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의 특공대는 약 120여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방 경찰청의 특공대는 약 25명 내외의 대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찰특공대는 예상되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주로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며, 아울러 주요 인사에 대한 빈틈없는 경호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날로 심각해지는 강력 범죄 사건의 해결에도 앞장서고 있다. 전남 순천에서 발생한 인질 사건 등에도 경찰 특공대가 출동하여 사건을 조기에 해결하기도 했다.
경찰 특공대의 대원들은 주로 특전사, 해병 수색대, 해군 수중폭파팀 출신이 대부분이며, 사격과 무술 분야에서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우수한 자질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적으로 각종 훈련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의 경찰특공대는 세계 유수의 대테러 부대들과 정기적인 훈련교류를 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한국 경찰특공대의 우수성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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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일본적군파에 의한 비행기 납치사건을 계기로 경찰내에 특수부대가 창설되었다. 경시청 제6기동대의 1개중대(3개소대), 오사카부경찰 제 2기동대의 1개중대(2개소대)로 편성되었다. 특수급습부대(特殊急襲部隊) 라는 정식명칭이 1996년 8월 5일에 제정되었고 5개의 도와 현 경찰에도 1개 소대씩 창립되었다. 주임무는 항공기납치사건 처리이며, 부대는 동경의 하네다 공항 근처에 위치한다.
SAT 는 60명이 3팀으로 나누어지며, 제 6기동대 제 7중대로 조직된다. 팀의 구성은 기내로 돌입하는 돌입반, 저격반, 지원반으로 나누어지며 저격반은 실제상황에서 2교대로 철야 감시체제를 갖춘다. 또한 근접하여 도청 등의 작전을 펴는 전자기기 조작에 능통한 대원도 포함되어 있다.
근무는 3교대제로 훈련중일지라도 반드시 1개소대는 긴급출동에 대비하여 24시간 대기체제를 갖추고 있다. 보통의 일정이 훈련, 대기, 비번의 구성으로 되어있어 일반 경찰과 비교하면 상당히 힘든 근무환경이다.
일본 경시청의 SAT는 설립당시, 루프트한자항공 비행기 납치사건때 출동하여 인질구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각광을 받았던 독일의 테러진압부대인 GSG-9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창설당시 제 1기의 대원들은 독일 GSG-9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처음에는 GSG-9와 똑같은 장비를 도입하게 되었다. 현재는 미국의 FBI 와 SWAT 으로부터 시가지 인질구출작전의 지도를 받고 있으며 , 전술훈련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다.
정식으로 SAT가 특수팀으로 되기 전까지는 편성예산이 부족하여 구식무기를 사용했으나, 96년부터는 비약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98년의 SAT 예산은 자그마치 50억엔(500억원)으로 그 중에는 헬기 2대도 포함되어 있다.
SAT의 대원이 되면 그들은 경찰관의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어, 지금 그 대원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같은 SAT 대원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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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육군의 특수부대 매트칼(Sayaret Matkal)과 함께 대표적 특수부대로 인정받는 13전대는 이스라엘 특수부대원 중 유일하게 AK47 소총을 쓰고 있는 등 긴 역사와 함께 부대의 발전과정에서 엿보이는 흥미로운 점도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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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ss.go.kr%2Fwarp%2Fkr%2Fdata%2Fterror%2Fc_terror%2Fimages%2Fvs_terror_06_2.jpg) 13전대의 출발은 이스라엘의 땅이 영국의 관리체제 하에 놓여 있던 193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스라엘에 있던 유대인들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영국과 아랍에 대항할 여러 지하무장단체를 조직했다. 그중 `방어'라는 의미의 `하가나(Hagana)'는 이들 저항조직 가운데 가장 큰 단체였고, 예하에 `강타(smash) 중대(PALMACH)'를 가지고 있었다. 중대는 바다환경에 맞게 특수화된 부대로 수중폭파임무와 함께 유럽에서 이스라엘로 도망쳐 오는 유대인의 배들을 안전하게 호위했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들의 배가 이스라엘 항구에서의 정박을 거절당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가나는 이를 계기로 영국의 군대와 시민들에 대해 모두 공격할 수중폭파팀(Haoulia)을 조직했는데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 후 이스라엘 해군의 `13전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전대는 `보안'의 울타리 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였으며 프랑스의 특공대 허버트, 영국의 SBS 등과 강한 연합훈련을 하며 전투력을 키웠다. 1960년부터 고유의 휘장을 공식적으로 사용했지만 드러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당시 대원들은 물리적으로 힘든 훈련코스를 수료했지만, 효율적인 훈련은 되지 못했고 전투기술도 최고의 수준에는 못미쳤다.
1967년에 아랍과의 '6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스라엘 군은 그 능력을 확신하고 있던 13전대를 투입했으나, 13전대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군이 고전적인 전격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반면 13전대는 그해 5월 6일 작전에서 실패하고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외국군과의 연합훈련이 이들 전투력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모든 전투훈련은 독자적으로 수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 역시 훈련 중 희생자만 불렀다. 기본적인 안전규칙을 무시한 무리한 그들의 훈련은 무려 7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매트칼과 같은 다른 특수부대에서는 13전대가 적을 죽이는 만큼 자신들의 대원을 죽인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이러한 형편은 13전대가 비밀부대이기 때문에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다.
