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막 14장 32-42절
설교제목 : 겟세마네의 기도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 입성을 기억하는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으로 죽음의 십자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거움과 고난과는 달리 만발한 꽃들을 더욱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경탄하는 일, 자연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대한 것인지를 인식하곤 합니다. 아름답게 핀 꽃들은 절로 미소짓게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바로 자연과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경탄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할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길이 재는 법, 무게 다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러러 보는 법, 놀라고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다. 장엄함을 느끼는 감각이나 인간 영혼의 보이지 않는 위대함과 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으로 부여된 어떤 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좀처럼 심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세계는 평면이 되고, 인간의 혼은 텅비게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이현주 옮김, 《사람을 찾는 하느님》, 종로서적, p40-41, 김기석, “깨어 있어라”, 2023년 3월 19일 설교, 재인용]
문명이 진보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각종 인생의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지만, 정신적 빈곤함은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 신앙생활의 참맛은 생명의 신비 앞에서 놀라고 경외하는 일, 자연과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장엄함을 느끼는 감각, 보이지 않는(비가시적인) 인간 영혼의 위대함, 모든 사람에게서 가능성으로 부여된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인간이 어찌 타자와 자연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주간을 통하여 아름다움과 경외의 감각이 깨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셔야 하는 잔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드론 시내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을 마주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 뜻은 ‘기름을 짜는 곳’입니다. 이 이름은 이곳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았고, 올리브 기름을 짜는 일이 행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겟세마네, 기름을 짜는 곳은 상징적으로 엄청난 고통으로 새로운 변환이 이루어지는 영역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님이 이곳에서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33)”고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기도하는데, ‘놀라고’, ‘괴로워하다’는 단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놀라다’는 그리스어로 ‘엑탐베오’인데, ‘압도되다’, 혹은 ‘놀람에 사로잡히다’를 의미합니다. 무언가에 압도된 상태, 의식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는 위태한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괴로워하다’는 ‘아데모네오’로 ‘무거움에 짓눌리다’는 뜻입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낭만적이거나 기쁨과 흥분을 자아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식으로 괴로움을 호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잔인한 운명 앞에 선 인간 예수의 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36a)”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바로 잔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잔은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사용하는 ‘점치는 도구’입니다. 이런 점치는 도구로써 잔은 요셉이 형들에게 시험했던 은잔이 있습니다. 또한 시편기자는 “주는 내가 받을 유산과 내 잔의 일부이니, 주께서 나의 운명을 지키시나이다(시편 16:5)”라고 탄식합니다.
또한 이 잔은 여호와의 분노를 의미하는 심판의 표상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사야 51:17)은 심판받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여호와의 손이 부여한 분노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이는 원형적, 원초적 정신으로부터 부여된 정동을 마시며 철저하게 찢어지고 고통당해야만 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런 잔이 내게서 떠나가기를 원하였고, 그 잔이 제발 자신에게서 거두어지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내가 마셔야 하는 잔이 죽음과 고통, 원초적 정동을 동화해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도 마시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나의 뜻 vs 아버지의 뜻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분노, 고문과 죽음의 운명을 동화함으로써 신성한 드라마, 구원의 드라마를 성취해가십니다. 예수는 고뇌와 고통 속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36b).”
자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과 분노의 잔을 기꺼이 마시는 그리스도의 자발적 희생입니다. 기꺼이 자아의 뜻을 넘어서 보다 높은 운명의 과제 앞에서 자발적이고 책임적으로 임하는 자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자아의 욕망을 채워가는 길을 넘어서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고, 나의 주관적 관점, 계획, 의도를 틀어지게 하고, 좋든 싫든 내 삶의 길을 바꾸어 놓고자 합니다. 이전의 낡고 좁고 일방적인 나의 체계를 벗어던지고 전적으로 더 높은 운명의 길을 열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렴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나와 하나님, 자아와 자기 사이의 긴장을 수반하는 대극의 갈등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뜻은 자아가 동화해야 하는 엄청난 과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차치하고도, 이는 한 개인의 인생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갈등입니다. 40대를 넘긴 한 남성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울과 무기력감에 시달리며 심리치료실을 방문하였습니다. 인생의 길의 정점을 달리며 성취와 목표를 이루어내야 하는데,데, 정신적 우울로 삶이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이 무기력입니다. 리비도가 전진하지 못하여 자신 안으로 후퇴하면서 정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엄밀히 말하면 보다 높은 운명이 그를 강제하는 것이고, 자아의 낡은 체계를 새롭게 하려는 무의식의 의도입니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태도로는 더이상 앞으로 갈 수 없기에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요청받는 상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라 표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심리적 발전은 영혼의 고통으로부터 발생합니다.[C.G. Jung, “Psychotherapists of the Clergy”, C.W.11, para.497.] 하나님의 뜻은 위대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러러보는 빛나는 성공적인 삶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만 아닐 것입니다. 이런 개인적 고통의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실현되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중대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융은 서간문에서 말합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아마 어떤 중대한 변화를 겪어야 할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왕에게 찬양을 바치거나, 아이가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일 대신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책임적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형식이 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C.G. Jung, Letters, vol.2, p316]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맹목적으로 찬양을 바치거나, 의존적으로 매달리는 아이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으로는 내 안에서 하나님은 뜻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책임적이고 경험적인 인간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뜻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기름을 짜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며 자발적 희생의 길을 기도했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에게 원형적 삶의 궁극적 모델을 제시합니다. 마셔야할 잔을 기꺼이 마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한 개체로서 내 인생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기도하라
예수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자들은 졸음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합니다. 세 제자에게 깨어 있기를 간청했음에도 내내 잠을 자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애가 탑니다. 자고 있는 베드로를 보면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37-38)”
깨어서 기도해야하는 분명한 이유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미혹되어 엉뚱한 길을 배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깨어있음을 강조한 것은 의식의 중요함을 가리킵니다. 이런 엄청난 대극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길이며, 기도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으며,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지를 자각할 때 우리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외부로 향하는 정신 에너지를 내부로 향하여 내면의 힘을, 신성한 힘을 활성화시키는 종교적 수행방식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장 높고 가장 결정적인 경험은 자신의 자기 또는 정신의 객관성이라고 부르기로 선택한 그밖에 무언가와 홀로 있는 것이다. 환자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다면 그를 지탱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는 먼저 혼자 있어야만 한다. 오직 이러한 경험만이 그에게 무너질 수 없는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C.G.Jung, C.W.12.para.32. 융기본저작집 5권, 꿈에 나타난 개성화의 과정, p41]
스스로 홀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 기도할 때 나를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그때만이 파괴할 수 없는 토대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겟세마네에서 홀로 하나님과 마주하며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온갖 미디어와 소식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며 우리의 마음을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게 합니다. 가장 높고 결정적인 경험은 하나님 앞에 홀로 깨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고난 주간, 스스로 깨어 기도하며 무너질 수 없는 토대를 우리 가운데 세우는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