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 2]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안식일에'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두번째 첫 안식일에'라고 되어 있다. '두번째 첫'이라는 말(듀테로프로토스)의 뜻은 불분명하다. 옛 영어성경(KJV)은 '첫번째 후 두번째 안식일에'라고 번역했다. 본서를 쓴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하였다(눅 4:16, 31). '두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혹시 그것들 중 두번째 안식일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구약의 안식일은 십계명에 규정된 대로 거룩하게 지켜야 할 날이었다. 그 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적, 육신적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했고(출 20:8-10) 거룩한 집회(성회)로 모여야 했다(레 23:3). 그들은 심지어 밭을 가는 시기나 거두는 시기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했다(출 34:21). 그 날에는 물건을 팔거나 사지 말아야 했고(느 13:15-22), 또 자신을 즐겁게 하는 오락을 행치 말아야 했다(사 58: 13, 14).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로 간주되었다(출 31:14, 15).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첫째로 인생의 수고로운 삶에 정신적, 육신적 휴식을 주신 것이며(출 23:12), 둘째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예배하게 하심이며, 셋째로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참된 안식의 때를 바라보게 하심이었다(히 4:3, 9-11). 그것들은 다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여 안식일 없이 살거나 안식일을 범하지만, 인간은 안식일 없는 삶에서 결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과 안식으로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의 행위는 일반적 상황에서가 아니고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특별한 상황에서의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즉 '안식일에 하기에 합당치 못한 일'로 규정하였다.
[3-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에 경건한 다윗이 특별한 상황에서 했던 한 일을 언급하셨다. 그것은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되어진 일이었다. 다윗은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진설하였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매우 시장했을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은 것을 예외적으로 용납하셨다. 그렇다면 너희도 제자들의 상황을 이해하려 해야 하지 않을까? 제자들이 얼마나 시장했으면 이삭을 잘라 비비어 먹었을까 하고 너그러이 생각하지 못하고 정죄만 하려는 너희의 태도가 과연 옳은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17세기 초 개혁교회의 도르트 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명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히 성별되어야 한다. 그 날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 초기의 카톨릭교회에 의해 이미 지켜져 왔다."
도르트 신경의 진술과 같이,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폐지되었다(골 2:16, 17).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안식을 예표하였다. 그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충만히 이루어질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부터 제자들은 주께서 부활하신 그 날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제7일 토요일로부터 주간의 첫째날 곧 일요일로 변경되었고 그 날은 '주님의 날' 혹은 '주일'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일요일 곧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이 되었고,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의 공적 예배일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사도시대부터 나타났다. 사도행전 20:7, "안식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들의 제자들인 소위 속사도들은 주일 집회에 대해 보다 밝히 증거하였다. 주후 100년경의 바나바 서신에는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지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후 107년경의 익나시우스 서신에는 "이상한 교훈에 속지 말라. 새 소망에 이른 자는 [토요] 안식일을 더 이상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후 150년경의 저스틴 마터의 글에는 "일요일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사도들의 글을 읽으라.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주 안에서 성취되고 폐지되었을지라도,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히 10:25).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이제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 우리의 모든 시간과 물질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또 이 날 곧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만일 내가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나머지 6일도 주께서 거두어 가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날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그에게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저는 저의 믿는 친척 가운데 주일을 범하고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다 날려 보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신약의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보다 덜 엄격한 점이 있다. 우리는 예배당에 오기 위해 부득이 버스나 전철을 이용한다. 우리는 주일예배와 집회를 위해 전기나 수도 등을 사용한다. 또 교회 식당은 점심식사를 위해 주일에도 음식을 만들고 제공한다. 또 주일에 불가피한 직장 근무도 있다. 의사나 경찰이나 군인은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또 성도들이 주일에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들은 다 부득이한 경우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약의 성도들도 할 수 있는 대로 주일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는 주일에 공적 예배를 위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 날에 시장을 보거나 너무 많이 빨래를 하거나 음식을 사먹거나 자동차 주유를 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토요일에 할 수 있는 일을 주일에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성도는 주일에 과도한 운동이나 텔레비젼 시청이나 오락 등을 삼갈 것이다.
구약성경 이사야 58:13, 14은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복이 될 지를 잘 증거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이 두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일과 대조하여,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깨달아야 하겠다. 이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또한, 구약의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변경되었다. 우리는 이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힘써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 날에는 물건을 사고 팔거나 세상적 오락을 즐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도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