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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 나의 아버지
백 승 권
프롤로그
간밤에 불현듯 어린 시절 고향 집이 보이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꿈속에서 그 옛날 고향 마을 오일장으로 유명한 경남 함안 군북장에 다녀오는 꿈을 꾸었다. 선잠이 깬 후 아버지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하도 또렷하게 그림처럼 떠올라 눈을 감고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세상살이 하루하루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일상에 지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내 그리운 고향과 34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가신 우리 아버지의 추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의 고향 오곡은 경남 함안군 군북 면 사무소 에서 남쪽 여항 산 기슭으로 낙 남 정맥의 중요 포인트인 오실 재 근처 하늘 아래 첫 동네 첩첩 두메산골인 오실 골이다.
당시 내가 국민학생 시절에는 단 하나 밖에 없는 교통수단이란 인근 도시 마산 에서 오는 오후 저녁 해질 무렵에 하루에 한번 들어와서 우리 마을 버스 종점에서 기사와 안내양이 숙박을 하고내일 아침 일찍이 나가는 것이 고작 이였다 그나마 버스가 오는 날보다 안 오는 날이 더 많았다.
제1부 전깃불과 TV
197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 들 불 처 럼 번져 갈 무렵에 우리 마을 에도 전깃불이 들어왔다. 항상 등잔불과 호롱불에 의지하여 책을 보고 어두운 밤을 밝힐 때와 비교하면 전깃불은 그야말로 최근 100년 역사에 가장 큰 대혁명 같은 사건이었고 농촌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변화 시킨 당시로선 엄청난 대혁명이었다.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 얼마나 신기하고 좋던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어둠이 슬슬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에 허리에 각종 전기 공구를 잔뜩 매단 한전 직원이 집 앞에 엊그제 세워 둔 전봇대에 올라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두꺼비 집까지 전기선을 연결시키고 온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원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안방 작은방 마루 부엌에 매달아 둔 100볼트짜리 전구에 환 한 불이 들어오는 순간 와아! 하는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나는 재빨리 스위치를 내려도 보고 올려도 보고 하니 마치 대낮같이 밝다는 느낌에 기쁜 나머지 얼른 교과서를 내어와서 펼쳐보았다 매일 호롱불 아래서 책을 보다가 어느 날 어머니가 사 온 촛불을 켜니 많이 밝았다고 생각했는데 전기의 효력은 촛불의 백배도 더 되는 듯 환했고 그날 밤 동생과 나는 자정이 넘게 전깃불 켜고 놀다가 아버지께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핀잔을 들은 후에야 전깃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전기가 들어오자 우리 시골 사람들도 TV 드라마를 알게 되고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고 리포트 하는 것을 보고 뉴스라는 것도 알았고 그동안 라디오로 음성만 듣던 김동완 통보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매우 궁금하던 차 내일 날씨를 예보하는 모습을 보며 음성과 TV 화면 속 인물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당시 제목은 잊었지만 KBS에 김정일나오는 반공 드라마와 "꽃피는 팔도강산"이 대유행이었는데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해 집에서 2km정도 떨어진 광산 마을까지 어둠이 내려앉은 들길을 따라 짚단에 불을 붙여 들고 TV 보려 다니던 기억이 있다.
TV 보러 가는 길은 험 했고 아주 높다란 나의 백모님 논두렁 길을 걸어서 가야 했는데 누렇게 익은 나락이 논둑으로 무거운 머리를 내미는 밤이면 잔뜩 이슬을 머금은 나락 때문에 우리들의 바지가랭이는 흠뻑 젖었고 무논에서는 큰 개구리 한 마리가 꾹꾹 거리며 노래를 시작하면 잔잔한 새끼 개구리들이 마치 합창이나 하듯이 온 논이 떠나가도록 알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간혹 물뱀이 나타나 스르르 지나가면 어린 마음에 겁이 낫지만, TV를 보는 쏠 쏠함에 그쯤은 큰 문제가 될 리 없었다.
