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내용을 적습니다...
험하고 매섭다 했다.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두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나 아름답다고도 했다. 청량산으로 향하는 예정된 등반길은 그렇게 겁도 나고 두근거리기도 했다.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곳. 발길에 채이는 돌맹이 하나에도 시가 흐르고 골짜기마다 선비들의 풍류가 흐물거리는 곳. 마주하고 첫발을 내디디면 모든것이 분명해지리라. 3시간여를 내달려 청량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들어서자 김덕호씨가 단숨에 달려 안온다. 동행해줄 3일을 통째로 비워 놓았다며 미리 준비한 자료들을 한 봉투 가득 넣어 건넨다. 선친때부터 봉화군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토박이 김덕호씨는 관리사무소가 지러지기 20여년 전부터 청량산을 오르내렸단다. 청량산을 찾은 이라면 누구에게라도 허리를 굽혀 90도로 인사를 하고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줘 함께 걷다보면 그의 겸손함에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라고 한다. 그를 가리켜 이곳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 '청량산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은모두 청량산을 향한 그의 극진한 사랑에서 비롯 되었다. 그도 그렇거니와 손바닥 보듯 청량산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터라 동행을승낙해 준 배려가 더 없이 고마웠다.
내유외강, 퇴계의 변모를 닮은 산 자동차를 타고 올라 입석에 다다르자 자동차 진입금지 표지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여기서부터가 사람들이 가장많이 이용하는 등산로의 시작이다. 입석에서 오르는 길, 얼마 안가 금세 어풍대에 이른다. 발 아래로 청량산의 골짜기와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작도 하기 전에 다 본건가 싶어 섭섭해질때쯤 연꽃의 꽃술 자리에 해당한다는 청량사가 펼쳐진다. "조금 힘들다 싶으면내리막길이 나오고 지겹다 싶으면 절경들이 눈을 즐겁게 해줘요. 오밀조밀 아기자기합니다." 배낭에서 식혜를 담은 병을 꺼내며김덕호씨가 빙그레 웃는다.
등산을 시작한 지 50여분 만에 응진전에 다다른다. 오르는 길 가에 고추며 배추, 호박이 눈에 띈다. 푸르고 싱싱한 푸성귀들이 가꾼 이의 부지런한 손길을 느끼게 한다. 응진전 뒤쪽으론 묵중한 바위 봉우리들이 위엄있게 내려다 보고 건강한 담쟁이 넝쿨이 층층이 감고 올라 운치를 더한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수도를 하고 노국공주가 청량산에 머무는 동안 치성을 드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재미있는것은 응진전 안에 자리한 각기 다른 표정의 16나한들. '아라한'이라고도 부르는 나한은 수행자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즉 도를 터득해 완전해진 사람을 이르는 말로 오랜 수행을 통해 스스로 부처가 된 사람을 가리킨다.
응진전에서 다시 20여분 지나 김생굴과 만난다. 김생은 <삼국사기>에 '부모가 한미(寒微)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해 예서ㆍ행서ㆍ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고 적고 있듯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끝에 당대 최고의 명필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김생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도 전해진다. 김생이 굴에서 글씨수도를 시작한 지 9년째 되던해에 청량봉녀가 홀연히 나타나 자신의 베 짜는 실력과 김생의 글씨 실력을 겨뤄보자고 제안한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시작된 경합은 결국 청량봉녀의 승리로 끝났고 충격을 받은 김생은 1년 동안 더 실력을 닦아 꼭 10년을 채우고 나서 세상에 나갔다고 한다. 한석봉과 매우 유사한 설화이지만 김생이 통일신라시대 사람인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생 설화가 한석봉 설화의 원형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바위를 깎아 놓은 듯 힘차고 날카롭다는 김생의 글씨는 현재 국립박물관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 남아있다. 그의 글씨를 흠모한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 3500자를 집자해 완성한 비문으로 비문이 세워지자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본을 뜨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청량산 박물관 로비에 축소 모형과 원본크기의 탁본사진이 있다.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다 김생굴에서 내려와 청량사로 행했다.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나무계단이 청량사 유리보전을 행해있다. 오르는 길 우측으로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이름의 예쁜 찻집이 눈에 띈다. 잠시 들러 향긋한 솔바람차 한잔에 지친다리를 내려놓는다.
