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목회)상담 수퍼비젼의 신학적 원리와 구성
권수영(연세대학교)
I. 들어가는 말
어느 기독(목회)상담의 지도감독자가 수퍼비젼을 하는 도중 피지도자(supervisee)에게 묻는다. “어떤 접근 방식으로 내담자를 이해하신 거예요?” 피지도감독자는 그간 목회상담학 공부를 통하여 군데군데 배운 대로 정신역동과 가족치료의 개념을 적절히 섞어 설명하였다. 더욱 난감하게 지도감독자는 생뚱맞은 요구를 한다. “기도 좀 해 보시겠어요?!” 목회자이긴 하지만 수퍼비젼 도중에 기도하라는 주문에 그만 그 목회상담사는 당황의 기색이 역력하다. 내담자를 생각하며, 그리고 그와의 상담 경험을 염두에 두고 기도해 보라는 지도감독자의 요청에 그 피지도자는 기도를 시작한다. 기도가 끝난 후 그 기도의 내용을 기억한 지도감독자는 기도 중에 나타난 피지도자의 신학이 그가 진행한 상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었는지에 대하여 성찰하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피지도자는 상담과정 중에 상호간의 심리적 구조만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학적 신념과 하나님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또 이 지도감독자는 분노에 가득 차 하나님에 대하여 불신과 의심에 불타는 내담자를 만난 한 여성 기독상담사와 수퍼비젼을 가진다. 이 상담자는 점점 자기 자신이 내담자의 하나님 이미지를 바꿀 만한 용기와 힘을 상실하여 간다고 안타까움과 좌절을 호소한다. 수퍼비젼이 끝나갈 무렵, 피지도자는 어떻게 내담자의 하나님 표상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새로운 임상적 접근을 알려달라고 주문한다. 지도감독자는 이 피지도자를 향하여 다소 장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내담자에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네?!”하고 반문하기가 무섭게 되묻는다. “내담자의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잠시 생각에 잠긴 피지도자에게 지도감독은 다시 묻는다. “상담자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더더욱 멍해진 피지도자에게 지도감독의 질문이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쏟아진다.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져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제대로 대답을 할 겨를조차 가지지 못한 피지도자는 그제서야 하나님의 실재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독(목회)상담 수퍼비젼의 역할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위에 제시된 두 피지도자들은 기독(목회)상담자로서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심리학적으로 사고하고 사례를 임상적으로 성찰하는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담의 과정을 그리고 그들의 사례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방법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였다. 그리고 지나친 임상적인 방법론에 대한 강조는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실재가 자신과 내담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 지에 대한 성찰 또한 간과하도록 내몰고 있었다. 과연 기독(목회)상담의 수퍼비젼이 구성되는 신학적 원리는 무엇이고, 구체적인 얼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기독(목회)상담자들은 모두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들이요, 자신을 부르신 분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고, 이러한 생각은 상담사역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새롭게 도전을 받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는 변화를 경험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기독(목회)상담자들이 모두 신학적 사고를 하게 마련이고, 그러한 신학적 신념이나 생각들은 진행하는 사역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그 사역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의 신학적 사고가 다시 영향을 받는 순환적인 상호연관성을 지닌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이나 영적인 인식의 흐름은 기독(목회)상담의 수퍼비젼에서 쉽게 간과된다.
필자는 필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목회)상담사들이 임상 경험을 통하여 발달하여 가는 임상적인 단계적 변화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본다. 첫 번째 임상의 시기는 상담을 진행하는 현장에서 내담자와 상담자가 읽은 상담학 교재가 교차적으로 보일 때이다. 책에 나오는 이론과 임상결과들을 상담자는 내담자와 상담자 자신 사이에서 적용하여 보고자 노력한다. 대부분 이 때 상담자는 지도감독도 제대로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두 번째 시기는 철저한 지도감독을 만나면서 상담자 자신이 자신을 보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상담의 임상현장은 책과 내담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자 자신의 심리와 자신의 삶이 드러나고 내담자와의 상호작용이 결코 멈추지 않는 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상담을 위한 신학적 성찰작업이 진행되고, 나름대로의 영성훈련을 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임상적 인식이 가능해지는 단계라고 본다. 특별히 이 시기에는 수퍼비젼을 통한 상담자가 자신과 내담자 사이에 있는 ‘그 분’의 자리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내담자와 상담자가 공히 소망하고 목적하는 변화가 사실 내담자로부터 오는 것도, 혹은 상담자 자신의 임상적 접근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닌, ‘그 분’에게로부터 와서 결국 모두에게 상호작용하고, 통합되면서 엄청난 실존적인 힘을 주는 목회적 사건이 된다. 이는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 하나님의 실재와 그 분의 변화의 사역을 경험하는 사건이기에 마치 회심의 사건과도 비견될 수 있다(권수영, 2005).
