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명한 것들이 여러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감사하며 만족합니다”
새로운 연구소가 세워진 것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에게 에디슨이 했던 연설 내용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전신 수신 장치, 축음기, 백열전등, 영화 촬영기등 1,300가지가 넘는 많은 것들을 발명하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8세 때는 선생님께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선생님이 꾸짖을 정도였고, 성적은 꼴지였고, 학교에 입학한지 3개월만에 퇴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12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기초 물리학에 관한 책은 물론 ‘세계사, 영국사, 로마제국 흥망사’등의 역사책을 보며 세계에 대한 눈을 떠갔습니다. 11살 때는 채소 재배를 해서 자라는 과정을 실험하며 자란 채소를 파라서 실험도구와 실험약품을 사며 자립심을 키웠고, 기차 안에서 신문팔이를 했는데 기차 안에서 만든 신문(주간 헤럴드)의 독자가 500명이나 되기도 했습니다.
▶15세 때 철길에 넘어진 역장의 아이를 구해준 사건으로 인해 아이의 부모인 역장을 통해 전신 기술을 배우게 되었는데 전신 기술의 연속적인 실패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기회가 되엇습니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였으며, 탐구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하면서 세밀하고 정확하게 관찰하고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연구와 발명하는 일을 할수만 있다면 어릴 때부터 모든 일을 기쁨으로 했습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할 때는 7,000번의 실패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빛을 만들실 때 말씀하셨던 “빛이 있으라!”(창세기1:3)고 하신 말씀을 실험할 때마다 외치고 했습니다.
▶에디슨은 발명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2)
믿음의 사람들(02)
인물: 아브라함 링컨 (미국)
연대: 1809년-1865년
▶링컨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라고는 몇 개월밖에 다니지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9세 때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링컨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매일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링컨아 너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며 언약을 심어주셨습니다.
▶어린시절 시장에서 보았던 흑인 노예들의 모습, 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팔리는 모습, 짐승처럼 학대받는 모습 등은 링컨의 가슴속에 남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습니다.
링컨은 어른이 되면서 노예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17세 때 나룻배 뱃사공일을 하면서 법률공부를 시작해서 27세 때에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가장 정직하고, 올바른 변호사로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23세 때에는 일리노이 주의 주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되었으나, 25세 때 결국 주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후 링컨은 51세 때에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이 되었고, 54세 때에는 노예 해방을 선언했는데 이것을 반대하는 남부 사람들과 부딪치게 되어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링컨 대통령과 함께 했던 북군이 남군에게 크게 패할 수밖에 없었으나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결국은 기적적으로 북군이 승리하여 노예 해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수많은 흑인들이 자유를 얻어 자유롭게 신앙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65년 남군의 패배로 남북전쟁이 끝났을 때 노예 해방을 반대하는 남부 청년의 총에 맞아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았던 링컨 대통령은 요셉처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데 귀하게 쓰임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3)
믿음의 사람들(03)
인물: 안악골의 호랑이 김익두 목사 (한국)
연대: 1874년-1950년
▶ “주모! 여기 술 더가져와” “예! 예! 알겠습니다요, 손님!” 한참 후에 청년이 술을 잔뜩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막을 나가려고 했습니다.
주인이 술값을 내라고 말을 하자 청년은 술상을 엎으며 소란을 부렸습니다.
“아이구! 그냥 가십시오” 술값을 내지 않았지만 주인은 청년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년이 나가자 주인은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누가 저 놈 잡아가지도 않나? 저널 놈은 이 세상에 아무 필요없는 나쁜 놈이야!”
그 청년의 이름은 김익두였습니다.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의 부유한 집안의 독자로 태어난 김익두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이 가난해지자 점점 깡패로 변해갔고 성격이 괴팍하여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혹시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마구 때리고 닥치는 대로 집이나 물건등을 부수었습니다.
그는 매일 술에 취해서 인생을 포기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김익두의 별명은 ‘안악골의 호랑이’였습니다.
▶이렇게 망나니와 깡패 생활을 하던 김익두는 안악교회의 스왈론 선교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김익두는 마치 정신병자 같았습니다.
매일 소리내어 울기도 하고, 성경을 읽는다고 며칠동안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습니다. 깡패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점점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1901년에 김익두는 재령읍교회 전도사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고,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전국의 교회를 돌아가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는데 앉은뱅이, 소아마비, 귀신들린 사람, 불치병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낫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소문은 일제 시대였던 그 당시에 미국 신문에까지 실릴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김익두 목사님을 통해 3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6.25 전쟁이 일어난 해에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함으로써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1900년대에 우리나라에 복음의 빛을 비추고 소금으로 살다 순교한 위대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4)
믿음의 사람들(04)
인물: 천로역정과 존 번연 (영국)
연대: 1628년-1688년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다.