유리보전 앞에 다다르니 김덕호씨가 차근차근 불상들을 설명해 준다. "청량사는 약사여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몇 안되는 사찰 중 하납니다. 예전에 유리는 일곱가지 보석 중 하나였다고 해요. 약사여래불이 인간의 몸과 정신을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게 낫게 해준다는 의미로 '유리보전'이라 칭했답니다." 보통 석가불을 모시는 곳을 대웅전이라 하여 사찰의 가장 중요한 법당으로 여기는 데 반해 이곳 청량사에선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는 유리보전이 곧 대웅전 역할을 한다. 이곳 중앙엔 약사여래불, 좌측엔 문수보살, 우측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이중 약사여래불은 종이로만들 '지불(紙佛)'이고 문수보살은 흙으로 만든 토불(土佛), 지장보살은 나무로 만든 목불(木佛)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 청량산은 불교의 산이었다. 모두 27개의 암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발길이 머무는 골짜기와 절벽마다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기와 파편들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농암종택 이성원씨가 그의 글 '예던길(농암종택홈페이지)'에서 '신재 주세붕의 청량산 등반은 오랜준비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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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신재가 청량산을 찾은 것은 1544년 4월11일이고 하산은 17일이며 글은 19일에 완성했다. 그때 신재는 무려 19개의 절과 암자를 만났다. 문헌으로는 이 무렵에 33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청량산은 산 전체가 법인당인 불교의 산이고 암자의 바다였다.' 고 적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 청량산에 불교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던 청량산은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썼던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의 산이 되었다. 특히 신재 주세붕에 의해 청량산은 순식간에 유교의 산으로 탈바꿈한다. 주세붕은 청량산 유람기를 쓰며 보살ㆍ의상ㆍ반야ㆍ문수ㆍ원효와같은 불교식 이름을 장인ㆍ연화ㆍ자란ㆍ경일ㆍ향로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퇴걔이황도 주세붕이 중국 무이산의 예를 따라 이름 붙인 청량산 육육봉을 칭송하는가 하면 그대로 노래하기도 했다. 그렇게 청량산은 불교의 산이기도 하고 또 유교의 산이기도 하다.
청량사에서 내려와 청량정사로 향하는 길, '산꾼의 집'이란 푯말이 재미있다. 소박하게 지은 집 앞엔 쇠를 녹여 만든 조형물들이 놓여 있고 '약초한잔 그냥 들고 가라'는 안대판도 붙어 있다. 아닌게 아니라 '산꾼의 집'에 들어서니 집 주인인 이대실씨가 그윽한 향의 약초를 대접한다. 달마도 명장 제1호이며 청량산문화연구외 외원이기도 한 이대실씨는 청량산이 주는 평온함에 빠져 벌써 십수년째 이곳에서 오고사는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옆에 놓인 청량정사에 들어서니 현판에 '오산당(吾山堂)'이라 적혀있다. 13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의 손에 이끌려 청량산에서 학문에 정진한 퇴계이황이 청량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청량산을 '우리집의 산', 곧 '오가산(吾家山)'이라 한데서 비롯됐다는 것. 1832년 퇴계의 후손과 유림들이 청량정사를 지어 헌사할 때 이를 가리켜 '오산당(吾山堂)'이라 했다. 평일인데도 '산꾼의 집'을 찾는 사람들이 꽤 많다.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운다.
500년 전에도 여전히 이 자리를 지켰을 터이니 이튿날 아침, 청량산을 좀더 가까이에서 보기위해 병풍바위에 올랐다. 얼음물과 초콜릿, 사과 두어알까지 꼼꼼하게 준비했지만 정작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먹을 일은 없었다. 경사가 급하고 험한 길에 다리가 뻐근해 온다 싶으면 곧 평지가 나타나 숨을 고르게 해줬고. 까맣게 익은 오디와 새빨간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쉬엄쉬엄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1시간쯤 갔을까. 송글송글 땀이 맺힐때쯤 병풍바위가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그 놓은 곳에 고추받이 가득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근처에 집을 짓고 사는 화전민들의 것이라 했다. 장인봉,선학봉,자란봉,향로봉,연화봉. 일부러 한 곳에 모으기라도 한 듯 흐드러지게 핀 순백의 망초풀 뒤로 청량산의 수려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저마다 이름에 걸맞은 형상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
햇살과 푸르름이 극에 달한 6월 중순의 오후, 청량산의 잘생긴 봉우리들 속에 파묻혀 있으니 옛 선인들의 감격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 하다.500년 전 그날에도 청량산은 여전히 푸르렀을 것이며 봉우리들 역시 제각각 지금과 같은 자릴르 지키고 있었을 터이니.