이에 필자는 기독(목회)상담에서의 수퍼비젼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상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재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신학적 작업이라고 본다. 이에 임상적 분석을 주요 기능으로 삼는 상담 수퍼비젼에서 어떻게 신학적 원리가 적용되는지 살펴보고, 그러한 신학적 원리를 토대로 구성되는 수퍼비젼의 모형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본 소고에서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방법론적인 변천을 살펴보면서, 신학적 방법론이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를 거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신이 만나는 접점에서 어떠한 강조점을 가지고 발전하였는가와 이러한 변천이 목회신학의 태동과 발전에는 어떠한 상호연관을 가지는 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목회신학적 원리로 구성된 수퍼비젼의 구성 방식을 소개하면서, 기독(목회)상담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재성찰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에서의 주요한 수퍼비젼의 매개적 역할을 강조하고자 한다.
II. 신학방법론의 변천: “있음”에서 “앎”으로 그리고 “삶‘으로
누구나 지구상에서의 학문의 태동을 말하고자 한다면, 인간이 진지한 사고 기능을 가지고 질문과 해답을 추구하는 과정의 원형으로 그 기원을 희랍 철학(philo-sophia)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이라는 학문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언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플라톤이 “신학”(theologike)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라고 알려져 있고, 이 후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체적 언급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학은 형이상학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용어 그 자체로는 학문의 순서를 언급하는 개념이다. 즉, 형이상학은 그 해석적 의미가 경험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단어의 본 뜻은 “meta”가 이후(after)를 나타내는 접두사이므로 물리학과 같은 자연학(physika) 이후에 오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학문의 순서를 말할 때 자연학을 먼저 배운 다음에 모든 존재 전반에 걸친 근본원리 즉 존재하는 것으로 하여금 존재토록 하는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제1철학”(proto-philosophia) 또는 “신학”(theologike)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사에 있어서, “제1철학”은 모든 존재사물에 대하여 그것들이 “있다”라고 말해지는 한에서 그 “있다”를 성립시키고 있는 제1의 원리, 원인 혹은 요소의 질서가 궁극적으로는 제1의 존재자인 신(神)에 어떤 의미로든 의존하므로 “신학”이라고 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근원을 묻는 존재(있음)의 학문인 형이상학은 중세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창조자로서 신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신학과 결합되어 오늘의 기독교 신학의 모체를 이룬다.
철학사에 있어서의 방법론의 변천은 가장 먼저 고대와 중세의 형이상학이 다루는 “부동의 제1원인”이 내포하고 있는 객관주의적 일방성에서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등장한 근대(데카르트) 이후에 드러난다. 부동의 신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신개념이 문제가 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는가하는 주관주의적 인식론이 이전의 개념적 틀을 대체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론적인 틀은 점점 보다 주관주의적인 일방성의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일방주의의 극단을 피하려는 변증적인 틀이 제시되는 데, 실존철학(생의 철학), 유물론, 해석학을 비롯한 보다 적극적인 반형이상학적 반동을 들 수 있겠다. 이전 시대와는 달리 삶의 자리, 사회경제적 상황이 중요한 매개로 등장한다. 즉, 존재의 부조리성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 ‘상황’ 안에서 사회와 역사에 참여하여 그 상황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보다 쌍방적인 상호관계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이에 정재현(2005)은 고중세를 “객관주의적 일방성의 시대,” 그리고 근대를 “주관주의적 일방성의 시대,” 그리고 현대를 “쌍방적인 상호관계성의 시대”라고 부른다(pp. 216-217).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의 변천사는 신학적 방법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온 것이 사실이다. 현대 신학방법론 논의에서 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하버드의 조직신학자 Gordon Kaufman(1999)은 신학의 방법론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려고 시도한다. 먼저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객관주의 유형이 “1차 신학”(first-order theology)이다. 신학이 “있음"의 순서에 따라 존재의 제1원인인 신으로부터 전개될 수 있다는 구도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계시(revelation)이다. 신이 그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 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요, 출발점이다. Kaufman이 제시하는 “2차 신학”(second-order theology)은 근대의 인식론적인 전환 이후에 전개되는 주관주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앎”의 순서를 따라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에서 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구도이다. 여기서는 계시보다는 이성이 강조되는 개념적 틀이다. 그러나 항시 2차 신학의 한계가 드러난다. 여전히 1차 신학의 객관주의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비교의 논리를 기조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근대 신학의 단골주제로 계시와 이성은 늘 긴장적으로 대립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적 논의는 인간의 땀내 나는 현실, 즉 "삶"과는 동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인식자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모호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개념일 뿐이지, 실제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실과 맞닿는 '신학하기'(doing theology)를 위한 방법론이 모색되어야 할 필요성이 등장한다. 이를 Kaufman은 “3차 신학”(third-order theology)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Kaufman의 제3의 신학 방법론의 전개에는 그 자신이 일본의 원폭투하 지역인 히로시마를 직접 방문한 이후에 생겨난, 보다 적극적인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실존적 논의가 그가 1985년에 발간한『핵시대의 신학』(Theology for a Nuclear Age)에 잘 드러나 있다. 이를 정재현(2005)은 “있음”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의 철학적인 시대정신(반형이상학)의 전환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본다.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도 “있음”과 “앎”은 대등적인데, 늘 한편으로의 극단적인 치우침을 면하기 어렵다. 이에 보다 긴장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삶"이라는 동시적 순환성을 위한 지평이 등장하면서 있음과 앎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보다 통전적으로 재구성하는 토대가 마련된다.
