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풍천리(春風千里)
안재홍(安在鴻)
「인생난득(人生難得) 백년한(百年閑)」이라고 옥중(獄中)에서 영탄(詠嘆)한 자가 있다. 백년한(百年閑)이 반드시 인생 생활의 극치는 아니겠지마는, 마차말같이 분망한 생애는 이름높은 항양의 춘색(春色)도 완상(玩賞)할 겨를이 없이 지냈었다. 이제 마산행의 기회로써 춘풍천리(春風千里) 남국의 화신(花信)을 전하게 된 것은 부생(浮生) 분외(分外)의 한사(閑事)이라 할까. 남원 가는 이도령의 행색은 아니지마는 야도한강수(夜渡漢江水)하는 진위행(振威行)의 도차(塗次)에는 연선(沿線)의 춘색(春色)을 엿볼 수가 있었다. 향제(鄕第)에 체재하는 일일(一日), 분묘(墳墓)에 성(省)하여 쓸쓸한 노고초(老姑草)를 보았고 도화(桃花)·행화(杏花)·신이화(莘荑花) 등은 아직 꽃망울이 터져 보려 하는 즈음이었다. 다시 경부선 차중의 사람이 되니 각각으로 접근되는 남국의 춘색은 앉아서 산수(山水)의 묘경(妙境)에 노는 듯하게 한다.
청·일 전쟁의 명소로 오인(吾人) 인상이 얕지 아니한 성환역의 부근에서는 벌써 눈록(嫩綠)을 바라보는 수주의 수양을 보았다. 속요(俗謠)에 나오는 천안 삼거리의 능수버들을 생각하게 한다. 부강(芙江)에 오니 황량한 촌락에 행화가 만발하였고 신이(莘荑)는 더욱 한창이다.
「신이화락 행화개(莘荑花落杏花開)」라는 한시(漢詩)가 있거니와 두 가지 꽃이 일시에 만개한 것은 재미있다. 신이화를 속명에 「개나리」라고 하니 「나리」는 백합의 속며이요, 「개나리」는 가백합(假百合)의 속어이리라. 이로써 구어(歐語) 「캐나리」의 귀화어로 생각하는 이가 있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백합과 신이가 1은 구근식물이요, 1은 관목이지마는, 꽃이 동과(同科)에 속한 고로 이러한 명칭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개나리」를 신이(莘荑)로 쓰는 것은 잘못이니 연교화(連翹花)가 그 참인 것이다.
신탄(薪灘江頭)에서 두건 쓴 사공이 협장(狹長)한 목선(木船)에다가 4,5의 백의 남녀를 싣고 담벽(湛碧)한 강수를 건너려는 것을 보며 무르녹은 시취에 잠기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 형로 알 수 없는 피안을 상징하는가 생각하면 묘연한 정사(情思) 형언할 길 없다. 대전역을 지나 사위에 솟은 산악을 바라보며 한참 장엄한 기분을 돋우는 중에, 초부(樵夫)가 소동(小童)으로 더불어 노방(路傍)에서 쉬는데 초망에는 마른 풀이 한 짐이요, 옆에는 작작(灼灼)한 두견화가 한 묶음이다. 만개한 두견화는 예서 처음이다. 심천(深川)까지 가서 절벽의 한 중간에 매달려 있는 두견화를 보았고, 연변(沿邊) 일대에 다시 성개(盛開)한 두견화를 찾을 수 없었다. 오인(吾人)은 꽃을 사랑하되, 그러나 꺾기를 즐기지 않는다.
꽃은 봄의 중추요, 생명의 표지라, 탐화봉접(貪花蜂蝶)이란 말이 있거니와 꽃을 탐내는 것은 봉접뿐이 아닐 것이니, 무릇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예찬하는 자 누구든지 꽃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때 만나 핀 꽃을 한손으로 꺾어 버리는 것은 잔혹이 심한 자이다. 꽃을 사랑할질대, 마땅히 그 정원이나 촌락에 옮겨 심어 둘 것이요, 그 힘이 없으면 차라리 두고 볼 것이다. 꽃을 꺾으니 그 선연(嬋娟)한 방혼(芳魂)을 상함이요, 하물며 시들은 뒤에 진개(塵芥)와 함께 버리기는 더욱 할 수 없는 일이다. 봄의 꽃, 가을 단풍, 무수한 관상자들이 한 다발씩 꺾어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액석하기 짝이 없는 바이다.
