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가 연 바로크 시대 ◇ 이탈리아인과 오페라 성악의 나라 이탈리아라는 이미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신화화되고 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곤돌라 수부가 저리 가라는 정도의 미성을 들려준다거나 나폴리의 좁은 골목을 흘러 넘치는 물건 파는 소리가 우리 나라의 웬만한 테너 가수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거나, 산 레모의 깐초네 축제에 모여드는 청중은 우리 나라의 대중가수는 발 밑에도 못따라갈 아마추어 음악가라고도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에 가보면 그 정도로 뛰어났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아무튼 개방적인 남국의 사람들이다. 이탈리아인들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일상생활, 작업장에서는 그들은 스스럼 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오페라좌에라도 가 보면 손목 같은 곳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아리아가 끝날 때마다 "어때? 이번 노래 들었지? 정말 죽여주는 군". "뭐 저게 노래냐, 정말 시시하다..."는 식으로 각자 자기가 느낀 대로 떠들어 댄다. 국제적으로 오페라가 부진하다는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에서는 서민들의 마음 속에 오페라는 계속 살아 있는 것 같다. 바로크 음악에서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가진 오페라라는 곡종이 탄생한 것은 바로크 음악이 막 시작하려 하던 시대의 이탈리아에서였다. 그 후 오페라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의 비옥한 땅에서 성장하였으며 이탈리아 출신의 오페라 가수, 오페라 작곡가들은 전 유럽을 이탈리아어 가사의 노래로서 문자 그대로 지배하여 버렸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국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음악용어가 알레그로라든가 크레센도와 같이 거의 이탈리아어에 의하고 있는 것도 실로 이 시대의 이탈리아 음악의 국제적 보급의 정황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 바로크의 여명 16세기 중엽, 그 때까지 전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폴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 음악이 쇠미해짐에 따라서 그 대신 이탈리아의 음악적 실력이 높아졌다. 16세기 말 경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팔레스트리나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년 경-1594)가 맑고 깨끗한 스타일에 의한 미사나 모테투스 등의 가톨릭 교회를 위한 전례음악을 작곡하고 있었다. 한편 베네치아에서는 지오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7년-1612년 경)등이 축전적인 성격을 가진 기악 합주곡이나 교회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나는 로마 가톨릭 대본산 문전의 도시로서의 보수적인 종교도시, 또 하나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상업 도시, 이 두 도시의 상위가 자연히 음악의 상위에도 이어지게 된다. 로마의 교회음악 작품은 가령 팔레스트리나의 [성모승천미사](Missa "Assumpt est Maria")처럼 화려한 목소리의 다채로운 비단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 근저에는 폴랑드르 악파 전래의 르네상스 폴리포니 서법이 있으며 더욱이 그것을 트렌트 공회의의 반 종교개혁의 정신에 입각하여 인위적으로 깨끗하고 투명한 양식으로 결정케 하고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 음악의 정점, 또는 완성이라 볼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바코크 음악의 전신도 아니고 오히려 마니에리즘으로서 파악되어야 할 일종의 절충적인 예술이었다. 한편 베네치아의 가브리엘리의 음악은 분명히 바로크의 방향을 예고하는 것이다. 아니 바로크 음악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오르간 주자로서 활약했던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은 비잔틴 양식에 의한 그리스 십자가형의 플랜을 특징으로 하며 제단의 양쪽 갤러리에 각각 하나씩 오르간을 마주 놓고 있었다. 이 두 개의 오르간과 그리고 양편으로 나뉘어진 합창단에 의해서 베네치아의 음악가들-베네치아 악파의 기초를 이룩한 플랑드르 사람인 아드리안 빌라르트(1480-1562), 그리고 지오반니의 백부이며 스승이기도 했던 안드레아 가브리엘리(1510-1586)들은 '다합창'(cori spezzati)의 서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지오반니의 축전 모테투스 [사람들이 모여서(In ecclesis) 1615년 출판]는 독창자들과 합창, 오르간, 기악합주를 동원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다이나믹한 움직임을 수반하여 하느님에게 드리는 찬가를 소리 높게 전개해 간다. 