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중국 남부 61년만의 폭우로 380명의 사망자와 피해자 발생
푸젠성의 경우 5월1일부터 무려 33일 넘게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이달 들어서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일부 지역의 경우 지난 5일부터 내린 누적강수량이 최고 700mm에 달했는데, 중국기상대는 평년 같은 기간대비 2배에 달하고, 1961년 이래 최고기록이라고 밝혔습니다. 피해가 가장 큰 푸젠성 룽옌시에서만 최근 열흘새 22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직접적인 재산피해만 우리돈으로 1,151억원이 넘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허난성 정저우에서는 사흘동안 1년치 비가 쏟아지면서 지하철역과 지하차도 등이 침수됐고, 380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나오는 등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2018년 제7차 동시지방선거, 더불어민주당 압승, 자유한국당 참패
2015년 영국서 사상 최고령 신혼부부 탄생
영국에서 6월 세계 최고령 부부가 탄생했다. 영국 남동부 이스트번에 사는 102세 조지 커비 할아버지와 92세 도린 럭키 할머니가 6월 13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은 할아버지가 103세가 되는 생일로, 부부 나이를 합치면 195세가 된다. 현재까지 최고령 결혼식 커플의 합산 나이는 188세다.
둘이 처음 만난 때는 커비 할아버지의 이혼 수속이 막 완료된 1988년이다. 당시 럭키 할머니는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27년간 연인으로 지냈다.
커비 할아버지는 자식들의 끈질긴 권유로 할머니와 결혼하기로 했고, 지난 밸런타인데이(2월 14일)에 프러포즈했다.
2015년 공수부대 중사 출신 최원창씨, 인터플로라 월드컵 1위 수상
인터플로라 월드컵은 세계 최고의 플로리스트를 가리는 대회다. 4년에 한 번 열리며 올해가 14회째다. 국가당 한 명이 출전하는데, 이번에는 미국·영국·독일·덴마크·한국·일본·중국 등 26개국에서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이 1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최씨는 경북 김천의 산골 출신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입대해 4년 6개월간 공수부대에서 복무하고 중사로 전역했다
그가 꽃과 인연을 맺은 건 여덟 살 위 친형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화환과 조화를 만들고 영안실 제단 장식도 직접 했는데 부케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은 외부에 맡기는 것이 싫어했다.
“부케 같은 꽃 장식을 배우려고 반년간 학원에 다녔어요. 소질이 있다더군요. 아예 제대로 배워 대회에 나가보기로 했죠. 2002년 처음 나간 대회에서 1등 했어요.” 이후 2008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받는 등 각종 대회에서 수상했다. 그는 실력 있는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수소문 끝에 전문가를 소개받았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인터플로라 월드컵에 출전했던 플로리스트다. 그의 도움을 받아 독일 플로리스트 마이스터 자격을 땄고, 함께 일도 했다. 서울의 몇몇 유명 백화점 꽃 장식을 맡았고,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꽃꽂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해외 대회 참가 횟수도 늘었다. 꽃 장식을 선보이기 위해 간 나라가 10개국이 넘는다.
2010년 중국 남부 폭우 홍수 사망 381명 실종 143명 이재민 7천만 명
2006년 한국 축구대표팀, 토고 꺾고 월드컵 사상 첫 원정 승리
한국 축구대표팀이 2006년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 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린 토고와의 2006독일월드컵 G조 첫 경기에서 이천수와 안정환의 연속골로 2대1 역전승을 거뒀다. 이날 승리는 한국이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거둔 사상 첫 승리였다.
한국은 2002년 이전까지 4무 10패로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다. 이로써 통산 7번째 월드컵에 진출한 한국은 월드컵 역대 전적 22전 4승 6무 12패를 기록했다.
한국은 전반 31분 토고의 카데르에 어이없는 선제골을 허용했다.
