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우리 시대의 명저 50] '풍류'에서 한국적 기독교의 길을 찾다 한국 종교 연구 기독교의 토착화 노력 종교의 공통분모 '삼태극'을 찾아내 "속죄의 상징 십자가는 우리와 안어울려" 한국일보 2006.1.17 | ||||||||||
(산) 2006년.. 개신교가 들어온 지 120년, 2014년 현재, 13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복음 역시 전래의 무교(?)와 유불도 삼교.. 정확하게 유불도라고 하여 유불선이 아니라는 것만 해도 상당히 정련이 된 개념의 정립입니다. 무교가 바로 선교에서, 신선교, 신교라고 하는 용어에서 나온 말이기에, 仙교=전래의 무교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박수... 그렇다면 이 히브리의 영적 씨앗이 한국인의 심성과 동아시아 문화의 토양에 어떻게 뿌리내렸고, 지금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이 질문은 선교적 관심때문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주체적 역량에 대한 반추 위에서, 영적 주체의 응답으로서 절실하다. 그 물음에 답한 이가 “교회마다 십자가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태극’의 상징을 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도그마 너머의 신학자, 소금(素琴) 유동식(85)이다 (산) 황당한 이야기.. 한국인의 심성과 동아시아 문화의 토양에 어떻게 뿌리내렸고, 지금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선교적 관심이라, 현재 북미 및 해외교포사회에서는 90%가 개신교도로 선교가 완료되었고, 아메리카 인디언 선교, 남미선교, 불교국교인 지역 선교활동(네팔, 인도 등) 그리고 이슬람교의 국가까지 중동지역,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터키, 이집트 등등.. 기부와 자선으로 선교할 자금이 마련되었으므로 도움을 준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의 한국인 선교에 도움을 준 것을 이제는 한인유다개신교인들의 적극 선교에 나서고 있습니다. 한국토착을 위한 선교가 아닌 한국유다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하여 모든 개신교 교회에는 세계선교회의 지원으로 선교활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에 한층 한국기독교의 선교와 토착을 위해, 단순 풍류신학만이 아닌, "십자가 대신 "천지인" - '삼태극'의 상징을 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유는? 유다민족이 되기 위해서.. 참으로 소탈한 거문고의 선교논리와 개신교의 풍류, 한류화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서글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왜 민족종교, 전래의 무교는 물론이고 불교도, 무너지고 있는가? 돈이 없어서다..고 해볼까? 아니면, 사상과 철학이 없는 미개민족이어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이 천부코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 하나가 유일이라고 떠드는 사람들.. 우리언어의 위대함을 모르니까, 그냥 이야기한다, 윷놀이, 바둑, 역(서양력, 태양력,요일력 모두 서양이란다), 과학, 산업, 지식 거기에 영적자유까지... ================================================ 1956년 그는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으로 보스턴 유학길에 오른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 소외에 시달려온 34세의 만학도는 그곳에서 또 한 번 근원적인 소외감, 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경전과 신학체계 전체가 서구 문화의 틀 안에서 형성됐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로써만 성서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누릴 수 있다면, 기독 신학자와 신앙인에게 반만 년 한국의 종교문화는 단지 미망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신앙이란, 절대자 안에서 우리의 모든 소외감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아닌가.(<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 84쪽) (산) 경전과 신학체계가 서구문화와 그들의 언어와 문화로써만 성서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했어야 하는데, 그래야 왜, 하나님은 그들 언어인 히브리어로 번역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 반만녀 한국의 종교문화는 단지 미망함을 인식할 수 있었을텐데.. 