전기가 들어오자 마을에서는 간간이 한 집 두 집 TV를 장만했고 우리 집도 1년 정도 후에야 외삼촌이 읍내에서 당시 금성전자대리점을 운영하시는 덕에 다른 집에 비해 TV를 빨리 장만 하여 KBS “전설의 고향”과 MBC TV의 김영란이 처녀 귀신으로 나오는 사극 “옥녀”를 보는데 어머니는 자신의 어린 시절 복장과 사극이 주는 분위기와 말투의 익숙함에 저녁상을 물리고 그 드라마를 즐겨 보곤 했다
제2부 아버지와 장날
국민학교와 중학 시절에 나의 아버지는 하얀 모시 저고리와 하얀 두루마기에 하얀 고무신을 신으시고 오일장 나들이를 하셨다. 닷새 만에 열리는 군북의 오일장은 우리 아버지의 5일 정기 행사였다. 농사일 절정인 타작이나 모심기 철을 빼면 하루도 쉬는 법이 없이 군북장에 출입하시는 게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셨다.
군북장은 4.9장으로 인근 "함안장" "의령장"과 더불어 근동에서 제일 큰 규모의 장으로 쳐주는 유명 장터였다. 경전선 철 뚝 길을 넘어서면 바로 좌회전하면 장터와 그 유명한 기차 불통에 물 먹이는 군북역으로 가는 길이 있고 곧바로 가면 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정류소를 지나 지서가 있고 지서 지나서 서쪽으로 쭉 가면 면사무소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위치하고 면사무소 옆 분지에 군북장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이른 쉰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시어 온 집안 식구들의 단잠을 깨우시며 온 집을 돌아다니시며 쇠죽도 끓이시고 온갖 집안 단도리를 하시는 통에 어머니도 하는 수 없이
덩달아 일어나서 서둘러 이른 아침상을 차리고 우리 형제들은 각자 소임을 하고 학교 갈 준비에 부산하였다.
제3부 우시장
우리 집에는 아주 영특한 소 한 마리가 있었는데 매년 년 송아지를 낳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는데 그때가 되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에게 소고삐를 잡혀 나를 앞세우고 같이 우시장에 소 팔러 가곤 했다. 소 전(우시장)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소 전 경매인에게 큰 소리로
"어이 김씨 이 사람아! 우리 송아 지 함 보게! 오늘은 값 제대로 안 쳐 주면 다음 함안 장에 갈 걸세!“
하며 기선 제압 겸 짐짓 위세를 부리신다.
당신이 원하시는 금액이 맞으시면 ”허! 이사람 고맙네! 소는 아깝지만 자네와 우리 사이를 생 해서 그냥 넘기네!"
하며 생색을 내시며 못 이기는 척하며 소 장수 김씨 아저씨가 내미는 노란 고무줄 에 묶은 백만원 짜리 다발을 건네받고 나를 교육시킬 심산으로 나보고 시퍼런 만원권 백만원 돈다발을 세어 보라신다. 열다섯 살 생전 처음으로 누런 고무줄로 묶은 일백 만원 짜리 돈다발을 아직 순진한 산골 소년은 잔뜩 긴장하여 돈을 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잊을 수 없는 돈다발 특유의 날카로운 냄새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다. 생전 처음 세어 보는 돈다발을 쥐고 어찌 세면 아흔아홉 장이고 다시 세면 백 장이고 이 크 난리 났다 이번에는 50장씩 나누어 세도 100장이 된다 이런 낭패가 있나?? 산골 소년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던 그날의 아련한 추억이 지금도 바로 엊그제만 같다.
계산이 끝나면 아버지는 돈다발을 두루마기 가슴 깊숙이 갈무리하시고 소전 앞에 크게 전을 벌려놓은 쇠고기 국밥 난전 천막 안의 나무 테이블에 턱 하니 앉으시고 위세 등등 하게 “보소! 아지매! 여기 탁주 한 주전자 하고 국밥 실하게 두어 그릇 말아 주소! 하신다. 어린 나는 그때 나는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먹었던 그 소고기 국밥 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기름이 동동 뜨는 한우 고깃덩어리에 생글생글 적당히 잘 익은 콩나물의 아삭함과 오늘 밭에서 갓 빼어와 넣은 생 무 의 그 싱싱한 맛의 조화와 인심 좋은 주인 아줌마의 넉살 좋은 인사가 차지다
”아이고 아들인교? 어쩌면 이리 잘 생겼을 꼬 ?” “낭중에 큰 사람 되겠다!”
하며 잽싼 몸놀림으로
“아가! 마이 묵 거래이”
하시며 마침 거의 바닥이 보이는 내 국밥 사발을 냉큼 잡아채어 또 한 그릇 퍼부어준다.
