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2: 22.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 23.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24. 바알세불을 힘입고
마 12: 22.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 -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
아마 안식일에, 사람들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귀신은 악한 영이며 사람들에게 정신적 연약을 일으킨다. 즉 사람에게 건전한 생각과 건전한 감정과 건전한 의지 대신에 연약한 생각과 연약한 감정과 연약한 의지를 갖게 하며 부정적인 생각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나 감정과 음란한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게 하고, 또 거짓말도 하게 한다.
또 귀신은 육체적 연약도 일으킨다. 이 사람은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시력을 잃었고 아마 청력도 잃었고 말 못하는 자가 되었다.
1]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아마도 9-21절 사건보다 훨씬 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 다이모니조메노스 뒤플로스 카이 코포스) - 헬라어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그 사람은 귀신이 들리게 되었으므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자'이다.
마태는 병의 원인이 '귀신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이 귀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함(謀陷)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가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바로 '영적으로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2]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마태를 위시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본 사건이 이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충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에 본 치유 이적을 간략히 소개하는 데 그쳤다.
예수께서는 그 근본적인 장애 요인이었던 영적 장애(귀신 들림)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를 하심으로써 육체적인 장애(시각, 언어)물 제거해 주셨다. 실로 그분은 영. 육의 온전한 구세주이시다.
마 12: 23.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
예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그 눈멀고 벙어리 된 자는 말하며 보게 되었다. 그러자 무리들은 다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가리킨다.
1]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죽어버린 교훈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이적 앞에 충격을 받았다.
이처럼 실재하는 천국은 기습적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에 돌입한다.
2]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예수의 치유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의 말이다.
이 물음은 헬라어 '메티'(*)로 시작되는 부정 의문문으로서 부정(不定)하는 답을 예상하고 있으나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없기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말은 '아무래도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들 자신이 메시야가 오면 표적을 행하리라고 하는 사실(38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 기적이 혹시 메시아의 징표(徵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가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에도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왕과 같은 권세를 행사(行使)하지 않고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아 됨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이해하게 되었다.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상(像)과 유대 국가의 멸망 이후 포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유대인의 정치적 메시아상(像)이 근본적으로 불일치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파생된 저들의 메시아니즘(Messianism)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난과 섬김의 삶을 통한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길을 걸으셨다.
그곳의 모든 사람, 즉 병 고침을 받은 자나 그 사건을 지켜본 자들은 예수가 메시아이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하게 되었으나 그곳에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감히 단정(decisive)적인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 사 35: 1-2, 5-6 –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위가 이런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마 12: 24. 바알세불을 힘입고 -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보수신앙을 가진 성도들같이 보였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도리어 그를 귀신의 왕의 힘을 입은 자로 비난한 것이다.
1]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의 치유 능력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난 반응 속에서 나온 말이다.
첫 번째 부류의 삶들이 품고 있는 일말(一抹)의 희망, 즉 예수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축(一蹴)하고 그 확신을 제거키 위한 노력에서 나온 적대적 표현이다.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바알세불 논쟁의 계기가 된 문구이다. 사탄이 예수의 영(靈)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 막 3: 28-30 –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요 8: 48-51 –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간혹 바알세붑으로도 불린다. 이 말은 땅의 주인인 '바알'이라는 뜻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에 그 기원이 있다.
후에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을 가리키는 수많은 명칭 중의 하나로 취급하였다.
* 왕하 1: 6 -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 마 10: 25 -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 장애를 갖은 성도들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조건 중의 첫째가 건강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건강을 잃은 사람, 곧 신체적 장애를 가진 자는 불행한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도 귀신이 들려서 눈멀고 말 못하는 자가 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여기 그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고침을 받은 행복한 장애인이 있는가 하면 고침을 받지 못한 불행한 장애자가 있다.
(1) 고침을 받은 행복한 장애인
병을 앓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치유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을 잃은 자는 정말 모든 것을 다 주고서라도 건강을 회복하기를 염원한다.
* 막 5: 21-28 –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러기에 주님 주변에는 건강을 잃은 신체장애인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오늘 본문의 한 사람, 곧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자'가 친지들에 의해서 주께로 나아오게 되었다.
시력과 언어를 잃어버린 장애인이다. 시력을 잃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볼 수없기 때문에 세상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언어의 장애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을 잃어버렸으므로 자아를 상실당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불행하였고, 그를 보는 친지들 또한 슬픈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이 '고쳐주시매 그 말 못하던 자가 말하며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젠 지금까지의 모든 슬픔은 사라졌다.
세상을 얻고 또 자기를 얻은 이 기쁨의 사람은 행복한 장애인이다. 아니 그는 이제 장애자가 아니다. 주님의 권능의 손에 의해 완전히 치료를 받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내용들이 있었다.
① 그를 데려온 자들의 믿음이 있었다.
* 막 2: 3 -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② 그가 만능의 의사이시며 병든 자를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났다.
* 막 2: 17 -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③ 무엇보다 온 인류를 위해 오신 구세주를 만나 그로부터 직접 고침을 받았다.
* 막 1: 24-26 –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막 5: 1-13 –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2) 눈을 뜬 사람들
귀신 들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깨끗이 낫게 된 역사는 또 한 가지의 기쁨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장애자를 고쳐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마태는 이 사실을 기록하기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하였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를 의미한다.
주님이 하신 사역은 참으로 메시야가 하시는 사역이었다. 그의 능력은 하나님의 권세 그 자체였다.
* 마 11: 4-5 –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사 35: 5-10 –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 사 64: 1 -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병 고침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임을 알게 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하였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병 고침을 받았을 때 우리는 신앙의 눈까지 열려 메시야를 믿는 기쁨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3) 고침을 받지 못할 불행한 영적 장애자
그런데 여기 또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신체의 장애인이 고침을 받고 감격하며, 또한 그와 함께 한 무리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닫고 기뻐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오직 바리새인들만은 같은 장소에서 있었으면서도 같은 감격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처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장애자가 아닌가?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인 예수님을 보고도 그가 누구신지를 보지 못하며, 그가 누구신지를 올바로 말하지 못하며, 그가 하시는 일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심각한 영적 장애자들이요 영원히 불행한 장애자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런 불행한 장애자가 되었는가?
① 그들은 믿음이 눈이 닫혀 있었다.
백일하에 드러나게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모든 사람이 볼 때 분명히 메시야의 사역이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눈은 그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 왕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자로 보았다.
어떻게 이렇게도 잘못 볼 수가 있을까? 그것은 그들이야말로 귀신에 사로잡혀 영안이 닫혔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영적 일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한다.
② 그들은 뒤틀린 심령의 사람들이다.
참된 일을 보고도 참되게 평가할 수 없는 마음은 장애를 일으킬 마음이다. 그러한 뒤틀린 심령은 가인과 같이 안색이 변하고 증오가 그 가슴에 타올라 끝내는 범죄를 초래하고야 만다.
뒤틀린 심령을 치료받기를 원치 않던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원한 장애자가 되고 말았다.
③ 그들은 영안이 없는 말 못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메시야를 보고도 메시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들은 말은 하지만 해야 할 말은 정작 못하는 언어장애인이다. 참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성도는 농아(聾啞) 성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