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광주호수 밑에 자리한 잣정마을은 1400년경 조유도(창녕 조씨)선생이 설촌한 마
을로 많은 효자와 학자를 배출한 창녕조씨 집성촌이다.
마을 뒤로는 광성산(廣成山)이 있고, 앞으로는 분향리들녘과 수남벌이 있어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현재는
대략 6~70여 가구정도가 생활을 하고 있다.
1976년 9월에 착공한 광주호(光州湖)로 인하여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동네가 와우형(臥
牛形)이라 안락하고 편한한 동네임을 강조 한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1430년경에 방향(芳香)이라 불렸으나, 1793년(정조 17) 마을 동쪽에 잣나무와 정자가 있어
잣정(栢亭)으로 개칭 했다 전한다. 또한, 마을에는 동강어적(桐江漁笛), 웅천명사(雄川明沙), 문암낙조(門巖落照),
운현취연(雲峴炊煙), 백산화죽(栢山花竹)등 잣정 6경이 전하여 진다. (도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잣정 마을 - 만옹정(晩翁亭)에서 내려다 본 잣정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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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옹정(晩翁亭).
1927년경에 조유한에 의해 지어진 만옹정은 앞으로 삼봉산을 바라볼 수 있게 지어졌다.
스스로 호를 만옹(晩翁)이라 명명한 조유한은 평생 변치 않을 나무의 절개(節介) 즉, 대나무, 소나무, 잣나무등과
같이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만옹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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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옹정 현판과 편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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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가정(觀稼亭).
잣정 마을 관가정은 창평면 삼지내 마을에 있는 남극루와 같은 맥락으로 농사를 지도. 감독 하기 위해 지은 정자
이다. 관가(觀稼)의 뜻 역시도 농사 짓는 것을 본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정자의 위치 또한 분향리 너른 들판
한 가운데 자리 하고 있다. 다른 의미로는 농사일 중간에 휴식 공간을 겸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228FB3C550167E435)
↓ 관가정(觀稼亭)이란 현판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글이라 전하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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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가정 앞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440여년으로 나무둘레 3.5m, 수고 13m로서 1991년 1월 7일 고유번호 15-6
-3-4번의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161743C550167E609)
![](https://t1.daumcdn.net/cfile/blog/263AF13C550167E727)
* 죽림서원(竹林書院). - 1987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 99호 죽림재 일원(竹林齋 一圓)으로 지정.
1708년(숙종 34) 예조의 관장을 받아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분토동에 죽림사(竹林祠)를 창건하여 죽림
조수문(竹林 曺秀文)선생과 운곡 조호(雲谷 曺浩)선생 부자를 배향하였으며, 1712년(숙종 38)에 죽림선생 6대손
삼청당 조부 선생을 배향했으며, 1751(영조 27)에 현 위치에 죽림 서원경내로 이건 하였다.
그 후 1785(정조 9)에 소은 정민하 선생을 추배 했으며, 1868(고종 5)에 서원 철폐령(撤廢令)에 의하여 훼철되었
다.
2002년에 죽림사를 정부 보조로 복원하였으며 2010년에 죽림사를 죽림서원으로 예성(禮成)하여 고려 말 순절신
산광 조대운(山狂 曺大運)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항절신 직제학 조유도(曺由道)선생과 함께 배향하고 환학당 조
여심(喚鶴堂 曺汝諶) 선생을 추배 하였다.
↓ 죽림서원 전경.
![](https://t1.daumcdn.net/cfile/blog/21308A3C550167E92F)
![](https://t1.daumcdn.net/cfile/blog/264E2736550167EA1D)
↓ 반월형연당(半月形蓮塘).
죽림재 창건 당시 주나라 주돈이 선생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인용하여 축조된 연못이었으나, 전쟁등으로 폐허
가 되었던 곳을 1639년 삼청당 조부(三淸堂 曺溥)선생이 반달형 연못으로 개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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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문.
충효문은 삼청당 조부((三淸堂 曺溥) 선생을 기린 정려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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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서각(藏書閣).
죽림 조수문 선생의 서적 보관고였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유허로 있다가 1972년 정부 보조를 받아 육영 사업
의 일환으로 정일도서관을 건립하여 학습장으로 활용 되다가, 1987년 죽림재 일원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현대식
구조물을 철거하고 198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 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758CA365501693A18)
↓ 취사루(聚斯樓).
강당겸 숙소로 죽림 조수문 선생 사후 이백여년이 지나 선생의 문하생과 후손들이 지방의 유림으로 조직화 되면서
죽림 선생의 학문과 도덕을 추모하는 사업이 활발해졌는데 춘추의 향사(享祀)때에 객들이 많아 강당과 숙소가 필요
하여 건립하였으나, 1868년 국령으로 죽림사를 훼철, 1870년 경에 취사루를 중수하여 3차례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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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영당(育英堂)과 정일재(精一齋). ↘
1890년경에 건립하여 육영당에서는 초학자(初學者)의 학습장및 숙소로, 정일재에서는 초학자 이상의 학문 연구실
및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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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245260365501693F1F)
↓ 세일재(歲一齋) - 영모당(永募堂).
세일재는 창녕 조씨 밀직사공파의 창평 입향 선조인 고려 보문각 직제학 조유도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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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재(竹林齋).
1466(세조 12) 창녕 조씨 죽림 조수문(竹林 曺秀文) 선생이 건립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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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사(竹林祠).
1708(숙종 34) 예조의 관장을 받아 창건한 곳이다. (상세 설명은 윗쪽 죽림서원(竹林書院)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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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조대(桐江釣臺).