마치 민족종교지도자처럼, 반만년역사라고 말은 하는데, 그러면서 단군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라고 말한다. 언어도단이라고 하는 말로, 민족의 자존심과 자수심을 높이는 것처럼, 역사의 시간이 반만년이 되다고 하지만, 겨우, 2000년의 종교철학이 어떻게 5000년 민족종교철학과 비교가 되냐고 하면 아마도 당장, 우리의 역사는 썰화였다고 할 것이고, 단지 고운 최치원이 난랑비서문도 만들었다고 할 것이기에.. 신앙이란 있슴이고 진리란 있슴을 아는 것으로 이를 깨달으면 도를 깨달은 것이고, 정성(소망), 믿음, 사랑중에 모두가 중요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정성입니다. 하나이지요. 정성, 믿음, 사랑은 모두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니, 자유와 평등은 하나라는 무부재 부불용 허허공공이나, 시작이고 마침이면서 무시무종의 하나라는 민족 무교의 종교관과 철학관을 이해라도 해주었더라면..... =================================== 그 즈음 신학의 양식사(樣式史)적 연구, 즉 진리의 절대성과 병행하는 문화의 상대성을 해명한 독일 신학자 불트만(1884~1976)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밝혀준 빛이었다. ‘진리를 담는 그릇’인 역사와 문화의 상대성 연구, 종교를 담아온 우리 민족 고유의 마음 틀을 찾아가는 그의 길이 열린 것이다. (산) 모든 철학과 신학은 독일 신학자, 철학자에서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진리를 담는 그릇이 "역사"와 문화의 상대성 연구.. 종교를 담아온 우리 민족의 고유의 마음 틀.. 이것이 하나경이고, 천부경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독일철학과 종교학의 "신은 죽었다"는 칸트의 철학이 신학에 필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60년대 초 그는 국내 기독교 ‘토착화 논쟁’을 선도하며 한국학 연구에 몰두한다. 절대자를 인식함으로써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 종교라면, 기독교의 복음원리와 우리 고유의 영성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민족적 영성의 문학예술적 표현으로서의 ‘신화’와 그 영성의 종교의례적 표출로서의 ‘제례’에서 시작한 그의 한국 종교사 연구는 단군ㆍ주몽ㆍ혁거세 신화와 고대의 제천의례, 신라의 화랑도(풍월도), 최치원의 풍류도, 원효의 불교사상, 율곡의 유교사상, 수운의 동학사상으로 이어진다. 그 시절 집필한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1975) 등의 저서는 한국 종교, 특히 무교에 대한 본격 연구서로서 지금도 거대한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산) 그러니까 국내 기독교 "토착화 논쟁"을 선도하면서 한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풍월도(화랑도) 최치원의 풍류도(무슨 최치원의 풍류도인지? 난랑의 화랑의 풍류지), 단군, 주몽, 혁거세까지 모든 씬화라고 하지 않는가? 동학교사상까지..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1975년).. 무교에 대한 본격 연구서로, 지금도 거대한 지분을 확보했다함은 잠재적 무교인들의 개종이 가능하고 이를 이용한 토착선교가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지분.. 좋겠습니다.. ============================================================ 신학의 토대 위에서 한국 종교사상사 연구로 나아간 그가 ‘풍류 신학’이라는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개념을 정립한 것은 80년대 중반이다. 60년대 <삼국사기>에서 최치원 난랑비문의 한 구절-‘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는 삼교를 포함한 것이요’-을 읽은 이래 어슴푸레하게 감지되던 실체를 붙든 것이다. 그는 고대 종교문화를 형성한 한국인의 원초적 영성이 유ㆍ불ㆍ도의 외래 종교와 어울려 맺은 것이 화랑제도요, 풍류도라고 밝힌다 (산) 풍류신학이라는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개념을 정립한 것이 80년중반이었다. 그러니까 박원순의 역사문제연구소 설립도 80년대 중반.. 삼국사기에 최치원의 난랑비문의 한구절.. 최치원이 아니고 난랑(진흥왕조의 화랑이 쓴 서문)이라고 하는데도 마치 최치원이 만들어낸 화랑도는 풍류다고 합니다만, 전혀 화랑과 풍류라는 것이 그 수련집단과 철학사이에 관련이 있는가를 연구한 것이 아니고, 화랑들만의 종교철학이 풍류다고 단정하여, 이것이 우리민족의 전통종교사상이다고 하는데, 그건, 풍류라는 말은 삼신교의 하늘의 도(하나)이고, 화랑은 천지화랑(하나랑)의 신라시절의 교육집단체제로 현재의 대학에 해당하는 민족교육집단, 민족사관학교로 사상과, 육신의 강건함 그리고 인륜의 실천이라는 귀족자제들의 국가관형성과 무관의 자질함양집단 교육기관입니다. 도리어 개신교면서, 귀족에 해당하는 노블들의 자제는 전부 검은머리 외국인에, 병역기피에, 하는 현실적인 종교에 편승한 사함, 죄를 사함받다 구제받는다는 것으로 토착민족정신의 쇠퇴가 문제입니다. 화랑과 풍류를 이용하여 개신교의 토착화와 선교를 하겠다는 것이 정말 참신하고 독창적인 것이란 말인가? 