽었던 홍세화선생의 책입니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되신 홍샘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래 전에 홍샘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란 책을 읽고, 출판된 지 꽤 시간이 지난 이 <생각의 좌표>책은 우리 사회 모순을 바라보는데 매우 유용한 내용이 많습니다.
이 책을 보고 바로 <자살하는 대한민국>을 보고 있어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려다 보니 모임 후 시간이 조금 지났습니다.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데 주류경제학 개념틀로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개인의 마음(이기적, 품성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으나 나름대로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국는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치고 이렇게 빠르게 압축성장한 나라가 없는 예외적 국가입니다. 그러나 빠른 성장만큼 그 모순을 제때에 완화를 하지 못해서 몰락 또한 급속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대기업에 비해서 중소기업과 농업의 생산성의 문제에 대해 역사적 형성과정을 생략한 점입니다. 알다시피 한국산업구조는 산업 간 유기적 연관 속에서 내포적 발전이 아니라 대외의존적 대기업 중심으로 발전했고, 농업은 미국의 과잉농산물의 처리시장으로 전락해서 중소기업은 유기적 발전은 할 수 없었서 대기업의 하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대기업을 제외한 다른 산업은 저임금에 장시간으로 굴러갑니다. 대기업 중심의 발전전략에 자본주의는 자본 집적.집중이 필연적으로 나타나서 대기업은 더욱 비대해지고 다수 민중은 가난해집니다. 퇴직자들도 실업자.비정규직.자영업자 등 함께 산업예비군의 대열임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좌표>에 대하여
어떤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 정신적 생산수단도 지배한다. 따라서 대체로 정신적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그것을 소유한 자들의 사상에 종속된다. (독일 이데올로기)
한국 사회 지배계급은 자본가계급과 이들의 이익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국가기구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해방 후 미군청정이 몇 년 간 지배했고 이후에 형식적이나 참정권을 주고 국가형태를 만들었으나 미국 이익에 복무하는 데 상당한 정도로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신적 생산수단은 학교, 출판사, 언론사 등으로 거의 지배계급과 그 국가 수중에 있습니다. 다수 사람들은 매일 접하는 뉴스나 학교교육이나 대중교육에서 접하는 역사,경제,과학지식 등은 미국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한국의 제도교육은 교과서를 거의 성경처럼 신성시하면서 무조건 외우고 정답을 고르는 문제풀이가 아직도 중심에 있습니다. 교과서가 외세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짜여있는데 이에 대해 민족과 민중 이익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사회가 왜?란 의문을 갖고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쓰기를 하면 지배계급과 외세가 통치하는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교에서 시험대비 논술도 입시를 위해 수치화되고 정형화되어 이를 가르치는 학원이 생길 정도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가질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 교과서에서 기존 지식만을 암기하고 정답 맞추기만 급급한 정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데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 권리인 근로기준법과 노동3권이 교과서에 얼마 전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가 해방 후에는 영어가 우리 국어보다는 훨씬 중요시합니다. 이는 단지 소통수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지배에 영향을 크게 미치기에 중요합니다. 남북 단원에서도 남북이 함께 살아야 하는 민족으로서 통일을 강조하면서 이북 바로알기보다는 이북을 비하하고 같이 살 수 없는 원수 취급합니다.
한국 교육은 지금까지 왜?란 질문없이 주입식 암기 문제풀이식이 주로 했던 시기는 산업사회로 기계에 적응하는 시대여서 급속한 압축성장을 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은 이런 일은 기계나 인공지능이 거의 다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기는 학생중심의 협력학습으로 학생이 창의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제풀이 중심의 수능고사를 자격고사로 하고 대학도 서열화가 아닌 평균화로 전환해야 합니다. 물론 이 서열화와 학벌사회를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고교졸업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동시장에 대한 고민까지도 해야 합니다.
자본의 내적 강제법칙은 경쟁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농촌공동체가 붕괴된 이후 한강기적이란 이름으로 성장만 추구하여 이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장치를 거의 하지 못하여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을 지도하는 교육과정을 아동학대죄로 고소하여 많은 선생님이 극단적 선택을 하였습니다. 공동체가 사라진 후에는 국가가 이를 대신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니 맘카페 등으로 각자도생하여 정보취합과 취사선택을 오로지 하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장시간에 저임금에 결혼과 출산이 사치재여서 최대한 가성비를 따집니다. 그래서 언제나 무해한 환경만이 원하는 효율성만 따지다 보니 이런 이기적이고 무모한 행위를 합니다.