“아지매 고맙습니다”
내가 예의 바른 모습으로 깍듯이 인사를 하면 경상도 말로 억수로 업(UP) 되신 나의 아버지는
“어허 고마 막걸리나 한 주전자 더 주소!”
그러시고는
“야야! 너도 한 사발 마셔봐라!
하얀색 고운 막걸리 한 잔을 나에게 내미신다.
나도 생전 처음 세어 보는 돈다발과 씨름한 탓에 목이 마르던 참에 막걸리 한잔을 얼른 게 눈 감추듯이 마시던 그날의 아버지와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그날 당신께서 주신 그 막걸리가 얼마나 달던지 짜릿하게 뱃속을 전해오는 알싸한 막걸리의 그향과 소전 앞 난장 천막에서 먹던 그 고소한 쇠고기 국밥의 추억은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추억거리가 됐다.
탁주 두 주전자를 나눠 마시고 기분 좋아지신 아버지는 소 팔러 나온 지나가는 안면 있는 사람 다 불러
“이 사람아 여기 와서 막걸리 한 사발 하고 가게!”
하며 오늘의 소 금(소의 매매 시세)과 그리고 먼저 미전(쌀 전)에 다녀온 사람들한테 오늘의 쌀 한 되 값이 얼마인지 보리 쌀은 한 되 얼마인지? 콩은 한 되 얼마인지 미리 사전 정보를 수집하고는 본격적인 장터 투어에 나선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다른 장을 보고 계시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하는 수 없이 군북 장터를 구석 구석 돌아다니다 어머니를 만나고는 돈을 적게 주신다는 어머니와 한판 언쟁을 하신 후에야 소 판 돈 몇 만원을 건네며
“무슨 돈을 그리 많이 써 노?”
하며 애문 어머니를 타박하시며 자랑스럽게 소 판 돈을 어머니께 건넨다.
그리고는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 함을 뿌듯하게 여기며 앞장서서 당신이 좋아하는 어물전이며 미전에 들러 오늘의 쌀 시세를 확인하는 것은 장에 온 목적이며 소임이다.
왜냐하면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반드시 “오늘 쌀값이 얼마나 합디꺼? 물어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제4부 미전
그리고 벼 가을걷이가 끝난 후에는 일부는 매상을 하고 '아끼 바리 고급 상품(쌀)은 방앗간에 가서 도정하여 경운기로 군북 장에 가서 팔아서 온 갖 생필품으로 바꿔 오곤 하셨다. 미전에는 쌀을 계량해 주는 '되쟁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쌀을 되어주고 그 수고비 조로 남는 자투리 쌀을 가져가는 일종의 중매 상인이다. 이 사람의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쌀을 사는 사람이 포대를 벌리고 있고 되 쟁이 가 쌀을 됫박에 처음엔 한 되 고봉으로 담았다가 둥근 막대기로 살짝 깍 아 내리면 9부나 8부로 슬쩍 줄어든다.
이것이 기술이다. 이걸 잘못하면 나중에 자기 몫이 없어지고 이걸 섣불리 눈에 티 나게 하면 옥신각신 실갱이가 벌어지곤 하였다. 항상 미전에서는 옥신각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방앗간 홍씨는 말 됫박으로 쌀을 가마니에 담아서 경운기로 각 동리의 미전에다 내려놓으면
되쟁이 변 씨가 됫박으로 한되요 두 대요 하며 화려한 기술로 구매자의 눈을 슬쩍 보며 쌀 한 말을 계량하여 포대기에 놓으면
“어허 이 사람 됫박이 너무 짜네”
하며 쌀을 구입한 사람은 두 손으로 쌀을 한 줌 더 퍼서 재빨리 포대에 넣어버린다. 이때 쌀이 좀 남아 있으면 맘씨 좋은 되 쟁이 변 씨는
“어허~ 나는 뭐 먹으라고!”
하며 나머지 자신의 몫인 쌀을 신속하고 화려한 솜씨로 자신의 포대기에 싹 쓸어 담아 버리고
다음 가마니를 부어서 쌀을 사려는 도매상과 흥정을 한다. 수요와 공급이 상충하는 미전에는 그날의 시세는 순진한 농민들과 눈치가 백 단인 중개 상인들의 치열한 수 싸움이다.
