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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게, 혹은 당황하게 하는 말의 편린
이 홍사
살다 보면 황당하게 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당황한다.
전혀 상식 밖의 일인데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내뱉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인데 그 말을 가슴에 오래 담아두어 부패가 되어 냄새가 진동하는 일이 있다.
“소설 쓰고 있네.”
자신의 아들 군 복무에서 휴가 미복귀에 대한 특혜의혹을 제기하자 법무부 장관이라는 여자가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다.
그 말에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황당했으며 당황했다.
그 이전에는 또 검찰총장이 자신의 말을 거역했다고 했다며 항명이라고 했다.
거역?
어느 시대에 쓰던 말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어제도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오다가 종호의 타이어 가게에 들렀다. 참새 방앗간 들락거리듯이 들르는 곳이다. 친구도 친구고, 커피도 커피지만 거기에 가면 조선일보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신문은 내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매체다.
지금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어제는 검찰총장의 국정감사가 있었는데 신문 일 면 타이틀에,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 부하가 아니다, 라는 제목을 달아두었다.
누구는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을 부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의 역설이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용어다. 누구는 강단이 있는 여자라고 했지만 나는 그 여자, 법무부 장관을 떠올리면 뱀을 본 듯 소름이 돋는다. 종호는 세상이 뒤집히면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지만 지금이 뒤집힌 세상이고 이렇게 뒤집힌 세상이 바로 설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는 어쩌려나? 법무부 장관이라는 여자의 얼굴 사진이 신문에 실려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 사설을 읽고 신문을 덮었다.
군에 있을 적에 무릎이 그 정도로 아팠는데 제대를 하고 어떻게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할까?
그 부분에 강한 의욕을 제기했다.
“엄마가 여당 대표인데 그 정도의 특혜는 누려야지. 무릎이 아파서 군에 가지 않아도 될 아이였는데 기어이 군에 갔으니 장하다고 생각해야지?”
욕설을 내뱉으며 신문을 덮자 마주 앉은 종호가 뱉은 말이었다.
물론 역설적인 말로 추임새를 넣은 것이다.
“그래서 그 무릎으로 제대하고 축구를 하고 있어?”
나도 맞받아쳤다.
소설 쓰고 있네! 공인이 비꼬는 투로 한 말이니 이 말도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내 가슴에 오랫동안 머물며 곰삭을 역사의 한 조각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아주 옛날의 일이다.
그때의 이름 모를 분노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내가 굴착기를 직접 운전하고 있었으니 이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조수에서 기사로, 기사에서 자가 운전자로, 자가 운전에서 배차하고 관리만 하는 경영자로 넘어오기까지 삼십 년이 넘게 걸렸다. 그러니 기사인지 자가운전자인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따지면 이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당시에 굴착기를 조종하며 나는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 몇 시에 무슨 프로를 한다는 것을 다 외울 정도로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은 어떤지 라디오를 듣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금요일 오후, 네 시가 되면 병무 상담을 하는 코너가 있었다. 병무청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일반 청취자를 상대로 전화상담을 하는 프로였다. 몇 개의 상식적인 질문에 깔끔하게 답변하자 다음 차례는 나이가 든 아줌마였다.
“우리 아들이 허리가 아프다는데 군에 가야만 합니까?”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물은 것이다.
상담을 받던 전문가도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청취하며 교양이 없는 아줌마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나요?”
병원에는 가지 않았는데 허리가 아프다는 것이었고 신체검사에서 일 급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징집 영장은 나왔나요?”
아직 영장은 나오지 않았는데 허리가 아프다는 말만 거듭했다.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서 첨부하면 재검사를 받을 수도 있다면서 지나가는 말로 자제분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지금 테니스코치를 하고 있는데요.”
듣는 내가 기가 막혔다. 병무 상담을 하던 전문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다음에 무슨 말로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나는 너무 분노하고 흥분해서 다음 말을 듣지 못했다. 분했다. 다혈질인 나는, 이런 아줌마를 위해서 현역으로 가서 그렇게 고생했는가? 생각하니 울분이 터졌다. 라디오를 난폭하게 끄고 그날 일을 중단했다. 너무 화가 나서 차분하게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테니스코치를 하는 놈이 왜 군에 못 가?
