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中期에 愛石한 최립(崔?)의 怪石詩 <怪石> 바다에 잠겨있던 수석, 누가 건져 바쳤는데 이 돌의 조각솜씨 귀신이 만든 작품일세.
석분(石盆) 앞에 옥사(玉砂) 깔고 궁궐 뜰에 놓았으니
은대(銀臺) 책상에서도 쭈뼛한 봉우리 상대할 수 있더라.
이끼 끼인 깊숙한 동굴에선 안개구름 일고
빗물이 축축하면 물기는 정상까지 오른다네.
아! 여기는 선인(仙人)의 관청이라 공무(公務)는 밝고
성긴 밭 틈으로 상쾌한 기분 오래도록 누리게 되더라.
최입의 호는 간이(簡易) , 字는 입지(立之)이며, 본관은 개성이다. 1555년 16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내고 1577년에는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이 되어 명에 다녀왔다. 1581년에는 황해도 재녕군수로 나가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을 입게 되자 구제하고, 다시 질정관이 되어 명에 다녀왔다. 1606년에는 중추부동지사(종2품), 1607년 강릉부사에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사직한 뒤에는 평양에서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
공의 문장실력은 뛰어나서 시험만 치르면 장원을 할 정도라 임진왜란의 위급한 정세 하에서 명에 구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 작성은 언제나 공의 몫이었다.
석가산시(石)假山詩)
간이공은 명의 사신으로 여러 번 갔다. 임진왜란 전에 두 번, 왜란 중에 두 번 다녀왔다. 그만큼 명 조정의 중신들과 외교를 성사시킬 인물이기 때문에 네 번이나 뽑힌 것이다. 최입 선생이 돌에 대하여 지은 애석시 중에 세 번째 지은 이 석가산시는 선생이 두 번째 명에 갈 때인 1581년(선조 14년)의 사행(使行)에서 지은 시이다. 북경 외곽의 한 마을에 있는 성국공(成國公) 주응정(朱應禎)의 별장에 머무르며 석가산을 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석가산시를 차운하다.
초년의 주씨 별장 경관 아름답지 않았으나 풍류 즐긴 호사가 주인, 전국에서 기묘한 돌 모아 천태산의 기이한 형태로 탄생시켰는데
태호(太湖)에서 나는 괴석들 골라 모았더라.
바위 속, 굴 길은 사람이 돌 수 있고
깊숙한 동굴 들어가면 넓은 방이 나온다.
이십년 세월은 주인을 세 번 바꾸었으나
크게 자란 솔과 삼나무는 그 역사를 증명하네.
성국공 주응정의 별장은 본래 다른 사람의 소유로 꾸밈이 아름답지 않았으나 세 번째 주인이 된 주응정은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중국 각지의 괴석을 모아 커다란 석가산 정워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천태산을 모방했다. 특히 중국 남쪽 지방의 태호산의 동굴형상석을 배치하였는데 그 구멍이 어찌나 큰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수석사랑을 읊은 고산 윤선도의 <五友歌> ![emb00000f84007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291.jpg)
윤선도의 부용정원 완도군 보길면 부용리 완도 항에서 서남쪽으로 12km 떨어진 보길도에 부용동 정원이 있다. 고산 윤선도가 수차례 귀향살이는 한 이후에 은둔생활을 결심하고 이 섬에 들어와 일생을 마친 곳으로 이곳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의 자연을 노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낙서재’, ‘통천석실’, ‘세연정’ 등의 정자를 짓고 정원을 일구며 신선처럼 살았다. 부용정원은 호남지방에서는 제일 큰 정원으로 지방문화재 3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emb00000f84007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304.jpg) 고산이 다도를 즐기며 앉았던 차바위
내버디 몃치나?니 水石과 松竹이라 東山에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다?밧긔 또 더?야 무엇?리
구룸빗치 조타?나 검기를 ?로?다. ?람소리 ?다?나 그칠적이 하노매라 죠고도 그츨뉘업기느? 물뿐인가 ?노라.
고즌 므스일로 퓌며서 쉬이디고 플은 어이?야 프르? ? 누르?니 아마도 변티아닐? 바희뿐인가 ?노라.
더우면 곶퓌고 치우면 닙디거? 솔아 너? 얻디 눈서리? 모??다. 九泉의 불희고 ?줄을 글로 ?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거시 플도 아닌거시 곳기? 뉘기시며 속은 어이 뷔연?다 뎌러코 四時에 프르니 그를 됴하 ?노라.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에 있는 <오우가(五友歌)>로 그의 자연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자연이 시적 대상이 되어 있는 <오우가>는 물과 돌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 거기에다 달이 지닌 미덕을 노래함으로써 자연적 사물들의 모습과 인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이 시조는 자연에 속하는 대상들의 본질적 속성과 도덕적 의미부여를 통해 그 실체에 더욱 깊이 있는 접근을 가능케 하였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시조작가로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까지도 이름을 널리 떨친 위인이다.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조시인의 한 사람으로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다.