후반 들어 활기를 되찾은 한국은 후반 7분 박지성이 상대 미드필드를 돌파하며 토고 아발로의 퇴장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천수의 환상적인 프리킥 동점골이 이어졌다. 후반 9분 이천수가 아크 서클에서 감아 찬 공은 상대 골키퍼가 전혀 손 쓸 수 없는 빈틈을 향해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주도권을 잡은 한국은 파상공세를 펼쳤고, 후반 27분 안정환이 역전골을 뽑아냈다. 안정환은 미드필드에서 연결한 공을 이어 받아 페널티 지역 바깥 오른쪽에서 통렬한 중거리 슛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2006년 ‘DJ 가택연금’ 19년만에 유죄, 당시 마포서장에 집유 2년
2006년 6월 13일 대법원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1987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가택연금한 혐의를 받고 있는 당시 서울 마포경찰서장 김모(72)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김씨의 불법감금 행위는 상급기관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위법성이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87년 4~6월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 전 대통령의 집 주위에 경찰관 수백명을 배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김 전 대통령의 외출에 비서나 가족이 동행하지 못하게 한 혐의다
2004년 영화계 대표적 감초배우 김일우씨 별세
우리 영화계의 대표적인 감초 배우이자 연극배우인 김일우(金一宇·51)씨가 13일 오전 1시47분 위암으로 별세했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김씨는 1976년 연극 ‘춘풍의 처’로 데뷔한 후 ‘그 섬에 가고 싶다’ ‘투캅스3’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엽기적인 그녀’ ‘목포는 항구다’ 등 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감칠맛 나는 조연으로 각광을 받았다.
김씨는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목포는 항구다’에 출연할 당시 위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으나 열정적으로 영화 촬영을 계속했으며, 항암치료를 받으며 8월 개봉할 ‘신부수업’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연극 ‘선택’ ‘바리공주’, 영화 ‘스물일곱송이 장미’를 제작했으며, 1996년 영화 ‘학생부군신위’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2002년 중국, 한국 영사관 진입한 탈북자 강제연행
중국 공안이 13일 베이징(北京)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무단진입해 앞서 진입한 탈북자를 강제로 연행했고, 나중에 탈북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이를 제지하는 한국 외교관 등을 집단폭행, 한·중(韓·中) 간 심각한 외교문제를 일으켰다.
베이징 공안국 소속 경찰들은 이날 오후 4시(현지시각)쯤, 앞서 한국 총영사관 안에서 끌려나와 정문 앞의 중국측 경비초소에서 중국 경찰의 조사를 받던 탈북자 원모(56)씨를 연행하면서, 이를 저지하는 한국 영사와 서기관, 영사부 직원, 한국 기자 등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집단폭행을 가했다. 이 때문에 한국 대사관 직원 등 5명이 다리와 어깨·머리 등에 상처를 입었다.
폭행에 가담한 중국 경찰 10여명 중 일부는 만취한 듯 짙은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대사 김하중·金夏中)은 즉각 중국 외교부에 대해 공관 불가침권과 외교관 신체불가침권의 침해를 강력히 항의하고 원씨를 한국측에 되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중국 경찰에 연행된 원씨는 이날 아들(15)과 함께 택시를 타고 오전 11시(한국시각 낮 12시)쯤 한국 총영사관 부근에 온 뒤 영사관 민원인 출입구 반대편의 차량 출입구를 거쳐 영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중국 보안요원 2명이 허락 없이 영사관 안으로 쫓아들어와 원씨를 강제로 끌고 나갔다. 원씨의 아들은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직원 사무실까지 뛰어들어가 연행을 피할 수 있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한나라당 압승, 민주·자민련 참패
2002년 6월 13일 실시된 제3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자민련의 참패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16개 시·도지사 중 11곳에서 당선한 반면, 민주당은 4곳, 자민련은 1곳에서만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한나라당은 특히 서울시장에 이명박, 경기지사에 손학규, 인천시장에 안상수 후보가 당선되는 등 수도권 3곳을 석권했다. 한나라당 세력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고, 수도권 3곳을 모두 이긴 것은 1995년부터 치러진 세 번의 광역단체장 선거 중 처음이다. 한나라당이 대전시장, 충북지사, 강원지사를 비롯, 부산시장, 대구시장, 울산시장, 경북지사, 경남지사 등 영남 5개 시·도 전부를 휩쓸었던데 반해 민주당은 광주시장, 전남지사, 전북지사 등 호남지역 3곳과 제주지사 등 4곳에서 승리했다. 자민련은 충남지사 1명만 당선돼 충청권 3곳 중 2곳을 잃었다. 전국 232명의 시장·군수·구청장을 새로 뽑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대약진한 반면, 민주당은 참패했다. 한나라당은 140명, 민주당은 44명, 자민련은 16명을 당선시켰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정당투표에서도 한나라당이 압도했다. 73명의 비례대표 의원 배분은 한나라당 36명, 민주당 22명, 민노당 9명, 자민련 4명 순이었다. 민노당은 이번 선거에서 구청장 2명과 시도의원 11명을 배출해 선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비례대표 73명을 포함한 682명의 시·도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467명, 민주당이 143명, 자민련이 33명을 당선시켰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48.9%로 전국단위의 선거로선 최저기록이었다.