이와 같은 기악과 성악의 음색의 대비에 의해서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서법을 콘체르탄테 양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바로크 양식의 하나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8성부의 기악합주를 위한 [sonata piano e forte 1597년 출판]는 이름 그대로 강주(포르테)와 약주(피아노)가 악보상에 명기되어 두 개의 두드러진 음량의 대비라고 하는 바로크 음악의 표현법을 구현한 가장 오래된 작품의 하나이다. ◇ 오페라의 출현 이와 같은 로마와 베네치아의 대비적인 음악 활동에 호응하면서 16세기 말의 피렌체에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은 카메라타 사람들에 의한 오페라 운동이다. 극(劇)을 음악으로 전개시켜 간다는 시도는 이제까지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령 중세 시대에는 성서의 이야기를 노래하면서 했던 전례극이라는 것이 행해졌으며, 16세기에 유행했던 인테르메디오 또는 인테르베쪼라는 예능은 통상의 극 속에 독창이나 합창, 기악합주 등을 삽입하여 가는 것이었다. 또한 이야기를 마드리갈(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서 번창했던 폴리포니 세속합창곡) 스타일에 의한 합창으로 진행시켜 가는 마드리갈 희극과 같은 것도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마드리갈 희극은 극으로 상연된 것이 아니라 음악만의 연주회 형식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예능을 동화해 가면서 오늘날의 오페라에 가까운 형태를 시도한 것이 피렌체의 카메라타들이다. 그들은 인문주의의 교양을 몸에 익힌 시인이나 음악가들이며 '동료들(camerata)' 이라고 불리는 신생의 의기가 넘치는 그룹을 조직하여 고대 그리스의 음악극의 재현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저 천문학자 갈릴레오의 아버지가 되는 빈첸쪼 갈릴레이(1520년 경-1591)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아들의 과학상의 신발명과 대조되어 흥미있다. 아버지의 작품은 2권의 류트곡 등 보통 수준을 넘는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카메라타의 대변인으로서 [고대 및 현대에 대한 대화 1581년 출판]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고대 그리스 음악극의 재현- 매력 있는 시도를 구체화시키는 데 있어서 그들이 목적으로 한 것은 언어와 음악의 완전한 일치였다. '노래하면서도, 마치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유형의 음악'이 이상이며 이를 위해서는 가급적 단순한 반주에 의한 독창 형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잡한 성부의 겹침에 의한 대위법적 서법은 여기서 일체 거부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제에 따라서 1598년에 야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가 작곡한 [다프네]가 상영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악보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 작품은 1600년,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마리데 메티치와의 결혼을 축하하며 상연된 리눗치니의 대본, 그리고 야코포 페리의 음악에 의한 [에우리디체]이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서 음부로 내려가 그녀를 데려온다는 오르페오의 전설에 의한 이야기 자체가 고대 그리스극의 재생에 걸맞는 테마이다. 이 동일 대본에 의한 줄리오 캇치니(Giulio Caccini 1540년 경-1618년)의 음악도 있으나 이것은 1602년까지는 완전한 형태로 상연되지는 않았다. 어느 작곡이나 낭창적인 스타일에 의한 독창을 중심으로 합창이나 기악 간주를 섞어 가면서 극을 전개시켜 가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독창의 선율과 그것을 반주하는 기악부의 움직임이다. '언어와 음악의 일치'라는 그들의 슬로건에 알맞고, 독창부는 '노래한다'기 보다는 '이야기하는'조로 흘러간다. 한편, 기악 반주부는 저음부로만 기보되고, 거기에 숫자를 붙여서 통주저음(Basso continuo)형식으로 작곡되고 있다. 즉 이러한 작품은 통주저음 서법에 의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고, 그러한 점에서도 '통주저음의 시대'라고도 불리우는 바로크 음악의 시작으로 보기에 알맞은 작품이다. 이와 같은 낭창적 독창과 그것을 받쳐주는 통주저음의 반주부에 의한 서법은 보통 모노디(monody) 양식이라 불려지는데, 카메라타의 오페라는 이 스타일에 일관하여 작곡된 음악이었다. 그것은 오페라에 한하지 않고 독창용 가곡에도 보인다. 