윤선도는 11세 때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16년(광해군 8년)이이첨의 난과 박승종, 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 기장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후에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그 후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년) 봉림, 인평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반대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그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상을 등질 결심으로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의 경치에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 해 풀려났다. 이후 윤선도는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詩, 歌, 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보길도에 묻혀 살았다. 그리고 해남 현산면의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山林?濟」의 저자 洪萬選의 완석 「山林?濟」의 저자 홍만선은 풍산을 貫으로 하고 字는 士中 이고 호는 유암(流巖)이라 했다. 조선조 중기의 인물로 1664년에 출생하여 1715년(숙종 41년)에 52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직은 장락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을 뿐이나 「山林?濟」의 일부는 역사적으로 끼친 공이 크다. 조선 시대의 박물지(博物誌)로서는 최고봉이라 하겠다. 천생의 고매한 식견은 물론 치세와 제민(濟民) 등에 관한 논술은 유일무이하다.
「山林?濟」를 보면 성생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山林?濟」의 제 4편 <양화(養花)> 항목의 완석에서 약 300년 전에 우리 선인들의 애석 풍조가 자못 고도의 수준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완석을 통하여 노후에 유일한 반려로 지내온 우리 조상들의 애석취미를 엿볼 수 있다.
선생의 완석론에 의하면 당대의 수석 취미계에 있어서 돌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모래를 넣어서 분에 수분이 자연스럽게 위의 봉까지 올라가도록 시도한 인위적인 착상도 異聞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밑면을 절단하는 층의 인사들에 비하면 오히려 그 정신면에 있어서 옛 선인들의 소박한 행위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인위적인 행위에 대해 선생은 비속한 짓이라 하였고 매우 비판적인 입장에서 애석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사실은 돌을 다루어 수반을 제작하여 괴석을 안치하고 물을 넣어 감상한 점이다. 현대에 있어서 우리 애석인들이 수반석에 물을 분무하여 산수경승(山水景勝)을 감상하는 일련의 취향과 일치한다. 이 정서는 물에 젖은 돌의 아름다운 색조와 신선한 감각에 의하여 서서히 위로부터 아래로 마르기 시작한 풍정의 자연미를 만끽하는데 있다.
이 묘경에 몰입하는 순간에서는 자아란 의식을 초월하는 대자연의 포용 속에 돌입하게 된다. 물이 작용하는 돌의 묘한 변화에서, 動과 靜의 조화에서 수석미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기에 이미 우리의 옛 선인들은 애석 감정에 있어서 깊은 묘경에 통달한 관점에서 새삼 외경을 금치 못한다.
또한 선생의 글은 조선조 중엽에서도 당시의 애석취미계에 있어서 문인 묵객들 사이에서 완석 풍조가 고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양석에 관한 <死石>이란 어휘라든지 이끼를 배양하는데 있어서 馬糞(말똥)을 이용하는 방법 등은 우리 水石後人들에게 경이에 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완석의 산지와 양석 중국에서는 거의 호수나 바다에서 돌을 발견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완상하는 괴석은 모두 산에서 채석한다. 송도(개성)에서 남쪽으로 20여리에 경천사(敬天寺)가 있다. 이 절로부터 북쪽으로 3마장 내지 4마장 사이의 그 일대가 괴석의 산지이다. 돌의 색은 청벽(靑?)이며 은은하여 마치우레가 요란하게 치는 듯한 형태의 괴석이 산출된다.
이 돌은 수반에 물을 넣어 안치하고 보면 자연히 이 돌이 물을 흡수하여 능히 돌의 윗부분에 이르러 그 물기가 마르지 않는다. 이끼의 형태가 마치 심수향(深水香)을 닮았다. 그러므로 이 돌을 이름 하여 심향석이라 부른다. 진실로 천하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신계현에서 산출하는 괴석은 석리가 대단히 치밀한 까닭에 수분이 위까지 흡수되지 못한다. 안산군에서 출토되는 괴석은 황적색으로 土色이 많다.
수락산에서 산출되는 괴석은 그 질이 견고하면서도 이 돌은 산봉우리까지 물을 흡수한다. 그 색질은 창흑(蒼黑)하며 석질은 매우 단단하다. 단양에서 산출되는 괴석은 물기를 잘 받으며 봉까지 이르게 되지만 황적으로 토색이 많다.
돌에 많은 구멍을 내어 무리하게 모래를 넣으면 석리가 단절되어 물기를 흡수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끼를 억지로 붙이면 자연히 마르고 죽게 된다. 또 이와 같은 상태로 오래 가면 괴석도 망가지게 된다. 이 같은 행위는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는 가장 졸렬한 행위이다.
石品이 매우 아름다운 일품은 양석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끼가 피부에 생기며 새파랗게 이끼가 나오게 되니 실로 형용할 수 없는 절묘한 자연의 소치라 하겠다. 한겨울에는 볕을 쬐게 하고 옹기에 넣어서 돌을 보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즘은 돌을 이용한 수반을 제작해서 괴석을 그 수반에 안착한 다음 물을 사용하여 완상하고 있다. 햇볕이 뜨거운 날이나 혹한에서는 괴석을 방치하게 되어 손상시킬 수가 있다. 아무리 석품이 우수할지라도 그 성질이 변하기 때문에 대체로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어 하품이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돌을 ‘死石’이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상태의 돌을 원래의 것으로 회복하려면 습기가 많은 땅에 묻거나 沼池에 투입하면 해를 거듭할수록 좋아진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석을 원래대로 회복시킬 수 있다.