Kaufman(1981)이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인 계시보다 인간의 상상력(imagination)을 새로운 신학의 주제로 제시하면서, 그는 모든 신학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단순히 기독교전통의 재해석이나 번역작업이 아니라, 신학은 “인간의 삶을 위하여 보다 적당한 방향성을 제공하려는 인간의 상상력의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정의한다(1985, p. 20). Kaufman의 신학은 결국 인간의 현실 가운데 있는 “인간의 삶에 작용하는 방향성” (orientation for human life)을 여실히 보여주는 3차 신학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인간의 “삶”이 신학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본원리로 작용한다는 현대 신학방법론적 변천이 21세기 한국 신학계에 불고 있는 목회 및 실천신학의 새로운 역사에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III. 목회신학의 발전: 1차, 2차, 그리고 3차 신학과의 만남
목회상담(pastoral counseling)이라는 것은 임상적인 실천(clinical practice)이다. 그렇다면, 목회상담-‘학’이라는 학문은 어디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미국의 목회상담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이는 결국 목회신학(pastoral theology)의 발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목회상담이라는 임상적 실천에 대하여 연구하는 목회상담학이라는 학문은 결국 목회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현대 목회신학과 목회상담이 발전하게 되는 역사를 살펴보자면 맨 먼저 Seward Hiltner (1909-1984)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시카고대학에서 학부를 공부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목회현장에서 10여년 간 목회 및 교단과 관련된 기관사역을 한 후, 시카고 대학교에서 11년 간(1950-61) 그리고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20년간 교수생활(1961-80)을 한 신학자이다. 이 기간동안 배출된 그의 많은 제자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주요 신학교에서 목회적 돌봄과 상담, 그리고 목회신학 및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학자들이 되었다. 결국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미국 목회상담이나 목회신학의 발전에는 그의 지대한 영향력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현재 한국 목회상담 혹은 기독교상담계에 제기되는 몇 가지 용어나 호칭의 문제와 그에 따른 오해를 접할 때마다 Hiltner의 목회신학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목회상담과 기독교상담은 어떻게 다른지, 다르지 않다면 왜 두 가지 용어를 쓰는 지 말이다. Hiltner(1958; 1968)는 일찍이 그의 목회신학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목회적” (pastoral)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정의에 대하여 언급한다. 먼저, 이 단어는 ‘기능적’ 정의이기 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회자의”(pastor's)라는 의미로 사용될 경우에, 안수 받은 목회자가 하는 일들(pastor's jobs)은 모두 ‘목회적’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정의이다. 목회자가 하는 일은 과연 모두 ‘목회적’(pastoral)인가? 이러한 기능적 정의를 고집하자면, 목회자가 꼭 안수받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더라도, 적어도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목회자가 아닌 사람이 ‘목회상담’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목회자이기만 하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목회적’이 되거나, 그가 하는 모든 상담이 ‘목회상담’이 된다는 것 역시 말도 안되는 억지가 된다. 이에 기능적 정의 중에서도 포괄기능적 정의가 아닌, 개체기능적 정의를 하려는 시도를 제기하여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목회자(목사)라는 사람이 하는 일 모두가 아니라, 목사나 교회가 갖는 여러 가지 기능 중에서, 예를 들어, 교리문답교육, 설교, 행정 등의 기능들 중에서도 성서적인 본래의 뜻대로 "양떼를 먹이고 돌본다(“poimenics”; shepherding)라는 한 지엽적 기능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결국 심방을 한다든지, 유가족을 위로한다든지, 위기시에 상담하여 주는 돌봄의 기능들만이 ‘목회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신학자 Hiltner의 주장은 단호하다. 이 두 가지 기능적 견해로는 결코 적절한 목회신학을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목회자가 하는 ‘모든’ 일을 다 ‘목회적,’ 혹은 ‘목양’ (shepherding)이라고 보기 어렵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심방이나 상담과 같은 간혹 가다가 행하는 지엽적 기능만이 진정으로 ‘목회적’, 혹은 ‘목양’ 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물론 이 두 가지 견해에서 공히 배울 게 있다. 특별히 성서에서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역의 성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목양(shepherding)이란 원래 포괄적이고, 또 구체적으로 구별될 수 밖에 없는 개체적인 하나의 카테고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적, 혹은 목양적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성서에 기초를 둔 목양 (shepherding)이란 무엇일까? Hiltner(1968)에게 목양이란 기능(what to do)의 문제라기 보다는 “관점”(perspective)의 문제이다(p. 17). 우리가 “어떻게” 하는 가에 문제(the way we do)라는 것이다. 즉, 목양에서는 어떠한 준비자세(readiness), 어떠한 태도(attitude), 어떠한 견지에서 보느냐(point of view)가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관점’으로서의 목양이 ‘목회적’(pastoral)의 두 가지 기능적 견해를 통합할 수 있는 해결점을 제공한다. 목양이 목사나 교회가 하는 일 전부일 수 있는가? 목양의 관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목회적’ 설교도 가능하고, ‘목회적’ 행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목회자가 어떠한 일을 행할 때 그리스도의 사역을 닮은 준비자세와 태도, 견지를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떤 일을 하여도 목양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심지어 그가 ‘목회적’인 심방과 상담을 행하더라도 그의 기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가 더 중요한 ‘목회적’ 혹은 ‘목양’의 결정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평신도가 하는 일이 목회적일 수 있냐의 문제도 안수 받지 않은 이가 목회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여준 목회적인 관점(perspective)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이에 목양이 관점이라면, 목양은 늘 기능적으로 상관관계적 (correlational)이다. 기능적으로 부분, 부분을 따로 보지 않고는 전체를 말할 수 없다. 상관관계적 관점에는 필요할 때 어느 특정한 기능 수행이 가능하다고 보고, 언제나 다시금 전체적인 조화에로 복귀한다는 입장을 제공한다.