캇치니는 1601년에 [신(新)음악(Nuove Musiche)]라는 이름의 독창 가곡집을 발행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유명한[아름다운 아마릴리],[아마릴리 미아 벨라]를 비롯하여 전부가 모노디 양식에 의하여 작곡되어 있는 것이다. ◇ 몬테베르디(Nonteverdi)의 오페라 그러나 전반적으로 말해서 캇치니나 페리등의 작품은 가사의 요소를 강조하는 나머지, 음악적 밀도가 결여되는 경향이 있으며 오페라 전체가 동공이곡의 연속이어서 긴 음악적 지속에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시도하는 아이디어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적지 않으며 그 후의 바로크 극음악 발전에 기중한 기초가 된 것도 확실하지만 역시 아마추어 내지 딜레탕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전대의 폴리포니의 무거운 짐을 너무나도 지나치게 의식하여 모든 것을 부정한 경향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술의 발자취는 과거 유산의 정당한 계승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카메라타의 노력에는 부정의 논리가 너무 앞서서 걸음걸이가 허공에 뜬 듯한 기미가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만약 몬테베르디가 그들에 의해서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시도는 결국은 불모의 상태로 끝나 버렸을 것이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는 16세기 중엽에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이 고장 대성당의 악장 마르코 안토니오 인젤리에리(1545년경-1592년)에게 사사하여 르네상스 폴리포니 서법을 몸에 익혔으며, 이미 1584년, 17세 때 3성의 [칸초넷타곡집]을 출판하였으며, 이어서 1586년에는 5성의 [마드리갈곡집]제 1권을 간행하고 있다. 그 무렵 만토바 궁정의 음악가가 되었으며 다시 1600년 경에는 악장직에 취임하였는데 그 사이에 [마드리갈곡집] 제 2 권(1590년 출판), 제 3 권(1592), 제 4 권(1603년)을 발표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곡집 중 몬테베르디가 서서히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의 이행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 5 권(1605년)에 이르면 그 걸음걸이는 결정적이 된다. 이 제 5 권의 서문에서 보수파의 이론가 지오반니 마리아 아르투지(1540년경-1613년)의 비난에 대항해서 기사의 내용을 표출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음악 작법과는 다른 '제 2의 작법(세콘타 브랏티카)'에 의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거기에 수록된 [잔인한 아마릴리 (Cruda Amarilli)]와 같은 작품네는 그가 선언하는 바와 같이 종래에 볼 수 없던 대담하고 효과적인 불협화의 용법이 특징으로 되어있다. 1607년에 이르면 몬테베르디 최초의 오페라 [오르페오], 이어서 다음 해에는 오페라 [아리안나]가 상연된다. 여기에 이르러 오페라는 카메라타들의 딜레탕트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음악적으로 충실하게 되었으며 장래의 발전이 약속되게 되었다. 스트릿지오의 대본에 의한 [오르페오]는 한편으로는 카메라타들의 모노디 양식을 승화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의 폴리포니 서법도 동화하고, 또 각 악기의 사용법을 악보상에 명시하여 그 장면에 어울리는 효과를 내도록 하여 극과 음악을 완전히 일치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지금도 종종 상연되고 있는데, 그 이상한 박력으로 인해 20세기의 청중을 매료시키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 드라마의 음악 나 자신도 이 오페라를 몇차례 보았는데 , 그 궁정 오페라풍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몬테베르디 음악의 강한 설득력에는 오직 경탄할 뿐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극음악으로서 필요한 수법은 모두 여기에 구비되어 있다고 평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오페라는 눈으로 보아서도 재미있지만 레코드 또는 악보로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더듬어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음악이 극의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으므로 가시적인 것이 추가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는 그의 아류인 베네치아 악파의 오페라 작곡가와는 대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몬테베르디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드라마의 작곡가였다.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 이야기에 의한 제 2의 오페라 [아리안나]는 오늘날 악보가 소실되어 [탄식의 노래]를 남길 뿐이다. 당시 널리 애호되어, 몬테베르디 자신이 5성의 마드리갈로 편곡하여, 그 제 6권(1614년)에 수록하였고 또 종교적인 가사를 붙여서 성모 찬가로도 하고 있다. 1624년에 초연된 [탕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은 오페라라기 보다는 칸타타로 보아야 할 작품이다. 