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요한복음 5:17-20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인사는 이렇게 합니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평안하지 않습니다. 연초부터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의 피해가 막대하고, 하네다 공항에서는 항공기가 충돌하는 사고로 불이 나는 아찔한 순간을 겪었습니다. 이란에서는 솔레이마니 혁명 수비대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 현장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으로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격앙된 이란은 보복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인근에 무장 드론을 보내 시설물을 폭격했습니다. 새로운 중동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번져가고 있습니다. 예멘의 후티 반군은 홍해를 지나는 선박을 공격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후티 반군 본거지를 공습하였습니다. 그곳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세계 물동량의 15%가 지나는 곳이어서 코로나 이후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북유럽은 상상하기 어려운 한파에 시달리고, 영국에서는 때 아닌 홍수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에 대한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증오와 적대감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세상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설렘으로 맞이한 새해의 실상입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근본을 성찰해야 할 것입다. 우리 앞에 펼쳐진 2024년이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두 주가 지났습니다. 뭔가 좀 새로워지셨습니까? 새해가 되어 수첩도 바꾸고 달력도 바꿔 걸지만 삶은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입니까? 아침에 일어나기 괴롭고, 하는 일이 즐겁지 않습니까? 꼭 청산했으면 했던 지난해의 나쁜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셨습니까? 왜 삶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해가 바뀐다고 해서 시간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정한 시간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유정한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고는 새로운 시간도 새로운 삶도 없다는 말입니다. 새해의 새로움은 새로운 사람 되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까닭은 삶의 초월적인 전망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땅의 현실에만 붙들려 하늘을 보지 않는 데 우리 삶의 병통이 있습니다.
<나무꾼과 선녀>라는 민담을 아시지요? 아이를 셋씩이나 낳고 살면서도 선녀는 자기의 고향 하늘을 잊지 않았기에 결국 하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反者, 道之動이라 했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원뿌리를 향하여 돌아가지 않고는 우리의 삶이 새로워질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연어는 때가 되면 자기가 알에서 깨어난 모천으로 회귀합니다. 철새들도 때가 되면 가야 할 곳으로 날아갑니다. 사람도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떠나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보내신 분이 맡겨주신 일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뿌리 의식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야!’ 이런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흔들리던 삶에서 벗어나 뿌리를 내린 자의 든든함을 가지고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압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살아있는 시간은 자기를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그 고통의 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속에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남김없이 수행한 자의 홀가분함이 배어 있습니다. 삶의 끝에 서서 ‘헛살았다’라는 자책을 하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새겨보며 살아야 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이 말은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병에 시달리던 사람을 안식일에 고쳤다고 하여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색이 뭘까요?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는 능력을 잃는 순간 우리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하고, 하나님이 심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래의 품성은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고질병으로 신음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살림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고,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지도 이미 오래입니다. 어쩌면 석고상처럼 희노애락의 감정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무표정하게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성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축하해주는 게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십시오. 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던 한 병자가 건강하게 회복되었다는 이 생명의 사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그의 몸속에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그걸 볼 눈이 없습니다. 율법 조문에 집착하느라고 구원의 현실에는 청맹과니가 되었던 까닭입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후3:6) 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아직 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종교의 본질이 다른 데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얽어매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온갖 죄와 헛된 욕망, 억압과 가난과 차별로부터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오히려 종교적인 독단과 편협함 속에 가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저 푸르고 넉넉한 가을 하늘처럼 청량한 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정말 매력 있는 사람, 관용적인 사람,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사람, 냉랭한 세상에 살면서도 따뜻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 모두가 ‘저 사람 못 쓰겠다’고 정죄하는 그때도 그에게 주어져 있는 아름다운 가능성을 보며 그를 품어 안아주는 사람, 바로 이것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더욱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잘라내고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됨이 넉넉하고, 품이 넓어서 누구라도 품어 안을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라고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2024년 새해에는 정말 매력 있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용모가 아름다워져 매력 있는 것 말고, 마음이 새로워져 매력 있는 사람,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곳에 있기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에게 순수한 삶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매력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과거에 속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고투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창조의 날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거대 자본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세력들은 쓰나미처럼 다가와 우리의 정신을 거덜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력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오기 어렵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희망으로 난 길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주님은 희망의 씨를 심으셨고, 미움과 증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고, 몸소 그런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그분의 생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아들도 그대로 한다.”