괴석에 석창포를 배양하는 법은 최근에 괴석에 이끼를 붙이거나 잡초를 심어서 관상하고 있다. 석창포는 창포와 같으나 괴석토에 심어서 즐길 수 있는 종류는 잎이 아주 짧고 가는 것을 사용해야 한다. 초봄에 뿌리가 가는 것을 채취하여 잔뿌리를 끊고 괴석 아래에 놓고 수반에 잔돌을 깔고 난 다음 샘물을 주어야 한다. 단, 냄새가 나는 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물을 매일 갈아주면 뿌리를 내고 살게 된다. 뿌리에 물을 자주 뿌려 주면 잎이 짧고 수려하게 된다.
연기를 매우 싫어한다는 점도 유의하여야 한다. 매연에 오염되면 죽게 되므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수반을 이용하여 괴석을 놓고 창포를 석봉 사이에 심어 아침마다 물을 주면 무성하게 된다.
석창포가 힘이 없어 보이고 잎이 누렇게 변하면 쥐가 배뇨한 것이니 이것을 다시 물에 씻어 냉수에 담가 놓으면 소생하게 된다. 또한 잎을 자주 끊어줄수록 가는 잎이 나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끼를 돌에 심는 방법은 수초를 말똥에 섞어 바르고 습기가 많은 곳에 두면 곧 이끼가 나오게 된다.
정다산(丁茶山)의 축경과 석창포(石菖蒲) ![emb00000f84007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312.jpg) 다산초당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신유교란(辛酉敎難)에 관련되어 1801년 전북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1818년 그의 나이 58세 때에 강진 유배지에서 풀려 나왔다. 인생의 가장 전성기 때에 거의 20년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 동안 그의 불우한 생애를 몸담고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대표작을 저술하였던 강진에 다산(茶山)의 애석(愛石)에 대한 자취가 남아있다.
다산(茶山)이 유배되었던 곳은 강진군 강진(康津)군 도암(道巖)면 귤동이다. 해남읍(海南邑)에서 동쪽으로 개나리까지 25리, 여기서 15리를 더 들어가면 고요한 규동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 초가 마을을 벗어나 수림이 우거진 산길을 타고 600m 쯤 추어오르면 후미진 평지에 다산(茶山) 초당(草堂)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나지막한 동산은 마을에서 ‘서당까끔’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본래의 산 이름은 ‘다산(茶山)’이다. 지금도 이 산속에는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차나무로 가득했던 이 산을 ‘다산(茶山)’이라 이름 붙였음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 산 북녘에는 만덕산(萬德山)이 높직이 솟아 있다. 만덕산(萬德山) 아래의 동산이 ‘다산(茶山)’이고 이 다산(茶山) 기슭의 마을이 귤동인 것이다.
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다산(茶山) 초당(草堂)은 본래는 초옥(草屋)이었는데 정약용(丁若鏞)이 그 초옥(草屋)에 들어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당시의 마을 사람들이 처음엔 그를 서우다산(書友茶山)이라 부른 것을 연유로 하여 나중에는 자신의 호(號)로 굳어졌다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친필 저작인 <사경첩(四景帖)>이 있는데 이것은 기거하던 초당(草堂)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연지(蓮池)를 만들고 거기에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하기 위하여 물굽이 치는 바닷가에서 괴석(怪石)을 모아다가 산봉(山峰)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초당의 작은 뜰에 축경(縮景)을 조성하려는 의욕으로, 머나먼 곳에 종자(從者) 6~7 명을 데리고 조수의 농간을 부리는 파도를 무릅쓰고 사람마다 수십 점의 괴석을 모아 배에 싣고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탐석(探石)인 것이다.
당시 맹수들이 넘나드는 산간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진 풍랑 심한 바다를 찾아서 돌 수십 점을 배에 싣고 돌아온 탐석(探石)이야말로 다산이 열띤 애석가(愛石家)임을 상상케 한다.
옛날 다산(茶山)이 거처했을 때의 유적이 잘 보전되어 있는 것이 있다. <사경첩(四景帖)>에 ‘차를 달일 작은 아궁이가 초당 앞에 있다.’라고 했듯이 ‘청석(靑石)을 갈아 평탄하게 하고 적자(赤字)를 새기니...’라고 한 비석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솔방울을 주워 다가 불을 지펴 샘물을 떠다가 차를 끓이면서 스스로 신선이 되기를 배우리라 했다.
그리고 ‘약천(藥泉)’이라는 샘터가 있는데 ‘옥정(玉井)에 흙 티가 없고 다만 모래알만 긁히며 한 주박을 뜨면 시원하기가 안개 마시는 듯 하다.’ 하면서 그것으로 차를 끓였다. 처음에는 바위틈에서 물줄을 이어 찾아 샘터를 손수 조성하였는데, 그 주변 풍치가 아름다웠음이 역시 <사경첩(四景帖)>에 기록되어 있다. ‘약천(藥泉)’은 서북 모퉁이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 그 샘터는 원형을 찾은 듯 하다.