한국 목회상담협회나 기독교상담 심리치료학회는 그간 “목회상담”(목회상담사)과 “기독교상담”(기독교상담사)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여 왔다. 여느 기관이나 목회상담사와 기독교상담사는 공히 거의 동일한 교육과정과 훈련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호칭으로 자격증을 받게 된다. 단순히 목회상담사라는 호칭은 안수 받은 목회자에게, 그리고 기독교상담사라는 호칭은 세례 받은 교인들에게 쓰여지는 것만 다를 뿐이다. 너무 어떠한 자격이나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하는 지에 대한 기능적인 정의에만 초점이 있어서, “어떻게”하는 지에 대한 방법론적 관심은 희석된다. 필자는 ‘기독교+상담’이라는 것과 ‘목회+상담’이라는 용어들에 있어서 사실은 “기독교”(Christianity) 혹은 “목회”(ministry)라는 용어가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체계를 구성하면서 상담체계와는 별개인 명사형이라기 보다는, 보다 구조적인 과정과 성격을 규정하는(즉, 목회적이고 혹은 기독교적인) 방법론적 방향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권수영, 2004). 사실 기독교(Christian)상담의 “기독”(Christian)이라는 형용사도 “기독교인의”의 의미보다는 성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혹은 그리스도를 닮은(Christ-like)의 의미로 생각할 때, 목회(pastoral)상담에서의 “목회적”(pastoral)이라는 형용사 역시 목자(shepherd)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는 목회신학적인 방법론의 관점에서는 동일선 상에 있음이 명백하다. 필자의 욕심 같아서는 “기독-목회상담”(Christo-pastoral counseling)이라고 해서 통합하여 사용하자고 주장하여 두 용어의 혼동을 막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 역시 “역전 앞”과 같은 동의어 반복이라는 비판도 있을 법하여 잠시 접어두려고 한다. 단지 여기서는 목회신학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목회상담’과 ‘기독교상담’라는 임상적 실천이 결코 상이한 체계가 될 수 없다는 점만 강조하고자 한다. 필자가 기독(목회)상담이라고 쓰는 이유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결국 목회(pastoral)신학은 이 “목양의 관점” (shepherding perspective)을 연구하는 데서 나오는 학문이다. 마치 유목시대의 은유처럼 보이는 이 “목양의 관점”은 최근 많은 흑인 신학자들에 의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매우 개인적이고 상하 수직적인 개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흑인 여성신학자는 이 “목양의 관점”은 미국 흑인공동체에 적용하기에는 개인적이고 지극히 협소한 개념이라고 비판한다(Watkins Ali, 1999). 그래서 “목양의 관점” 이 아닌 “여성주의적 관점”(feminist perspective) 혹은 “워머니스트 관점”(womanist perspective)을 강조하게 된다(Miller-McLemore & Gill-Austern, 1999). 사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나 세계관(world view)을 의미하는 “관점”은 Hiltner가 애초에 언급한 “관점”(perspective)과는 거리가 있다(Emerson, 2000, p. 339). Hiltner에게 “관점”(perspective)이란 인간의 상호적인 행동이나 기능의 여러 양태, 즉 소통하고(communicating), 조직하고(organizing), 혹은 돌보는(shepherding) 행위들을 운용하는 구체적인 방식의 문제이다. Hiltner의 “목양의 관점”은 단순히 목자(목회자)가 한 양(교인)을 어떻게 보는 가의 개인적 시각이나 세계관의 문제이기 보다는, 성서에 드러난 목양의 모습을 지금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다양한 학문적 방법들을 운용하는 새로운 신학하기("doing" theology)를 성찰하는 과정이다. 당연히 목회신학은 논리 중심 신학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행동-기능 중심(operation, function-centered)이 된다. 신학의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이 없이 동일한 신앙의 공동유산(하나님, 인간, 죄, 구원과 같은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를 1차 신학 혹은 2차 신학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내담자의 죄의 문제, 그의 하나님 인식의 문제로 재해석하는 보다 3차 신학적인 틀 안에서 성찰하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그럼, 이제 목회신학 혹은 기독(목회)상담의 모형을 Kaufman의 신학방법론 분류와 연관하여서 살펴보자. 1차 신학적인 목회상담의 틀은 전통적인 정통주의신학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영원불변의 계시된 진리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 잡아 내담자의 ‘상황’이나 ‘삶’으로 매개하기 위한 접촉점을 찾기 어렵다. 지나친 선포 중심의 성서적 상담을 예로 들 수 있다. 분노감에 시달리는 내담자에게 일곱 번에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명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을 선포한다. 그런 목회자들에게 내담자는 속으로 불평할지도 모른다. “그걸 누가 모르나요? 그리고 제가 그걸 물어본 게 아니예요!” 신학자 Paul Tillich의 언급대로, "인간은 그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코 대답으로서 받을 수 없다"는 점은 목회상담자에게도 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1951, 65). 사실 임상현장에서 내담자들이 묻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바로 “어떻게”인 것이다. 그래서 “무엇”에 주된 초점을 둔 이러한 1차 신학적 상담모형은 “내용 모형”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반신환, 2004).