2002년 미군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2명 사망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45분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친구 생일을 축하하러 가기 위해 갓길을 걷고 있던 이 마을 신효순, 심미선양 등 2명이 미군의 가교 운반용 장갑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나 미군측은 6월 19일 사고조사 결과 발표에서 “선임 탑승자가 피해 여중생들을 30m 전방에서 발견, 운전병에게 경고하려고 했지만 소음이 심해 제때에 경고할 수 없어 발생한 고의성 없는 사고” 라고 말했다. 미군은 적법한 작전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미군측의 과실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정부경찰서가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사고 차량 운전병의 진술서에 따르면 운전병이 선행하던 중대장과 무전교신을 하고 있어 선임 탑승자의 경고를 못 들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찰조사 결과 탑승자들의 헬멧에 장착된 무전교신기가 동시에 두 곳과는 교신이 불가능, 유사한 사고의 발생 위험성이 높다는 점도 드러나게 됐다.
법무부는 미군 당국을 상대로 장갑차 탑승 군인에 대한 1차 재판권포기를 요청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 20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이 무죄 평결을 받은 데 이어 20일에는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도 무죄 평결을 받아 파문이 확산됐다. 이후 국내에서 촛불시위를 비롯해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파문이 점차 확산되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토머스 하버드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사과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반미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12월 13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로 직접 사과했다.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개정에 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 사건이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 첫 회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이 평양에서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실시했다
이 회담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와 생애 전반에 대한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7년 미연방배심원, 티모시 맥베이 사형평결
1994년 북한 IAEA 탈퇴 선언
1989년 후반 프랑스 상업위성이 촬영한 영변 핵 시설 사진이 공개됨에 따라 제1차 북핵위기가 국제적 현안으로 대두되었으나 미군 전술핵무기의 한반도철수(1991.9.27.) 남북한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12.31.)으로 평화적 해결 여건이 조성됐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2년 1월30일IAEA(국제원자력기구)의 핵 안전조치협상에 서명, 핵시설과 그동안 생산한 플류토늄 90g을 신고했다
하지만 핵 사찰결과 북한이 신고한 플류토늄양이 불일치하자 IAEA는 신고가 되지않은 두 곳의 영변 핵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 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고수를 위한 응당한 자위조치”라고 강변하면서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고 1994년6월13일에는 IAEA마져 탈퇴를 선언했다
1994년 10월에 북한의 NPT잔류와 IAEA 사찰 수용을 전제로 미국으로부터 대북지원을 보상받는 이른 바 “미북 제네바 합의”가 체결되었다
하지만 1998년 8월 북한은 대포동미사일을 발사하며 다시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2001년 9,11테러 이후 북한을 “악의축”으로 규정한 미국이 대북지원을 중단하자 북한은 IAEA 사찰단을 추방하며 2003년 1월 또다시 NTP 탈퇴를 선언했다
1993년 캐나다 첫 여성 총리에 캠블 선출 4개월 만에 물러남
1993년 백남준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대상 받음
1991년 옐친, 러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직선) 당선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러시아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60% 이상을 득표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1931년 우랄산맥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방의 부트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1985년 직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추진 인물로 발탁돼 모스크바시 당중앙위원회 건설담당자로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대중 정치가로 부상하면서 1987년 개혁이 미온적이라며 고르바초프를 비판해 당직에서 해임되기도 하였으나 1989년 3월 실시된 인민대회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돼 고르바초프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했다.