또 다산(茶山)의 서쪽 돌병풍이 창연한데 거기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처럼 그 자체(字體)가 지금도 잘 남아있다.
그리고 미원장(米元章)이 돌에 절하였다는 일과 도연명(陶淵明)의 성주석(醒酒石)을 상기한 <사경첩(四景帖)>의 기록으로써 옛 선인들의 애석했던 자취를 진작에 살폈음을 보아, 그 먼 바다에까지 나아가 탐석할 수 있었던 일은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다산(茶山)은 수풀이 울창한 산간 속의 작은 초당(草堂)에 18년 동안 거처하면서 좁은 터전에다 연지(蓮池)와 석가산(石假山)과 폭포경(瀑布景)과 다정(茶庭)의 한 형태도 꾸미며, 축경(縮景)의 미를 조성하고 열렬히 애석(愛石)하였던 풍모를 그려볼 때, 그는 무척이나 자연애(自然愛)에 심취하면서 불우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물굽이 치는 바닷가에서 괴석을 모아다가 산봉(山峰)을 이루어 놓으니, 본디의 참다운 산악 모습을 그대로 살려 커다란 산 모양을 꾸민 듯 하다. 드높이 비탈지고 기교하게 고요한 세 층의 탑을 조성했으며, 그 깊은 골짜기의 휑한 곳에다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엉키고 교묘한 자태는 봉황새가 춤추는 듯한 모양 같으며, 뾰족한 곳에 아롱진 문채는 죽순(竹筍)이 솟은 모양이다. 그리고 또 산속의 샘물을 끌어다가 둥글게 연못을 만들어 놓고서 그 물속에 푸른 산 그림자(괴석의 그림자)가 첩첩 쌓인 것을 고요하게 바라본다.
내가 처음 다산(茶山)에 오고 나서 그 이듬해에 문거(文擧)라는 친구와 함께 이 못이 있는 정자에서 신부(新婦)터까지 걸음을 재촉해 다달아, 다시 바위에 바닷물이 철석거리는 농어낚시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오는 사람은 6~7명 이었다. 조수가 훌쳐간 너른 곳에 교묘하고 기괴한 돌이 많으니, 사람마다 수십 덩어리씩 주워서 배에 싣고 돌아와 마침내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했다.”
丁 石 - 다산 정약용 죽각(竹閣) 서편 바위가 병풍 같으니
부용성 꽃 주인은 벌써 정씨에게
돌아 왔네.
학이 날아와 그림자 지듯
이끼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톱 흔적처럼 글자는 이끼 속에 뚜렷하다.
미로(米老)처럼 바위를 경배하니 외물(外物)을 천시한 증거요
도잠(陶潛)처럼 바위에 취했으니 제 몸 잊은 것을 알리라.
부암(傅巖)과 우혈(禹穴)도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또 명(銘)을 새기리오.
![emb00000f84007a](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161.jpg)
완당(阮堂) 「山水石」탁본(拓本)과 초상
![emb00000f84007b](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167.jpg)
정조(正祖)와「태호석기(太湖記)」
조선의 제 22대 왕으로 1752년(영조 28년)에 태어난 영조의 손자이다.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11세 때 아버지가 참화를 당하고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755년(영조 51년)에 대리 청정(聽政)하였다. 다음해에 즉위하여 25년간 재위하다 1800년 승하하였다.
정조는 선왕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탕평정치(蕩平政治)를 하여 왕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치에 뜻이 없어 홍국영에게 정치를 맡기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왕실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두어 국내의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하고 서적을 간행했다.
「태호석기(太湖石記)」는 <춘저록(春邸錄)> 권 4에 있는 바 서인(序引) 4편(팔가백선인(八家百選引) 등)과 記 3편(<소요정기(逍遙亭記))>, <영취정기(映翠亭記)>, <태호석기(太湖石記)>) 등으로 되어 있다.
역문(譯文)
동정호의 서쪽에서 산출되는 돌을 태호석이라 일컫는다. 질은 매우 단단하며 색은 짙은 푸른색이다. 규장옥처럼 진한 윤기가 난다.
형은 할퀴어 뾰족한 것이 험한 봉우리 같고 벌레가 등을 구부리고 있는 것 같이 둥근 연봉을 이루고,
괴상한 것은 동물이 웅크리고 걸터앉아 있고,
쫑긋한 것은 사람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서 있고,
검은 기름칠을 하여 자수정처럼 색채가 현란하니,
모두가 기괴하고 이상한 유형이다.
눈덮인 잘밤의 계곡에는 연기구름 휘감고 누대에 걸친 잔교의 형태가 너무나 정교하게 똑떨어진 것이 순전히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이라 하더라도 그 절묘함을 다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미원장은 애석인으로서 이와 같은 돌을 보자마자 엎드려 ‘석장(石丈)’이라 불렀으며, 속세를 초월한 풍류시이자 서화가로서 당의 시성 잡안의 杜氏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도 매우 부지런을 떨어 구한바 갑오년 봄에 고궁의 정원에서 얻었다. 뜨거운 물을 끓여 목욕을 시키고 물을 말려서 창가에 놓았다. 약탕관, 향사발, 주문왕의 솥에 만든 화로에 담아서 움직이지 않개 나란히 벌려 세웠다. 그 돌의 크기는 주먹만하나 천 길의 큰 바위로서 빼어난 산악경을 나타내고 있다.