추풍령을 넘는다. 일대 산악이 원정층준( 層峻)한데 북류(北流)하는 계수(溪水)는 오히려 만만한 기세를 보인다. 추풍령은 경부선 중 최고한 지점을 이루었다. 백두(白頭)의 정간(正幹)이 속리산에 미쳐서 역행하여 한남과 금북(錦北)의 제(諸)산맥을 이루었고, 차령으로부터 남주(南走)한 산맥은 호남 일대에 ??쳤으니, 추풍령은 즉 속리로부터 서행하는 과도 지대이다. 석자(昔者) 임진(壬辰)의 역(役)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서로군(西路軍)을 거느리고 추풍령을 지나 청주, 죽산 등지를 거쳐 북상하니 오인(吾人) 독서자의 두뇌에는 이러한 인상이 때때마다 스러질 수 없다.
한국의 기후가 추풍령을 분계로 삼아 남북이 특이한 바 있거니와, 추풍(秋風) 이북에는 북류수(北流水)를 보고 추풍 이남에는 남류수(南流水)를 보는 것도 매우 흥미깊은 현상이다. 추풍령을 넘어 남하하는 도중 직지사라 하는 산간 소역이 성개(盛開)한 신이총중(莘荑叢中)에 파묻혀 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문구를 기억하거니와 홀홀한 여로가 이 산간의 정토(淨土) 직지사의 묘경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섭섭한 일이다. 금천 역에 당도하니 비로소 성개한 앵화(櫻花)를 보겠다. 이것이 남국 춘색의 제일경(第一境)이라고 할 것이다. 앵화에 관하여는 추후로 일필(一筆)이 있고자 한다.
떠나는 길에 뒤로 돌아보니 금천의 천변(川邊) 높은 석축의 밑에서는 백의백건(白衣白巾)의 표모군(漂母群)의 방망이 소리가 한창이요, 맞은쪽 일면 백사(一面白沙)의 위에는 세탁한 백포(白布)와 백련(白練)이 그럴듯이 보인다. 대신역을 지나니, 오후에 하학한 학동들이 손마다 한 다발씩의 두견화를 들고, 즐거운 듯이 지껄이며 돌아가는 양이 매우 마음 기쁘게 한다.
고요한 가을 찬 밤 귀뚜라미 울지 마라.
어지러운 때의 물결 이적엔 어이 된고.
등(燈) 아래 홀로 누운 몸이 한숨겨워하노라.
왕년 작이다. 시야 어찌되었든지, 대구는 나의 잊기 어려운 인상 깊은 도시이다. 추풍령을 넘은 남행의 기차는 약목(若木), 왜관 등 역을 지나 대구까지 왔다. 왜관은 낙동강의 중류가 굽이지어 흘러가는 곳이다. 왕왕한 탁류가 바로 장장 대하의 맛이 있다. 수십 년 전 필자가 왜관에서 내려 「이놈으 자식」말하고 사투리 쓰는 마부들과 편주(扁舟)로 낙동강을 건너고 필마로 「바람티」를 넘어 성주읍내까지 가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나 우편으로 달성 공원의 듯듯는 춘색을 지점(指點)하고, 좌편으로 금호강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추억 많은 대구 역에 왔을 적에는 벌써 십 수년 전의 추억은 스러지고, 다만 기미(己未)·임술(壬戌)의 깊고 깊던 옥중 생활의 인상이 되살아난다. 10분간 정차를 이용하여 그름다리를 건너 개찰구까지 가서 역두에 몰리는 군중을 쳐다보았다. 동으로 팔공산, 서으로 남산의 정벽( 碧)한 경색(景色)이 더욱 회고자의 감회를 돕는다. 삭풍이 에이는 듯한 옥성중(獄城中)의 운동장에서 백설 애애( )한 팔공산의 연봉(連峰)을 바라보던 덜덜 떨리는 수인(囚人)에게는 마치 폭위(暴威)가 늠열한 혼세마왕(渾世魔王)과 같이 보이더니, 지금에는 자못 강산의 풍경 웅원창달(雄遠暢達)한 바 있음을 깨닫게 한다. 더우기 남산은 옥창으로 들이쏘이는 재양(載陽)한 춘일(春日)과 함께 인세(人世)동경의 표상으로서 조망되는 바, 오늘날에 대하여 더욱 다정해 보인다. 남으로 경산역을 지난다. 경산은 경부선 중평 택역과 함께 미곡 산출이 풍부한 곳이어니와, 금년은 오래 가는 봄 가물음으로 인하여 경산의 평야 일점수(一點水)를 볼 수 없다.