군에 못 갈 정도로 아픈 놈이 어떻게 테니스코치를 해?
그 상담 프로의 한 조각이 나의 뇌리에 날카롭게 박혀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다.
그 후로는 정신 건강을 위해서 그 프로는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에 나는 또 너무 분통이 터져서 일을 중단하고 들어온 일이 있다. 당시에는 구미지역에 큰 수해가 났다. 태풍이 지나가다가 우리 고을 구미에 집중호우를 쏟아붓고 지나가 제방이 무너지고 과수원이 쓸려 내려가는 수해가 발생했다. 가을 무렵이었다. 사과가 익었던 걸 본 기억이 있으니 그랬다. 수해복구 현장에 장비가 투입되었다. 수해복구는 나만 한 것이 아니고 경북의 소방관들이 다 관내에 출동되었다.
내가 가진 장비는 옥계동의 들판에 출동이 되었는데 그곳에는 포항에서 온 소방관들과 팀을 이루로 수해복구를 시작했다.
쓸려간 토사를 이용해 제방을 대충 막고 과수원의 뿌리가 드러나고 삐딱하게 선 사과나무를 바로 세워서 흙으로 뿌리를 묻고 있는데 과수원 주인이라는 젊은 작자가 나타나서 그 일을 못 하게 막아섰다. 그리고 삽질을 하는 소방관의 삽을 빼앗아 패대기치는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다.
“뭐야? 어디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고맙다고 하면서 음료수나 한 통 들고 와야 마땅할 일인데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서 장비를 세우고 내려갔다. 사내는 술이 좀 취해 있었다.
이유인즉, 왜 남의 과수원에 임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오느냐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소방관은 수해 복구를 하고 도와주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나무를 그대로 두어야 수해로 인해 국가에서 보상을 받는데 바로 세우면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기가 막히는 게 아니라 분노였다.
국가에서 보상해주는 돈은 어디서 나오는데?
주둥이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쥐어박으면 상당히 비싼 개값을 물어주겠다 싶어 충동을 억누르고 장비를 철수했다.
비록 노가다지만 일을 하면서도 나는 고객 감동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삐딱하게 서 있는 나무를 바로 세우고 뿌리를 묻어주면 밭 주인이 감동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국가에서 보상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아주 옛날의 일이다.
당시에는 굴착기가 상당히 귀하던 시절이었다.
중장비를 끌고 의성의 어느 골짜기에 소방도로를 개설하러 들어가던 길이었다. 길이 좁아 중장비를 실은 트레일러가 들어가지 못하고 내려서 끌고 들어가던 길이었는데 내가 보아도 길옆의 밭 가운데 여기저기 자리 잡은 바위가 눈에 거슬렸다. 좁은 농로를 따라서 굴착기를 끌고 들어가면서 주위에 있는 밭의 바위를 밭 가장자리로 꺼냈다. 그런 바위가 밭 중간에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있어서 농사를 짓기에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력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한 돌덩이를 지나가면서 밭의 가장자리로 꺼내주면서 올라갔다. 대형 굴착기로 그런 돌덩이를 꺼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밭에는 콩이 한창 자라고 있었지만, 콩이 좀 다치더라도 꺼내는 게 마땅하다 싶어 꺼내며 올라갔다. 밭갈이하거나 써레질을 할 적에 상당히 불편했을 거 같아 그렇게 당겨냈는데 이 밭 저 밭 따져서 약 스무 덩이 정도가 넘었을 것이다.
산에 다다라 산불방지용 소방도로를 개설하는데 그건 도면이 없다. 장비가 일하기 수월한 곳으로 길을 내면 되는 일이다. 산소를 피해서 수월한 곳으로 소방차가 올라올 수 있는 넓이의 길을 매끈하게 내면서 올라가면 되는 일이었다. 감독도 없고 혼자서 알아서 하는 작업이라 무료하기 그지없는 작업이지만 일을 다 마치면 길이를 측정해서 공사비가 지급되는 시스템이다.