돌은 천지의 정기로 만들어졌으니 기가 돌을 낳는 것은 사람의 근락이 화하여 손톰, 발톱, 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옛 선인들의 애석편을 보면 우 임금에게 異石을 공물한 것이 있고 좌씨는 태호석에 대하여 글을 지었다. 또 천하에 큰 괴석은 큰집의 정원에 꾸며놓는 것이 좋고 작은 돌은 책상 위에 꾸며놓고 보는 것이 좋다. 혹은 물을 채워 水景으로 보고 혹은 山景으로 보는 것이 좋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智者는 물을 좋아한다 하셨다. 인자와 지자가 좋아하는 돌을 정원에서 얻었는데 집채만큼 웅장하게 큰 것이 태호석과 같다.
이 돌을 나의 처소에 가져다 놓았으니 어찌 풍류시인 묵객으로써 완호(玩好)하지 아니하리오!
색채석의 아름다움을 시로 엮은 신위(申緯)의 애석시 - 신위(1769~1785) 선생은 조선 정조? 순조 때의 문신으로 詩? 書? 畵에 뛰어난 애석인 이었다. 44세 때 주청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 색채석을 운반할 때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시를 지었다.
여행길 험악하나 자하(紫霞)는 웃으며
어명 받든 만리사행(萬里使行)에서 수석을 탐석했다.
탐석은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서 했는데
큰 옥덩어리 주스면 색깔 이쁜 천에 포장한다.
창해의 물가에서 폭풍과 파도에 부스러져
옥석되어 도깨비불에도 색채 발하며
칠가령의 석벽면 이끼는 벗겨져 있고
고죽사당(孤竹祠堂) 아래 물은 맑아 밑바닥까지 투명하네.
작은 돌은 능금만하고 큰 것은 손바닥만하며
무거운 것은 한 근, 더 가벼운 것도 있다네.
한 차에 돌 가득 실어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마차 주인은 돌이고 나는 그의 손일세
풀숲 수렁 뻘구멍에서 오랜 세월 굴러다니며
유수에 용 노니는 것 응당 보았으리라.
존귀한 것 아닌데 石丈하며 군자들 귀중히 여김에
나도 안개 낀 산천에서 습득해 공양하고 있지.
휘장 친 마차 안에 푸른색 비취색 아우르니
작은 봉우리도 구지산을 대하는 듯 하여라.
성은을 그르친다고 비웃지 마라, 신선을 태웠다네.
미인승차 사양함은 어진이의 규범일세.
객원 중에 그림 솜씨 좋은 이수민 선비 있어
장시 지어 수석운반도(壽石運搬圖) 그리기를 청탁하니
붓을 잡고 열심히 그려 놓고
산수 속에 선생까지 첨사(添寫)하였네.
미남궁은 돌에 미쳐 엎드려 절하였고
양차공은 좋은 돌 만나면 낚아채 갔다지.
이러한 이야기는 우스갯거리라 나도 알고
깊은 산골 불문하고 사두마차를 달린다네.
명나라 때 제화문 앞 상가에는
온갖 만물 구름처럼 쌓여 있는데
진나라 비석, 한나라 보석과 골동품들
남방 나라의 보물 상아조각품으로 찼지만
이 서생 안목이 어리석게도 낮아
우리나라에서 가져 갈 화물상자 텅 비워 놓았지.
뒷날 이 재석도(載石圖)표구하여 판다면
영롱(玲瓏)하게 빛나서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으리라.
조선 24대 헌종(憲宗)의 해석연산석(海石硏山石) 헌종은 조선조의 24대 임금으로 연경당을 짓고 살면서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다가 돌아가신 익종의 아들이다. 아버지 익종은 정식 임금은 되지 못했지만 세자시절 순종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4년 동안이나 대리청정을 한 공로로 후일 헌종 자신이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서하고 추모하였다.
헌종의 출생은 애석의 분위기가 충만한 연경당에서이다. 당시 정가(政街) 주변의 애석계를 살펴보면 옥수 조면호가 저작한 「예석기(禮石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순조의 장인이며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스승이었던 김조순은 당대 애석계의 대부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원이 좋기로 유명한 옥호정(玉壺亭)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후대 자손들까지도 왕비로 입궐시켜 영화를 누렸던 안동 김씨 집안을 세도가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김조근의 딸로 하여금 헌종비를 삼게 하고 김문근의 딸로 하여금 철종비로 삼게 하였다.
김씨가의 당시 ‘根’자 항렬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수석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과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가 있다. 1812년 익종의 세자책봉 주청사의 일행으로 청에 가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능하에서 탐석해왔다는 자하 신위도 있다. 또한 동강 이수민, 예석기를 쓴 옥수 조면호, 난 그림의 대가인 대원군 이하응, 신미양요 때 평양감사와 우의정을 지낸 헌재 박규수도 있다. 이러한 분들이 모두 당대 권좌와 풍류계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익종과 조비 사이에서 태어난 헌종은 아버지 익종을 세 살 때 여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여덟 살에 승하하시게 되자 헌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어머니가 있었지만 정사는 할머니(순조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어린 헌종은 몇 년을 기다려 장가를 들게 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간택에서 김조근의 딸이 왕비가 되었으나 6년만에 사별하였다. 후에 헌종은 낙선된 여인 중에 있었던 김 여인을 좋아하여 후궁으로 맞아들여 보금자리를 위해 낙선제를 짓게 되었다.