성현수도(省峴隧道)를 지나 청도를 거쳐 밀양역에 달하였다. 밀양강 일대에 수석(水石)이 점철하고 용두종남(龍頭終南)의 제산이 촉촉하게 운제(雲際)에 솟았는데 익연(翼然)한 영남루가 밀양 강안에 번듯이 서서 묘망한 광야의 경색을 토탄하는 듯하다. 밀양은 증유(曾遊)의 지(地)요, 사지(斯地)에 다시 고인이 많은지라, 기타 신인 행객의 추회(追懷)를 일으킴이 많다.
삼랑진에 다다르니 앵화가 그름 같다. 구름같이 늘어선 담백한 앵화의 총중(叢中)에는 수 주의 도화가 사이사이 끼어 있어 점점홍의 교태가 견줄 데 없다. 앵화가 내외에 천명(擅名)하는 것은 물론이어니와 꽃으로 인물에 비긴 것이 많으니, 모란이 부귀인, 연화(蓮花)가 군자, 국화가 은사(隱士), 매화가 한사(寒士), 혹 숙녀, 장미가 소인, 해당이 미인, 도화가 유녀(遊女)라고 하는 것은 꽃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짐작하는 바이다. 유녀를 상징하거나, 숙녀를 형용하거나 담백한 화운(花雲) 중에서 이 작작한 도화를 보는 곳에 자못 적열(赤熱)한 정감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없다.
유천(楡川)·밀양(密陽) 일대 계산(溪山)이 영대(映帶)하는 곳에 비로소 일파(一派) 죽림을 바라보며, 선명한 남국(南國) 정조를 일으키게 되었더니, 삼랑진 이남에는 더욱 무성한 죽림이 곳곳에 다 있는 것을 보겠다. 작원관(鵲院關)을 바라보아 고전장(古戰場)의 여겁(餘劫)을 조상하며, 물금·구포 등 역을 지나 부산진까지 왔다. 삼랑진 부근부터는 용용(溶溶)한 낙동강의 하류가 거의 항상 기차와 병행하게 된다.
작하(昨夏) 낙동강 하류의 대홍수로 인하여 대저면(大渚面) 일대의 주민들이 모두 어별(魚鼈)을 이루었다고 하더니 지금에도 연강 일대의 촌락은 오히려 숙연한 풍경이 마치 전란 후의 시가를 봄과 방불하다. 작년 8월에 부산까지 왕복하는 길에 기차로 여기를 통과하며, 처연한 재해지의 부녀의 곡성을 듣고 믄득 수연(愁然)히 상감(傷感)함이 있어 돌아가 8,9일간의 곡보(哭譜)를 썼더니, 미구에 본보는 정간의 액(厄)을 당하였으므로, 이 재해의 표상인 곡(哭)의 보(譜)를 쓴 것이 연기(緣起)가 좋지 못한 일이라고 하여 동인간에 가끔 조소를 받았었다. 금번에는 될 수 있는 대로 환희의 춘광을 널리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다.
대구 부근에서부터 기온이 돈연(頓然)히 높아져서 침울한 기분이 깊었더니, 부산진에 내려서 묘망한 오륙도(五六島) 부근의 해색(海色)을 바라보니, 심기일전, 자못 청상쇄락(淸爽灑落)함을 깨닫게 한다. 역두(驛頭)에 나서니, 뜻밖에 고인(故人)이 대구서부터 동차(同車)하여 그곳까지 왔었고, 동래 온천으로 향하는 전차에서 다시 고인을 만났다. 이번 길은 초초히 독행(獨行)하여 일석(一夕)의 휴양을 얻고자 하였으므로, 지인(知人) 제씨에게도 통지하지 못하였다. 추억 많은 강수영·남문구 등 지점을 지나 동래성을 남쪽으로 두고 온천장리(溫泉場裡)에 파묻혀 버렸다. 봉래교·백록교 등 송림과 앵화가 어울어진 곳에는 천성(天成)한 유락지(遊樂地)에 다시 인위(人爲)의 기교를 가미한 것을 알 것이다.
* 안재홍은 호가 민세(民世)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요, 정치가였다. 1891년 11월 경기도 진위(振威)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를 졸업했고, 3·1 운동 이후 대한청년외교단을 조직해 활약했다. 중앙학교 학감(學監)과 기독교청년회 간사를 거쳐 시대일보사 논설위원, 조선일보사 주필(主筆) 및 사장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국민당 당수, 한성일보 사장,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작품으로 <백두산 등척기> 외에 다수의 평론, 수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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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봄의 중추, 생명의 표지~
금수강산 처처가 블국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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