탓소의 [해방된 예루살렘]에 의해서 십자군을 거느린 무장과 이교도의 딸과의 비련을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의 절박한 결투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바이올린의 핏지카토(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주법)나 트레몰로(같은 음을 급속하게 반복하는 주법)를 사용한 최초의 작품의 하나로서도 중요하다. 이 시기에는 몬테베르디의 작품 외에도, 가령 마르코다 갈리아노(1575년 경-1642년)의 [다프네 1608년]와 같은 작품이 상연되어 오페라의 형태가 시행착오의 형으로 추구되고 있다. 이 작품의 서문에 여러 가지 예술의 종합으로서의 오페라의 이념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19세기의 바그너의 종합예술론을 상기시키게 하여 흥미 깊다. ◇ 새로운 기법의 개척 이와 같은 걸음걸이를 거친 끝에 이윽고 오페라는 넓은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되어 1637년에는 최초의 공개 오페라 극장이 베네치아에 개관되었다. 종래의 왕공의 비호에서 벗어나서 신분의 구분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오페라가 친숙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베네치아에서는 17개의 오페라 극장에서 388편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오페라의 중심지도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졌으며, 1613년 이래로 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으로 이 고장에 부임한 몬테베르디도 극장을 위하여 많은 오페라 작품을 제공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악보들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으며 고작 만년의 [유리시즈의 귀환 1641년 초연]과 [폽페아의 대관 1642년]을 남겼을 뿐이다. 후자는 네로와 폽페아의 사련을 취급하여 각 인물의 성격을 유감없이 음악적으로 잘 표현하여 75세의 노인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관능적이며 열정을 담고 있다. 내가 최초로 [폽페아의 대관]의 상연을 접한 것은 뮌헨의 레지덴츠 극장에서였다. 였 궁전의 한 귀퉁이에 세워진 궁정극장으로, 천장에는 바로크적 장식을 하여 더욱 분위기를 돋구어 주었다. 고악기를 사용한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연주한 것은 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게 하였다. 지금까지 들어오던 베르디나 바그너의 오페라와는 다른, 바로크 오페라의 본질은 이 때 나에게는 처음으로 체험한 것으로 생각된다. 1587년에 출판된 마드리갈곡집 제 1권부터 1642년의 [폽페아의 대관]까지 몬테베르디의 음악 작품을 연대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르네상스 음악에서 바로크 음악에 걸친 음악의 큰 변화가 몬테베르디의 작품의 변천 속에 마치 축도처럼, 그리고 가장 충실한 형태로 부조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몬테베르디 자신의 작품을 개척한 발자취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음악사가 옮겨가는 것을 주도했던 것이다. 음악사의 변동기에 있던 작곡가, 가령 바하라든가 바그너,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와 같은 사람에게도 그러한 경향을 지적하는 것은 곤란하기는 하지만 몬테베르디와 같이 전혀 대비적인 작법을 여러 차례나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하여 하나하나의 작품 속에 멋지게 결정시켜 가는 예는 그밖에 별로 볼 수 없다. 몬테베르디는 유럽 음악의 역사 중에서도 특히 걸출한 대장부였다. ◇ 스펙터클한 대중 오락 몬테베르디는 164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무렵-중기 바로크 시대로 접어든 무렵부터 오페라의 선율은 매우 유려하며, 듣기도 좋아졌으며 이른바 벨칸토 양식(아름다운 노래라는 뜻,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율미를 강조하는 서법 및 창법)을 확립해 간다. 서정적인 선율미가 강조되는 반면, 서정적인 낭창에 의해서 극의 진행을 명확하게 해갈 필요가 생겨 여기에 선율미를 강조한 아리아(영창)와 말을 중심으로 하는 낭창적인 레치타티보(서창)가 확실하게 분리하는 경향을 낳았다. 또한 오페라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된 결과, 입장료의 수입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어 무대에서의 최대의 효과가 중시되게 되었다. 갖가지 기계장치를 동원하여 폭풍우의 장면, 전쟁의 장면, 신들의 출현 같은 의표를 지르는 연출이 환영을 받아서, 호화로운 무대장치, 의상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수의 특정 스타 가수가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반면 코러스는 점차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어 갔다. 17세기 중엽, 베네치아를 방문한 한 영국인은 그 일기에 베네치아 오페라를 보고 난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성악.