88년까지 13전대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13전대는 비밀이라는 스크린이 매우 편리하다는 것을 이때 깨닫고, 이를 유지해 온 것이다. 이 때문에 매트칼보다 처진다는 이스라엘 군 내부 평가도 묻혀 있었다.
13전대는 1969년 그린 아일랜드 침공작전에서 매트칼과 합동작전을 펼쳤는데, 여기 또다시 3명의 대원이 죽고 10명이 넘는 대원이 부상을 입었다. 그들은 60년대를 통틀어 적지않게 성공적인 작품을 내놓았으나 독립전쟁 시기부터 쌓아온 화려한 전공의 명성은 퇴색하고 말았다. 1970년에 들어서 13전대의 대원은 겨우 20명뿐이었다. 현존하는 부대로 봐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13전대는 재구성될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이같은 상황은 반대로 13전대가 재기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이 되었고, 13전대는 스스로 변화를 모색했다. `기습타격'의 임무를 강화해야 한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반면 다른 특수부대들은 13전대의 이같은 변화를 반대했다. 이즈음 매트칼과 13전대의 갈등은 매우 심각했고, 여기에 또하나의 특수부대 `707부대'라는 존재가 전투역량을 향상시키면서 13전대의 위상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707부대는 이스라엘 해군이 1965년에 두 번째로 창설한 특수부대로, 항만 방어와 기뢰로부터의 함정 보호 등의 임무를 수행할 전투다이버 요원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바로 13전대의 훈련코스를 이수하다 탈락한 대원들인데, 아이로니컬하게도 13전대로부터 능력이 떨어지는 `열등한' 대원들로 간주되던 이들이 훗날 13전대에 합류하면서 13전대는 오히려 옛날의 위상을 찾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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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에서 처음 스와트팀이 창설(1974년)된 이후 미국 각지의 주 경찰, 지방경찰, 시경찰에서 스와트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모든 경찰조직에서 스와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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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임무는 납치사건, 마약사건, 무장강도, 인명구조, 특정인물의 경호 등 일반 경찰이 수행하기 힘든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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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특수전사령부 예하의 SEAL은 바다(Sea), 하늘(Air), 땅(Land)을 조합한 이름에서 보듯이 작전무대를 가리지 않는다. 또 특수작전에 필요한 모든 전투기술이 SEAL에 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의 임무 모두를 `완수'로 귀결짓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SEAL의 명성과 역량에 대한 평가를 깎아내리지는 못했다. 이것은 저절로 얻어진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항상 “가장 편한 날은 어제였다”고 말한다.
SEAL은 존 F 케네디의 특수부대 창설지시에 따라 해양작전을 전담할 미 해군의 특수부대로서 1962년 첫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SEAL은 2차 세계대전 때인 1943년 봄, 미 해군 건설공병대대(SeaBees)에 소속된 해군보병 자원자들로 조직된 해군전투폭파부대(NCDU)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태평양함대와 대서양함대에 각각 1팀씩 분리, 위치한 이들의 임무는 정찰과 상륙작전시 해변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1947년 미 해군은 이들을 수중타격에 중점을 둔 즉, UDT(수중폭파팀)로 재편성했다. UDT는 6·25전쟁에 참전해 그 명성을 드높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데 이어 원산·진남포 등지에서 교량과 터널 폭파, 항구와 강안에서 기뢰제거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62년 UDT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미 해군은 UDT 대원의 일부를 중심으로 마침내 2개팀의 SEAL을 창설하고 UDT와 함께 해군작전지원단 예하로 두었다.
오늘의 SEAL 현황을 미 해군특수전사령부 속에서 살펴보면 지휘부 아래 제1, 제2 특수전단이 있는데 각각 태평양과 대서양 방면을 담당한다. 또한 SEAL팀에 최신 `MK-V '정(艇)을 비롯한 각종 작전용 보트 운용 등을 지원하는 제1, 제2 특수주정대(SBU)와 교육훈련기관인 특수전센터, 대테러작전을 주로 수행하는 해군특수전연구발전단(DevGru·옛 SEAL 6팀)이 있다.
SEAL 대원은 약 2000명 정도이며, 작전은 최소 2명으로 구성하여, 수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대 기본단위는 소대로서 16명으로 구성된다. 각 팀은 작전지구가 정해져 있어 그 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팀은 북극지역에서 작전수행이 가능한 유일한 팀으로 혹독한 겨울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
남미지역을 담당하는 4팀은 정글작전에 강하며 스페인어까지 구사한다. 사막전은 3팀과 8팀의 몫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태평양 방면의 제1특수전단 예하의 5팀은 한국을 중심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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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CIA 공작국 산하 특수작전단(SOG)은 이라크 전쟁에서도 신출귀몰한 활동을 전개, 승전을 이끄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라크 전쟁 발발 2개월여 전부터 SOG는 이미 덴마크나 아일랜드 등 유럽의 비즈니스맨 등으로 가장해 수도 바그다드, 바스라, 모술 등 주요전략 목표지에 잠입하여, 지휘, 통제, 통신 및 정보(C3I) 시설 등 전쟁 수행에 대뇌 기능을 하는 시설물 등에 대한 현장정보 수집활동을 전개했다.