쌀이 적게 출하된 날이면 그럭저럭 농민들이 원하는 시세에 매매가 되지만 자녀들의 학자금이며 명절 전 생필품을 바꾸기 위해 농민들이 일시에 쌀을 내는 날이면 눈치로 세상 사는 중개인들은
"오늘의 쌀이 너무 비싸네!"
하며 슬쩍 꽁무니를 빼며 쌀을 사지 않으려는 시늉을 하며 딴 전으로 발길을 돌리는 척한다.
아마도 딴전을 핀다! 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해는 지고 파장이 다가올수록 농민과 되쟁이 의 마음은 바빠진다. 팔고 다른 장을 봐야 하는 농민과 어쨌든 거래를 성사시켜 구전을 뜯어야 하는 되 쟁이는
"어이 김사장 왜 그러나? 오늘 쌀이 윤이 자르르 흐르는구만, 한 되 이 값이면 싼 게 아닌가? "
하며 얼래보고 달래어 본다 그러나 언제나 승자는 중개상인이다.
“오늘은 돈이 없어 못 사겠네!”
하며 손사래를 치면 마음 급한 농민은 이미 팽팽한 삿-바 싸움에서 팔 할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럼 얼마면 사려는 가?”
이를 놓칠 리 만무한 중개인은 못 이기는 척“ 000원 이면 사 볼 수도 있으련만,,” ᆢ
시세보다 한 참 낮아진 가격이다. 눈치 빠른 되쟁이
“아제! 오늘은 시세가 요거 밖에 안됩니다! 그냥 넘깁시다!”
“허 참 ,,,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러 세!”
미전은 매번 바람 잘 날이 없다. 되 쟁이 가 마술을 부려도 언제나 9홉 되 반 만 나 올라 치면 방앗간 홍씨는 되쟁이 변씨에게 된통 당해야 한다.
“이 사람아 말질을 어떻게 했길래 매번 쌀이 모자라나?"
방앗간 홍씨도 지지 않는다
“무슨 소린 교? 내가 정확하게 되 넣었구만! 아제가 기술이 모자라서 그렇지요.”
심한 날은 다시 쌀 포대를 부어서 다시 한 되 한 되 재 계량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쌀이 너무 많이 나와서 팔리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하다. 장터 어딘가 창고를 구해서 다음 장날까지 보관을 하든가 아니면 다시 20리 길을 싣고 다시 집으로 되가져 가야한다.
대부분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낮은 가격에 울며 겨자 먹기로 떨이를 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다가 내가 고향을 떠난 후 농민들의 애환이 서린 미전이 없어졌는데 미전이 없어진 지는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지만 농협의 쌀 수매가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안정화된 것일 게다.
제5부 어물전
미전에서 쌀을 처리하신 아버지는 부리나케 장터 한복판에 들어서신다. 장날이면 팔도에서 모여든 장꾼들이 천막이란 천막은 다 쳐놓고 그야말로 없는 거 빼고는 다 있다. 화개장터 못지 않은 큰 장이 군북장이다
그중에서 가장 우리 아버지가 먼저 가시던 곳이 어물전이다. 당신께서는 유독 생선을 좋아하셨다. 냉장 냉동차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 리 만무한 그 시절 심지어 우리 부친은 소금으로 버무린 염장 멸치 한 마리 채로 쓱 문질러 드시곤 막걸리 한 사발을 쭈욱 들이키시곤 하셨다. 그래서 어물전은 필수 코스다 장에 가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갈치는 필히 사 오셨고 갈치가 안나는 시기에는 명태 오징어 고등어 등속을 사 오셨다. 당시는 냉장시설이 없으니 안 봐도 비디오다
소금으로 범벅이 된 생선을 의령장에서 팔고 남으면 또 함안 장으로 다시 군북 장마당에 전을 펼쳤을 것이다. 그런 것을 먹고도 배탈이 안 난 것만 해도 다행이고 우리 아버지의 위장은 천하무적이다. 아버지는 생선 광이셨다. 여름철이면 낮에 논에서 일하시다가 개천에서 손으로 참 피리를 낚아채시고는 배를 뚝 따서 내장은 버리고 피범벅인 참 피리를 개천물에 슬쩍 씻어 고소하시다며 생채로 씹어 드시던 분이시다. 비닐 팩이 없던 시절이라 어물전에서 필히 생선을 구입하여 새끼줄로 묶어 들고 막걸리 한잔 힘을 빌려 즐거운 마음으로 이십 리 길을 걸어 오시곤 하셨다. 그 그림이 그려지나요?