대중교육,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누리소통망(SNS) 등을 통해서 지배계급의 정신적 생산수단으로써 다수 민중의 동의를 구함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제도교육도 이런 상황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교사 집단의 노력으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정신적 생산수단에 대해 미국과 우리 지배집단의 절대적 영향력에 있기에 대다수 민중은 허위의식인 물신이 팽배해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가 이만큼 살게끔 하는데 도와줬기에 은혜로운 존재라든가 625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고마운 국가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기업이윤이 나지 않으면 도산됨으로 노동자의 일자리를 잃어버린다. 교육에서 암기식 주입교육에 따라 오지선다형을 매우 공정하다. 등등 관념도 매우 강력한 현실적인 힘이 됩니다. 민중이 이런 허위의식을 벗어나야만 통일문제도 민중생존권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우리 사회가 민족과 민중이익을 위해서 물질적 생산수단이 최소한 자립적 입장에서 편성해야 하지만 미-일-한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분업구조에 철저히 대외의존적 양적 경제성장을 해왔습니다. 세계 10위 GDP를 외형적으로 뽐내고 있지만-현 정권은 그나마 자본축적을 위한 환경도 방해하고 있어 날개없는 추락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주권이 우리에게 매우 미흡한지라 대내외적 경제정책을 자주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출중심의 대기업에는 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에 비해서 취업률도 매우 낮습니다. 대부분 노동자는 중소기업과 서비스업 그리고 자영업입니다.
이 산업들은 대기업과 유기적 연관 속에서 내포적 경제발전이 아니라 하청화되어 있기에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립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긴 노동시간을 자랑한 한국은 이를 어릴 때 적응시키기 위해서 장시간 학습노동과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답만 외우라는 교육이 지금도 횡행합니다. 주입식 암기교육은 생각도 없고 실천도 없는 식민지 교육입니다. 농업은 존재 자체가 매우 힘든 산업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 생산수단 또한 자주적이지 못하고 반민족 외세적이면 반민중적입니다.
한국은 경제성장에 비해서 민중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유례없이 빠르게 경제성장을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소멸하고 있습니다. 압축성장하면서 나타난 모순을 해결은 아니더라도 완화시키면서 성장을 해야 했는데 많은 모순을 방치한 결과가 급속도로 저출산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결혼과 출산이 당연한 현상이 아니라 사치재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준조세의 성격을 띠고 있는 사교육비와 천정부지를 치솟았던 주택 문제 등을 우선 정치권이 해결해야 하는데 그리 관심이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증세를 해야 하나(그럼에도 이가 가장 바람직합니다.) 저항이 있고 당분간은 국가채권 발행도 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국토의 균형발전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인구뿐만 아니라 자본도 대부분 몰려있기에 이를 분산시켜 주택가격 하락과 일자리 등을 고르게 배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헌재판결이 관습법으로 정부이전을 저지시켰으니 어느 나라 기관인지 의문입니다.
홍샘은 프랑스 왜?란 의문을 갖고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쓰기를 한다면서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 학생들에게는 말잘듣는 노예로 만들기기 위해서 단순한 기술만 익히는데 학교를 개방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달리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에서 탄생한 산업구조나 여러 제도의 식민지성을 고찰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처럼 톨레랑스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지가 잘되어서 서민들이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도 이런 상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오랜 세월 동안 부르주아 혁명과정이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공했고 여기에 더해서 짧지만 노동자 정권(코뮌)이 들어선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복지는 민중의 투쟁도 있었지만 수많은 제3세계 식민지에서 착취와 약탈을 통해 거둬어들인 부도 큰 몫을 했습니다.
한국은 개발독재로 빠른 압축성장으로 선진국처럼 오랜세월 투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모습만 수입해왔습니다. 이것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민대표선출도 온전히 투쟁으로 획득하였습니다. 아직도 한국은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사회적 약자들의 발언권이나 이익을 위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노동력을 팔아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이기에 노동자권리를 보장해야 하는데 가장 기본인 노동조합 결성권도 없는 노동자가 다수입니다. 또한 여러 계급과 계층이 존재하기에 이해관계가 달라서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다당제가 필요한데 한국은 양당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학생은 정치 기본권은 있으나 지도할 교사는 없어서 정치적으로 한정 치산자입니다.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미국과 자본이익의 자장 안에서 뿐입니다. 홍샘은 이북의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이 공적 소유이기에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