2차 신학적 목회상담이란 자연의 질서나 인간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그 문제에 대한 해결까지도 자연과 인간 안에서 모색하려는 자유주의 신학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심리학적이고 임상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이러한 상담 방법론은 “어떻게”라는 방법에 치중한 나머지 질문과 해답이 동일하게 인간으로부터 파생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2차 신학적 목회상담은 늘 일반상담과 무엇이 다른 가하는 정체성 논란에 쉽게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 모형”에서는 인간 변화의 궁극적인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무엇”마저도 심리학이라는 "어떻게"가 대체하게 되는 2차 신학적인 일방주의나 환원주의의 제한점을 쉽게 드러낸다. 예를 들면 이러한 2차 신학적 목회신학 방법론에서는 우울증치료는 목회상담이든지, 일반상담이든지 관계없이 인지치료가 가장 효율적이라는 “어떻게”에 치중한 나머지, 목회상담자과 내담자 사이에서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무엇”)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인지치료를 쓰느냐 마느냐가 가장 우선되는 방식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3차 신학적 목회상담의 방법론에는 “무엇”과 “어떻게”에 “누가”와 “언제 어디에서”라는 삶의 요소들을 가미한다. 3차 신학적인 상담 현장에서는 상담자 자신이 한 내담자와 바로 삶의 한 복판에서 함께 만나 변화의 주체인 하나님에 대하여 공유하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Kaufman이 언급한 “인간의 삶을 위하여 보다 적당한 방향성을 제공하려는 인간의 상상력의 창조적인 작업”의 일환으로 신학과 기타 인간 과학이 대화하고 혹은 통합된다. 영어 알파벳 H에서와 같이 전통적인 신학이라는 축과 심리학과 같은 인간과학 혹은 사회과학이라는 또 다른 축을 가운데서 긴장적으로 붙잡고 통합적으로 만나도록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을 목회신학에 비유한다면 임상적으로도 두개의 방법론을 양쪽에서 똑같은 거리와 무게를 두고 함께 사용하는 제3의 목회상담 방법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권수영, 2004).
목회신학은 단순한 응용신학 (one-directional applied theology)만은 아니다. 즉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여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현장에서, 즉 교회나 상담실에서 실천하는 방법에 대하여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선형적(linear) 혹은 연속적(sequential) 관계는 늘 괴리감과 단절감을 제공한다. 이론은 신학교에서 실천은 현장에서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러한 등식이라면, ‘실천 없는 교육’이나 ‘이론 없는 현장’도 오답이 아니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목회신학은 실천을 성찰하고 이론화하여 다시 실천으로 나아가는 보다 순환적인 해석학적 구조를 가진다. 가장 단적인 예가 기독(목회)상담의 수퍼비젼 과정이다. 기독(목회)상담의 과정은 배운 이론을 적용하고 끝나는 ‘이론-실천’의 단절을 허용하지 않는다. 늘 기독(목회)상담 사역은 ‘실천-이론의 재성찰-실천’의 원리로 구성된다(Browning, 1991, p. 39). 단순히 배운 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해본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실천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근본적인 이론의 재해석을 도출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한 이론의 재해석은 다시금 상담 현장으로 돌아갈 때 실천의 밑그림으로 작용하고, 이 때 정기적인 수퍼비젼은 지속적인 재해석의 순환적 기능의 중요한 매개적 역할을 담당한다.
목회신학은 신학적 주제나 기독교의 교리를 삶 가운데 행하는 일을 돕는 사역에 있어서 심리학을 비롯한 다양한 다른 학문분야의 지식을 응용한다. 그러나 목회상담에서 정신분석과 가족치료 등의 임상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기능적인 정의를 가지고 목회상담이 단순히 기독교인이 행하는 정신분석이나 가족치료의 기독교버전이 되어서는 안된다. 보다 목회신학적인 틀 안에서는 상담적 실천과 성찰 과정을 통하여 결국 근본적인 신학적인 이해에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전통적인 인간의 ‘죄’의 문제를 재성찰하기 위하여, 한국적인 상담현장에서 내가 만난 내담자의 ‘삶’ 가운데서 정신분석학이나 가족치료, 혹은 사회심리학적 도움으로 그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 또한 그가 가족적, 혹은 사회문화적 구조 가운데 당한 ‘한’의 경험을 돌보는 경험을 가지고 다시금 기독교의 ‘죄’에 대한 교리적 이해를 재성찰하는 작업이 바로 목회신학적 작업인 것이다. 신학자 박승호(1998)가 행한 서구 기독교적인 죄에 대한 단편적 이해를 제3세계의 현장에서의 ‘한’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것은 대표적인 목회신학적 틀이라고 볼 수 있겠다.
