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토요일, 1학년 후배 두 명과 함께 대구영상미디어센터를 찾았다. 원래 2시 본선경쟁 작품을 보려고 했지만, 후배들과 합류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려 4시의 초청작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상영관. 상당히 아늑한 분위기였다. 일반 영화관에 들어가면 영화관에 압도되는 기분이 들지만, 이곳의 상영관은 편안한 안방처럼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각 편마다 시간을 두고 상영하는 방식이 아닌, 다섯 편을 연달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Pledging my Road, 전화번호가 필요해!, 외출, 소년마부, 거울공주. 5편을 한꺼번에 본다기에 힘들 줄 알았는데, 공감되면서도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어서 끝까지 몰입하고 볼 수 있었다.
초청작 모두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그 중 내 뇌리에 가장 또렷하게 박힌 작품은 Pledging my Road이었다. 첫 번째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너무 짧은 시간의 상영 시간 때문에 초청작이 아닌 간단한 오프닝이라고 생각하고 보았다가, 초청작이라는 정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대수롭지 않게 보기 시작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영화는 항상 좋은 화질에 완벽한 색채, 깔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 선입견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Pledging my Road의 영상은 야간에 캠코더로 찍은 느낌의 흐릿한 색채의 영상에 흔들리는 카메라 시선, 너무 크게 들려서 오히려 어색한 발소리 등 여태 보아왔던 영화와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위화감이 들었다. 길을 걷고 있는 남자의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와 그와 대조되는 고요하고도 적막한 길거리에는 가로등 불빛이 비취고 있었지만, 그 빛도 미약하게 느껴졌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지는 암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화면에 혼자 쓸쓸히 걷고 있는 남자는(나중 DIFF 사이트를 통해 이름이 재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힘없고 웅얼거리는, 전형적으로 술 취한 아저씨의 혀 꼬부라진 소리다. 집중해서 들어도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정도로, 통화를 한다. 카메라가 재구의 뒤에서 앞으로 이동해서 얼굴을 비춰줄 때에야 비로소 통화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돈과 관련한 내용의 통화였다. 영화 제작을 하는 재구에게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인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화가 난 재구는 들고 있던 술병을 냅다 던져버리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오히려 심한 꼴을 당한다. 근처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욕을 듣고,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고…. 재구의 억울한 감정과 막막한 한숨으로 영화는 끝을 맺었다. 짧은 내용이지만 무거움이 실려 있었다. 게다가 어두움, 적막함 등 부정적인 여러 요소가 잘 맞물려 그 분위기를 한껏 살려냈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어려움, 이상과는 다르게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 Pledging my Road를 보고 난 바로 직후 인디밴드로 활동하는 분들과 언더그라운드 힙합퍼들이 먼저 생각났다. 순수한 예술을 꿈꾸는, 그래서 현실의 ‘돈’이라는 큰 벽에 부딪혀 힘겹게 생활하는 모습이 재구와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큰 갭. 그 사이에서 힘들어 하는 모습.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슬프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영화 내용을 떠올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아니 더 나아가 현대인들도 재구와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현대인들도 재구와 같지 않을까.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 대부분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 과도한 확장해석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래저래 이상을 품어도 펼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좌절하고 힘들어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Pledging my Road이라는 제목처럼, 나의 길에 대한 기약(맹세인지, 서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건하게 자신이 품을 뜻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따뜻한 볕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니 기대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