지금의 나 같으면 "가오" 가 안 잡혀 도저히 엄두가 안 날 일이지만 하얀 두루마기 입으시고 결코 가볍지 않은 갈치 다섯 마리 고등어 다섯 마리 새끼줄로 묶어 들고 걸어오시는 시골 촌티 나는 영상을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가족 사랑 방법이셨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것이 가족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걸 알기에 당신께서는 조금도 스스럼이 없었던 부친이셨다.
그 후 다행히 생선을 다라이(함지)를 머리에 이고 생선 팔려 다니는 신창 아줌마가 있었다.
그녀의 삶의 현주소를 말해주듯 얼굴이 쌔까만 아줌마였는데 얼마나 부지런하던지 매일 매 일 군북에서 출발하여 오곡까지 무려 직선거리로 10km 이니 생각해보면 무려 왕복 25 km이상을 머리에 생선 함지를 이고 신창 동촌 서촌 사촌 신촌 오곡 마을 만 해도 다섯 골짝 300 여 호를 돌며 갈치를 파는 철의 여인이었다.
“갈치 사이소! 까 알~치! ”하며 외치는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이 아주머니가 생긴 후로는 우리 집도 이 아주머니한테 쌀이나 보리쌀 등을 주고 생선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제 6부 나의 큰 누이
이 아주머니를 생각하니 우리 아버지가 큰누나를 함안 조씨 양반 집안이라고 따져 보지도 않고 시집 보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그 무렵에는 거의가 그랬지만 유별나게 가난한 집안인지라 땟-꺼리(식량)가 없어 먹을 것이라고는 고구마 밖에 없어 하는 수 없이 당시에는 여자 탤런트 들의 로망이고 나름 유명 브랜드인 아모레 화장품 장사를 해야만 했던 우리 큰누나 생각이 난다.
나의 큰 누이 역시 이 갈치 아줌마와 같이 화장품을 머리에 이고 지금의 “여 항 산” 기슭 편도 2km 거리를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여 여섯 식구의 생계를 이어 가야했다. 당시의 화장품 외판원은 그나마 경쟁이 치열하여 구역 개념이 명확했던 것 같다. 도시의 좋은 구역은 선점한 외판사원들의 구역이고 후발 주자였던 나의 누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외지고 도로마저 포장이 안 된 아무도 지원하지 않고 거들떠 보지도 않는 지금은 창원시로 편입된 진전 면에서 옥방 비실 등 여항산 기슭 산골짝 험지를 구역으로 맡아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였었다.
산골짝에는 화장품 수요가 매우 제한적이었고 당시로선 시골 아낙네가 얼굴에 화장을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소비자가 한 골짝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여자 고객을 찾아서 어찌하여 화장품 몇 병 팔고 나면 나중에 추수하면 보리나 쌀로 화장품 값을 받는 데 갈치 한 마리 팔고 겉보리나 쌀 한 되와 바꾸고 나면 갈치보다 더 무거워졌을 그녀나 나의 누이는 한 치도 다름없는 운명이었다.
화장품 한 병보다 훨씬 무거운 쌀이나 보리쌀을 포대를 머리에 이고 5km 정도 가서 내려놓고 다시 되돌아가 다음 보퉁이를 이고 갖다 놓고 또 가며 밤새도록 그 보퉁이와 씨름했던 불쌍한 우리 누나,, 그렇게 고된 여정과 피눈물 같은 세월을 고생하더니 육십도 안돼 세상뜬지 어언 20년이 되어간다.