부지런히 내려와 점심을 챙겨먹곤 공민왕당으로 향했다. 산성 입구에 자동차를 대어 놓으니 돌로 쌓아올린 산성이 코앞이다. 높고 거친 바위들을 타고 올라 20분쯤 갔을까.공민왕당이 나온다. 생각보다 허름하고 초라하다. 곧 공사가 이루어 질 거라며 미안한 듯 부끄럽게 웃는 김덕호씨가 정겨워 보인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동아 불교와 유교가 청량산을 뒤흔들어 놓은 가운데에서도 청량산 자락에 살던 화전민들은 종교가 아닌 공민왕을 섬기며 살았단다. 이곳 청량산 축융봉 자락 북쪽 산성마을에는 공민왕당이 있고 반대편 가송리에는 노국공주를 모시는 부인당이 있는데,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온 공민왕이 하필 청량산을 택해 들어왔고 이곳이 잠시나마 고려의 도읍지가 되었던 것에 큰 감동을 받았던 까닭이다. 여전히 이곳에는 공민왕이 쌓았다는 산성터와 말 다섯필이 한번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터가 넓다는 오마대, 마치 섬처럼 우뚝 선 봉우리에 죄인을 밀어 넣은 후 다리를 걷어내 처형했다는 밀성대 등이 전설로 남아 있다. 지금도 가송리 마을 사람들은 정월과 백중이면 제를 지내기 위해 공민왕당을 찾는다.
하루종일 강한 햇빛을 받으며 산속을 헤맨 탓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청량산은 그렇게 주저앉고 싶을 만큼 험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녹록하지도 않았다. 이 감격이 평온한 상태에 이를 즈음 다시 한번 청량산에 오르겠노라 다집해 본다. 돌아오는 8월8일 백중을 맞이해 청량산문화연구회에서 공민왕당을 찾아 백중행사를 크게 연다니 빠르면 그때쯤이 되지 않을까. 그날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숨어 들어온 공민왕과 노국공주도, 청량산을 그토록 흠모했던 퇴계선생과 신재 주세붕도 같은 하늘아래 모여 청량산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할 수 있으리라. |
청량산문화연구회
청량산을 찾은 2박3일간의 여행길에선 녹음 짙은 절경과 골짜기마다 숨어 있는 문화유산 외에도 특별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량산을 중심으로 봉화와 안동, 영양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결성한 청량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청량산문화연구회'가 그것. 청량사 주지스님과 농암종택 이성원씨를 비롯해 달마도 명장 제1호 이대실씨,안동하회탈춤의 명인 이상호씨, 소백예술촌 촌장 조재현씨, 그리고 도시생활을 접고 비나리마을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있는 송성일 씨와 정도윤씨등 20여명이 연구외의 회원이다. 2004년12월22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청량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이름으로 카페를 열어 현재 온라인상으로 활동하고 있는 회원수는 140여명에 이른다.
화해하지 못한 500년, 불교와 유교가 손을 잡다 청량산문화연구회가 발족하게 된 것은 지난 500년 동안 청량산 내에 공존하면서도 단 한번도 화해하지 못한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손을 잡고 마음을 풀어 놓자는 데서 시작됐다. 종교의 벽을 넘어 청량산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 되고자 하는 마음이 농암종택 이성원씨의 발길을 청량사로 향하게 했다. "불가를 대표하는 청량사 주지스님과 조선 선비의 유가를 대표하는 농암종택 주손인 제가 나서면 지난 500년의 벽을 허물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지스님 역시 같은 뜻을 품고 있던 터라 흔쾌히 동의해 주셨습니다." '불교와 유교의 화해' 를 실현한다는 상징적 차원에서 가장 먼저 청량사 홈페이지와 농암종택 홈페이지를 링크시켰다. 자우롭게 드나들면서 서로의 세계관을 이해하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둘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청량산의 환경을 지키고 오랜 세월 청량산이 품고 있던 불교와 유교문화의 흔적을 발굴 보존하는 데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취지가 순수하고 의미도 깊으니 봉화와 안동 일대는 물론 인근 지역의 지식인들까지 동참 의사를 밝혀 왔다. 주지스님으로부터 취지를 전해들은 청량산'산꾼의 집' 이대실씨도 흔쾌히 활동에 나섰다. "청량산에 십수년을 묻혀 사는 산꾼이니 이미 청량산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 밖에요. 기쁘고 감격스런 마음으로 적극 나섰습니다." 정년퇴임 후 청량산에 들어와 너와집을 짓고 민박을 짓고 식당을 운영하는 '까치소리'의 최용철씨도 문화회의 제안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청량산 문화연구외한 이름으로 비로소 마음을 여니 지역의 경계를 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일정한 모임 장소가 필요했던 터라 '까치소리'가 완공되자마자 첫 모임을 각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이 도시에서 귀농해 농사를 짓고 사는 비나리 정보마을의 송성일씨와 정도윤씨도 동참해 젊은츨과 중장년층이 고루 섞여 연령층도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뜻을 함께 하고 마음을 터놓으니 만남 자체가 즐거웠다. 