IV. 수퍼비젼의 목회신학적 원리와 구성
이제 이러한 목회신학적 틀 안에서 어떠한 신학적 원리로 수퍼비젼을 구성할 것인지를 살펴본다. Hiltner의 목회신학적 원리는 목회상담자들이 내담자와 만나는 임상현장에서 결코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주요 증상(symptom)이나 문제(problem)에서 출발하지 않고, 신학적인 주제에서 출발해야 함을 공고히 한다. 기독(목회)상담의 현장에서 상담자는 결국 모두 신학적인 작업을 하는 신학자이다. 기독(목회)상담자인 내가 우울증을 가진 한 기독교여성을 상담하는 것은 우울증이라는 ‘증상’이나 ‘문제’를 다루는 임상적 작업만이 아니라, 그 내담자가 잃어버린 기독교적인 ‘소망’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그녀의 삶의 자리에서 재해석하고 결국 소망에 대한 새로운 목회신학적 재성찰을 시도하는 신학적 작업이다. 목회상담의 현장에서 많은 임상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목회신학자 혹은 실천신학자들이 다루는 주된 주제는 인간, 죄, 죽음, 가족, 성, 신앙, 자기 인식 혹은 하나님 인식 등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기독(목회)상담의 수퍼비젼을 진행하는 지도감독자의 가장 중요한 방향성(orientation)은 그가 어떠한 임상적인 방향성을 견지하는가 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가 어떠한 신학적 자기 인식과 성찰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또한 무엇보다 자신이 지도감독하는 상담자를 하나의 신학자로 인식하는가의 문제이다. 많은 경우 신학공부를 하지 않고, 안수받지 않은 소위 기독교상담사를 지도감독할 경우에 그 상담사를 어떻게 신학자로 인식할 수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목양적 관점이 결코 사역자의 기능적 차원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Hiltner가 들으면 무척 섭섭할 소리이다.
Hiltner와 그의 제자들도 신학적 성찰방법론인 목회신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대별될 수 있는 두 가지 신학과 신학자의 양태를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적 신학자(academic theologian)가 있는 반면에, 신학을 교회나 병원 혹은 상담실에서 실천하고 그리고 다시 재성찰하는 임상적 신학자(clinical theologian)가 있다는 것이다(Patton, 1986, p. 129). 필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목회신학의 장래를 얼마나 학문적 신학자와 임상적 신학자가 긴밀한 유대관계 가운데 상호협력할 수 있을까의 문제로 본다. 기독(목회)상담이라는 분과가 신학의 한 분과이기는 하지만, 다분히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신학과는 거리를 두는 태도를 가지거나, 혹은 학문적인 신학자들이 기독(목회)상담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해석적 소리에 둔감하다면 우리가 살 21세기에 신학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에 결코 적절하게 응답하지 못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도감독자의 수퍼비젼에 대한 구성방식과 방향성은 그가 지도감독할 사례를 어떻게 보는가와도 상관이 있다. Hiltner의 초창기 제자였던 John Patton(1986)은 우리가 흔히 의학적 모형이나 심리학적 모형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쓰는 “사례”(case)라는 용어를 “목회적 사건”(pastoral event)으로 바꾸어 쓰자고 제안한다(p. 130). 수퍼비젼의 시작에서부터 이 사례가 한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에서 일어난 “목회적 사건”임을 강조함으로 임상적 성찰보다 앞선 신학적 성찰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필자가 미국의 한 목회상담기관에서 임상훈련을 받을 때에 필자의 지도감독자는 Hiltner에게서 마지막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Sandra Brown이었다. 그녀의 수퍼비젼은 늘 신학적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 상담 경험을 통하여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무엇인가? 혹은 신학적 주제는 무엇인가?” 수퍼비젼을 시작하면서 신학적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당시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필자에게 심지어는 그 주제에 대한 최근 조직신학자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냐는 질문도 서슴치 않았다. “아니, 뭐 내가 조직신학 전공생도 아닌데, 별일이야?” 라는 생각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항상 수퍼비젼이 끝나갈 무렵에는 애초에 제기된 신학적 주제를 상담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재성찰하도록 요구하였다. 사실 그녀는 Hiltner가 그녀에게 강조한 주문사항을 또 다시 필자에게도 재현하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다시 필자에게 주문된 Hilner의 강력한 메시지는, “생각해라. 그리고 행동해라: 행동해라. 그리고 생각해라!: 그리고 나서 더욱 열심히 생각해라. 그리고 더 많이 행동해라”(Think and Do: Do and Think: And then Think Harder and Do More!) (Brown, 1986, p. 117). 이러한 목회신학적 원리에 의거하여 구성된 수퍼비젼이 다른 일반적인 임상수퍼비전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이를 Patton(1986)은 상담과정에 대한 축어록 중심의 분석보다 한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대한 강조라고 힘주어 말한다(p. 133). 물론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를 비판적으로 재성찰하기 위한 목회신학적 성찰에서는 신학적(영적)인 구조와 더불어 심리학적 구조에 대한 긴장적이고 통합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아래는 필자가 사용하는 목회신학적 원리에 의하여 구성된 “목회적 사건(사례)에 대한 보고 목차”이다.