헌종은 낙선제에 정성을 다하여 仙景을 만들고 사랑하는 여인과 정념의 불꽃을 태우다 승하하니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이다. 낙선제 생활 2년 만에 후손도 없이 23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헌종이 애완했던 해석연산석 헌종의 유품 가운데 해석연산이라는 조그만 수석이 한 점 있다. 이 돌은 관리물품에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어떻게 관리할지를 몰라 당시 규장각 담당 오규일이 시골집으로 반출하여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후에 옥수 조면호가 이 돌을 보게 되었고 욕심이 발동하여 추사 선생이 그린 묵란도와 바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석연산석은 옥수 조면호의 소장석이 됨과 동시에 예석기의 제 1석이 되었다.
헌종은 이 돌 말고도 또 하나의 돌이 있었는데 빙소(憑?: 순 임금 장사 때 나타났다는 새 이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을 통해 추축해보면 해석연산은 바닷돌로 물고임 산경석이며, 빙소석은 산지를 알 수 없지만 새를 닮은 물형석으로 짐작이 된다.
낙선제 마당에 있는 괴석
「禮石記」의 저자 조면호(趙冕鎬)의 壽石詩 ![emb00000f84007f](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194.jpg) - 조면호(1803~1887) : 호 옥방(玉房), 옥수(玉垂), 태당(台堂) - 책 넣는 진열장을 마련하여 그 위에 소형의 산경수석을 분의 물 가운데에 앉혔던바 밑자리가 불안함으로 모래를 깔았더니 안정되었기에 이를 시의 제목으로 삼는다.
자그마한 산새가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았고
빼어난 모양은 부용(芙蓉)을 닮았네.
이어진 재 옆에는 봉우리 우뚝하고
으슥한 골짜기에 만 길의 구멍이 파였네
분수(盆水)는 영주도의 바닷물 같으니
수석과 꾸밈새가 맞아 떨어지네.
지축 같이 끄떡 않음은 모래를 깔은 공덕이고
강건함은 큰 거북 등판 같네.
좁쌀 같이 작음 속에 세계가 간직되었으니
광막한 표현을 무엇에 비유할까
큰 것을 작게 축소하는 일은
신선들만이 마음대로 한다 했네
나도 본디부터 仙人이 되고자 하였으니
쪽배타고 영주도에 불로초 캐러 갈까.
韓末의 우국지사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애석 창강 김택영(1850~1927)은 한말의 우국지사이자 애석인이다. 1850년 10월 15일 경기도 개성부 동부 자남산 남지사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림 호는 창강이며 본관은 화개로 1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 초시 삼부에 합격하였다. 1895년에는 석기관으로 승진하여 내각기록국 사적과장으로 일했다.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일본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차관정치를 하게 되었다. 창강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 감이 암담하여 후일의 독립투쟁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그는 망명지인 중국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오직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하여 많은 韓國史書를 발간했다. 그리고 조국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선배와 친구들의 문집을 많이 발간했다. 그러다가 1927년 한 많고 고달픈 생애를 망명지 중국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의 친구들도 많은 글을 지어 애도하였다.
고달픈 망명지에서 갖은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우국지사인 매천의 문집을 발간하여 그와 매천을 높이 우러르게 하였다. 그 발간 연도가 나라를 빼앗긴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이었기 때문이다.
창강 선생이 수석을 사랑하면서 지은 글은 모두 네 편이 있는데 그 문체를 유형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명체(銘體) 2편, 설체(說體) q편, 시 1편이다. 글 속에는 선생의 애석정신이 심오하게 스며 있어 현대 수석인들이 깊이 음미할 훌륭한 사료라 하겠다.
용두바위를 이 지방 사람들은 채석강이라 부르는데 지금의 전북 부안군 변산면의 서해안이다. 이 곳에는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뿌리는 바다로 비스듬히 뻗었고 모양은 말이 고개를 쳐들고 앞발을 치켜든 형상을 하고 있다. 바위에 올라서면 북, 서, 남 삼면의 해변에 암석이 서너 마장 깔려 있다. 여기서 오색의 무늬돌이 산출되는데 색깔을 고루 갖추고 있으나 그 모양을 따서 이름을 개별적으로 다 지을 수 없어서 시를 2편 적으며 내력을 적었다. 아래의 시는 그 2편중 하나이다.