“갈치 사 이소~”
걸쭉한 목소리로 마을의 정적을 울리며 자신 왔음을 알렸던 이 아주머니가 갈치 몇 마리를 주고 무거운 쌀을 받아 갈 때 마다 누나 생각에 내 마음도 저렸다. 얼마나 무거웠을까? 화장품 한 병과 겉보리 한말을 바꾸어 화장품보다 100배 무거운 짐을 순전히 머리로 이고 날랐을 큰 누나의 그 긴 하루는 얼마나 고달 팠을까? 발은 부러 터고 목은 마르고 지치고 힘든 삶의 고달픔으로 하루 하루는 얼마나 길고 힘들었을까? 그렇게 고생하여 모은 돈으로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날 학교 앞 K 모직 양복점에 가서 당시로는 너무나 큰돈인 20만원을 들여 내 동생이 커서 대학에 간다고 좋아하시며 양복을 맞추어 준 날 나도 울고 누나도 울었다 한 달을 팔아도 20만원이 안 남았을 것인데,,,
저 가난도 미움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나마 더이상 무거운 짐일랑 머리에 이는 일 없는 세상에서 힘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7부 에필로그
군북 오일장은 나의 아버지 삶이요, 인생 그 자체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5일 마다 장에 가시면 의당 장터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 자시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갈치 댓 마리 새끼에 묶어 쥐고 이 십리 오실 골 집으로 걸어 가실 제 아지랑이는 그렇게 피어올랐고 길가의 봄에는 장다리는 노랗게 피어 늦은 봄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 했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양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 하늘하늘 손을 흔들고 잠자리는 왜 그리도 많이 날던지,,,
아버지의 출타에는 반드시 양반가의 도리인 의관 정제는 필수였고 어머니와 누나가 풀 먹인 하얀 모시 적삼 두루마기를 고집하시던 당신, 막걸리 한 잔의 힘을 빌려 무거운 갈치 들고 집으러 가는 20리 자갈길은 하염없이 멀었고 당신의 어깨엔 인생이란 삶이 말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신창 지나서 새 동네 그리고 동 촌지나 서촌 숲에 들러 시원한 그늘에 한 다리 쉬고 사촌 봉제 점방에 들러 막걸리 한잔 더 드시고 국민학교를 지나 신촌 마을 앞을 여유 있게 지나면 통시 각시 귀신 집 있는 나래이 모퉁이를 돌아서서 광산 마을 지나 집으로 가시던 시오리 솔밭 길은 아스팔트 로 포장되어 변해 버린지 오래다.
그 후 아버지도 저세상으로 가시고 그리운 고향 집은 황성옛터 폐허로 변한 채 얼마를 임자 없는 자리만 지키고 있더니 지금은 어느 외지인이 현대식으로 리모델링 하여 살고 있고 그 옛날 분산하게 씨 끌 벅 적 하던 식구들과 그 집을 빙 둘러싸고 있던 그 대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저녁밥을 짓던 어머니와 누나의 모습도 간데 없고 가마솥에 장작 불 속에 묻어두고 먹던 고구마도 감자도 없어졌구나!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 이런가 하노라!”라고 노래했던 옛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온지 어언 30 여 년을 훌쩍 넘었고 당신께서 저세상으로 가신지 올해로 강산이 무려 3번이나 바뀌었고 당신 가시고 홀로 31년을 버티시던 우리 어머니도 96세를 일기로 백수를 눈앞에 두고 가신지 벌써 4년이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고향 마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구초심이라 했던가? 한낱 미물인 짐승도 죽으면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하는데 하물며 생각을 하는 인간 일진데 오죽하랴?
진해에서는 벚꽃이 만개하고 군항 제로 상춘객들은 봄 꽃 구경하려 산으로 들로 나서는 아름다운 봄날 밤인데 초로의 중 늙은이는 잠이 없다. 도시의 하늘은 회색이고 간혹 희미한 별 하나 나를 내려다본다.
오늘은 어린 시절 죽마고우가 고히 키운 딸을 시집보낸 날이다. 사위 한번 딸 한번 안아주며 돌아서서 깊숙이 절하던 친구의 모습이 왠지 가슴이 짠한 것은 왜일까?
축하객으로 같이 갔던 고향 소꿉친구들과 헤어짐이 아쉬워 벛 꽃이 터널처럼 피어 인파로 북적이는 창원 충혼탑 거리를 둘러보고 그래도 허전하여 어시장에 들러 소주 한 잔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집으로 왔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중이다. 상념의 시간은 길고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어릴 적 같이 뛰놀던 친구와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오는 벚꽃이 만발한 봄밤이다,
* 영축문학 수필 공모전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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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인가~
꿈이지요. 한바탕 긴 꿈.
꿈인줄 알고살면 무거운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고요.
고맙습니다. ()()()
"수필 좋은글
감사합니다 _()()()_
과거 의 내자신을 찿아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해주는 글입니다ㆍ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바로 그리움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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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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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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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