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들의 묘소
제1대
太祖=建元陵=太祖陵: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東九陵 소재)-사적 193호
齊凌=太祖 妃 神懿王后 韓氏 (6男2女) =單陵임.
위치: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북한소재)
貞陵=太祖(이성계)의 繼后 神德王后 康氏(初代 國母)=2男1女 둠.
위치:서울 성북구 정릉2동 산87번지 (사적 208호)
제2대(1419년)
정종=厚陵=定宗(이방)과 王妃 定宗王后 金氏 (無子)=雙陵임.
위치: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 (북한소재)
제3대 (1422년)
太宗-獻陵-太宗(이방원)과 王妃 元敬王后 閔氏(4男4女) 雙陵.
서울 강남구 내곡동 산 13 (23대 純祖의 仁陵과 합처 獻仁陵)
제4대 (1450년)
世宗-英陵-世宗(이도)과 王妃 昭憲王后 沈氏 (8男2女)
合葬(同陵異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번지 (사적195호)
獻陵에서 遷葬
제5대 (1452년)
文宗-顯陵-文宗(이향)과 王妃 顯德王后 權氏 (1男1女) 同原異岡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사적 193호.
6.제6대 (1457년)
端宗-莊陵-端宗(이홍휘) 流配生活에서 賜藥, 庶人 降等. 中宗11년에 封墳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 121번지- 사적196호
제7대 (1468년)
世祖-光陵-世祖(이유)와 王妃 貞喜王后 尹氏(垂簾聽政. 2男1女)
同原異岡陵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 -사적 197호
추존 德宗(1457년)-敬陵-德宗(이장) 世子(世祖의 長男, 夭折)와
昭惠王后 韓氏 (1男)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西五陵 소재)
제8대 (1469년)
叡宗-昌陵-叡宗(이황)과 斷妃 安順王后 韓氏(1男1女) 同原異岡陵
경기도 남양주시 용두산 30(서오릉 소재)
恭陵-叡宗의 王后 章順王后 韓氏(1男) 恭順永陵 소재(順.永.永陵)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15
제9대(1494년)
成宗-宣陵-成宗(이혈)과 斷妃 貞顯王后 尹氏 (1男1女) 사적199호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5-4 同原異岡陵 (宣靖陵소재)
純陵-成宗의 王妃 恭惠王后 韓氏(無子) 單陵
제10대 (1506년)
燕山君-中宗反正으로 廢王 燕山君과 廢妃 夫人 愼氏(2男과 함께 賜死)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5 (사적362호)강화도 교동서 이장. 雙墳
제11대(1544년)
中宗-靖陵-中宗(이역)의 陵, 十二支神像 (宣靖陵소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5-4 (풍수지리상 수맥의 우려)
溫陵-中宗의 王妃 端敬王后 慎氏 (無子) 현재 비공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 사적210호
정조 임금이 집권하던 1786년 12월, 왕대비 정순왕후는 다음과 같은 한글 교서를 내린다.
“1786년 5월 문효세자의 사망, 9월 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죽음, 11월 상계군 담의 사망 등 왕실의 비극적 사태들이 모두 독살에 의한 것이니 빨리 역적을 찾아내라.”
1786년은 정조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슬픔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자녀가 없던 정조가 뒤늦게 얻은 일점혈육 문효세자를 홍역으로 잃은 것이었다.
문제는 다섯 살 어린 나이의 세자가 홍역을 앓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면서부터. 사실 정조는 세자가 홍역을 앓게 되자 의약청을 설치하고 자신이 친히 약을 달여 먹일 정도로 온 정성을 기울여 아들을 살려냈다.
그리고 이를 몹시 기뻐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과거를 실시하고, 조세를 탕감해주는 등 온 나라를 축제 분위기로 이끌던 터에 갑자기 세자의 병이 악화돼 끝내 죽고 만 것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그 자신이 왕세손으로 있을 당시에는 정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을 받았으며, 왕이 되고 나서도 몇 번씩이나 자객으로 인해 암살 위기에 처했던 정조였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임신중이던 왕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가 그 해 9월 갑자기 사망하고 만 것이다.
또 그 해 11월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는다. 상계군 담은 정조의 이복아우 은언군의 아들이었다. 사도세자의 후손들이 모두 죽어 나가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왕대비 정순왕후가 왕실에 더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음을 감지하고 이 같은 한글 교서를 내린 것이다.