기악이 모두 뛰어났으며, 무대는 변화에 찼었다. 하늘을 나는 기계나 놀라운 장면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호화로운 오락이다." 몬테베르디의 제자인 프란체스코 카발리(1602-1676), 거기에 이은 마르칸토니오 체스티(1623-1669) 등이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새로운 경향의 오페라를 작곡해 냈다. 카발리의 대표작 [자소네 1649년 초연]는 매우 극적인 표현력에 차있는 작품이며, 또 1667년에 체스티가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1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상연한 오페라 [황금의 사과 Il pomo d'oro]는 5막 66장으로 된 작품인데 호화로운 스펙터클 효과와 대규모의 기악 반주에 의한 축전적인 성격의 작품이다. 오늘날 이 시기의 오페라가 상연되는 일은 극히 드물며 우리가 이들 작품에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오페라는 그 장소에 한해서만 연주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으며, 따라서 악보가 출판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필사 악보조차도 대부분은 소실되었으며, 또 악보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주의 윤곽을 알려줄 뿐이며 그 당시 가수들의 비루투오소에 의해서 처음으로 빛을 발할 수 있었으며 여자역은 카스트라토라는 특수한 가수(소년기에 특수한 처치를 하여, 성장하여도 고음을 낼 수 있도록 한 남성가수)에 의해서 불려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오늘날 여성 가수에 의한 연주와는 상당히 이미지를 달리했다는 것, 그리고 호화로운 장치나 의상을 곁들임으로써 당시의 오페라는 처음으로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 등의 이유에 의하고 있다. 오페라의 유형은 다시 칸타타(이탈리아어의 '칸타레=노래하다'에서 유래하였으며 기악 형식의 소나타에 대해서 그 반대의 뜻으로 사용된 말), 특히 실내 칸타타의 번영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실내 칸타타(칸타타 다 카메라)란 세속적인 내용에 의한 독창 내지 중창을 위한 작은 성악곡이다. 몬테베르디가 만년에 작곡한 통주저음이 붙은 독창, 내지 중창을 위한 마드리갈레-가령[얌전한 꾀꼬리(Dolcissimo Usignuolo).1638년에 출판된 마드리갈 곡집 제 8권]같은 작품도 일종의 칸타타로 볼 수 있으나, 다시 루이지 롯시(1598-1653), 그리고 지아코모 카릿시미(1605-1674), 앞에서 말한 체스티 등에 의해서 많이 작곡되었으며, 동시에 오페라와 한가지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교대를 원칙으로 하는 형으로 고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 아리아의 중시 이어서 후기 바로크 시대로 들어서자 오페라의 중심은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옮겨졌다. 이 곳의 오페라는 이미 프란체스코 프로벤짤레(1627-1704)등에 의해서 개척되고 있었는데, 다시 알렛산드로 스카를랏티(1660-1725)에 이르러 나폴리파의 황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시실리의 바렐르모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로마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1683년 이래 나폴리로 옮겨서 [티토 셈프로니오 그라코 1720년], [그리셀다 1721년]와 같은 작품 속에 바로크 오페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결정시켜 갔다. 스카를랏티의 위대함은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자라 하기보다는 종래에 있어 왔던 갖가지 요소를 정리, 통합하여 오페라 세리아의 고전적인 질서를 확립시킨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통 짧은 서곡(신포니아)-빠르게-느리게-빠르게 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이른바 이탈리아식 서곡 형식에 의한 -으로 시작한다. 막이 오르면 고대의 이야기는 신화가 원칙적으로 3막의 극으로 전개되어 간다. 극의 발전은 낭창적인 성격을 가진 레치타티보에 의해서 행해지는데 서정적인 하강 부분에서는 아리아가 노래되며 오페라 전체가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교대로 구성되게 된다. 청중이나 작곡가의 보다 큰 관심은 주로 아리아에 집중되며 아리아 오페라라 부를 정도로 되었다. 그 때문에 극적인 중점과 음악의 중점이 어긋난다는 모순이 생겨 극작품으로서의 밀도가 희박해지기도 했는데 그당시로서는 그러한 결함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리아의 형식은 A-B-A의 세 부분으로 된 다카포 아리아 형식이 보통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타이프에 따라서 아리아 칸타빌레(아름다운 선율을 충분히 들려주는 아리아), 아리아 파를란테(이야기하는 듯한 생기있는 아리아), 아리아 디 브라부라(숙련에 의하여 넓은 음역을 가졌으며 가수의 발성 기술을 들려주는 아리아)등 다양하게 분류되기도 한다. 