1990년 5월에는 소련내 최대 공화국인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소련이 해체된 후 이날 처음으로 실시된 러시아공화국 직접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0년 정부 국군조직법 개정안 마련
1986년 `스윙재즈의 킹` 베니 굿맨 사망
1930~40년대 재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며 일명 ‘스윙재즈’로 재즈 역사를 새롭게 장식한 베니 굿맨이 1986년 6월 13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9년 시카고의 가난한 양복재단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밥벌이를 위해 미시간 호수 유람선 밴드를 드나들며 연주를 했다. 그러던 1935년 8월 21일 팔로마 보룸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미국과 전세계를 들끓게 한 ‘스윙재즈’ 붐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나의 26세였다. ‘스윙재즈’의 열풍이 일기까지 재즈는 소규모 밴드, 술집 그리고 거리축제 등에서 연주되던 흑인 음악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윙재즈’가 나오면서 재즈는 더 이상 흑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스윙재즈’... 말 그대로 재즈 연주 특유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듯한 리듬감을 표현한 이 음악은 대공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내 ‘스윙재즈’ 열풍을 타고 재즈는 온통 거리를 휩쓸게 되었고 이로써 약 10년 동안 베니 굿맨의 스윙 황금시대가 계속됐다.
1984년 런던서 시크교도 망명정부 칼리스탄국 창설
1982년 할리드 사우디국왕 사망
1982년 제12회 월드컵 스페인서 개막
1974년 중국, 비림(批林).비공(批孔)운동 전개
1974년 제10회 월드컵 서독서 개막
1971년 뉴욕타임스(NYT)지 베트남전 기밀문서 게재 정치문제화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를 펼쳐 든 미국인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23년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의 실상을 그대로 까발린 이날 기사의 1면 제목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과정 30년’이었다. 기사는 오랫동안 비밀의 장막에 갇혀 있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베트남 내전의 개입에 반대하는 군 상층부의 경고를 무시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의 전복을 승인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 통킹만 폭격을 결정하기 전 예상되는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보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모두 6면에 걸쳐 보도된 이 엄청난 고발은 대니얼 엘스버그(1931~)라는 군사전문가의 고뇌와 용기의 산물이었다.
1967년 그는 1961년부터 7년 동안 베트남전쟁을 지휘한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에서 행해진 미국의 의사결정에 관한 1급 비밀을 한데 모아 맥나마라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관여했다. 맥나마라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된 전쟁에 의문을 품고 1967년 6월 베트남 전쟁사를 재검토하는 프로젝트에 엘스버그를 합류시킨 것이다.
폭로 기사는 1971년 6월 13일의 첫날 보도에 이어 1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가 “미국 국방상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며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3회분 기사가 실린 후 신청을 받아들여 연재는 중단되었다. 시리즈가 중단되자 이번에는 엘스버그로부터 4,000쪽 분량의 보고서를 입수한 워싱턴포스트가 6월 17일 기사화했다.
1969년 미국 베트남 주둔 지상군 철수 발표
1968년 정부, 가이아나와 국교 수립
1968년 향토예비군법 시행령 공포
1966년 `미란다 원칙` 고지 의무화 판결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1966년 6월13일, 범인체포시 이 `미란다 원칙` 고지가 의무화되도록 한 판결이 처음 내려졌다. 경찰로부터 묵비권과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사전에 듣지 못한 피의자에게 미 연방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미란다는 1963년 3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시의 한 극장 앞에서 10대 소녀를 납치ㆍ강간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23세의 멕시코계 청년 어네스토 미란다의 이름이다. 미국인들에게는 `미란다 대 애리조나`로 더 잘 알려져있다. 경찰조사에서 자신의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진술조서에까지 서명을 마친 미란다가 돌연 재판과정에서 강요된 자백이라며 진술을 번복함으로써 재판이 잠시 차질을 빚긴했으나 법원은 미란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최고 30년의 중형을 내렸다. 주(州) 대법원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란다의 무죄를 주장하는 `미국 자유시민 연맹`이 연방 대법원으로까지 사건을 끌고가자 연방대법원은 5대4로 원심을 뒤집고 미란다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 후, 인권에 대한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않았다. 공교롭게도 판결이후 강력범죄가 급증했다.