결국 정조는 명당을 통한 ‘운명바꾸기[改天命]’를 시도한다. 그러잖아도 이전부터 억울하게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무덤 자리가 나쁘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던 터였다.
정조는 고모부인 박명원(화평옹주의 남편)과 지관 차학모(車學模)를 대동하고 사도세자의 무덤(현재 서울시립대 내에 위치)을 둘러본 뒤 그곳이 흉지임을 확인하고 이장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장하는 데 좋은 날을 잡지 못하여 무려 3년을 기다린 끝에 정조 13년 마침내 수원으로 이장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세자의 현재 무덤인 융릉이다.
이 자리는 고산 윤선도가 일찍이 ‘천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최고의 명당’으로 평가한 자리였다. 이른바 엎드린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반룡롱주형(盤龍弄珠形)의 명당.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이장하고, 정조는 주역으로 점을 치게 한다. 괘가 겸괘(謙卦) 오효(五爻)로 나왔다. 이 괘는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조만간 국가의 경사(즉 자손을 두는 것)가 있을 것’으로 풀이됐다.
실제로 이장한 그 이듬해인 1790년 6월에 수빈 박씨가 왕자를 낳는다. 바로 11세의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올라 34년간 왕위를 지킨 순조 임금이다. 아무튼 순조를 얻은 것이 명당의 발복 덕분이라 생각한 정조는 더욱더 자주 융릉을 참배한다.
나아가 그는 융릉을 위해 성을 쌓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이다.
이렇듯 수원 화성은 자신에게 아들을 안겨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의 보존과 자신이 융릉을 참배할 때 머물 행궁(行宮)이라는 1차적인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 때의 대신 김종수(金鐘秀)가 쓴 화성기적비(華城紀積碑)에도 명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화성이 건립된 1차적 목적은 풍수적 이유였다는 것이다. (끝)
[우리 문화 우리 풍수 | 수원 화성과 융릉 ]
이장하고 아들 얻은 정조 임금
증직(贈職)에 대해서
묘지의 비석에는 망자의 생전 업적과 벼슬 등을 기록한 비문이 있다. 비석 앞면에는 망자의 벼슬 품계와 소속 관청, 그리고 직위(관직)를 표시하고 있는데 증직(贈職)과 실직(實職)을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추증(追贈)이라고도 하는 증직은 죽은 뒤에 관직을 부여하는 것으로 가문을 빛나게 하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여기에는 원칙이 있다.
추봉(追封) 또는 추증(追贈)의 기준은 왕실의 종친과 생전 실제 벼슬이 종이품(從二品) 이상인 문무관(文武官)에게는 그의 3대를 추증하였다.
그의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는 본인보다 한 단계 낮은 품계를 주고, 증부모는 본인보다 두 단계 낮은 품계를 추증하였다. 죽은 처는 그 남편의 품계에 준하였다.
또 비록 벼슬이 직위가 낮더라도 친공신(親功臣)은 정삼품(正三品)을 증직하였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실직으로 정2품인 이조판서를 하였다면 그의 죽은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가 되고, 그의 할아버지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종2품인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 되고, 그의 증조부는 이 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정3품인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를 추증하였다.
또 홍길동의 부인은 실직인 "정부인(貞夫人)"이고, 죽은 어머니는 "증 정부인(贈 貞夫人)"이고 할머니는 "증 정부인(贈 貞夫人) : 정2품, 종2품 부인의 품계는 모두 貞夫人 임"이며, 그의 증조모는 "증 숙부인(贈 淑夫人)"이 된다.
왕실의 경우 왕의 장인이 죽으면 정1품인 영의정(領議政), 세자의 장인이 죽으면 정1품인 좌의정(左議政), 대군의 장인이 죽으면 정1품인 우의정(右議政), 그리고 왕자의 장인이 죽으면 종1품인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 영의정 되기까지 30년 이상 소요"
수평적인 대응은 곤란하지만,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이 조선시대에는 영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사람이 어떤 코스를 밟아 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들의 재임기간은 어떠했을까?
국민대 한국학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을 받아 2005년 이후 삼국사기를 필두로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헌과 금석문 등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는 역대 한국사의 관인(官人. 관료)과 관직(官職) 변동사항을 뽑아 정리했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됐다.
