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Victoria) 여왕과 알버트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는 조지 3세의 셋째 왕자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딸로, 1819년 5월 24일 Kensington Palace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유모로부터 독일어를 듣고 자라서 평생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는 못 했다고 한다.
빅토리아는 원래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할아버지였던 조지3세의 혈통이 끊기자 1837년 6월 30일 18세의 나이에 영국 여왕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작센부르크 대공 레오폴드의 아들인 프란시스 알버트는 빅토리아 여왕과 사촌 간으로 빅토리아 보다 3개월 후에 출생했다.
알버트의 부친은 도락을 일삼는 호색한으로 그런 남편에 지친 그의 어머니 루이즈 왕비는 왕실의 한 장교와 파리로 도망쳤는데 얼마 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때 앨버트의 나이는 4살이었다..
앨버트는 지혜로웠지만 어릴 때 겪었던 일들로 소심하고, 우울한 성격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가정적이며 청교도적이었고 음악과 독서와 공부에 치중했으며, 사냥을 좋아하지만 여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가족들이 자신들을 결혼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두 사람은 빅토리아가 16세 때 처음 만나 일주일을 함께 보냈는데, 빅토리아는 사촌에게 매료당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앨버트는 큰 키에 멋진 외모와 파란 눈이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반면 앨버트는 빅토리아를 "친한 친구같은" 사촌이라고 생각했다.
앨버트가 떠나자 빅토리아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침통해 했다. 두 사람은 3년 후인 1839년에 만났는 데 빅토리아는 19살로서 이미 여왕이 되어있었다.
빅토리아는 수상에게 결혼하겠다는 뜻을 통보하고 다음날 앨버트에게 청혼했다.
"나의 청혼을 받아들여 준다면 행복이 넘쳐흐를 것이오."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애정을 가질 수 있는 필요한 존재일까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영원히 당신의 노예가 되겠소. 당신의 충직한 앨버트."
알버트가 승락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팔을 벌려 그를 껴안았다. 그들은 다음해인 1840년 2월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빅토리아 여왕은 흰 옷을 입었는데 당시에 흰색은 순수와 순결을 의미하였다.그 후 결혼식 날 신부가 흰 드레스를 입는 것은 그녀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 빅토리아는 알버트에게 아무런 관직을 주지 않고 여왕의 배우자 역할만 하도록 하였다.
결혼 6주만에 빅토리아는 임신을 했고, 그 후 여왕은 아홉 명의 자녀를 출산하였다.
다혈질인 빅토리아는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남편에게 싸움을 걸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 앨버트는 그 순간을 피해 달아난 적이 많았다.
어느날 알버트는 화가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방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 때 여왕은 남편의 방문을 두드렸고 알버트는 안에서 대답했다.
"누구시오?"
“영국 여왕입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여왕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당신의 아내예요"
그러자 문이 열렸다고 한다.
알버트는 빅토리아가 자신을 싫어해서가 아니고 여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인 줄을 알고 넓은 아량을 베풀어 신뢰를 갖게 하였다.
1851년의 국제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도 알버트의 숨은 공이었고, 여왕에게 당파싸움에 중립을 지키도록 조언하여 영국의 입헌 군주제를
발전시키기도 하여 여왕은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1861년 11월 샌드허스트(Sandhust) 육군사관학교를 시찰하고 오던 알버트 공이 비를 흠뻑 맞았다.
흔한 감기라고 생각한 알버트는 얼마 후 아들(후에 에드워드 7세 왕으로 즉위한다)을 만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떠난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감기에 이어 장티푸스에 걸린 그는 한달 후인 1861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알버트공이 죽자 빅토리아 여왕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제 나를 빅토리아라고 불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남편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여왕은 머리맡에 앨버트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의 셔츠를 안고 잠이 들 정도였다.
또한 시녀들을 시켜 존재하지 않는 알버트를 위해 매일 의상을 준비시키고 세수 물을 준비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40년 동안 빅토리아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되었다.
윈저성으로 들어가 여왕은 모든 공식 일정을 포기하고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고, 여왕이 국사의 일선에 나서지 않자 대영제국의권력은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여왕은 영국 각지에 알버트 조각상을 세우고 켄싱턴 궁 부근에는 알버트 기념관을 설립하였다.
7년에 걸쳐 완성된 이 기념관에는 알버트의 위엄있는 조각상을 비롯하여 그가 좋아하던 미술품과 가구, 소품들이 있다.
5년이 지나자 여왕은 다시 생기를 되찾고 식민지 전쟁에 박차를 가하여 대영 제국의 황금시대인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한다.
이 시기 그녀는 스캔들에 시달리는데 바로 앨버트의 시종이었던 존 브라운과의 염문이었다.
여왕은 왕실의 예의범절을 벗어나 소탈한 성격의 이 스코틀랜드 남자와 상전과 시종의 관계를 떠나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여왕이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여왕의 침실 옆방에서 지냈는데, 그들의 관계는 1883년 브라운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관대한 영국인들은 여왕의 염문을 눈감아 주었고 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은 후에 ‘미세스 브라운’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883년 3월 파상풍에 걸린 브라운이 세상을 뜨자 여왕은 알버트가 죽었을 때 만큼이나 슬퍼했으며, 여왕이 숨을 거두기 전 자기의 관속에 브라운의 머리카락과 반지,
사진을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그 후 여왕은 인도인 시종 ‘압둘 카림’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01년 81세에 사망한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Prince Albert 옆에 묻혔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동안 통치한 왕으로서 64년간 영국을 다스렸다.
첫댓글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역사가 바로 대영제국의 역사라고 할수있는데 빅토리아여왕의 남성편력을 잘 압축 기술해준 용환이글 잘 보았다. 고마워!!!
빅토리아 여왕이 죽고 난 뒤에 영국이 쇠퇴의 길로 들어선 것이 맞지.
9명의 자식을 낳은 여왕이라...담배값으로 세계의 돈가치를 척도하는구나..여기는 휘발유값으로...뉴욕 담배값도 9만원을 웃돈다.
돈 없으면 담배도 끊어야 겠구나.
돈 계산을 잘못했네..9만원이 아니라 9천원..담배를 사본적이 없어 들은 얘기를 쉽게 전하다보니..애연가 동기들에게 미안하게 됐네.미국 올때 담배 왕창 가지고 올 뻔 했잖아..ㅎㅎ,담배값이 주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담배를 생산하는 north carolina등은 3천원 정도라니까...
같은 나라에서 담배값이 3배까지 차이가 나는구나.
용환이의 로열 앨버트홀編은 한편의 잘 만들어진 로망스 영화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
기품이 넘치는 로열 앨버트홀 내부.. 화면으로만 봣지만 여왕이 이 홀에 들인 정성을 알만했다.
저런 문화 유산은 참 부럽다.
하이드파크가 상상으로는 그저 파고다공원이나 사직공원 정도의 크기인줄 알았었는데 42만평이라면 내가 건설에 참여했던 30만평 크기의 과천 경마장보다 훨씬 더 넓은 크기로구나! 한바퀴 돌려면 자전거 내지는 전기자동차가 있어야 겠다.
공원 둘레로 馬道가 있더라..
그렇군! 말을 타고 돌면 더 볼 만 하겠다. 충선이는 안 가본데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구나! 앞으로 Dr. Lee 로 불러야 겠다.
Dr. Lee,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