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이 임박해서 부산에 사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진주에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타고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약속이 없다는 것에 나는 기뻤다. 도착하면 전화를 하라며 걸어서 시외버스 정류소 근처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버스에서 내렸고, 둘은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평소 자주 전화도 하고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라 별다른 애기 없이 우리의 대화는 세상살이와 등산으로 이어졌다. 나는 직장생활 짬짬이 산을 가게 되지만 그 친구는 자기 사업을 하여 시간의 여유가 많아서 해외 등반은 어렵지만 국내산은 대부분 다닌단다.
요즘은 산악회도 무슨 체인조직처럼 전국규모의 연합이 되어 있어 특정 산악회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닐 수 있단다. 그래서 그 친구는 이 곳 저 곳의 산을 많이 접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공통된 이야기는 당연히 한 살이라도 젊어서 산을 많이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고, 친구는 볼일이 남은 터라 식사와 가볍게 소주 한잔 곁들이고 헤어졌다.
길모퉁이를 돌다 문득 하늘을 보니 기울어가는 달이 가까운 산 능선을 비추고 있다.
반달이었다. 순간 기분이 상쾌해졌다.
일몰 후에는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지만 막바지라서 그런지 운동원이 앞을 가로막고 성가시게 한다. 어째 갈수록 선거판이 혼탁하고 세상살이도 막가자는 분위기 인 것 같다. 예전에는 휴대폰으로 문자보내기라든지 거리유세가 지금 보다는 덜하였는데 이번 선거엔 하루에도 몇 차례의 문자 멧세지를 받았고, 심지어 모 정당사무실에서는 나더러 자기들 당원이라는 터무니없는 전화까지 받았다. 기가차서 웃고 말았지만 누군가가 그 당에다 내 정보를 제공하는 실적(?)을 올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은 보았더라도 훗날엔 보지 않았다고 할 사람들이다.
세상의 권력 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단결하고, 자신 앞에 줄서기를 강요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까지도 건드린다. 마치 모든 구성원에게서 모든 것을 위임 받은양, 자신의 개인 소유인양 거들먹댄다. 교만의 극치이고 사람 취급받기를 거부하는 것 같아 보인다. 저들 또한 당연히 그럴 것이다.
좁은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예전엔 집집마다 장사를 하였을 테지만 지금은 변두리라 삼분의 일 정도의 가계가 문을 아예 닫은 모습이다. 서민들이 살아가기가 점점 어렵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저만치 선술집 앞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생겼다. 다가가니 술이 거나한 오십대의 남자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과 사회의 불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러다 지나가는 날더러 대뜸 ‘너는 뭐냐’고 한다.
나는 뭘까?
미친놈의 헛소리. 그리고 나도 미친 놈?...
주먹을 날려 보았자 서로가 응급실과 경찰서를 오가는 피곤한 짓거리라 생각하며 피식 웃고 지나쳐 갔다.
너 잘났다 하고 흘려버리기 보단 그래도 그러한 모습으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한편으론 예술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희로애락을 다 가슴에 품고 또는 그 것을 표출하며 살아가는 인생.
때로는 자신을 높이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고행의 경지로 몰고 가는 삶 - 넥타이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빼딱 구두로 발뒤꿈치 근육을 조여 올리며 아름다움을 과시하려는 행태들...
티벳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는 국빈으로 초청의 자리에서도 머리를 긁적이고, 코를 자연스레 풀어댄다고 한다. 가려울 때 긁고, 생리현상을 아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결한다는 것이다. 본래 예절이란 것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속박이고, 자신의 행동이 그래도 남을 해하거나 위선적인 행동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체면이 밥 먹여 주는 우리네 사회에서는 그러한 행동은 당연히 손가락질과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동식물. 개. 돼지, 산에 사는 새들도 각자 자신의 소리를 내고, 악기도 만들어진 형상과 인간의 조율하는 바에 따라 자신들만의 고유의 소리를 내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내고 싶어 무든 애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 것도 아주 편리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소리는 크고 길게 내고, 불리한 소리는 아예 내지 않거나 내어도 작고 짧게 내고 만다는 것이다.
속된 삶은 부러워 할 일도 존경스러워 할 가치도 없다. 오는 것은 조금 미리(10개월)알게 되지만, 가는 것은 분초를 기약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혹자는 나이가 들면 유서를 준비하거나 사진을 미리 찍어둔다. 결코 인생을 비관해서가 아니라 조물주가 정한 섭리에 순응하자는 것이다.
그래도 약한 놈이라 고함이라도 한번 질러 볼일이라는 것이리라. 우는 놈 젓 주거나, 지진이라도 나서 매몰된다면 목소리가 큰 쪽으로 구조대가 먼저 가지 않을까?
고갤 들어 건널목 위의 가로등 불빛을 쳐다본다. 눈을 뜰 수가 없이 강렬하다. 그 것은 내가 따로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 것이 나의 시선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 그런 이치가 아니겠는가.
강한 것엔 약하고, 약한 것엔 강하게 사는 것. 그렇다고 비난 할 일이 아니다. 그게 다 조물주의 탓이니까.
터덜거리며 걷다 보니 어스름 속에 산이 올려다 보인다. 가슴 시리도록 좋아 하는 산. 그것 은 밤이 되어도 여전히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대로 산에라도 올라볼까? 그러나 선 듯 발걸음이 다가가질 않는다.
얼마를 걸으니 산 하단부의 강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속력을 내고 달려가고 있다. 달이 비추는 하늘 길 따라 강의 물결이 선을 긋는다. 멀리 고수부지엔 하나 둘 무리지어 산책 나온 사람들의 형상이 아른거린다.
집근처 골목을 들어가며 마지막으로 산을 돌아다보았다.
달은 이제 산 능선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괜스레 가슴속이 허전해 왔다.
어쩌면 이처럼 통제되지 아니한 자연스런 질서가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질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