영의정이 설치된 조선왕조 494년 간 그 자리에 재임한 인물은 총 162명. 재임기간을 평균하니 926일(2년반)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인조시대 신경진은 영의정에 제수된 지 불과 6일만에 사망한 주인공이 되었고
*장수 영의정 황희는 세종시대에 무려 6천562일을 영의정으로만 있었다.
*같은 재상급이지만 2위인 좌의정에는 홍응이란 인물이 2천881일 재임해 최장 기록 보유자며,
*3위인 우의정의 경우에는 김사목이 3천369일이나 있었다.
조선시대에 '낙하산'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절대다수가 관료출신이다.
연구소 조사 결과 영의정이 되는 가장 전형적인 코스는 과거급제→언관ㆍ경연관→6조 당하관ㆍ당상관→의정부 당상관→대신이다.
이 과정에서 지방 실태 파악 차원에서 지방직을 몇 번 거친다. 과거급제에서 영의정 승진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30여 년이었다.
12대 인종
12대(1545년)
仁宗-孝陵-仁宗(이호)와 왕비(王妃) 인성왕후(仁聖王后) 朴氏 비공개.雙陵.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서삼릉 소재)
[제12대 인종실록]
[1. 인종의 짧은 치세]
(1515-1545. 재위 기간 1544년 11월-1545년 7월. 윤정월 포함해 9개월간)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이다.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후사도 하나 남겨놓지 않고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일컬었다.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 금욕적인 생활 등이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은 1515년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 자는 천윤이다. 1520년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머물러 있다가 1544년 중종이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정도로 총명하여 1522년 여덟 살의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게다가 철저한 금욕 생활을 추구했던 듯 동궁에 머물 당시에는 옷을 화려하게 입은 궁녀는
모두 내쫓았으며,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성품은 계모 문정왕후의 표독하고 사악한 성격을 방치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그를 낳고 7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런데 문정왕후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그와 빈궁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보니 동궁이 불에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서 타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불을 누가 지른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때마다 요행히도 그는 죽음을
면하곤 했다. 비록 계모이긴 하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하니 자식된
도리로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불에 타 죽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은 자신 혼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졸지에 화형을 당할 지경에 처했는데, 그때 밖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를 애타게 부르는 중종의 목소리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겐 불효이자 불충이라고 말하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이 불은 누군가가 꼬리에 화선을 단 여러 마리의 쥐를 동궁으로 들여보내 지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을 지른 장본인이야 구태여 따져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범인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사건은 유야무야 없던 일로 처리되고 말았다.
이렇게 몇 차례 죽음의 위험을 겪어내면서 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30세였다. 그는 즉위하자 곧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은 사림 세력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도 복구시켰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익히고 배운 도학 사상을 현실 정치에 응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사림들을 등용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이언적, 유관 등
사림의 대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미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재위9개월 만인 1545년 7월에 31세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인종이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은 문정왕후 윤씨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은 계모이긴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윤씨는 항상 인종을 원수 대하듯했고, 문안 인사차 들른 인종에게 자신과 아들 경원대군
(명종)을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말할 정도로 막말을 해댔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은 그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개탄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인종이 앓아 누워 죽게 된 것도 문정왕후가 내놓은 독이 든 떡이 그 원인이라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 인사차 대비전을 찾아갔는데, 그날 따라 문정왕후는 평소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인종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에게 떡을 대접했다. 인종은 난생 처음계모가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 아무 의심 없이 그 떡을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 야사가 시사하는 것은 문정왕후의 인종에 대한 멸시와 시기가 얼마나
극악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이 먹혀들었던 것은 인종이 너무나
유약하고 선하기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으며, 그의 효행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는 효릉이라 했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 인성왕후 박씨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1514년에 태어났다. 1524년 11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으며 인종이 죽은 후에도 32년을 더 살다가 1577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인종과 함께 효릉에 묻혔다. 귀인 정씨는
정유침의 딸이며, 정철의 큰 누이다. 소생은 없었으며 생몰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제12대 인종의 가계도
중종의 두번째 부인 장경왕후의 장남으로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가 인종의 부인이며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1515-1545) 재위 기간은 1544.11-1545년 7월로 윤정월 포함하여 9개월이었다.