(19)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뜻과 생각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혹은 하시는 일은 때로는 불합리해 보입니다. 어리석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 당신을 온전히 내려놓으셨습니다. 자신을 깨끗이 비워낸 것입니다. 깨끗이 닦인 유리창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왜곡됨이 없이 보여줍니다. 그것처럼 자아라고 하는 것을 말끔히 닦아냈기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한다고 하여 그를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더할 나위없는 친밀성의 표현입니다.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가장 큰 공헌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이라 했습니다. 언제나 念天呼父 하는 것이 믿음이랍니다. 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부를 때 우리의 삶은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면서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하나님은 때로는 의를 세우기 위해 매를 들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더 많은 순간, 하나님은 매를 드셨다가도 당신의 뜻을 돌이키시고 더 큰 사랑으로 그의 백성들을 품어 안으십니다. 바로 그렇게 품어 안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에는 낭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건물의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보살핌’과 ‘아낌’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늘 보살피는 마음으로 세상을 돌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있는 모든 것을 아끼셨습니다.
지금 세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산성’입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가차 없이 도태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틈을 내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펴내고 있는 김종철 교수는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환경 파괴적이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국민 소득이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환경이 그만큼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고 또 돈 때문에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너무 자주 봅니다. 그래서 김종철 교수는 ‘여성주의 경제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성주의 경제학이란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집안에서 해왔던 일들, 이를테면 가족과 노약자를 돌보고 텃밭을 가꾸고 가사 일을 처리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해가는 일같이 일견 사소해 보이는 일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존중되는 경제체제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윤추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키는 보살핌이 중심이 되는 경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방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하고 친해져서 복이나 좀 받아보자는 것입니까? 넉넉하게 살고, 사업 잘되고, 자식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 잘되게 해달라고 믿는 것입니까?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기 위한 결단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온전케 하시고, 마음이 상한 이들의 벗이 되어주셨던 것은 그들을 보며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아들도 그대로 한다.” 바로 이 마음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나도 그대로 한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서툴다 해도 지금부터라도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대로 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전에 어느 신문에서 본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명원이라는 문학평론가가 참회록을 쓰듯 쓴 글인데, 저도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는 식당에서 젓갈을 넣지 않고 숙성시킨 김치에 돼지 목살이 양껏 얹어진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흐뭇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식당 문이 열리더니 잿빛 점퍼를 입은 사내가 들어섰습니다. 머릿결은 오랜 노숙 생활 탓으로 기름때가 엉겨 있었고 눈빛은 흐렸고 목소리는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혹시 남는 김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아마 주인이 손짓으로 나가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이 다소 불편했겠지요. 그런데 그는 맞은편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한 여자가 식당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시 후 다시 들어온 그 여자는 자기 식탁 위의 김치를 포장한 후, 계란말이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고, 그것을 들고 다시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에는 거절당한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이날의 풍경은 간단합니다. 한 사내는 음식 예찬을 하며 등을 돌리고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내는 김치를 구걸하고 있고, 또 한 여자는 구걸하는 사내에게 제 몫일 음식을 내주고 있는 풍경입니다. 어느 날 늦은 저녁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경험한 이 일이 이명원이라는 한 사내의 가슴에 어떤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날 그 식당에서 보았던 여인은 이명원에게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였습니다. 물론 그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자기가 하늘의 사자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렇게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 불편하다는 느낌보다 그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천국에 속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해주실 겁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그려온 그림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그것을 액자에 넣어 보관하는 부모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그림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내 아이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는 낙서처럼 보여도, 그 그림은 부모에게 너무나 소중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일 겁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조차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이렇게 쓰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하시는 일을 숨김없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고, 물질을 바치고, 그들 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 존재는 환해질 것입니다. 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 어떤 마음으로 사시렵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주님의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기 위한 결단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주님의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