굴착기에 넣을 기름과 점심은 마을 이장이 경운기에 싣고 내가 개설한 도로를 따라서 올라온다. 종일 일을 해도 만나는 사람은 이장밖에 없었다. 그것도 점심시간 잠깐뿐이었다. 기름을 넣고 점심을 먹으면 이장은 바로 돌아갔다. 어쩌다 산림조합에서 나와서 보기는 했지만 몇 마디 하지도 않고 돌아갔다. 사람이 그리운 곳이고 이야기할 상대가 아쉬운 작업이었다.
한 이틀을 그렇게 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한 노인이 올라왔다.
아마도 산주이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노인은 담배, 무슨 담배인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옛날 거북선이라는 담배는 상당히 비쌌다. 그 거북선 담배를 두 보루를 들고 올라온 것이다. 비싸서 시골에서는 찾기 어려운 담배였는데 그걸 들고 올라온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굴착기를 세우고 내려가니 노인이 모자를 벗으며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 노인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니 내가 허리를 더 굽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사 양반! 오십 년 묵은 채증이 쑥 내려간 기분이네.”
무슨 말인지 몰랐다.
들어보니 산으로 들어오면서 돌덩이를 꺼내준 밭의 주인이었다. 그 밭에 농사를 지은 지가 오십 년이 넘는데 이렇게 기분이 좋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대수롭잖은 일이라 담배를 받지 않으려고 했더니 오히려 서운하다고, 평생 마음의 빚을 만들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 돌을 꺼냈으므로 밭 값이 쑥 올라갔다는 것이다. 평생 그 밭에 쟁기질하면서 돌 때문에 갈지자로 밭을 갈며 눈총을 주었던 돌인데 오십 년간 막혀있던 무엇이 뻥 뚫린 기분이라고 하며 기사는 복을 받을 것이라 했다.
그 기분은 대충 알겠지만, 시골에서 그 비싼 담배를 그만큼 받기에는 황송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하나만 받겠다고 했더니 밭 값이 오른 것에 따지면 조족지혈이라고 하면서 기어이 굴착기 운전에 담배를 올려놓았다.
다음날 그 노인이 또 찾아왔다.
오전이었다.
집에서 떡을 했다면서 송편을 조금 싸서 음료수를 들고 올라왔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노인과 풀 섶에 앉아서 송편을 맛있게 먹었다. 그다음 날은 막걸리를 두 통을 들고 찾아왔다. 같이 나누어 마시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내려갔다.
그 노인은 매일 뭘 싸 들고 찾아와 덕분에 무료하기 짝이 없는 작업을 수월하게 마칠 수가 있었다.
거기에서 느낀 것은 감동이란 받는 사람보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더 뿌듯하다는 기분을 몸소 체득한 것이다.
그 후로 내 사업을 하면서 나는 고객 감동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아들 녀석이 가업이라고 굴착기를 배워서 하고 있다.
아들 녀석에게 나는 늘 말한다.
“아직은 실력으로 승부를 걸기에는 미숙하니 고객 감동에 목숨을 걸어라.”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녀석이라 바로 집 앞에 있는 유명 고등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집에서 좀 떨어진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것도 집에서는 책가방을 들고 나갔지만 PC방으로 등교를 한 날이 태반이었다.
이 녀석에 대해서 이야기 나오면 할 말이 많다.
축약해서 말하자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쳐서 대학에 들어간 녀석이다. 검정고시에 합격하니 제 또래들 보다 일 년 일찍 대학에 가게 되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사이에 시간이 좀 있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녀석을 불러내서 내가 소유한 굴착기의 주기장에서 굴착기에 기름을 치고 닦으면 얼마씩 용돈을 주고 일을 시켰다.
“야! 인마, 굴착기 면허 따서 군에 가면 수월한 보직을 받을 수가 있어.”
녀석은 솔깃했던 모양이다. 다음날부터 시키지 않아도 굴착기를 운전을 연습했다. 중장비 학원에 다니지 않고 기사들이 끌고 나가고 나머지 서 있는 굴착기에 올라가 혼자서 연습했다. 그러더니 서점에 가서 굴착기 필기시험에 대비한 책을 사 오는 것이었다.
책을 사 오던 날,
녀석을 사무실에 불러놓고 나는 세 시간에 걸쳐서 굴착기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작동 원리에 관해서 설명했다. 엔진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굴착기는 선회해도 왜 호스가 꼬이지 않는가? 유압이 무슨 원리로 피스톤이 빠졌다가 들어가는가? 주행에서 자동차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전반적으로 다 알게 듣기 쉽게 설명했다.