[2. (인종실록) 편찬 경위]
(인종실록)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1544년 11월부터 1545년 7월까지 9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인종이 죽은 뒤 일어난 을사사화로 인해 그의 외가, 처가 및 가까운 신하들이 큰 희생과
탄압을 겪어야 했기에 (인종실록)은 편찬 계획조차 수립되지 않았다. 다만 1546년 (중종실록)
편찬에 부수되어 4년 후에 겨우 완성을 보았다. 이 때문에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모두
(중종실록)의 편찬자들이다. 또한 즉위년의 11월, 12월 기사가 (중종실록)에 실려 있어
(인종실록)에는 고작 7개월간의 역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
제13대(1567년)
明宗-康陵-明宗(이환)과 왕비(王妃) 仁順王后 沈氏(1男) 雙憤. 사적 201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33-19
제13대 명종실록
[1.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
(1534-1567, 재위 기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인종이 죽자 12세밖에 안 된 경원대군이 왕위를 이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후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에
눌려 평생 눈물로 왕위를 지켜야 했다.
명종은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이름은 환, 자는 대양이며
태어나자마자 경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인종이 즉위하자 1544년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이었다.
문정왕후는 원래 자녀를 5명 낳았으나 그 중에 아들은 명종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녀가 명종을 낳았을 때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의 나이는 이미 20세였다. 때문에
명종이 왕이 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인종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만약 인종이 그대로 죽게 된다면 명종의 왕위 계승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문정왕후는 그런 결과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그것은 이루어졌다.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7년
(중종 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고 무고하는 한편, 인종이 죽을 당시에는 윤임이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 삼아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 세력들을 유배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시킨 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이 사사되고,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 세력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또한 윤원형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을 궁중에 들여보내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고 무고하여
사사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원형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 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내에
집이 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작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정난정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윤원형의 이런 세도가 명종이 친정을 한 이후에도 계속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명종은 드디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했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용한 인물은 이량이었다.
이량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이었다. 하지만 이량 역시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
명종이 자신을 신임하자 그는 이감, 신사헌, 권신, 윤백헌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자기 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축재에도 열을 올려 그의 집앞은 항상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께 '조선의 3흉'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호랑이를 내쫓으려다 호랑이 한 마리를 더 키운 격이 된 명종은 그를 한때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기도 했다. 하지만 윤원형의 극심한 권력 독점을 염려한
나머지 1562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이량은
한층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예조,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된 뒤에
그의 권력 남용은 극에 달했다.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 세력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의 사림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음모가 그의 조카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화를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이때가 1563년이었다.
이처럼 권신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는 명종에게 설상가상으로 문정왕후는
툭하면 떼를 쓰며 왕을 괴롭혔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봉자였던 듯 봉은사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히는 등 해괴한 인사를 행하기도 했고, 선종과 교종을 모두 부활시키고 승과를
부활하는 한편 보우를 도선사 주지로 삼고 도대선사에 올려놓기도 했다.
왕의 권위는 이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자연히 사회는 어수선하고, 민심은 병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민간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마다 도적떼가 난립하였다.
특히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이들 도적떼의 두령들을 끌어모아 관군을
괴롭혔고, 그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꺽정
무리의 활동은 황해도, 경기도 등 전국 5도를 누비며 1559년부터 1562년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고
있었기에 그를 잡으러 다니는 관군이 오히려 민간의 원흉으로 취급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회가 이렇듯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르자 자연 국방이 허술해졌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중종 시대의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당해오던 왜인들은 1555년 배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한때 전라도
일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들은 결국 이준경, 이경석, 남치훈 등이
이끄는 군사에 의하여 격퇴되었지만 을묘왜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민간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중종 때 임시로 설치된
비변사를 상설 기구화하고 외침에 대비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 같은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그녀는 '여왕'으로
불리울 정도로 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친정 동생
윤원형의 폭압적인 권력 독점과 남용을 후원하고 있었고, 유교 사회를 표방하고
있는 조선에서 승복을 입은 승려를 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정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죽기 전에는 조선 사회가 제 위치를 찾을 가망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명종을 포함해 대부분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녀가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태였고, 마침내 1565년 그녀가 죽자 조선은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철퇴를 맞은 것은 승려 보우와 윤원형 일파였다.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고, 다시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그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라지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안정되고 사회도 점차 질서를 되찾아갔다.