한편 레치타티보는 통주저음만이 붙은 단순한 레치타티보 세코(메마른 레치타티보)와 오케스트라 반주가 딸린 극적인 레치타티보 스트로멘타토 또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의 형이 있었다. 이들의 배열 방법이나 순서에도 하나의 관습이 있었으며 이 관습을 답습하는 것이 작곡가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의식된 시대도 있었다. ◇ 미성가수의 횡포 한편 다른 사람이 만든 아리아를 무단으로 차용해 오는 일도 적지 않았으며 심한 경우에는 여러 가지 유행하는 명아리아를 이것 저것 빌려와서 그럴 듯한 새로운 즐거리를 주어맞춘 '긁어 모은 오페라(파스팃치오)라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오페라가 다른 장소에서 상연되는 경우에는 대개 전혀 다른 형태로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국 오페라란 그 장소에 한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며 일체의 이유를 빼 버리고 도도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벨 칸토의 선율에 심취할 수만 있다면 되는 것이며 이야기의 진행이라든가 작곡자의 이름 따위는 2차 , 3차의 문제였다. 작곡자로서 중요한 것은 명가수-특히 카스트라토들의 미성과 기교를 충분히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며 마치 의상 디자이너처럼 가수들의 가창에 어울리는 효과적인 선율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1721년 경에 출판된 [유행의 극장(Teatro alla Moda)]이라는 책 속에서 자신이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했던 베넷트 마르첼로(1686-1739)는 그 당시의 오페라 가수들의 횡포상을 야유조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리아의 전주가 연주되고 있는 사이에, 가수는 무대 위를 걸어다니고, 기침을 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오늘은 어쩐지 컨디션이 나쁘다는 식의 이야기를 거들먹거리며 동료들에게 한다. 노래가 시작되면 카덴짜 부분에서 적당히 쉬고 장식음으로 멋대로 장식하거나 한다. 그 동안 지휘자는 쳄발로에서 떨어져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가수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다 카포 아리아의 마지막 부분은 최초의 부분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기교적인 장식음을 많이 붙여 변주되고 있었다. 이러한 오페라에 대해서 '의상을 걸친 성악 연주회'라는 비판이 가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무대 위에서 관객의 눈요기를 위하여 갖가지 기계 조작으로 화재나 지진, 전쟁, 지옥의 정경 등이 스펙터클하게 충분히 효과적으로 연출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새야, 노래하라]라는 아리아에서는 실제로 새를 무대에서 날려 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오페라의 보급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동시에 세속화와 타락의 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스카를랏티와 같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그러한 위험을 물리치고 음악적으로 충실한 명오페라를 만들어 냈지만, 아류의 작곡가들의 손으로 넘어가자 감상적이고 지나치게 달콤한 선율과 동일한 패턴의 반복에 의한 생기 잃은 오락으로 빠지기도 하였다. ◇ 웃음의 오페라 이와 같은 오페라의 대중화 내지는 서민화는 오페라 부파(희극)의 등장에 의해서 더욱 촉진되었다.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 희극적인 장면을 삽입하는 것은 초기 오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가령 17세기 초기에 활약한 스테파노 란디니(1590년경-1655년경)의 오페라 [오르페오의 죽음.1619년]등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으며 다시 조금 늦게 활약한 비르질리오 맛쪼키(1597-1646)나 마르코 마라쫄리(1619년경-1662년) 등의 작품도 일종의 오페렛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오페라 붑파의 스타일을 확립하여 넓은 영향력을 가진 중요한 작품은 1733년에 상연된 지오반니 밧티스타 페르골레지(1710-1736)의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이다. 까다롭고 돈 많은 노인을 섬기는 꾀가 많은 하녀가 계략을 꾸며 결국은 마님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2막짜리 희극은 원래는 정가극 중의 한 장면(Intermezzo) 이었으나 이 부분만이 압도적인 인기를 끌자 독립시켜 계속 상연되었으며 외국에도 소개되어 그 후의 오페라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지금도 이 오페라는 종종 상연되며 20세기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단 두 사람만의 대화(또 한 사람이 등장은 하지만 벙어리여서 노래는 전혀 부르지 않는다.)