내가 가르쳐 준 것은 그것뿐이었다.
녀석은 그렇게 연습하더니 오로지 군에서 편한 보직을 받기 위해서 조종사 면허 시험에 합격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일 년, 그것도 반은 중국 교환학생으로 나갔다가 군에 갔는데 보직을 굴착기 운전으로 받게 되었다.
군에서 굴착기 운전병으로 근무하다가 제대를 앞두고 휴가를 나오더니 복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 엄마는 그 말에 깜짝 놀랐지만 나는 속으로 ‘제 갈 길을 찾는구먼!’대수롭잖게 생각하고 마음 잘 먹었다고 했다. 지방 따라지 대학을 나와봐야 취직할 곳이 마땅치가 않은 세상이다.
제대하고 온 녀석을 바로 굴착기를 끌고 현장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가 차주라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하여, 데리고 있던 기사 중에서 경험이 많고 노련한 기사의 조수로 딸려서 일을 내보냈다. 그 기간이 일 년,
사무실에서 배차를 하다 보면 일이 수월한지 난해한 작업인지 알 수가 있다. 녀석에겐 사무실의 경리 부장인 여동생과 수월한 작업부터 일을 잡아서 녀석을 우선으로 배차를 했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어려운 일을 보냈다. 그게 벌써 오 년이다. 베테랑은 못 되지만 웬만한 난이도의 작업은 다 한다.
일전에는 지하실 터파기 공사 현장에서 반출되는 흙을 버리는 곳에 평탄 작업을 보냈다.
건설업자에게 도로에 흙이 묻어서 나올 것이니 청소할 인부를 붙여 달라고 했더니 한 사람 알아서 붙이면 나중에 정산해주겠노라고 했다. 이십 년이 넘도록 고정으로 거래한 업체라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용역 회사에 급하게 인부를 구하니 없었다.
그 토건 업체는 대구의 건설업체인데 대구에서 인부를 데려올 수는 없는 문제라 아들 녀석에게 친구 중에서 노는 놈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네가 짬짬이 도로를 청소해라. 일당은 후하게 쳐서 줄게.”
아들 녀석은 얼마를 줄 거냐고 낭창하게 물었다.
급한 김에 용역에서 부르는 인부에게 주는 인건비의 반을 주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공정이 꼬이고 난해한 작업이라 공사 기간이 늘어났다. 공사 기간이 늘어났다는 말은 그 녀석이 평탄 작업을 하며 쉬는 시간이 많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건설업체는 내가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도 적자 공사가 되었다. 일이 끝나고 청구서를 넣는데 녀석은 제가 청소한 몫으로 일당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 회사가 적자가 나는 공사였어. 그런 거는 없던 것으로 해. 굴착기 일당을 받잖아?”
“누가 적자가 발생하는 공사를 하랬어요?”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음은 물론이고 입에 버석, 모래를 씹은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고객께 감동을 주어서 일거리를 물고 오는 점이라는 걸 느꼈다. 이십 년이 넘게 거래할 수가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 감동을 주고받은 까닭이었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불러 앉혀 놓고 그런 말을 할 시간이 없다.
우리가 을이다.
믿음으로 거래한 업체이지만 갑이 안 부르는 끝이다. 어려울 적에 서로 도우며 거래를 유지해야 한다. 뭔가 틀어져서 안 불러주면 서운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는 을이라는 점 직시해야 한다. 지금 많고 많은 게 굴착기 업체다. 우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일을 해 줄 중기 업체가 있다. 경쟁은 치열한데, 녀석에게 이것부터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조용히 불러놓고 얘기할 짬이 나지 않는다.
사십 년이 넘게 중기 업체를 경영하면서 나는 고객 감동에 엄청 신경을 썼다. 녀석은 그것을 모른다. 녀석에게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아직은 내가 일선에 서서 칼자루를 쥐고 있지만, 적자가 나는 업체는 공사대금을 조금 깎아주어 갑의 인심을 사야 한다는 걸 녀석은 모르고 있다. 녀석에게 칼자루를 넘기고 스스로 체득하려면 송아지가 물 건너간 다음이다. 시간이 늦다.