하지만 명종은 그 동안 너무 국정에 시달린 탓인지 병을 얻고 말아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명종의 나이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때문에 후사를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왕위는 중종의 아홉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이 이어받았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얼 출신인 방계 혈족이 왕위를 잇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때문에
이후부터 왕의 권위는 한층 떨어지게 되었다.
명종의 능호는 강릉이며 현재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2.명종의 가족들]
명종은 부인이 인순왕후 1명뿐이다. 게다가 자식도 순회세자 하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13세에 요절하여 결국 후사를 잇지 못했다.
인순왕후 심씨(1532-1575)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에 태어나 14세 나던 154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그는 13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후 1567년 명종이 죽자 대비가 되어 16세 된 선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하지만 1568년 선조에게 친정을 시키고 물러났으며,
1575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명종의 능인 강릉에 묻혔다.
순회세자(1551-1563)
순회세자는 1551년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부, 아명은
곤령이다. 1557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윤원형의 추천으로
참봉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이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호군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하고 1563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서손자
하성군이 대통을 이어야 했다.
#제13대 명종 가계도
중종과 문정왕후의 차남으로 제13대 왕이 되었다. 경원대군이며 1534년에 태어나
1567년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재위 기간은 1545년 7월부터 1567년 6월까지
22년이며 부인은 1명에 자녀는 1남만 있었다. 부인은 인순왕후 심씨이고 아들은
순회세자인데 순회세자는 13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3.명종 시대의 주요 사건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
(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켰다. 이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삼흉이라 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했다.
중종에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인종)를 낳고
7일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에 일대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며, 12세밖에 안 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결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김명윤, 이덕응,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양재역 벽서 사건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헀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임꺽정의 난
임꺽정은 사회가 혼탁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이 들끓던 명종 시대의 대표적인
도적 두목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던 인물이다. 양주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힘이 장사인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당시의 양반 중심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꺽정이 출몰하기 시작하던 1559년은 척족 윤원형의 일파와 이량 일파가 발호하여
온 나라가 그들의 세도에 눌려 있었고, 반대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고, 민간은
학정과 수탈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째
흉년이 계속되어 거지가 늘어나고 도적떼가 할거하였으며, 남쪽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야말로 조선 사회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임꺽정은 이 아수라장을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타개하려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도당 몇 명과 함께 민가를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에 본거지를 두고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 둔갑했다.
이러한 의적 행각은 백성과 아전들의 호응을 얻어, 백성들이 관아를 기피하고
오히려 임꺽정 무리와 결탁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관아에서 그를
잡으려고 병력을 동원하면 백성들은 그들을 숨겨주거나 달아나도록 도와주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어 그들을 정탐하게 했는데, 되레
선전관이 그들에게 잡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조정은 임꺽정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관아에서는
임꺽정이 도적의 괴수라는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러는 가운데
임꺽정 무리는 개성에 나타나기도 했으며, 1560년에는 마침내 서울에까지
출몰하였다.
1560년 8월 임꺽정 무리를 쫓던 관원들은 그의 아내를 잡는 데 성공하여 그녀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들어서는 서울로 진입하는
길을 봉쇄하고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그러나 이들 도적 무리는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여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도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 병력이 임꺽정 무리를 잡기 위해 나섰다. 이 해 12월에는
엄가이라는 도둑 두목이 잡혔는데, 그는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라는 자였다. 관아는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을 여러 번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관군은 오히려 그들에게 패하여 후퇴하였고 부장 연천령이 죽고 군마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사건이 이렇게 커지자 임금이 직접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해 책임지고 도둑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었는데,
한낮에 도둑떼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관군은 본격적으로 도적 소탕 작전에 돌입하여 그 해 12월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했다. 하지만 그가 잡은 사람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인 가도치였다. 그래서 이사증은 이 허위 보고에 책임을
지고 파직당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5도의 군졸들이 모두 임꺽정을 잡기 위해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1561년 9월 평안도 관찰사 이량은 의주 목사 이수철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은 임꺽정을 가장한 가짜였다. 이 때문에 이수철은 허위 보고로 파직당했다.