인데도 불구하고 이 음악의 호소는 매우 강하고 또한 직접적이다. ◇ 나폴리의 작곡가들 페르골레지에 의한 희가극의 개척이 없었다면 저 모차르트의 [코시 판 투떼]나 [피가로의 결혼]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결코 피상적인 웃음이 아니라 인간의 뱃속까지도 꿰뚫어 보는 웃음이며 등장 인물이 가까운 서민이라는 것도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스카를랏티, 그리고 페르골레지와 같은 시대의 나폴리파 오페라 작곡가로서는 다시 프란체스코 두란테(1684-1755), 니콜라 포르포라(1686-1768), 레오나르드 빈치(1690-1730), 레오나르드 레오(1694-1744), 니콜로 욤멜리(1714-1774), 그리고 독일인인 요한-아돌프 핫세(1699-1783), 오페라 부파 부문에서는 니콜로 핏치니(1728-1800), 다시 그 뒤를 이은 지오반니 파이지엘로(1740-1816), 도메니코 치마로사(1749-1801)등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파이지엘로는 롯시니(1792-1868) 보다 먼저[세빌리아의 이발사.1782]를 작곡했으며, 또한 치마로자의 [비밀결혼.1792] 등도 오늘날 종종 상연되는 작품이다. 그들이 활약한 것은 이미 모차르트 등의 고전파 시대로 들어와서 인데, 그 후의 독일 오페라의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나폴리파의 작곡가들에게서는 많은 실내 칸타타를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칸타타는 레치타티보-아리아-레치타티보-아리아의 4악장 구성이 보통 이었으며,선율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다 카포 아리아를 중심으로 전개해 간다. 스카를랏티에게만도 600곡이 넘는 칸타타가 있는데 그 중에는 [엔디미오네와 친티아]와 같이 그의 최대작의 하나로 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 종교음악의 전개 ◇ 최초의 오라토리오 바로크 시대의 성악음악 부문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종교음악이다. 미사곡, 마니피카트(성서의 누가복음에 의한 마리아 찬가)와 같은 중세 이래의 전례용 악곡 뿐만 아니라 교회 칸타타, 그리고 오라토리오라고 하는 바로크 특유의 곡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오라토리오란 원래 르네상스 말기에 로마에서 행해지던 민중 교화를 위한 운동으로, 그 회당(기도당=오라토리오)의 이르을 따서 '오라토리오의 모임'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는 성서의 낭독이나 설교가 행해졌으며 또 찬가도 불려졌는데 1600년, 최초의 오페라가 상연되던 해에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1550년경-1602년)의 [영과 육의 극(Raprisentatione de anima e di corpo)]라는 이탈리아어에 의한 작품이 상연되었다. 그 이름으로도 상상할 수 있듯이 '영'이라든가 '육', '육체'라든가 '시간', '천국' 과 같은 우의적인 역할의 인물이 등장하여 신앙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레치타티보나 독창, 코러스, 기악 반주 등을 섞고, 의상을 입어, 일종의 종교적인 오페라로 상연되었다. 이 작품을 최초의 오라토리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어지는 란디의 [성 아렛시오(1632)]등도 일종의 종교적인 오페라 내지는 오라토리오의 성격을 가진 작품인데 17세기 전반의 로마 오페라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보수적인 종교도시 로마에서는 오페라는 코러스를 중시?? 종교 오페라 내지 오라토리오의 형태로 발전하는 길 외에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는 다른 독자적인 표현을 개척해 가게 되는데 그 발전에 특히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은 로마의 지아코모 카릿시미(1605년-1674년)이다. [예프터], [요나], [솔로몬 왕의 재판]등, 카릿시미의 오라토리오는 구약성서에서 취해졌으며 테너 독창에 의한 설명역(텍스트)을 중심으로 각자의 역할을 라틴어로 노래해 간다. 여기서는 더 이상 일체의 극적 연출은 가해지지 않고 이른바 연주회 형식으로 불려지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적인 호소는 직접적이고 강렬하다. 특히 카릿시미는 합창을 중시하여 낭창풍의 강한 리듬으로 극적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장군 에프터의 승리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으로 하여 신에게 바치는 그 딸의 비극을 다룬[예프터] 등, 매우 깊은 감동에 찬 작품이다.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탄식의 합창은 매우 압권이다. 특히 불협화음을 수 없이 겹쳐가는 단순한 구성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박력으로 듣는이의 마음을 파고든다. 