현재 400여 명의 요원을 거느린 것으로 알려진 SOG는 지난 195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 제 3세계권에서 발생한 각종 쿠데타나 반미인사들에 대한 체포, 고문, 암살 등 '더러운 임무'(Dirty job)를 도맡아 수행했다.
이런 '전과' 때문에 SOG는 지난 1970년대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단행한 숙청작업의 첫번째 희생자가 됐다. SOG는 제 3세계권에 대해 개입을 노골화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조차 회생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SOG가 부활한 것은 지난 1997년 조지 테닛이 CIA 국장에 취임하면서부터다. 테닛은 정규군과 특수부대원으로서도 수행하기 어려운 각종 비밀공작을 위해서는 SOG를 재건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행정부, 의회 및 군부를 상대로 하는 지속적인 설득작업 끝에 재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 비밀조직에 들어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5년 이상 군 경력자로 확실한 신원과 함께 체력조건을 갖춰야 되기 때문이다. 요원 중 대부분은 그린베레, 델타포스, 해군특전단 산하 특수전연구개발단(DevGru), 포스리컨(해병대 특수수색대)등 최정예 특수부대를 거친 역전의 용사들이다.
거의 1년 가까운 심사과정을 거쳐 '입사'한 요원들은 새로운 신분증을 부여받는다. 예전의 기록들은 공작단 비밀금고에 깊숙이 감춰지는 등 완벽한 세탁작업을 거치기 때문이다. 군 특수부대와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재량권이다. 군 특수부대 요원의 경우 상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SOG 요원들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융통성 있는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직전 현지에 투입된 일부 요원들은 현지 군벌 매수를 위해 아직 잉크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지폐를 300만달러씩 휴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SOG를 바라보는 군부의 시각은 곱지 않다. 통합특전사(SOCOM)를 중심으로 특수부대의 몸집을 불려나가는 국방부의 입장에서는 목표지역에 대한 정보수집, 목표타격 등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는 SOG 요원들이 달가울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휘계통이 다른 까닭에 SOG 요원들이 군의 통제에 제대로 따라주지 않고 '카우보이'식으로 행동하는 것도 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다. 이와 함께 공작 임무 완수를 위해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도 서슴없이 저질렀던 과거의 악행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SOG를 바라보는 군부의 시각이다.
한편 SOG는 원활한 공작을 위해 자체적으로 해상 공작부와 공중 공작부를 운영하고 있다. DevGru나 포스리컨 출신들이 주축인 해상 공작부의 경우 쾌속정은 물론이고 잠수정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공중 공작부도 소형제트여객기와 수송기를 보유, 명령이 하달되면 2시간 내에 출동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예멘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진가를 발휘한 프리데터 무인정찰기(헬파이어 공대지 미사일 장착)도 공중공작부가 운용하는 장비 가운데 하나다.
앞으로도 해결사로서 SOG의 역할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정보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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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타포스(Delta Force)는 그 명성에 비해 부대의 공식명칭이나 위치, 조직구성 등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않다.
비공식적이긴하지만 미군의 엘리트 특수임무 수행부대로서 전체 미군에서 가장 우수한 인력만을 모아 구성된 부대로 알려져 있으며 합동특수전사령부 예하로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포트 브래그에 위치해 있으며 '제 1특전단분견대 델타'로 불린다.
델타포스는 테러가 빈발하던 시기인 1977년 11월 13일 찰스 벡위드 대령이 영국의 SAS연대를 본떠 발족한 미 육군의 대테러 전문부대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등의 특수부대나 미 해군의 SEAL 등이 델타포스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3개의 작전대와 1개 지원대, 통신대, 1개 항공소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군으로 구성된 '퍼니 플래툰'도 운영하고 있으며 대테러작전, 특수수색 및 정찰, 인질구출작전 등이 주요 임무이다.
지원병력을 포함해 총 대원은 약 2500명 정도이며, 흔히 '오퍼레이터'라고 불리는 델타포스의 작전대원은 200~300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소 편성 단위는 흔히 'Chalks' 또는 'Troops'라 불리는 '반'이다. 4개의 반이 모여 중대를 구성하고, 다시 2~3개 중대가 모여 대대를 구성한다.
델타포스는 1980년 4월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구출작전을 통해서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89년에는 파나마의 군부실력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체포해서 미국으로 압송하는 개가를 올렸다. 걸프전에서는 특수정찰 임무수행과 함께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기지 폭파 임무를 맡았다. 이후 델타포스는 콜롬비아 등 일부 중남미 국가에 밀파돼 마약밀매단을 소탕하거나 보스니아에서 밀로반 카라지치 등 전범들의 검거와 제거공작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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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동독과 덴마크 해안의 기뢰 제거와 침투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설된 해군의 특공대로 원명은 'Kampf Schwimmer Kompanie'로 흔히 'KSK'라는 약어로 불린다.
독일판 SEAL팀인 이 부대의 현재 병력은 장교 11명, 하사관 1백 19명 등을 포함해 약 2백 50명 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자격은 독일 연방해군(Bundesmrine)에서 최소한 4년 이상 복무한 현역장교나 사병들에게만 주어진다.