벌금까지 내걸며 부부동반을 강조하는 이성원씨의 '고집'에 따라 내외가 모두 참석을 하니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활동 2년째,<청량>을 창간하다 청량산문화연구회가 시작한 첫번째 사업은 청량문화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별나게 새로운 문화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져 가는 옛 문화를 되살려 재각인 시키는 것이 취지이다. 한달에 한번씩 열리는 회의 역시 이러한 내용으로 진행된다. 다름 아닌 '한가지씩 옛 문화를 토해 내자는 것.' 청량산과 관계된 여러자료를 가지고 와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파고드는 것이 주된내용이다. 그러다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면 대학교수를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한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잊혀져 가는 옛 이야기도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를테면 '길도 험하고 교통편도 열악했던 시절의 조상들은 어떻게 천리길을 다닐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곧 옛길 찾기로 이어졌다. 지역의 현존하는 최고 연장자를 찾아 이야기를 듣고 남아 있는 고서들로 고증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이렇게 이어진 청랴산문화연구회의 첫 성과물은 2005년10월 <청량>지의 창간이었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청량산의 그것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창간지의 내용은 이대실 선생의 표현대로 '밭두렁에 주는 분뇨와 같은 글들'로 엮어 졌다. 현재 2호도 한창 제작중에 있고 오는 8월8일엔 공민왕당에서 대대적인 문화사업으로 공민왕제를 올릴 계획이다.
공민왕제는 고려시대 당시의 제복을 입고 자연친화적인 공민왕제를 올리는 1부, 과거 적에게 병졸들이 많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허재비를 세워 놓았던 허재비 문화를 재현하는 2부, 그리고 자연과 하나 되는 어울림의 출하연인 3부로 진행될 예정이다. |
청량산 등산코스 부분은 틀린곳이 있어 아쉽습니다..
농암종택에서의 하룻밤
여행의 마지막 날, 농암종택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다. 퇴계와 인연이 깊었던 농암선생의 종택을 지천에 두고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얼마 전 새로 보수를 하고 한옥 민박체험장으로 사용이 허락되었으니 이렇듯 좋은 기회를 놓칠수는 없었다.
봉화군에서 안동시로 넘어서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달려가니 싱그러운 밭들 사이로 그림같은 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 농암종택을 지키고 있는 농암 선생의 주손 이성원씨(청량산문화연구회 회장)가 반갑게 맞아준다.
어쩌면 농암 선생과 만날 수 있으리라 "원래 이 종택은 1975년 이전까지 안동시 분천에 있었습니다. 안동댐에 건설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이곳까지 오게 됐죠." 한문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성원씨는 종택을 이전해 올 터를 찾기 위해 부근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고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랜 고민을 단숨에 털어 버렸다고 한다.
수려하게 펼쳐진 자연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별채 긍구당과 사당, 사색에 잠기기 좋은 다실까지. 스스로 관직에 물러나 89세로 생을 마감할때까지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농암 선생의 기개와 유려함이 종택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듯했다.
날이 저물자 녹음이 짙은 산세는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물소리가 목청을 돋운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고택안엔 푸른빛 정적이 감돈다. 까만 하늘 위로 믿기지 않을 만큼 수많은 별들이 쏟아진다. 다음날 일어나면 혹여 농암 선생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 없는 상상에 빠져든다. 그렇게 고즈넉한 농암종택에서의 하룻밤이 저물어 간다.
퇴계오솔길을 따라 걷다 이튿날 아침 7시, 새벽 무렵 뿌옇게 피어오르던 물안개가 걷히자 밤새 어둠에 묻혀 있던 농암종택이 한결 투명하고 싱그러워 보인다. 이른 아침 강변에 펼쳐진 백사장에 나서면 노루 발자국도 발견할 수 있다는데 한발 늦지 않았다 싶어 못내 아쉽다.