전남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산 36번지 광주호 인근 산자락에 위치한 동강조대는 부모에게 효심을 다하기 위해 매
일 물가에서 낚시를 하여 공양을 하던 두 형제의 효심이 전하여 지는 곳이다.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지만, 동강 조국간과 매사 조국성 형제의 효(孝)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전하며, 특히
동강 조국간은 제봉 고경명, 하서 김인후등과 교류하며 문학을 날렸다 하나 전하여 지는 글은 없다.
동강조대의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광주호가 생김으로 인해 몇번의 이전끝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전한다.
또한, 이곳 동강조대에는 "유풍여운(遺風餘韻)-아름다운 풍습을 널리 알린다." 라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쓴 글
이 걸려 있었다 하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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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무등산이 보이고, 동강조대밑으로는 광주호의 물소리가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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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조대는 광주호가 생김으로 인해 몇번의 이전이 있었다 하나, 아직 정리 되지 않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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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수정(觀水亭) - 전남 담양군 분향리 353번지.
1544년(중종 39)에 창녕 조씨 계월당(溪月堂) 조여충(曺汝忠)이 건립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857
년과 1929년 후손들이 재건하고 1949년과 1993년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여충은 1512년에 태어나 153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몽교관에 특채 되었지만 오래 벼슬을 하지 않은것으로 전
하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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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부에는 중건상량문(重建上梁文)과 함께 몇편의 시(詩)가 걸려 있으나 아직 해석이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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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산정(小山亭) - 전남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용대마을. (2004년 1월 6일 담양 향토유적 제 6호로 지정)
담양 고서면 분향리 용담대(龍潭臺)위에 세워진 정자로, 환학 조여심(曺汝諶)이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
敬命 : 1533~1592)등과 더불어 용담대에서 소요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조여심의 후손인 동호당 조은환(曺殷煥)이
1927년 건립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전면과 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화강석 기둥이 마루 높이까지 올라오며, 그 위쪽으로는 나무 원기둥을 세웠다. 천장은 연등천장, 기와는 한식기와
이다. 정자 외부 왼편에 소산정(篠山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 소산정기(小山亭記) 현판등 9개의 현판
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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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분향리 석불입상(潭陽分香里石佛立像) - 1986년 9월 29일 전남 유형문화재 제 144호로 지정.
↓ 담양 분향리 2구 용태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석불입상은 전체 높이 259cm이다.
법의(法衣-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는 두툼하게 양어깨를 걸친 통견(通肩-어깨에 걸침)이다. 옷주름 표
현은 가슴에서 U자형을 이루다가 양다리에서 상호 대칭으로 타원형을 그리고 있다.
양손은 허리 근처에서 몸에 바싹 붙인 채로 왼손은 연화봉을 쥐고 오른손은 반주먹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 불상
은 우리나라에서는 귀한 사례로 꼽히는 연화봉을 들고 있는 미륵불로 추정된다.
발은 발등이 의습(衣褶-옷주름)에 가린채로 앞쪽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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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호(相好-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는 동안처첨 경쾌하게 느껴지며, 소발(素髮-민머리)의 머
리가 낮아 약간 어색하게 보인다.
눈썹에서 코로 이어지는 선이 매우 부드럽게 호선(弧線-활 모양으로 굽은 선)을 그리고 있으며, 득남의 염원 탓
인지 코끝은 마모되어 거의 없고 입술은 두툼하며, 두 귀는 짧은 편이고,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돌려져 있다.
↓ 별도의 8각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불상은 뒤쪽으로 5˚ 가량 기울어 있으며, 서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대좌는 8각이며 여기에 16엽의 복련(覆漣-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조각 되어 있다.
불상 앞에 자연석의 배례석이 놓여 있으나 후대에 누군가가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이며, 주변이 넓지 않아 큰 규모의
가람이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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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분향리 석불입상과 같이 2m가 넘는 큰 불상은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나주철천리석불입상, 무안약사사석불입
상, 담양오룡리석불입상, 순천근둔사지석불입상 등이 있으나 양식에서는 큰 차이가 나고 있다.
분향리석불입상은 법의의 의문(衣文-옷자락 무늬)이 특이하며, 아울러 수인(手印)이 독특하여 비교할 수 있는 불
상이 없는 형편이며, 조각 기법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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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명소.
담양 분향리 인근 교산리 138번지에는 정종원년(1399)에 창건하였으며, 지방유형문화재 제104호 창평향교(昌平鄕校)가 있으며, 성월리에는 문화재자료 제 221호 담양성월리월전고분(潭陽聲月里月田古墳)이 있다.
또한 전남문화재자료 제12호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역시 광주호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 편의 시설.
분향리 잣정 마을 죽림서원과 문하재들을 방문하기위해선 별도의 주차장이 없으므로 마을 인근의 공터를 이용하여야
한다. 기타 편의 시설은 광주호 주변의 전문 음식점이나 광주생태원 인근의 식당을 이용 할 수 있으며, 화장실은 죽림서원 내 육영정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첫댓글 이번에는 효자와 학자의 고장 담양 잣정 마을을 다녀오셨네요~~ 아주 상세한 설명과 사진 잘 보고 갑니다... 봄이 되고 주변에 문화제들도 여럿 있고 하니 나들이 삼아 다녀와도 좋겠네요~~^^
잣정 마을은 광주호수 밑에 자리 하고 있어, 오가는 길에 들려 보기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이제 벚꽃이 떨어지고, 새로운 꽃이 반겨 주려 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심으로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문화제가 많이 놓여있는 그 곳
봄의 향연 함께하는 곳
상세히 올려 주셔서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고급 문화재 보다는 향토나 지역 문화제들이 많이 있다 보니, 더욱 정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봄과 함께 행복이 함께 하는 평화로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