학자로서의 양심이라도 있는지? 하나민족의 한 사람으로 학생들을 자유와 평등에 의해, 공평한 사고의 논리적인 전개를 가르쳤는지? 아니다고 본다. 단순, 유다개신교의 토착화와 선교를 위해 민족정신의 말살 혹은 접목, 군생접화.. 민중과 접하여 기독교만 선교하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유다적인 유일철학의 발로는 아닌가? 사랑이란 개념도, 자심지자연이고 인성지본질이라는 사랑, 동양사상의 기본 측은지심, 어짊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고는 이러한 풍류신학이라고 풍류, 멋드러진, 예술의 감성의 창조가 유다기독교의 영적 감성의 접목이라는 가이소리가 된다는 말인가..... ================ “가무강신(歌舞降神)하여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소원을 성취한다는 구조”(<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48쪽)다. 화랑의 가무는 예술적 차원 너머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삼국유사>, 위 책에서 재인용)는 행위였고, “산수를 찾아 노니는 것 역시 자연의 정기를 호흡하고 그곳에 강림한 하늘의 영과 교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위 책 53쪽)었다. (산) 가무강신하여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소원을 성취한다. 잡신 개잡아먹는 소리를 한다.. 가와 무는 율려로, 인간의 소리를 듣고 빛을 들어, 즉 소리는 하늘의 광명을 파장으로 듣고, 춤을 추어 율동에 맞추는 신명나야, 강신하는 것으로 이는 신명을 그냥 참나와 신명할 수 없기에, 가무를 통한 굿으로 강신의 경지, 무의 경지에 들어, 참나인 신명을 만나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바른 신명이 자신의 뇌에 내려와 있어, 이를 통한 소원이 아닌, 바른 길을 찾는다는 일신강충, 성통광명의 신교, 풍류의 기본 일곱과 여덟에 대한 이야기를 난도질 해놓았다.. 화랑의 가무는 예술적 차원을 너머,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종교라는 것은 이미 풍류로, 우리는 이것이 마루고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는다. 있슴의 도는 깨달아야하고, 가르침은 선사의가르침을 통해 배우는 것으로 서적과 무술연마로 육신의 강건함을 키우는 것이지, 가무가 마치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이 보다는 천제시 가무를 하여, 하나님, 천신과 지신 인신의 합일을 맞이하여,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합일을 이룬다함은 바로 이것이 일신강충이고 성통광명의 의식일 뿐입니다. 사유를 통한 각성대오도 가능하고, 지감, 조식, 금촉으로도 종교적이라고 하는 성명정의 삼진의 보존, 앎 그리고 깨달음의 삼진일체를 알고자하는 수련법. 산수를 창자 노닌다고 하는 것은 놀고 있다고 보이나, 산천의 정기와 하나됨으로써 정신과 육신이 지신과 하나됨을 배우는 것이고, 그래야, 자신의 뇌(심장이 아니고)에 강림한 하나님(속마음, 참나)와 천지가 합일되는지를 검증하는 수련법으로 선인수련법이라고 합니다. 화랑만의 수련법이 아니고 고구려의 조의선인이 되는 수련법도 동일합니다. ========================== 화랑과 ‘풍류’에 대한 그의 사유는 의미의 깊이로 파고들어, ‘멋진 한 삶’의 사상으로 여물어간다. ‘멋’은 이상적 미의식이자, 초월적 자유, 원융무애한 조화다. ‘한’은 크디 큰 하나의 포월적 ‘한’이고, 사람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구체적 일상의 ‘삶’이다. 거기서 그는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하나됨, 곧 ‘삼태극’의 형상을 발견한다. (산) 마치 풍류가 주색잡기 바람도라고 생각하나보다. 멋진 한 삶.. 마치 멋, 한, 삶이 삼진이라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멋이 이상적인 미의식(?) 그러니 멋은 정이라는 이야기고, 초월적인 자유, 원융무해한 조화다 맞지도 않는 아무말이나 아무곳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원융무애한 조화고 초월적인 자유라면 그것은 일적십거 무괘화삼으로 性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삼진의 성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즉 이는 멋이 아니고 "한"입니다. 하나가 원융무애한 조화고 초월적 자유고 眞(참)이라고 하는 것이고, 멋은 성명정 삼진의 정으로 멋짐, 미학, 아름다음으로 美라는 이야기로, 이는 지킴해야 한다는 하철의 精입니다. 삶은 다스림, 치화로, 이것은 삶 그자체로, 이 또한 명정, 명을 알고, 정을 지키라는 것으로 멋, 한, 삶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천지인도 아닙니다. 즉 삼태극도 아니라는 이야기.. 멋과 삶이 하나로 이것은 삶의 일모양입니다. 태극은 삼극으로 삶입니다. 무극은 천지도로 하나(한)이고, 반극은 무위자연, 양의조화입니다. 