싸가지라고는 없는 업체라는 오명을 쓰기 전에 가르쳐야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내 자식을 두고 교육을 운운하면 누워서 침 뱉기지만 모든 아이가 다 그렇다.
첨단 공업도시 구미에는 일본 업체가 많다.
아사히글라스, 도레이첨단소재가 대표적인 업체지만 그 외에도 작은 일본 업체가 산재해 있다. 일례로, 싸가지라고는 서푼 어치도 없는 운송업자가 있었다. 아사히글라스에 납품하는 부품을 운송하는 차량, 트레일러 기사인데, 차량에 온통 반일 구호를 써 붙여 운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쪽빠리 물러가라, 일본제품 불매하자. 망해라 일본. 이런 구호를 현수막과 스티커로 인쇄해서 차에 도배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이 작자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이번 정부에 들어서 왜 이렇게 반일 감정을 조장하는지 모르겠다. 반일 감정을 조장해서 얻는 게 뭔지 모르겠다.
일본의 총리가 바뀔 때마다 사과했다.
그런데 진정성이 없단다.
진정성이 있는 사과란 무엇인가.
아무튼, 이 정부가 들어서서 친중 반일을 정치적 목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우리는 중공군이 아니었으면 예전에 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에서 신의주까지 밀고 올라갔는데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밀리다가 휴전이 되었다. 아무튼, 원론적인 이야기는 그만두고 반일 감정을 정치적 목적으로 조장하는 정부는 상당히 못마땅하다.
이 트레일러 기사라는 자식은 일본회사에 납품하는 물건을 운송하면서 애국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스티커를 도배해서 다녔는데 아사히글라스에 납품하러 들어갔다가 일본 관리자의 눈에 뜨인 모양이다.
저 차량 사내 출입 금지!
당연한 일이지.
일본 덕에 먹고 사는 놈이 분수를 모르고 그런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으니,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고소했다.
그런데 이 자식은 스티커를 뗄 생각은 하지 않고 공정거래를 운운하며 차량을 아사히글라스 회사 정문 앞에 세우고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게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신문을 보는 다수의 구독자는 누구를 욕할까?
참 당황스럽고 황당한 일이었다.
그 자식은 지금 어디서 뭘 처먹고 살까?
입구 자 口가 세 개면 품자 品 자가 된다.
모든 인품은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품위, 품평, 품격, 인품, 등 모두 입에서 비롯된 말이다. 하여 말의 편린, 한 조각이라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혹시 나는 누구에게 말로 상처를 준 일은 없는가? 남에게 감동을 주리고 달린 입이지 상처를 주라고 달린 입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며 살아야지.
아들 녀석에게 이것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쁘다. 당장 불러 앉혀서 고객 감동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녀석이 자는 시간이다. 자는 녀석을 깨워서 앉혀 놓고 고객 감동을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는 말을 할 기회가 생기겠지.
말을 잘해서 인품이 돋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그게 내가 굴착기 조수를 처음 시작할 때였으니 거의 사십 년 전에 만난 처녀다. 당시에 나는 청주의 공단에 있는 어느 회사의 신축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지역마다 중장비가 많아져서 자기 지역에서 일하고 승용차가 없는 기사가 없어서 그런 일은 없지만, 당시에는 굴착기 기사와 조수는 현장에서 숙식이 제공되었다. 그 현장에서 두 달 가까이 일을 했는데 잠을 잔 곳이 청주의 변두리, 복대동 오거리에 있는 어느 현대식 여관이었다. 그 여관 지하에는 술집이 있었다. 당시에 음악을 틀어주고 무대가 있었으며 흥이 겨운 손님은 무대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술집이었다. 가라오케나 노래방이라는 게 생기기 이전의 일이라 그런 술집이 유행이었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무슨 일로 청주에 가보니 그쪽이 번화가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공단 오거리 부근에 상권이 형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전부가 뽕밭이었다. 충북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그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도 뜸했던 시절이었다.
그 술집에서 만난 접대부 아가씨였는데 내 또래였다.
대학을 입학해서 한 학기만 다니고 오로지 학비를 벌기 위해서 휴학을 하고 접대부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물론 그 술집 접대부 중에서 막내였고 나이를 알아보니 나와 동갑내기였다.