군항 도시인 키일에서 실시되는 건강 진단과 심리테스트를 통과한 지원자는 다시 실내 수영장에서 실시되는 수영능력 측정 테스트(5㎞와 1㎞ 2종으로 실시됨)를 받아야 한다. 일단 수영능력을 인정받은 지원자는 다시 각각 4주간에 걸친 2단계의 고강도 수중작전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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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이 끝나면 지원자는 다시 8주간의 기습특공 훈련과 3주간의 공수 기본교육을 받아야 된다. 과정을 무사히 마친 지원자는 작전팀에 배속되어 다시 자유강하, 수상강하 등 좀더 높은 강도의 훈련을 습득한다.
이 부대는 특히 영국의 SBS, 미국의 SEAL팀 등 우방국 특수부대와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기술을 교환하고 유사시에 대비 공조체제를 굳건히 하고 있다. 이 부대는 특히 걸프전을 전후하여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원들과 함께 걸프만 해역에서 기뢰제거 작업, 화물선 수색작업 등을 전개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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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에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에 의해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무참하게 살해되자, 서독 정부는 테러 발생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특공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브란트(Willy Brandt)수상은 Hans-Dietrich Genscher 연방 내무장관에게 대테러 특공대 창설을 지시했다.
악명을 날렸던 나치 독일의 친위대인 SS에 대한 반감이 여전했기 때문에 군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특공대를 창설하지 않고, 대신에 연방국경경찰(Federal Border Police) 예하에 특공대를 창설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창설된 서독의 특공대가 Grenz Schutz Gruppe(GSG-9)이며, 총대원은 88명으로 구성되었다.
본(Bonn)의 외곽에 자리한 세인트 오거스틴(St. Augustin)에 기지를 두고 있는 GSG-9는 테러리즘 관련 임무를 수행하며, 위기상황 하에서의 VIP 경호,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예상되는 독일 주재 외국 대사관 방어, 국가의 주요 시설물에 대한 수비 등을 담당하고 있다.
초대 GSG-9 대장으로 임명된 웨게너(Ulrich Wegener)는 경찰 베테랑으로 테러리즘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수부대와 긴밀한 협조로 오늘날의 GSG-9을 있게한 장본인이며, 1976년 이스라엘의 엔테베 인질구출작전에 동행하여 이스라엘 특공대에 전술적 조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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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당시의 GSG-9은 구성면에서 보면 3개의 공격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통신 및 정보분대, 화력분대, 연구 및 장비분대, 정비 및 군수분대, 훈련분대 등의 지원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1983년에는 1개의 공격대가 추가되어 현재는 4개의 공격대로 구성되어 있다.
대테러리즘 작전의 핵심은 정보 수집임을 인식하고 있는 GSG-9은 코미사르(Komissar)로 알려진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 단체에 대해 추구하는 목적, 조직구조, 공격양상, 무기, 핵심대원 등 모든 자료를 입력하여 과학적 분석을 함으로써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고, 상황발생시 효과적인 진압작전을 하고 있다.
GSG-9의 대원선발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GSG-9의 대원으로 응시하기 위해서는 국경경찰대에서 2년 이상 우수한 성적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야만 자격이 주어지며, 3일 동안 계속되는 체력, 심리, 사격, 지능, 일반상식 등의 테스트를 통해 일차선발이 이루어진다. 1차에 선발된 인원은 5개월 동안의 기초체력, 사격, 무술 등의 엄격한 훈련을 받게 되는데 1차 선발인원의 10% 이상이 탈락된다. 2차를 통과한 지원자는 또다시 3개월 동안의 훈련을 거치게 되는데, 이 기간에는 팀공격 훈련, 전술훈련 등을 받는다.
일단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최종적으로 GSG-9의 대원으로 선발되면, 외국제의 모든 화기 조작술을 익히게 되며 9백만 불의 예산을 투입하여 설치한 항공기, 열차, 선박, 대사관 등의 모형물에서 시나리오에 따라 실전과 똑같은 모의구출작전을 반복적으로 실시하여 최고의 엘리트 대테러 특공대원으로 양성되게 된다.
GSG-9의 대원들은 최고의 능력을 유지하여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일주일에 50∼60 시간 훈련을 하고 있으며, 대원들은 일년에 두번 실시되는 테스트를 통해 검증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GSG-9은 대테러리즘 관련 기술, 정보, 그리고 장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교환하기 위해 FBI(미국), SAS(영국), GIGN(프랑스), 샤렛트 매트칼(이스라엘), 델타포스(미국)에 대원들을 파견하여 공동으로 훈련을 시키고 있다.