나 옛날 총석정을 찾았을 때 시퍼런 바닷물에 발 적시며 삼면을 바라보면 하늘은 까마득히 푸르고 육각 돌기둥은 기묘하고 불가사의하며 동해에서 뜨는 해 수면위의 기둥을 비추고 기이한 석품이 금강산에 이어졌더라. 그날 밤은 유난히도 청명하여 솟아오르는 명월 바라보며 경관을 즐겼다네. 남쪽에 유람 와서 변산반도 동녘을 바라보니 경치라고는 파도소리 뿐이고 한 마리 용이 바다로 뛰어드는데 머리를 청천에 쳐들었다. 파도에 씹히고 삼키기만 하였는데 무쇠가 닳은 듯이 매끄럽게 갈렸으며 발을 들여놓으니 이무기가 꿈틀거리는 듯 나는 정신을 잃었으나 기분은 황홀하고 처음에는 육신을 기쁘게 만들더니 육신은 다시금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더라. 앞을 보니 중국 산둥반도가 나타나고 옆을 보니 남지나 땅은 물에 가라앉았네. 아! 여기는 무늬돌이 풍부하여 예전부터 선굴(仙窟)이라 불러왔다. 온갖 물체의 모양을 닮았으되 각기 다르며 갖은 색깔 뽐내며 자랑하더라. 처음에는 별로 상식 없이 하나 둘 줍다가 세심하게 찾을수록 상세히 식별하겠네. 편편하지 않은 돌은 무늬그림이 옆면에 펼쳐 있고 우뚝 솟은 산모양은 입석체로 그려졌다. 어떤 돌은 새가 날개를 펼쳐 나는 듯 하고 또 한개는 짐승이 날쌔게 뛰는 동작일세. 어떤 것은 비단옷에 고운 수를 놓은 듯 하며 한 돌은 비석에 글씨를 조각한 것 같고 기양의 석고상은 한쪽이 떨어져 나갔으며 깊숙한 굴속에는 용의 정기가 서렸다. 어떤 그림은 금잠충(金蠶蟲)이 흩어져 꿈틀거리며 어떤 것은 병아리가 익살스런 동작으로 뛰는 것 같고 앞에 있는 돌을 캐보니 두 사람이 끌어갈만하나 뒤에 있는 돌을 파보니 짊어질 수가 없네. 지방 사람들은 보통 돌로 보지만 시골 선비로서는 감탄하여 말문이 막히고 아침 밀물 때는 달빛이 을씨년스럽더니 저녁 썰물 때는 바람이 세차게 일어난다. 밀물과 썰물이 계속 반복하여 정갈하게 다듬어지느라 쉴새 없도다. 송나라에서는 서울에 꽃과 수석을 줄줄이 실어 날랐는데 그 가운데 佳品은 수석이 제일이었고 날마다 운반함에 사고도 뭉치로 나니 용왕신이 슬퍼하여 기쁨이라곤 없더라. 나 손을 들어 총석정에 읍을 하곤 형상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것이 장엄하도다. 태초에 하늘과 땅으로 갈라질 때 수석도 같이 났으니 신의 창조물이라 자랑거리로선 이 보다 더하랴? ![emb00000f84008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338.jpg) 채석강
부안군 변산면 변산반도의 최서단의 포구인 격포 오른쪽에 돌출한 바위산이다.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 강물에 뜬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강물에 빠져 숨졌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모양이 흡사하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이곳은 선캄브리아대 화강암과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하고 중생대의 백악기에 퇴적한 해석단애로 된 절벽이다. 모양이 만여권의 서책을 쌓아놓은 듯 하고 물속으로 오색 보석을 깔아 놓은 듯 영롱하다.
남농(南農) 허건(許楗)의 생애와 愛石
![emb00000f84008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393.jpg)
![emb00000f84008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355.jpg)
운림산방 전경
한국 현대 수석 발전의 선구자인 허건(1908~1987) 선생은 동양화가로 널리 이름을 알린 분이다. 호는 남농으로 소치 허련의 손자이고 미산 허형의 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진도에서 생활 터전을 목포로 옮긴 후 목포 상업전수학원을 수료했고, 1925년 소련미술전람회 최고상을 수상했다.![emb00000f84008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349.jpg)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서 선전출품을 본격화했으며 1943년까지 줄곧 입선했다. 1944년 <목포일우>로 선전 총독상을 수상했다. 1955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로 위촉되었고, 그 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83년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emb00000f84008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405.jpg) 운림산방 앞에 있는 예스러운 연못
초기에는 아버지 미산의 영향을 받아 전통산수? 고사인물? 화조영모? 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으며 42년경에는 필선위주의 묘법에서 벗어나 점묘화를 그리기도 했다. <목포일우>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 후 남농 선생은 필선위주의 화법으로 돌아와 <금강산 만폭동>, <서귀소견>과 같은 실경산수를 그렸다.
남농 선생은 소치, 마산보다 더 활발한 수석문화를 영위했다. 이에는 물론 두 선조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로 확인되었다. 남농 선생의 수석사랑은 그가 기증한 수석을 중심으로 지어진 목포 향토문화관에서 알 수 있다. 향토문화관은 남농수석관으로도 불리며 이 수석전시관에는 소치, 미산, 남농 3대에 걸쳐 탐석한 수석이 전시되어 있다. 그 수가 1800여 점이나 된다고 하니 그들의 수석에 대한 열정도 짐작이 간다.