미란다는 그뒤 동거여인의 증언 등으로 다시 유죄가 확정돼 옥살이를 하다가 1972년 가석방됐으나 1976년 술집에서 싸움 끝에 죽었다.
1962년 학원가 대남지하서클 간첩단 사건
1961년 언커크, 한국의회제도 부활을 촉구
1959년 민판수호총연맹, 언론수호대회 서울서 개최
1958년 스위스 의회, 부인참정권 가결
1958년 일본, 한국에 반환할 문화재목록을 제공
1956년 영국군 74년 만에 수에즈운하서 철수
1955년 일본-북한 어업협정조인
1955년 이기붕 제50차 IOC총회(파리)에서 IOC위원으로 뽑힘
1953년 콜롬비아 육군 유혈쿠데타
1951년 한국전쟁 중 유엔군 3.8선 도달
1948년 미국 뉴욕 양키즈팀,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발표
1944년 독일 비행폭탄 V-1 로켓 첫 발사
1938년 학교 근로 보국대 실시요항 발표
1938년 휘발유 및 중유판매취체령 공포
1938년 경성제대 강당에서 육군지원병훈련소 입소식 거행
1918년 광화문선 전차 운행 개시
1917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915년 1938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미국의 테니스 선수 버지 출생
1903년 소련 압록강목재회사 설립
1903년 소련,청나라 전선연접 조약 성립
1890년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허가(1890.06.13 음력)
조선조 말, 외국인이 숨지면 주로 제물포항 언덕에 묻혔다. 정부가 성내 매장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1890년 헤론이 전염성 이질에 걸려 숨진 것을 계기로 외국인들은 한강변에 가까운 양화진을 공동묘지로 불하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헤론은 1885년 의료선교사로 파견돼 불철주야 한국인을 위해 의료사업을 펼쳐온 사람이었다.
6월13일(음), 정부가 묘지설립을 허가하고 헤론이 이 곳에 처음 묻히면서 이후 양화진은 베델,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등 면면이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안식처가 됐다. 묘비도 감동적인 문구로 가득해 베델의 묘비에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건 소명”, 헐버트의 묘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적혀있다. 현재 4000여평의 공간에 500여명이 묻혀있다.
1879년 핀란드의 육상선수 누르미 출생 - 1920, 1924, 1928년 올림픽서 6개의 금메달 획득
1871년 런던 상해간 전신 개통
1865년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 출생
1831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출생
1790년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에스 출생
1402년 명나라 율문제, 정강의 변으로 폐위
1398년 목화 전래자 문익점 사망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6월 13일 원정지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끊임없는 정신적-육체적 과로, 국사에 대한 엄청난 중압감, 장기간의 행군과 심각한 부상 등으로 원기가 소진되어 걸린 열병이 원인이었다. 만 33세가 되지 못한 나이였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지 1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동방원정 기간동안 1만 7,600킬로미터를 행군한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정복자였으며, 전술 및 전략의 새로운 준거를 확립한 지휘관이었다. 그의 정복으로 거대한 세계의 문은 활짝 열렸고 통합되었으며 헬레니즘 문화는 꽃을 피웠다.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부친인 필리포스 왕에게서 군사적 재능과 냉철한 합리주의를 이어받았으며 모친 올림피아스에게서는 신비주의, 낭만성, 격정적인 기질, 카리스마 등을 물려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는 지식에 대한 사랑, 특히 과학적 탐구와 의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갑작스런 부친의 살해에 그가 부친의 왕국, 군대, 아시아 원정계획 그리고 코린트동맹군 지휘의 임무를 떠맡은 것은 그의 나이 약관 20세때였다. 동방 정복에 나선 이후로 단 한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그가 갖는 중요성은 단순히 군사적 천재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만민의 평등과 협조에 바탕을 둔 세계국가 이념이야말로 그의 업적이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다. 젊고 자부심에 찬 정복자가 착안한 이 정치적 비전은 그가 사망하고 그의 제국이 사라진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당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