이것중에 삼태극이 아니고 태극이 삼극으로 무한창조가 셋으로 태극입니다... 화랑의 풍류라고 하면 하나로 천도이며, 하늘의 도입니다. 태극은 화랑의 하나랑으로 삶으로 태극자체로, 사람의 도를 실천하는 삶 자체를 의미하고 이는 전부 하나로, 풍류가 됩니다. ================================ 화랑의 가무강신과 ‘멋진 한 삶’은 유교의 극기복례나 불교의 무아열반,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 상징과 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종교의식의 본질이자 종교적 진리의 공통 구조인 ‘자기부정’을 통한 초월적 세계, 절대자 인식이다. 훗날 그는 ‘멋’을 중시하는 우리 고유 영성의 심미적ㆍ미학적 특성을 돋워, ‘예술 신학’이라는 또 하나의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다. (산)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이 화랑의 가무강신과 멋진 한 삶이 한 뿌리를 공유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유선악, 유청탁, 유후박은 화랑의 기본사상인 무선악, 무청탁, 무후박과는 정반대의 사상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예술신학은 자유의 형이상학과 신학의 표시이나, 이것이 예술신학으로 화랑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재질이 있어 예술(술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의 창조적인 감성의 수련이라고 하는 것은 화랑정신이 그냥 가무강신하고, 산천유람하는 자유스러운 예술인의 멋이다는 것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한류의 기본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전혀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괘변입니다. ================================ 이 노학자가 대학 퇴임 후인 95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마련한 <다산기념강좌>에서 교수 및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이다. 우리 민족 5,000년 종교사상사의 높은 봉우리들을 두루 꿰며 서양 정신사의 정수인 신학과 합류하는 물길을 연, 소금 신학사상의 정수를 담은 책이다. 1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연치가 의심스러울 만치 강건했다. 그는 서양 복음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적 계약관계’ 위에서 성립된 반면 우리 종교사상은 ‘절대자와 내가 땅 위에서 하나’라는 삼태극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며, 십자가의 상징(죄와 대속)이 과연 우리에게 어울리는지 반문했다.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라고 했어요. (산) 서약복음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적인 계약관계로, 주종, 주인과 노예에 의한 계약관계로 한번 맺으면 영생, 죽을때까지 죽어서도 무시로 영향을 미친다는 독재 노동계약서인 반면, 우리 조요는 절대자와 내가 땅위에 하나가 아니고, 절대자와 내가 바로 속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합일이 됨을 깨달아야 한다는, 인내천보다는 일신강충의 의미에 기초를 두고 있고, 이것이 삼태극이 아니고, 성통광명, 재세이화, 그리고 홍익인간이 태극인데, 이 것은 홍익세상, 홍법의 이익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내용.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들 안에 있다느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일신강충을 이야기하여 하나님이 내 속마음에 내려와 계심을 친히 알게 될 것이다와 같은 말로 들리지만, 우리의 삼신일체는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고, 너희들이 하나님과 같으며, 하나님이 너희들과 우리에게 모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재세이화니 홍익인간 유니크라시라고 한다. ===========================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된다는 게 바로 삼태극의 원리죠. 신 앞에서의 죄의식을 일깨우는 십자가보다 삼태극의 상징이 우리 교회에는 더 어울려요.” 그가 성직자 안수를 받지않은 평신도 신학자였고, 교권(혹은 도그마)의 바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던 점도 저 우람하고도 자유로운 ‘영성의 성채’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일 것이다. (산) 그리스도를 매개로 여호와와 자신이 하나된다는 것이 삼위일체(Trinity)이나, 이것은 성신과 성자 그리고 매개로 성령이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개신교의 어느 신칭에도 들어가지 않는 순우리말입니다. 