남농 선생은 그 어떤 인사보다 수석인을 먼저 만나주었고 수석인과의 친분도 두터웠다고 한다. 남농 선생은 수석이라는 매개로 많은 수석인들과 교류를 나누었다는 것은 수석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남농 선생과 친분이 있는 원로 수석인들은 ‘남농 선생은 다정다감하고 수석인이라면 마다않고 언제나 만나고, 또 그림을 선물하시곤 했지.’라고 회상한다. 남농 수석관 개장 당시 아끼던 소장석을 보내 수석관을 빛낸 원로 수석인도 있다고 하니 남농 선생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남농 선생이 아끼던 수석들이 목포 남농수석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1879점의 수석이 350여 점씩 매달 교체 전시되고 있다. 또한 운림산방 3대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정원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정원석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찾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여기 전시된 수석을 보면 하나하나 석명이 적혀 있는데 대부분은 남농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 석명들을 열거하면 오작교, 고인돌, 천국의 계단, 독립문, 꿈꾸는 토끼, 창세기 이전, 자화상 등 특이한 이름이 많다. 이 석명들만 보아도 남농 선생의 수석에 대한 애착을 짐작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자화상이라는 석명의 돌은 남농 선생이 살아생전에 침대 머리맡에 두고 늘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끼던 수석이라고 한다. 이 수석은 남농 선생과 그 모습이 흡사해 그렇게 아꼈다고 한다.
돌을 愛石한 혜산 박두진(朴斗鎭) 시인
- 청록파 시인으로 수석시만 5백여 편을 남기다 - 박두진 선생은 수석을 읊은 연작시 「수석열전」을 1972년 8월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많은 수석시를 잇달아 썼다. 혜산의 후기시는 거의 수석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속수석열전」, 「수석연가」등 수석시집을 3권이나 펴내기도 했다.
![emb00000f84008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cs114.net%2Ffiles%2F200908%2F13%2F125012325431.jpg)
혜산은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23세 때인 1939년 「문장」지를 통해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산을 배경으로 한 시를 많이 썼던 혜산 선생은 수석시를 쓰면서부터 약간의 변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시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며 혜산의 시세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자료가 되고 있다.
박두진 시의 독특한 점은 ‘자연의 의식에서 보여주는 생명적 이미지, 시의 활력을 불어넣는 능동적 상상력, 한국어가 갖는 소리의 다양성과 리듬에 대한 효과, 시를 시대나 종교 윤리와 동일한 것으로 꿰뚫는 시정신의 다면적 추구’에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평이다.
그가 수석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연세대학에 재직 중 소공동 상공회의소 전시회에서 산수경석을 보고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석을 하게 된 것은 70년도에 제자인 김춘석이 돌밭에 가보자고 해서 처음 간 곳이 단양이었다.
수석 차원이 아니라도 어렸을 때부터 돌을 좋아했던 그는 그날부터 돌에 완전히 매료되어 1년간은 돌만 했다. 그러다 수석이 시간놀음이고 경비가 꽤 든다는 회의도 잠깐 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돌이 가진 깊은 의미를 생각하고 시의 소재로 어떨까 생각하다가 71년부터 돌에 관한 시를 썼다.
초기부터 추상석을 즐기게 된 그는 “그때까지 그런 특이한 시의 소재를 한번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 후 지금까지 한번도 수석시를 거른 적이 없다. 만약 돌이 가진 조건을 외적으로만 보거나 수석에 대한 시를 쓰지 못했으면 수석의 깊은 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말하기를 “돌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신비한 색채? 형태? 질감 등을 통해 상징성을 무한히 제시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그의 눈에 비치는 돌의 존재는 무제로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돌에서 천체, 우주, 생명, 도덕을 꺼낼 수 있다. 그가 <가을절벽>이라는 시에서의 소재는 단양산 밤색 돌이다. 그는 이 돌의 밤색 절벽 속을 보고 가을 절벽을 생각했으며 거기서 인류 전체의 숙명적인 불행을 노래했다. 그 나름대로 가장 힘들여 쓴 시라고 한다. 그의 「수석열전」맨 처음의 시는 <天台山 上臺>이다.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할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아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시시던 자리. 돌의 노래 돌이어라. 나는 여기 절정(絶頂)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종일(終日)을 잠잠하는 돌이어라.
밀어 올려다 밀어 올려다 나만 혼자 이 꼭대기에 앉아 있게 하고 언제였을까 바다는 저리 멀리 저리 멀리 달아나 버려
손 흔들어 손 흔들어 불러도 다시 안 올 푸른 물이기 다만 나는 귀 쫑겨 파도 소릴 아쉬워 할 뿐. 문으로만 먼 파돌 어루만진다.
오 돌. 어느 때나 푸른 새로 날아 오르랴 먼 위로 아득히 짙은 푸르름 온 몸 속속들이 하늘이 와 스미면 푸른 새로 파닥어려 날아 오르랴.
밤이면 달과 별 낮이면 햇볕 바람 비 부딪히고, 흰 눈 펄 펄 내려 철 따라 이는 것에 피가 잠기고 스며드는 빛깔들 아롱지는 빛깔들에 혼이 곱는다.
어느 땐들 맑은 날만 있었으랴만, 오 여기 절정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하늘 먹고 햇볕 먹고 먼 그 언제 푸른 새로 날고 지고 기다려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