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빠듯한 살림살이에 절약하며 모은 돈을 남편 친구가 빌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약속한 날짜에 갚지 않았습니다.
“한 달만 쓰고 준다고 해 놓고 일 년이 지나도록 안 갚으면 어쩌자는 거야?”
은혜는 아이들 학교 등록금도 내야 해서 애가 탔습니다. 남편은 그 친구의 사
정이 딱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식구들, 친척들 돈까지 다 끌어들여 주식에 투자했다가 완전히 망했대, 나까
지 돈을 달라고 할 수가 없더라. 집도 다 날렸나 봐.”
남편과 절친한 그가 힘들게 되었다는 말에 은혜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습
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친구가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당신이 못 받으면 내가 가서 받아야겠어. 그게 어떤 돈이야? 콩나물 값 아껴
가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야. 우리 아이들 학교 등록금 낼 돈도 빠듯해, 이렇
게 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남편이 말렸지만 다음날 은혜는 남편 친구가 이사한 집을 어렵게 알아 내 찾아
가 보았습니다. 초라한 그 집 너머로 피아노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은혜는 가
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그 친구의 아내가 동네 꼬마에게 피아노 교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낡은 중고 피아노는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은혜
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는 사람들을 늘 배려하는 따뜻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
었습니다. 피아노 교습을 끝낸 그녀가 찾아온 은혜를 놀란 얼굴로 보았습니다.
은혜는 그 집의 상황이 남편이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 안에 있던 가전제품들이며 가구들까지 빚쟁이들한테 다 빼앗겼지만, 낡은
피아노 한 대는 남겨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피아노로 동네 꼬마들 몇 명을 가
르치고 있는데, 그걸로 학교 다니는 아이들 학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죄송해요 남편이 진 빚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갚겠습니다. 빨리 갚겠다는
약속을 못 드리겠지만 꼭 갚을 테니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집 주소를 적은 종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저희 집 주소예요. 사정상 휴대전화도 정지 시켰지만 연락이 안 되더라도 불안
해 하지 마세요. 도망은 가지 않습니다.”
은혜는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어휴, 그 낡은 편으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마침 악기 판매점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그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피아노 한 대로 24개월 할부로 구입했습니다. 악기점
사장이 “어디로 배달해 드릴까요?”하고 묻자 은혜는 아까 받은 주소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이 주소로 배달해 주세요.”
집에 돌아온 은혜에게 남편이 물었습니다.
“돈 받아 왔어?”
은혜는 남편에게 할부 영수증을 내밀었습니다.
“이거 당신이 내.”
남편이 영수증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게 뭐야? 피아노는 왜 샀어?”
“아, 묻지 말고 할부나 갚아 난 몰라.”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는데 왜 마음은 가벼워진 것인지 은혜는 알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