선생이 안채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차린게 없습니다. 안동 반가에서 차림 소박한 아침식사 한번 드셔보시지요." 그러나 밥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고구마 줄기와 콩가루를 넣어 끓인 국과 콩가루를 묻혀낸 부추, 밥에 올려 쪄낸 계란 등 무엇하나 정성이 부족한게 없고 자연을 거스르는 것도 없다. 너무 먹었다 싶게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워냈지만 속이 불편하거나 과하게 포만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상을 물리곤 서둘러 산책길에 나섰다. 전날 이미 선생이 동행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놓은 터라 벌써부터 기대가 가득하다. 농암 종택 뒷산을 따라 '퇴계 오솔길(예던길)'에 올랐다. 태어난 지 4개월 된 진순이도 따라나선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촉촉한 향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원래 퇴계오솔길이라 부르는 지역은 매내-올미재-가사리로 이어지는 길 전체를 말하나, 우리는 걸어서 무리없게 산책할 수있는 종택 뒷산의 작은 오솔길만을 택했다.
20여분 걸어 삽재에 오르자 고산정과 가송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집이나 사람이나 있어야 할 곳이 있어요. 고산정이 꼭 그렇습니다. 녹음이 짙은 산과 수직단애, 앞으론 강이 흐르잖아요. 그 가운데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고산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얼마쯤 가자 강 가운데 우뚝솟은 경암(景巖)이 나타난다. 길에서 만든 모난 미물에게도 아름다운 시를 헌사했던 퇴계 선생은 경암에 '천년 동안 물결쳐서 아직도 그렇건만 / 중류에 높이 솟아 기세도 장할시고 / 인생의 헛된 자취 허수아비 떴는 듯이 / 뉘라서 이 가운데에 굳게 서서 견디리오'라는 시를 헌사했다.
경암 바로 앞엔 한속담(寒粟潭)이라는 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에도 역시 '맑은 걸음걸음 가는 곳 모두 선경이고 / 괴석 큰 소나무 푸른 물가 가득하다'는 시를 남겼다.
제법 햇살이 강한 날씨였지만 좁고 아기자기한 오솔길 안은 소나무며 감나무, 매실나무들이 우산처럼 막아줘 서늘하고 청량하다. 나무들 틈 사이로 경쾌한 물소리가 귓전을 두드린다. 오디와 감나무,싸리꽃,산딸기,토종매실도 만난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걸으니 퇴계선생이 이 길을 가리켜 '그림 속으로 걸어가는 길'이라 했던 이유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얼마간 더 걸으니 물길이 급하게 꺾어지는 길목에 하늘 놓이 솟아 있는 수직단애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천연기념물인 먹황새의 서식지라 '학소대'란 이름을 얻었고 68년까지는 먹황새 한 쌍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나오니 퇴계 오솔길 끝자락에 농암종택이 눈에 들어온다. 종택 뒷산으로 올라가 다시 종택으로 돌아나오기까지 2시간여에 걸친 아침 산책. 500년 전 퇴계 선생의 치열한 사색의 공간을 따라 걸은 오늘을 잊을 수 있을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 여겼다면 찾아오지 않았으리라. 이성원씨의 배려가 없었다면 행여 만나보지도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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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함께 그림을 보면 더욱 좋았을텐데.....
글을 볼 수 있을꺼란 기대로 올렸는데 보이지 않아 밑에 다시 적었습니다.
첫댓글 1등..조회수 0 ....근데 글자가 안보인다..클릭한번 해보자..그래도 안보이네 그림이나 보지머...자란님 감솨...!!
글씨가 작아서 밑에 쓰려고 합니다..^^ 오랜시간 붙들고 있음 중간에 컴터가 말썽을 부려서요..^^ 쫌만 기다리세요~ 횐님들 모두 보실 수 있도록 글도 올리겠습니다..^^
에고 너무 고생하싰다마는...너무 너무 감사~~
청량산 기사에 우예 자란이 빠졌노...! 사업초기부터 문제 안고 출발하더니 개통하고도 도사님 야그 빼고는 별 무신통이네....청량산 야그에 자라이가 빠지다이....
ㅎㅎ 慈省님만이 저의 가치를 알아주십니다~~^^ ~~
그저 수고하시는 자란님 고마워유~~~!!!!!! ^^ 복 받을거유~~!!!
횐님들의 과분한 애정으로 이미 복 받은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