GSG-9의 명성은 모가뒤슈로 납치된 루프트한자 항공기의 인질 91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함으로써 확인되었다. 모가뒤슈 작전후 싱가폴, 사우디 아라비아 등 40여개 국가에서 대테러 특공대 구성을 위해 GSG-9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SAS에서도 영국 주재, 이란 대사관 점거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구출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GSG-9의 협조를 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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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명으로 구성된 SASR의 전신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지난 1942년에 발족된 제 2 독립특공중대이다. 일명 ’Z부대’(Z Force)로 알려진 이 부대는 250여 명밖에 되지 않는 미니부대로 주로 티모르 군도를 중심으로 정찰, 매복, 제한적인 목표타격 등 신출귀몰한 활동을 펼쳐 3개 사단, 3만 5천여 명의 일본군 병력을 거의 1년 동안 발목을 묶어둬 연합군이 파푸아뉴기니 등 남태평양 도서에 대한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특히 Z부대는 지난 1943년 8월 남태평양 도서에 배치된 일본군의 보급물자를 실은 화물선단이 일시 정박한 싱가포르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유류, 탄약, 식량의약품 등 3만9천 톤의 전략물자를 수장시키기도 했다. 2차대전 후 잠시 해체된 호주군 특수부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1951년이었다. 호주 정부는 1개 공수소대 발족을 인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1957년에는 제 1공수특전중대를 창설해 중.장거리정찰, 정보수집, 목표타격 임무 등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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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전중대는 이후 영국 육군의 제 22 SAS 연대와 해병대의 SBS 동료들과 함께 보르네오 등지에서 인도네시아군과 공산반군 등을 상대로 대(對)게릴라전 등에 큰 전과를 거뒀다. 특히 베트남전에서는 SASR 요원들은 단독 또는 미 육군 특전단(그린베레), 해군의 SEAL, 해병대의 포스리컨(특수수색대) 대원들과 합동으로 남부의 정글지역에서 활동, “정글의 유령”(jungle ghosts)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들은 또 동티모르로부터의 인도네시아군 철수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평화유지군의 첨병으로서 해안정찰, 인도네시아군 특수부대(코파수스) 저격수 파악, 사살 등의 임무를 거의 완벽하게 수행, 코파수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로 알려졌다.
베트남전 종식과 함께 SASR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다름 아닌 대테러전임무였다.
계기는 지난 1978년 2월13일 시드니 중심부에 위치한 힐튼호텔에서 발생한 폭발물 테러사건이었다. 이곳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모라자이 데사이 인도총리 등 정상급회담 참석자들로부터 호주 정부는 허술한 보안체제와 관련해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이에 자극받은 호주 정부는 이스라엘군 특수부대가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에서 거둔 인질구출작전 성공 등을 교훈삼아 SASR측에 이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또 최대의 가상적국인 인도네시아에 대한 작전과 광활한 호주 서북부지역에 대한 순찰임무 등을 위해서 훈련과 교육을 강화하도록 SASR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SASR은 대테러임무를 담당하는 ’전술기습단’(Tactical Assault Group, TAG)을 새로 편성, 영국의 SAS, 미국의 델타포스, 독일의 GSG-9, 프랑스의 GIGN 등세계 유수의 대테러부대에 위탁교육 또는 합동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역량을 키웠다. 또 호주 대륙과 남부 타스매니아섬 사이의 바스해협에 산재한 석유 시추시설에 대한 테러공격에 대비해 해군잠수요원 등으로 구성된 ’연안기습단’(Offshore Assault Group, OAG)을 창설하여 산하에 둠으로써 해상 대테러임무 등에 투입하고 있다.
특히 OAG는 해병대가 없는 호주로서는 영국의 SBS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요원들의 개인기량과 장비면에서도 세계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550명 규모로 서부 호주 퍼스 인근에 본부를 둔 SARS는 대테러전 등 특수임무 전담인 TAG와 OAG 외에도 영국의 SAS의 편제를 본떠 2개의 작전제대와 본부 및지원단(보급 및 훈련전담)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실제작전을 수행하는 제대는 다시 A중대(고공강하 전문), B중대(수중작전 전문) 및 C중대(사막전 등 육상작전 전문)로 각각 세분화 되 있다.
SASR 요원 지원자격은 2년 이상의 현역복무자에 한하며,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것으로 평가받는 3주간의 기본선발과정을 거친 뒤 다시 개인특성과 훈련성적 등을 토대로 1년 동안의 전문교육 훈련과정에 들어간다. 통상 1년에 1차례인 선발과정의 지원자수는 400여 명으로 통과율은 10%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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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올림픽 사건이후 프랑스 역시 대테러 특공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테러 특공대 창설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73년 9월 5일에 발생한 프랑스 주재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 점거 및 인질억류 사건이었다. 무장한 5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에 침입하여 13명을 인질로 잡고, 이들의 석방조건으로 투옥 중인 동료 테러리스트의 석방과 자신들의 안전한 출국을 요구했다.
동 사건은 아랍 국가의 대사들이 협상 조정자로 나서서 평화적으로 해결했고, 프랑스 정부는 아무런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 점거 사건 직후인 1973년 11월 프랑스 정부는 대테러 특공대 GIGN(Groupement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을 창설했다.
창설 초기에 GIGN은 제 1 GIGN과 제 4 GIGN의 2개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76년에 2개의 부대는 통합되었고, GIGN의 임무가 점차적으로 늘어나자 1979년에는 부대요원들이 대폭 증원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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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GN은 12명으로 구성된 4개의 타격대(Strike Unit)로 되어 있으며, 4개의 타격대 중 1개 타격대는 비상 대기조로 24시간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다.
GIGN은 프랑스의 인질구출작전이 주된 임무이지만, VIP에 대한 경호, 핵발전소 등 주요 시설물에 대한 방어, 극악범 호송 임무도 아울러 수행하고 있다.
GIGN 대원의 선발은 헌병대 근무자중 1차 서류와 GIGN 대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100명을 선발하고, 이들이 일주일 동안 체력, 담력, 사격능력 테스트를 받게 된다.
체력테스트는 완전군장 8 km 달리기, 암벽타기, 레펠훈련 등이며, 담력검사는 훈련된 사나운 군견과 무술 유단자와의 연속대결 등이며, 사격은 권총 및 소총 사격능력 평가가 포함된다.