그 해 10월에 임꺽정 무리에 의해 해주의 민가 30호가 불타는 화재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부터 관군들은 서림을 앞세워 임꺽정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는데
수상해 보이면 무조건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울은
온종일 호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모든 관청은 일을 중단하고 임꺽정을
색출하는 작업에 투입되었고, 5도의 전 시장들을 휴업하게 하였다. 또한
황해도에서는 양민들이 도둑에 가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전세를 전부
탕감시켜주었으며, 평안도에서는 전세의 절반을 깎아주기도 했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군민은 피로에 지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토벌 대장인 토포사를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하고 임꺽정 무리를
잡는 일은 평안도, 황해도의 병사와 감사가 맡게 하였다.
그 후 1562년 정월,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이 임꺽정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진짜 임꺽정이었다. (기재잡기)는 임꺽정이 잡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민가에 숨어 있던 임꺽정은 주인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라고 소리치게
한 다음 자신이 뛰쳐나가 도둑이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믿고 관졸들이
임꺽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몰려가자 그는 군졸들의 말을 뺏어 타고 달아났다.
그때 서림이 저 사람이 임꺽정이라고 소리쳐 끝내 상처를 입고 생포당하고 말았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체포령을 내린 지 3년 만에 붙잡혔고, 체포된 지 15일 만에
처형당했다.
명종실록은 임꺽정 무리에 대해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람들이 임꺽정을 단순한 도적 괴수로 생각하지 않고 민심을
대변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적으로 추앙했으며, 무수한 설화와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임꺽정을 가리켜 앞 시대의 홍길동과 후세의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라고 했다.
임꺽정은 평민과 몰락한 양반들에게는 의인으로, 그리고 양반들에게는 도적으로
평가되었다. 어쨌든 그의 도적 행위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의 활동이 3년 동안이나 조선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였다는 점에서 '임꺽정의 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당시의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에서는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킨 바 있었지만,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정미약조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여러 가지 규제를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 전역이 전운에 휩싸여
있던 터라 내부의 무역 사정도 좋지 못해 결국 명나라 해안과 조선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감행하게 되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을 앞세우고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또한 어란도, 장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행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하였지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다시 급파했다.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과의 무역 관계가 악화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하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일본 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어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었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4.명종 시대를 이끈 사람들]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1491-1553)
이수희의 손자이자 이번의 아들인 이언적은 1491년(성종 22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적이었지만 중종의 명으로 '언'자가 더해져 언적이라 하였으며 호는 회암,
주희의 학문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회재라고 하였다.
그는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응교 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중앙으로 올라온 뒤에 다시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 해에 윤원형 등의 척신 세력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사림들을 심문하는
추관을 맡았으나 자신도 이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6년을 보내다가 1553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을사사화와 같은 시련기에 이언적은 판의금부사라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윤원형 일파에 의한 사림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이
부족하여 자신도 결국 사화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이이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지 못했던 점을 들추면서 절개를 지키지 못한 우유부단한
학자로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강구하던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조의 성리학을 정립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승도 제대로 없던 그는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이황의 성리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27세 때 당시 영남 지방의 선배 학자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 논쟁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그의 견해는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만년의 유배 생활 동안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서들을 남겼다.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중요구경연의), (봉선잡의) 등이
그것이다. (구인록)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에 대한 그의 관심이
집약되어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살피면서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탐구하고 있다.
이 탐구를 살펴보면 그는 주희를 추종하긴 했으나 주희가 강조했던 '격물치지'의
내용을 거부하고 철저한 주리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학문적 관점은 이황에 의해 집대성되어 영남학파를 이루는 근거가
되었다. 도학적 수양론과 실천을 강조한 그는 군자의 길을 닦는 것이 곧 학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조선 성리학의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큰 산 이황(1501-1570)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북 안동시)에서 좌찬성을 지낸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후실이었지만 현부였던 생모
박씨의 가르침으로 총명한 자질을 키워나갔다. 12세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때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도연명의 시를 즐겨 외웠으며,
20대에 들어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쳐 병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
등과 교류하고 (심경부주)를 입수하여 탐독, 심취하였다.