하나님자체의 말씀이 하나이고, 이는 석삼극하여 조화, 교화, 치화로 나뉘더라고 하나다 그것이 태극이고, 이는 석삼극 무진본으로 그 무진본이 하나임을 알게 되리라.. 신앞에서 원죄가 있다는 것은 유선악(심망)으로 우리 민족하나철학은 무선악으로 태어나, 이를 깨달음하면 상철로 광명공완자라고 하여, 태극이 아니 무극의 경지의 하나철학은 최고경지인 성통광명, 무극으로 태양을 상징합니다. ================================= 청년 시절의 한학 스승이던 전주의 고득순 목사가 그에게 준 호가 ‘소석’(素石ㆍ<계시록>에 나오는, 새로운 이름이 적힌 흰 돌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의 호 ‘소금’(素琴ㆍ줄 없는 거문고)은 고희 어름에 스스로 바꾼 것이다. “소리 안 나는 거문고이니, 미욱하다는 의미죠. 무거운 ‘돌’을 내려놓으니 마음은 가볍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싶다는 꿈마저 놓을 수 없어 들고는 다니는 거문고요.” 지난 해 후학들이 <소금전집편찬위원회>를 결성해 성서신학-풍류신학-예술신학으로 이어지는 그의 신학사상사를 정리하려는 참인데, 그는 연전의 강연자료들을 정리해 내년쯤 또 책을 묶을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교회의 삼태극 상징도 그 책에서 하고싶은 얘기입니다. 살아있음은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고, 젊고 늙음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력으로 나뉩니다.” (산) 개신교의 토착화와 선교를 위해 이렇게 창조를 하는 것은 좋지만, 풍류신학(풍류도 기독교를 위한 도구일 뿐), 삼태귿도 교회의 특히 유다 쥬이쉬 사상과 철학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세계종교, 신학의 발전에 무차별적인 독선과 아집의 자아도취형 꼰대(노자)의 행위입니다.. 혼자 다 알고, 혼자 만유인력의 창조자고, 혼자 전지전능한 영생의 교주라,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구원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1922년 황해 평산군 남천 출생. 춘천고 감리교신학대 졸업 48~56년 공주여사범ㆍ전주사범ㆍ배화여고 교사 56~72년 미 보스턴대, 스위스 에큐메니칼연구원, 일본 도쿄대ㆍ국학원대학 수학 59~67년 감리교신학대 교수 73~88년 연세대 신과대 교수 <한국종교와 기독교>(65) <민속종교와 한국문화>(77) <한국신학의 광맥>(82) <풍류신학으로의 여로>(88) <풍류도와 한국신학>(1992) 등 저. 76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98년 3ㆍ1문화상 학술상 한국이 죽어야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는 외래 종교인 기독교와 토착적인 한국문화의 비극적 충돌을 생생하게 문학적으로 증언한다. 한국문화가 서양에서 전해진 기독교를 버려야 한국적인 정신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혹은 기독교가 불필요한 불순물로서의 한국문화를 버려야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유동식 선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은 이러한 번역신학이나 수입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좋은 한국인이 될 때 좋은 기독교인도 될 수 있다는 토착화신학의 화두를 던진다. 한국문화의 뿌리를 망각하고 서양을 서투르게 모방만 하려는 종교나 신학은 마치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으로 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 한국이 죽거야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 이는 상생의 원리보다는 불상생으로 서로의 합일점이 없다는 점으로 유불도의 근거기준점이 우리나라 민족종교의 시원임을 인정할 때 상생의 도가 나오고 태극이 나옵니다. 도리어, 기독교의 순수성, 독창성, 유일성으로 풍류도 기독교사상이고, 태극도 기독교선전복음을 위한 것이다는 것은, 민족종교를 죽여야 기독교가 산다는 말로,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도용하여, 갈취해갔고, 정신머리 없는 얼빠진 미개인이라고 하고 있고, 풍류도 화랑도 없고, 삼태극도 태극도 전부 기독교를 위한 도구일 뿐, 선교와 토착을 위해서는 징용, 강제징발을 통해서라도 신식민지종교론으로 눌러야 한다는 언어도단의 폭거적인 이야기입니다. ================================================================== 선생은 한국문화의 바탕을 풍류도로 본다. 민족의 얼로서의 풍류도는 유교ㆍ불교ㆍ도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마음의 틀이다. 