2차관문을 통과한 응시자들은 8개월간의 각종 대테러 전술과 전기를 연마하게 되고,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료하면 정식으로 GIGN의 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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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대테러 특공대원들이 받는 훈련에는 낙하훈련, 레펠훈련, 전투수영훈련 등의 각종 특수훈련이 포함되어 있다. 이중에서 타국의 특공대와는 달리 GIGN은 전투수영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해상에서 선박납치 사건이 발생하거나, 해안에 있는 호텔과 같은 위락시설의 점거와 인질억류에 GIGN이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GIGN는 매년 9천발 이상의 권총사격과 3천발 이상의 소총사격, 계속되는 모의 인질구출작전 등 훈련을 받는다. 이러한 훈련은 대부분의 특공대에서 실시하는 것들이다. GIGN은 대원 개개인들이 맞서게 될 테러리스트들을 심리적으로 압도하기 위해 정신수양훈련(mental training)을 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 단체에 대한 공격유형과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작전에 투입될 경우 테러리스트 및 단체에 대해 세밀한 사항까지 파악하고 있음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GIGN이 갖추고 있다는 것이 강점중의 하나이다.
GIGN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최고의 엘리트 대테러 특공대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체적인 연구와 각종 훈련을 통해 그 어느 특공대보다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금까지 창설이후 GIGN이 수행한 작전은 실패한 적이 없으며, 지난 20여년 동안 560여차례의 특수작전을 통해 모두 550여명의 테러리스트들을 무력화시켰으며 350여명의 인질을 구출해 냈다.
1976년 지부티에서 발생한 스쿨버스 인질구출작전, 1979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회교원리주의자들이 일주일간 장악하고 있던 회교성지 메카사원 진압작전, 1983년 파리의 오를리 공항 납치범 제압작전 등이 GIGN이 수행한 대표적인 작전이다.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구출작전은 1994년에 발생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 납치사건의 구출작전이다.
알제리의 우아리 부메디엔 공항에서 알제리 회교원리주의 테러리스트 4명이 자국의 항공기를 납치하여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마리난 공항에 강제 착륙시키고 프랑스 정부와 대치하자, GIGN이 투입되어 납치범 4명을 사살하고 인질 170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했다.
GIGN은 명성에 걸맞게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제 3세계 국가의 대테러 특공대원들의 훈련을 지원하고 있으며, 한국의 특수부대 역시 GIGN부대를 방문하여 대테러 특공훈련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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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서북쪽 해안도시인 라 스페치아 인근 소읍인 바리그나노에 위치하고 있는 콤수빈은 해군 참모총장의 직접 통제를 받는 부대다. 2백여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2개의 지원부대와 3개의 작전부대로 세분화 되어 있다. 지원부대는 잠수공작원 양성교육과 행정 업무를 각각 관장한다. 작전부대는 '수중작전단', '해군특수전단'과 '기습작전단'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콤수빈은 해병대인 산마르코대대 출신자들에게만 지원자격을 부여한다. 체력검사를 통과한 지원자들은 42주 동안에 걸쳐 혹독한 훈련과정을 이겨내야 한다. 이 기간중 스쿠버 다이빙 등 기초적인 수중훈련은 물론이고 함선 공격, 기뢰 제거, 유격, 공수낙하(스카이 다이빙 포함), 격투, 폭파, 화기 조작, 대테러전 등 거의 모든 종류의 특수훈련을 이수해야 한다.
워낙 훈련이 혹독해 전 과정을 이수하는 자는 전체 지원자의 약 5%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과정을 모두 거쳤다고 해서 완전한 콤수빈 대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작전부대에 배속되면 다시 1년여 동안 고강도의 훈련을 반복한다.
훈련은 주로 야간에 3∼12명으로 구성된 팀 단위로 실시된다. 특히 기습작전단에 배속된 대원들은 암벽타기, 장거리 정찰, 통신, 폭파등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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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만도부대 가운데서 최정예로 손꼽히는 대대급 특수부대로 미 해군의 SEAL팀과 유사한 임무를 수행한다.
SBS 역시 SAS와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 초기 때 창설돼 프랑스, 에게해 등지에서 수많은 무훈을 세웠다. SBS의 선발과정 역시 혹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현역 코만도부대 장교나 하사관에게만 지원자격이 주어지고, 지원자는 체력, 심리검사 등 3주 동안에 걸쳐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테스트를 거쳐야 된다.
일단 이 과정을 통과한 지원자는 다시 15주 동안 정찰, 폭파, 스쿠버 다이빙, 공수강하, 고무보트 조작 등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기본훈련을 마치고 본대에 합류한 뒤에 이들은 다시 자유강하, 수상강하 등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훈련과 해상 대테러훈련도 이수해야 된다.