일을 마치고 기사와 둘이서 여관 생활을 하던 중에 저녁 시간이 무료해서 그 술집에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곳에 가면 항상 내 파트너는 그 아가씨였다.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설 양이라 불렀던 것 같다. 물론 본래의 성이 아닐 것이다. 지금이야 미스 설이라고 불렀겠지만, 당시에는 설 양이었다.
“오늘 공 쳤는가 보네?”
비가 오는 날 초저녁에 가면 먼저 알고 있었다.
“낮에 뭐 했어?”
술집 접대부가 매상도 그리 많이 올려주지 않는 굴착기 조수에게 관심을 준다는 건 황송한 일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참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했다.
서너 번 가자 여관 몇 호실에 묵고 있느냐고 물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낮에 비어 있는 방을 좀 쓰겠다는 것이었다. 잠을 자는 곳이 지하 술집의 골방이라 눅눅해서 자고 나면 몸이 가뿐하지 않다면서 낮에 잠을 좀 자야겠다고 방 열쇠를 좀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방 호수를 알려주고 예비 열쇠를 주었다.
중장비를 끌고 객지를 다니다 보면 숙식은 현장에서 제공하지만, 빨래가 문제였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그 점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낮에 와서 잠은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르겠지만 빨래를 깨끗이 해놓는 것이었다. 날마다 그랬다.
“왜 그런 수고를 해?”
“복 받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 복 받으려고 그렇게 하는 거야.”
늘 하는 말이 참 찰졌다.
주머니 사정을 비롯하여 정신적으로 가난한 조수에게 참 힘이 되는 말만 골라서 했다. 무리한 부탁을 하면 싫다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에 무리한 부탁이라면 뭐가 있겠는가? 빤하지.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 말에 언제쯤 한 번 손이 없는 날을 잡자고 농을 한다. 그러며 싫다고 말을 하지 않고 2월 31일이라고 대답을 한다.
2월 31일이 있는가?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하프를 켜는 음양처럼 내 고막을 자극했다.
“너 아직 동정을 지니고 있지? 왜 동정을 술집 접대부에게 바치려고 해?”
내가 일을 힘 들어 하거나 실의 차 있으면 달래준다.
“내가 생각해도 너는 앞으로 정말 잘 살 거야.”
싫다거나 안 된다고 말을 하지 않는 아가씨였다. 최소한 그녀는 나를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만만한 친구로 생각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월급을 받아서 나는 필요가 없다면서 그녀에게 내민 적이 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이었지만 그녀의 학비에 보태 쓰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마음만 받을게.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네.”
이런 여자에게 반하지 않을 청년이 있겠는가?
그 현장에 있는 동안 그녀에게 남에게 감동을 주는 말을 배웠는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아쉽지만 그 현장의 공사를 마치니 옷 보따리를 싸서 들고 여관을 나와야 한다. 다른 현장으로 가서 서너 달 있다가 그 지하의 술집을 찾아가니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아마도 다시 복학해서 떠난 모양이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마음속으로 빌며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나왔다.
지금도 남에게 모진 소리를 하려다가 그녀를 떠올리고는 말의 편린을 목구멍으로 억지로 삼킨다.
요즘 나는 저녁에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든다. 아니, 정정하자. 듣다가 잠이 든다. 내가 자주 보는 유튜브는 그날의 신문 기사를 총망라해서 요점만 정리해서 들려주는 유튜브다.
핸드폰을 배게 옆에 놓고 좌담이나 뉴스를 듣다가 잠이 드는 것인데 들어보면 정치인들의 말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참 많다. 막말에 막말로 대꾸를 한다. 정치판은 아수라장이다. 국민은 당혹스럽다. 현 정부는 국민이 현혹할 만한 공약을 수도 없이 내걸었다. 그러나 조목조목 짚어보고 따지면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지켜진 게 하나가 있다고 종호는 대꾸한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놓는 정책이라고는 정말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정책뿐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지난밤에도 유튜브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며 쌍욕의 한 조각을 꿀꺽 삼키고 담배를 찾아 문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말의 편린을 듣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이 되지 않았는가?
“고이 접어 나빌레라”
그 옛날 천주에서 만났던 아가씨의 말을 속으로 웅얼거려 보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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