34세(1534년)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37세에 모친상을 다하자 고향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김인후가 낙향하는 것을 보고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핑계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산운야학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돌입하였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으니,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그 뒤에도 그는 몇 번에 걸쳐 임관의 명을 받게 되자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외직을 지망하여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 경상도 풍기 군수 등을 지냈다. 풍기
군수 시절에는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서적, 편액, 학전 등을
마련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하지만 49세가 되던 해에 그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자 취임하였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고, 낙향하여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정진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아호를 도옹이라고 개칭하고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 등에 매진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명종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자주 그에게 조정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초현부지탄(현인을 초빙했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 및
(도산잡엽)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고는, 그것을 밤낮으로 쳐다보며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명종은 그 이후에도 자헌대부, 공조판서, 대제학 등의 현직을 내려 이황을
초빙하려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때
명나라 신경의 사절이 당도하여 조정에서 상경을 강권하자 그는 마지못해 한양
길에 올랐다.
이후 명종이 돌연 병사하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 판서에 임명했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명망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여러 차례 고사 끝에 선조의 간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68세의
노구에 대제학, 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통치 철학이 되는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단 한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했고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성학집도)를 저술해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직을 간청하여
마침내 낙향을 허락받았다. 낙향한 후 이듬해 11월 평소에 아끼던 매화에 물을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떴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영의정의 예로 장사
지내도록 했다.
이황이 학문에 본격적으로 정진한 것은 (주자대전)을 읽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가 이 책을 입수한 것은 43세 때였다. 하지만 그는 풍기 군수를 사퇴하고
퇴계에 칩거하고 있던 49세 때에 비로소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이미 (심경주부),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 등을 공부한 이후였기에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던 터였다. (주자대전)을 섭렵함으로써 그는 성리학에 대한
깊고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본격적인 학구 활동은 50세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황은 53세에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고, (연평답문)을 교정하였다. 54세에 노수신의
(숙흥야매잠주)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56세에 향약을 기초하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를
완성하였다. 또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하여 서문을 썼고,
59세에 황중거의 물음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에 응답하였고, 61세에 이언적의 (태극무변)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후 그는 70세에 죽을 때까지 이언적의 유고와 행장을 정리하는
한편, 성리학에 관한 숱한 논문들을 작성하였다.
이황은 이 같은 만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는 한편, 동양 유학의
한 산맥을 이룰 수 있었다. 젊어서는 학문을 위한 준비에 게으르지 않았고, 중년에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실천했으며, 노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쌓고 제자를 길러
맹자가 말하던 인생삼락을 철저히 즐긴 사람이었다.
그의 학풍을 따른 학자로는 당대의 유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기대승, 조목,
이산해, 이강이, 황준량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달하고, 나아가서는 성혼, 정시한,
이현일, 이재, 이익, 이항로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 사류 모두이다.
이는 조선 주리철학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으니 실로 한국 유학사상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황의 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았던 것이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넓은 강을 낼 수 있다는 이치가 바로 이황에
적합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명종실록) 편찬 경위]
(명종실록)은 총 34권 3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45년 7월부터 1567년 6월까지
22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명종실록)의 편찬 과정에 대해서는 실록에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고, 다만
(선조실록)에 1568년 8월 춘추관에서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 홍섬의 주재하에
편찬 회의가 개최되고 총재관 홍섬 이하 당상, 낭청의 임명이 있은 3년 뒤인
1571년 4월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편수관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했던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의 편찬 과정이 파악되고 있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인물은 감춘추관사 홍섬, 지춘추관사 오겸, 이황 등 9인,
동지 춘추관사 박순 등 10인, 편수관은 이제민 등 20인, 기주관은 유도 등 17인,
기사관은 홍성민 등 20인으로 총 77명이었다.
(명종실록)의 특징은 여타 실록과 달리 보기에 편하게 편찬되었다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사실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배열하되 날짜가 바뀌면 줄을 바꾸어
기록했다든가, 또는 같은 날의 기사도 대체적으로 국왕 및 왕실에 대한 일,
대외관계, 국정 집행 및 이에 대한 의정부, 삼사, 육조의 상서, 지방 행정, 천문
지리학 등의 순으로 배열하여 놓았다는 점, 그리고 사론을 본문과 분리시켜 그
위치를 명확히 했다는 점 등이다.
#명종 시대의 세계 약사
명종 시대의 중국 명나라는 지진과 기근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어 세력이
약해졌으며,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이 더욱 가속화되어 조선과 명의 해안 지방에
대한 왜구들의 노략질이 한층 심해졌다.
한편 유럽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신교가 인정되어 종교 전쟁기에서 벗어나
평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