SBS가 본격적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은 포클랜드 전쟁 때였다. 당시 SBS는 영국군의 반격에 앞서 아르헨티나군이 점령하고 있는 사우스 조지아 등에 침투, 정보를 수집하고 목표물에 대한 기습을 전개, 파괴하는 등 신출귀몰한 작전을 전개해 명성을 쌓았다. SBS의 정확한 규모는 베일에 가려있으나 대략 2백여명 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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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 특공대의 대명사인 SAS는 원래 테러 사건의 담당을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가 아니다. SAS는 군사적인 기습공격과 중요한 정보수집을 위해 1941년 데이비드 스털링(David Stirling) 중령에 의해 창설되어,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과 이태리군에 대항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SAS는 6개 대대의 여단으로 성장했으나, 1952년에 3개 대대(21 SAS, 22 SAS, 23 SAS)로 구성된 연대급 부대로 축소되었다. 각 대대는 4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중대는 사병 72명과 장교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SAS는 케냐, 보르네오, 예멘 등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진압과 대테러리스트 작전에 주로 투입되어 왔다. SAS는 1960년대 말까지 우방국 원수의 경호원들에게 경호에 관한 군사기술을 전수했고, 이 기간 동안에 SAS의 우수한 대원 15∼20명이 한 팀이 되어 테러리즘을 연구하고 항공기 납치범 그리고 기타의 테러리스트 공격에 대한 전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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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이르러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하고 공격빈도가 급증하자 대테러 업무를 담당하는 요원을 증원하여 72명의 대원과 6명의 장교로 구성된 대테러 전담 특공대를 만들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SAS는 1980년 런던 주재, 이란 대사관 인질억류 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최고의 대테러 특공대로서의 명성을 전세계적으로 얻게 되었으며, 독일 GSG-9의 모가디슈 항공기 납치 구출작전, 아센 열차 납치 구출작전, 이태리 수상을 역임했던 알도 모로 납치사건 등에 SAS 요원들이 파견되어 전술적 지도 등 최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성공적 구출작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과 명성으로 인해 전세계 각국의 대테러 특공대 창설의 모델이 되었으며, 미국의 델타포스 역시 SAS의 도움으로 창설되었다.
SAS의 본부는 웨일즈(Wales) 근처의 히어포드(Hereford)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대부분의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 SAS대원은 다른 영국군 부대에서 지원하는 자들 중에 우수한 자원을 엄격한 심사하에 선발하여 16명 단위로 훈련이 이루어지며, 다시 4명 1개 조로 세분화된다. 모든 대원은 킬링 하우스(Killing House)로 알려진 특수시설에서 밀폐지역전투능력(Close Quarters Battle Capability), 각종 화기 및 폭발물 처리능력은 물론이고, 4명 1개 조에서 한 명은 반드시 작전에 투입되는 국가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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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대테러 특공대원들이 습득해야 하는 공수, 레펠, 육박전 훈련, 폭파, 통신기술 등은 SAS대원으로 선발되기 전에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밀폐지역전투(CQB)에서의 사격훈련이다. CQB 기본 사격과정은 6주동안 계속되는데, 이 기간 동안 최소 1,200 에서 1,500발의 실탄사격을 하게 된다. 기본 사격훈련이 끝나면 이동 타겟트에 대한 사격, 신속한 탄창교환 훈련, 총기고장 수리 등 계속되는 반복훈련을 통해 사격의 명수로 양성되게 된다. 일정 수준의 훈련을 마치면 발생 가능한 상황을 상정해 놓고 끊임없이 반복적인 모의 구출작전을 실시하여 실제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특히, 실제 사격이 이루어지는 모의구출 작전에서 SAS대원들이 인질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SAS대원의 사격능력을 입증해 주고 있다.
SAS가 최정예 대테러 특공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요인 중의 하나는 SAS내에 운용하고 있는 작전연구팀(Operational Research Team)이 대테러 작전에 필요한 특수장비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인데, 신경무능화작용탄(Stun Grenade), 특수공격작전용 사다리(Special Assault Ladders) 등이 바로 작전연구팀이 고안해 낸 장비들이다.
SAS는 미국의 델타포스, 독일의 GSG-9 등 서방국가의 대테러리스트 특공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통해 대테러리즘 전술개발과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들 특공대의 실제 작전투입시 특수장비의 지원과 대원들을 파견해 자문역할을 하는 등 테러리즘 근절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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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모스크바의 조직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1987년에 창설하였는데, 활동 목표는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으로 인한 사회 혼란기에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비상사태 발생시 법과 질서를 초기에 확보하여 대규모 혼란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현재 활동중인 대원은 약 2000명이며, 평상시에도 국가 주요 공공시설인 공항, 철도, 고층건물 등을 순찰하면서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으로 즉각 출동하여 사건을 해결하므로 "자유로운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내무부산하의 엘리트 경찰 집단이다.
주요 사건 해결 사례를 보면 1995년 10월 마약전문조직을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일망타진하였으며, 2002년 10월 26일 모스크바 돔 쿨트르이 극장 인질극 진압 작전을 "알파특공대"와 합동으로 해결하였다.
오몬특공대원은 공수부대와 해병대에서 선발된 후보자를 엄격하게 훈련시켜서 정예요원으로 성장시킨다. 오몬특공대는 장갑차와 첨단특수장비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인구 30만 이상의 도시에 주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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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국가 보안 위원회(KGB) 의장인 "안드로포프"가 1974년에 창설하였으며 KGB 제 7총국 소속이다.
알파특공대 대원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정치적인 결점이 본인은 물론이고 친척까지는 없어야 하며, 둘째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셋째 튼튼한 정신과 육체를 가져야 한다. 일단, 대원으로 선발이 되면 전원 장교로 임관되며, 주택과 급여에 대한 특별한 혜택을 부여받으며, 입교 후 1년간은 특수부대에서 사격술, 폭약다루기, 통신, 해상 및 공중침투술, 정보사진 판독법, 실종자 수색법, 통신전문교육 등 여러 가지 교육을 받는다.