거기서 사용되고 있는 음이 적고 단순한만큼 설득력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카릿시미의 작품에 의해서 본격적인 오라토리오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그 후 가령 헨델의 오라토리오 창작 등에도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다시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는 지오반니 레그렌찌(1626-1690년), 안토니오 드라기(1635년-1700년), 알렛산드로 스트라델라(1642년-1682년)등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드라마틱한 오라토리오 후기의 이탈리아 오라토리오는 카릿시미의 작품과는 달리, 다시 오페라적인 경향이 강해진다. 이 시기의 오라토리오란 오페라의 상연이 금지되었던 4순절(그리스도의 부활에 앞선 6주간 반의 기간)에 이른바 오페라의 대용품으로 연주된 것으로 보면 벨 칸토 양식에 의한 오페라의 성격이 요구된 것도 역시 당연한 귀결이었다. 알렛산드로 스카를랏티를 비롯하여 안토니오 롯티(1667년-1740년), 안토니오 칼다라(1670년 경-1736년), 레오나르드 빈치 등의 오라토리오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26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저 [마님이 된 하녀]의 작곡가 페르골레지의 백조의 노래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는 십자가 밑에 서 있도다)]에도 이와 같은 오페라적 요소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그 외면의 극성과 감상성의 내부에 꺼지지 않는 강렬한 불꽃이 불타고 있으며 그것이 작품을 같은 시대의 종교작품 중에서 스케일이 큰 두드러진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 오페라적인 전례음악 한편 교회의 전례를 위한 미사나 모텟트도 극적인 오페라적 경향이 강한 것이 바로크기의 특징이다. 몬테베르디의 [마리아의 만과,1610년 경 출판]는 6인의 독창자와 합창과 관현악을 필요로 하는 극적인 작품이며 매우 역동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또한 몬테베르디 만년의 종교곡을 모은 [윤리적.종교적인 숲(Selva morale e spirituale)1640-1641년 출판]도 잊지 못할 감동적인 음악이다. 한 곡 한 곡이 이 작곡자의 다양한 음악 서법을 응축시켜 하나의 미크로 코스모스(소우주)를 이루고 있다. 로드비코 비아다나(1546년-1645년)의 모테트처럼 [교회 콘체르토]라는 타이틀을 가졌으며 극적인 기악 반주가 딸린 모노디 양식을 채용하고 있는 작품(1602년 출판)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오라찌오 베네볼리(1605년-1672년)의 다양한 기법에 의한 모테투스등에서 하나의 피크를 이루게 되었다. 한때는 베네볼리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던 [53성의 미사]는 오스트리아-독일계 작곡자가 작곡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미사곡이 1628년, 짤쯔부르크 대성당의 헌당식을 위하여 작곡된 것이라는 것도 부정되고 있는데 그러나 이 미사곡이 바로크적인 맘모스 종교작품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 후의 종교 작품도 거의 동일한 방향을 취하고 있으며, 가령 후기에는 안토니오 비발디(1678년-1741년)의 유명한 [글로리아]처럼 이 협주곡을 생각케 하는 극적인 악곡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한편 의식적으로는 르네상스풍의 폴리포니 서법을 사용한 [옛양식(stile antico)]의 작품도 역시 바로크기에 적지 않게 보인다. 스카를랏티, 롯티 등 , 이런 유형의 작품은 지금도 종종 연주되며 아마추어 합창단이나 교회 성가대의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 압도적인 영향 바로크 음악은 이탈리아 오페라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탈리아 오페라와 함께 발전해 갔다. 이탈리아의 오페라야 말로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곡종이었던 것이다. 오페라의 어법은 다시 미사나 모테트 등의 교회음악, 그리고 소나타나 콘체르토 같은 기악음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다른 나라에도 진출하여 각 나라의 바로크 음악의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다른 나라의 음악, 특히 그 극음악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하든가 아니면 그것이 반발하는 일에서 시작하든가의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가령 반발한다 하더라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힘은 결정적이었으며 영국이나 독일처럼 국민 오페라를 대두시키면서도 결국 그 싹을 이탈리아 오페라 앞에 쪼아먹히고 말게 되었다.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들이 그 오페라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실로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