(1) 임상정보
대략적인 구성을 본다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물론 일반적인 임상정보에 대한 부분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 때 축어록은 나머지 3부분에서 성찰하는 해석적 작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상담의 과정 일부를 소개하는 기능을 한다. 필요 없이 한 회기 전체를 풀어 쓰거나 아니면 성찰할 내용과는 관계없는 부분을 무절제하게 축어록으로 구성하지 않도록 지도한다.
(2) 신학적/ 영적인 구조
두 번째 부분은 신학적 성찰에 대한 부분이다. 내담자에 대한 심리적 구조를 성찰하기에 앞서서 먼저 신학적 성찰이 선행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 인간의 심리, 즉 ‘증상’이나 ‘문제’를 먼저 보고, ‘어떻게’를 분석하기 보다는 내담자와 상담자, 그리고 이들 사이에 있는 신학적 인식, 즉 하나님의 ‘있음’과 인간적 ‘앎’ 그리고 그 사이에 변증법적으로 존재하는 ‘삶’이 어떠한 연관관계에 있는가에 대하여 먼저 관심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담자의 신념체계를 성찰하여 보고, 내담자의 신념체계와 내담자의 실제적 자기이해, 삶의 방식, 기능 및 행동양식과 일치하는 점과 또 일치하지 않는 점은 무엇인가를 성찰하여 그 내담자 자신만의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으로 신학적 성찰을 시작한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에서 상담자 자신의 신학적 인식 또한 중요한 성찰의 요소가 된다. 여기에서 다시 이 상담 경험을 통하여 떠오르는 어떠한 신학적 개념이나 주제, 그리고 성서 구절 등을 가지고 재성찰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삼는다. 그리고 나서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목회적 작용(pastoral operation)을 성찰하고, 이러한 상호적 경험이 그들 각자의 신념체계, 하나님 인식 등에 어떠한 영향이나 도전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도록 인도한다. 이 신학적 성찰 부분에서 임상적 신학자(clinical theologian)로서의 지도감독자의 중요한 과제는 한 개인의 ‘삶’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과 상담이라는 목회적 사건이 얼마나 하나님의 실재(있음)와 내담자의 인식체계(앎)와의 괴리감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을 유도하는 것이다. 피지도자의 상담이 1차 신학적 상담이나 2차 신학적 상담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가의 관건이 여기에서 신학적 성찰의 첫 단추를 어떻게 끼는 지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3) 심리적 구조
세 번째 부분은 내담자의 심리구조에 대한 성찰로서, 기타 일반 상담이나 심리치료의 수퍼비젼에서 볼 수 있는 임상적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게 구성된다. 전이와 역전이에 대한 평가, 상담관계에 있어서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분깃점, 임상단계에 대한 평가, 정신장애적 진단, 치료계획 및 전략 등으로 구성된다.
(4) 목회적 전망
결론적인 네 번째 부분은 목회적 전망, 즉 Hiltner가 언급한 “목양관점”(shepherding perspective)에 관한 성찰이다. 본 상담에서의 상호적 경험이 신학적인 토대로부터 출발한 상담자 자신의 신학적 평가에 어떠한 재성찰을 하도록 요구하는 가를 묻는 것이다. 지극히 중요한 수퍼비젼의 결론적 성찰은, 어떻게 본 상담경험이 상담자의 목회상담을 목회적이 되도록 하였는가 (what makes your pastoral counseling pastoral)를 깊이 성찰하도록 돕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목회)수퍼비젼의 목적이요, 다시 현장을 향하여 새로운 실천을 위하여 나가는 상담자에게 힘을 더하여 주는 이론적 재성찰의 팡파레가 아닐까?
목회적 사건(사례) 보고 목차
1. 일반적인 임상정보:
(1) 상담에 임하면서 내담자에 의해 제시된 문제들
(2) 내담자의 개인적 역사/가족사
(3) 임상적 평가
(4) 축어록
2. 신학적/ 영적인 구조:
n 내담자의 신학적/ 영적인 인식
(1)내담자의 신념체계 (내담자의 내면적 삶에, 내담자와 타인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무엇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는가?)
(2)내담자의 신념체계와 내담자의 실제적 자기이해, 삶의 방식, 기능 및 행동양식과 일치하는 점과 또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n 상담자의 신학적/ 영적인 인식
(1)상담자의 신학적/ 영적인 인식 (내담자와의 치유과정에 참여하면서, 어떠한 신학적/ 영적인 의미를 구성하는가?)
(2)내담자와의 임상과정 중에, 혹은 치료적 개입을 계획하면서, 떠오르는 성서의 구절이나, 신학적 개념/ 이미지들은 무엇인가?