개인 휴대화기로는 권총, 기관총 등이며,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제작된 각종 장비도 지급된다. 특히 이들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통신장비를 구비하고, 항공기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알파특공대의 주요 활동 사례를 보면,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 아민대통령 관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1백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선수촌 경비와 주요 인사들의 경호를 수행하였다. 1991년에 발생한 소련 쿠데타 당시 "크루츠코프" KGB 의장은 알파특공대원에게 주요인사 체포와 러시아 의회 건물(벨루이 돔) 공격을 명령하였으나 불복종하여 쿠테타가 실패하도록 하였다. 쿠테타를 진압한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KGB를 해체하고, 알파특공대를 크램린 경비대에 예속시켰다. 1995년 5월 체첸반군이 러시아 남부 부덴노브스크시의 한 병원에서 인질 100여명을 억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알파특공대는 체첸반군에 밀려 퇴각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사건후 대테러리즘에 철저히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크램린 경비대 소속의 알파특공대를 연방보안국(FSB) 예하 대테러리즘 센터(ATC)에 재배치하였다. 최근의 테러리스트 진압 작전으로 2002년 10월 23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돔 쿨트르이 극장에 체첸 분리주의자들이 난입한 사건을 작전 개시 40분 만에 진압하였다.
알파특공대원은 모스크바본부에 약 250명의 병력이 있으며 "예카테린부르크, 하바로프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등에 지부를 갖고 있으며, 50명 정도의 대원으로 편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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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에 소련이 나토 등 서구의 전략 시설물에 대한 정보수집, 파괴, 후방 교란, 요인 납치 및 암살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부대로 군사정보국(GRU)의 통제를 받았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 스페츠나츠는 지상군 소속 16개 후방교란 여단, 해군 4개 여단 등 20개 여단과 독립중대 등으로 구성됐으며, 병력은 2만 7천∼3만 명으로 알려졌다. 각 여단은 다시 1천∼1천 3백명 선으로, 작전시에는 1백 35개의 팀으로 세분화된다. 또 여단은 자체적으로 정보센터를 운영, 필요한 목표물들의 정보를 시시각각 수집, 분석한다.
스페츠나츠의 인적 구성은 크게 특공전투부대원, 전문 체육요원, 해외 공작원 등으로 나뉘며, 이들은 각각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스페츠나츠 훈련소에 입교해 혹독한 훈련을 받아 여단에 배속된다. 특히 유사시 목표국에 침투, 임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외국어 교육에도 치중해 왔다. 스페츠나츠는 1968년 체코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도 정치 지도자 암살과 납치, 군 지휘소 공격 등의 특수 임무를 수행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일부 스페츠나츠 부대는 민족·종교분쟁, 대테러전 쪽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재편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알파(ALPHA)'팀으로 알려진 대테러 부대는 1993년 10월 보리스 옐친대통령에 반기를 든 러시아 보수파들을 체포, 사태를 해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ss.go.kr%2Fwarp%2Fkr%2Fdata%2Fterror%2Fc_terror%2Fimages%2Ftitle_01.gi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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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ss.go.kr%2Fwarp%2Fkr%2Fdata%2Fterror%2Fc_terror%2Fimages%2Fvs_terror_01_1.jpg) BBE는 해병 제1전투단 소속으로 특수주정대(SBS)와 함께 해병 특수부대의 골간을 형성하는 부대다. 네덜란드는 전통적으로 해양국가이므로, 해병대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BBE란 'Bizondere Bystand Eenheid'라는 네덜란드 명칭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전천후 부대 정도로 풀이된다. 대테러전 전문부대인 이 부대의 현재 병력은 3개 소대 90명 선으로 알려졌을 뿐 자세한 것은 베일에 쌓여있다. 이 가운데 2개 소대는 작전 소대이고, 나머지는 행정, 훈련, 보급 등 업무를 수행하는 지원소대다.
BBE는 현역 해병대원 가운데 희망자를 선발해 대원으로 양성시킨다. 그러나 70% 이상이 서류나 체력, 심리 검사에서 탈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입대가 허용된 지원자들은 48주간 동안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된다.
지원자들은 이 기간 동안 대테러전 수행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해야 된다. 고층 건물, 열차, 함정, 항공기 등 테러가 예상되는 모든 종류의 구조물을 이용해 은밀 침투, 포위, 진입, 제어 등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받는다. 위기시 경찰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폭동 진압술도 교육을 받는다.
또 해외에서의 임무수행을 위해 국제법과 현지 풍습 등에 대해서도 관계 전문가들이나 기관의 도움을 얻어 교육을 이수해야 된다.
기본훈련이 끝나면 지원자들은 작전 소대에 배속되어 좀더 높은 단계의 훈련을 실시한다. 실제 작전시 BBE외에도 특수주정대(SBS)와 '위스키'라 불리는 1백 50명 규모의 독립 특공대를 운영하고 있다. 위스키 부대는 유사시 영국 해병대의 제 3코만도 여단에 배속되어 주로 상류지점에 대한 기습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와 함께 특수부대원들의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주정대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네덜란드는 현재 2천 8백 명 수준인 해병대 병력 가운데 20% 이상이 특수부대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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