즉 풍류도는 어떤 구체적인 고대 종교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 바탕과 얼을 구성하는 불변의 원리이며 보편적인 영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풍류도의 핵심에는 종교와 예술과 인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한 멋진 삶'의 추구가 있다. '한'은 크다는 뜻으로, 종교에서는 거기에 인격적 존칭을 붙여 한님 곧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종교들이 담이 없이, 더 나아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담이 없이 한 전체로 어우러진 삼매경을 신라의 석학 최치원은 포함삼교(包含三敎)라 불렀고, 이를 한국 기독교는 타 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종교신학으로 발전시켰다. '멋'이란 단순히 자연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개입된 예술적 미를 뜻한다. 삶 자체를 예술로 보고 이러한 흥ㆍ자유ㆍ조화의 멋을 추구한 우리 민족의 예술문화를 최치원은 좁은 의미에서의 풍류(風流)라 불렀고, 이를 한국 기독교는 이른바 예술신학으로 계승하고 있다. '삶'이란 살림살이의 뜻으로, 사람의 준말이다. 사람다운 삶, 사람다운 사람을 이룩하려는 우리 민족의 생명존중사상을 최치원은 접화군생(接化郡生)이라 불렀고, 이러한 생명살림의 요구를 한국 기독교는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신학으로 발전시켰다. (산) 마치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이 교주인 풍류도가 아닙니다. 그 시원은 기원전 7000년전의 환인시부터 천부경이 나왔고, 이것이 조화경으로 말씀이고, 삼일신고는 교화경으로 배달한국시 가르침경이고, 참전계경도 배달의 큰스님의 가르침보다는 다스림경으로 이를 직접 다스림한 것이 단군조선입니다. 삼신랑(천지화랑, 국자랑)은 백랑무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사제도고, 이러한 선인정치 및 종교의 귀일을 하려면 태자감, 경당의 일정교육기관을 준수해야 하는데, 이 때 문하생을 천지화랑(하나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한이기에 님을 붙여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이기에 하늘의 도이기에 하나에 님을 붙이면 하나님이요, 한(하나)에 하나는 알로 한알이고, 하나의 둘은 한얼이며, 하나의 셋(우리)는 한울입니다. 한알, 한얼, 한울이 셋극(태극)이나, 이는 모두 핵심이 하나(한)이니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풍류는 멋, 한 , 삶이 아니고, 하나도로 천도라고 할 수 있으나 파람의 도는 셋으로 하나둘셋, 성명정으로 진선미, 조화, 교화, 치화의 풍수(천문), 지리, 인리(사랑)의 말씀, 지표 그리고 삶이라는 인생의 목표와 운행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우치는 우리 아리(하나)랑들의 교육시스템입니다. 기독교선교를 위해 기부하라는 말은, 조금 너무 한 것이 아니고 많이 너무 한 무상기부요구입니다. 한국이 살아야 기독교가 살고, 기독교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고 선생은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서양 선교사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 아니다. 그는 한울 우주를 창조하고 실현한 예술가이며, 우주 만물의 포월자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이러한 풍류도의 '한 멋진 삶'의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실로 선생은 하나님이 보여준 바람의 길을 걸으며 땅에서 하늘을 산 나그네이다. (산) 한국이 살아야 기독교가 살고, 기독교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 알겠습니다. 민족의 얼이 없는 얼빠진 한국이 살아야 기독교가 살고, 기독교가 살아야만, 얼빠지 한국이 유다한국이 된다.. 하나님은 서양선교사와 함께 오신분이 아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에게 선교하는 교육자라고.. 하나님은 하나민족의 머리속에 박혀서 뺄 수없는 영원한 하난민족의 시조요, 시원으로 하나는 하늘의 나로 빛이요, 시작이요, 마침이라, 알파요 오메가다. 그러니, 여호와와는 다른다. 이유는 하나님은 무시무종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무에서 시작하고 무로 끝나니 절대적 영원멸의 존재가 아니고, 사람과 함께 하는 태극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풍류도가 한과 멋 그리고 삶의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고, 조교치, 군사부 이것이 일체(하나님)입니다. 서로의 언어의 사용과 의미가 틀리기에 내가 나그네가 아니고, 그대가 바람따라 멋부리면서 남의 사상과 언어를 난도하는 나그네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교화, 선교, 복음의 근착하려 하지 말고, 빈손으로 가시기를 부탁드리옵니다. 무소유, 법정스님의 말씀. 호현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