(3)상담자의 신념체계와 실제적 자기이해, 삶의 방식, 기능 및 행동양식과 일치하는 점과 또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n 상담자와 내담자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신학적/ 영적인 구조
(1)내담자의 신념체계와 함께 작용하는 당신의 신념체계, 신학, 영성은?
(2)본 상담경험이 내담자의 신념체계를 어떻게 명확히 하고, 확대시키거나, 또한 도전하는가? 그리고 상담자의 신념체계를 명확히 하고, 확대시키거나, 또한 도전하는 부분이 있다면?
3. 심리적 구조:
(1)내담자에게 작용하는 심리적 요소는 무엇인가? 어떠한 심리적 전이 (transference)가 일어났는지 (구체적 예가 도움), 상담자는 상담에 어떻게 이를 다루고, 이용했는가?
(2) 상담자에게 작용된 심리적 요소는 무엇인가? 무엇이 상담자의 편에 서도록 했으며, 무엇이 멀어지게 하거나, 가장 효과적으로 (혹은 비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하였는가? 어떠한 심리적 역전이 (counter-transference)가 일어났는지 (구체적 예가 도움), 상담자는 상담에 어떻게 이를 다루고, 이용했는가?
(3)내담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 가장 긍정적인 (그리고, 혹은 가장 부정적인) 분깃점 (turning point)이 있었는가? 어떠한 심리적 구조가 이런 주요한 분깃점이 일어나도록 했다고 생각하는가?
(4)현재의 상담이 어떠한 임상적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는가? (초기, 중기, 말기, 종료). 어떻게 상담자가 각 단계를 이해하고, 단계마다 어떠한 치료적 개입을 했는지 요약한다면? 어떠한 개입이 지속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또 어떠한 개입은 변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는?
(5)정신장애적 진단을 한다면? (DSM-IV)
(6)다음 단계를 위한 치료계획, 전략과 목적은?
4. 목회적 전망:
(1)내담자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목회적, 윤리적 경계 문제들 (boundary issues)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2)내담자의 치료적 관계를 평가하면서, 상담자가 자신에 대해 새롭게 느끼고 배운점이 있다면? 목회상담자로서의 본인의 성장에 새롭게 느끼고 배운점은?
(3)수퍼비젼이 어떻게 상담자의 상담을 지원하고, 보강하고, 또한 도전하였는가?
(4)본 상담 경험이 신학적인 영적인 토대에 기초하는 상담자의 목회상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새롭게 하고, 또한 도전하였는가? 다시말해, 어떻게 본 목회적 사건(사례)이 상담자의 목회상담을 목회적이 되도록 하였는가 (what makes your pastoral counseling pastoral)를 평가하라.
V. 나가는 말
인류사에 있어서 신학의 방법론은 실재와 방법 사이에서 일방적인 편향성을 지닌 채 자주 극단의 모습을 취하여 왔다. 이러한 신학은 인간의 삶을 배제한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논리 구성으로 끝나고 만다. 다시 말해 실재가 ‘무엇’과 ‘있음’에 해당하고, 방법이 ‘어떻게’와 ‘앎’에 해당한다고 할 때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는 한 인간의 ‘삶’의 자리는 설 곳이 없다. 이에 필자는 Kaufman의 대안적인 3차 신학적 신학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목회현장에서 경험하는 내담자의 삶의 한 복판에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하는 목회신학적 방법론을 3차 신학과 연관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기독(목회)상담을 연구하는 일은 목회신학적 작업이다. 기독(목회)상담의 현장에서 모든 상담자는 임상신학자이고, 이러한 임상신학자의 신학적 성찰을 돕는 장이 바로 수퍼비젼이다. 다시 말해, 목회신학에 기초를 둔 수퍼비젼은 목회현장에 있는 사역자로 하여금 기본적인 신학적인 이해의 비판적인 재해석을 위하여 목회적 경험을 콘텍스트로 하는 신학적인 성찰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에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이러한 기독(목회)상담의 수퍼비젼은 두 가지 영역에서 크게 공헌하리라고 본다. 첫 번째는 임상적 공헌이고, 두 번째는 학문적 공헌이다. 먼저 목회신학적 원리로 구성되는 수퍼비젼의 실천은 수많은 임상적 실천 체계 가운데서 기독(목회)상담을 과연 어떻게 ‘기독적(Christian) 혹은 목회적(pastoral)’이게 할 수 있을 까 성찰하는 과제에 주력하면서 궁극적으로 기독(목회) 상담의 중요한 정체성 확립에 지속적인 일조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학의 학문적 발전에 있어서도 수퍼비젼에서 진행되는 신학적 주제들의 재성찰은 우리 시대가 이 땅에서 필요로 하는 기독교 신학의 재구성을 위하여 가장 현재적이고, 현장적인 재해석의 자료들을 제시하는 남다른 공헌을 할 것이라고 본다. 그간 신학이라는 학문이 걸어온 하나님의 “있음”이나 인간의 “앎”으로만 치닫는 폐쇄적인 일방주의를 넘어서 이제 “삶”으로의 적절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새로운 신학적 과제가 현장에서 땀 흘리는 임상신학자들, 바로 우리 기독(목회)상담자들로 하여금 완성되어 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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