이러한 책들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이 ‘성경’이다.
두 번째로 많이 읽혀진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존 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이라는 책이다.
천로역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해석하는 입장으로 기록되었고, 그 당시 영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되었다.
천로역정은 번연이 살아있을때도 10만부 이상 판매되었고, 1909년에는 세계 112개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현재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존 번연은 1628년 11월 영국의 베스퍼드 그처 엘스토라는 농촌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떠돌아다니며 고장난 물건을 수리해 주는 가난한 땜장이여서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번연은 일고 쓰는 것을 겨우 배우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해야만 했다.
그러나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고,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풍부한 상상력을 길렀고, 그 가운데서도 성경을 가장 많이 읽었다.
▶번연이 16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그해 7월에는 누이동생도 죽었다.
8월에 아버지께서 새 어머니를 데려오시자 번연은 점점 거친 반항아가 되어갔다.
이후 번연은 마리아라고 하는 매우 신앙이 좋은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마리아는 번연을 인내와 섬김으로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존 번연의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존 기퍼드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고 영접함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번연은 비국교도이며 성직을 받지 못한 평신도가 설교한다는 이유로 12년 동안(1660-1672) 감옥에 갇히기도 했는데 출감한 이후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1676년 다시 비국교도 박해가 시작되어 6개월간의 짧은 투옥기간에 천로역정 전반부를 쓴 것으로 보이며, 후반부는 1684년에 완성하였다.
천로역정은 가장 잘 팔리는 책이 되었고, 그는 유명하게 되었다.
▶번연은 1688년 어느 가정의 재산 상속 때문에 생긴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화해시키려 런던에 갔다가 심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기까지 60년을 살면서 60권의 책을 썼다.
‘천로역정’,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거룩한 전쟁’은 기독교 역사에 남는 걸작이 되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5)
믿음의 사람들(05)
인물: 교육의 아버지 페스탈로치 (스위스)
연대: 1746년-1827년
▶페스탈로치의 할아버지는 목사님이셨는데 할아버지는 친구같이 잘 대해 주셨고 할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께서 하늘로 길게 뻗은 나무의 가지를 자르고 계셨습니다. 페스탈로치는 할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나무가 아플 것 같아요. 왜 가지를 자르시는 거예요?”하고 여쭤 보았습니다.
“응! 나뭇가지를 잘라주지 않으면 나무가 반듯하게 자라지 못한단다. 아주 쓸모없는 나무가 되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교육을 받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된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할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평생동안 어린이 교육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어렸을때부터 아주 겁쟁이였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멍청이 괴물’이라고 놀려대곤 했습니다. 페스탈로치의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이었지만 아주 가난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페스탈로치가 5살 때 아버지는 병으로 눕게 되었고, 결국은 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목사님이 되기 위해 신학 공부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이들을 위해 집을 짓고 학교를 세워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뜻 있는 일도 여러 차례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어떤 때는 정부에서, 어떤 때는 사람들이 시기하여 학교와 고아원이 문을 닫게 된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교육에 관한 많은 책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돌봐주지 않으면 돌봐줄 이 없는 의로운 어린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그에게는 기쁨이며 자랑이고 행복이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81세로 인생을 마치기까지 ‘교육의 바탕은 사랑이다’는 말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가 어린이들에게 바친 사랑, 교육에 대한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이었습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6)
믿음의 사람들(06)
인물: 미국의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 (미국)
연대: 1839년-1899년
▶일생을 통해 5천만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가운데 1백만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을 받도록 만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쓰임 받았던 사람이 무디이다.
▶대개 세계적인 위인들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훌륭한 사람을 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드와이트 무디 역시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어머니는 9명의 자녀를 돌보며 어려운 가정 생활을 꾸려 나갔다.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가장 신경을 쓰셨다.
▶무디는 겨우 초등학교 시절밖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지만 무척 재주가 있고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후 구둣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에드워도 킴벨 선생님을 만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돈을 벌어서 큰 사업을 할 목적으로 시카고에 갔다. 처음에는 구둣가게 점원 노릇을 했다. 꿈 많은 소년으로, 성실한 점원으로 착실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직접 하나님의 일꾼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주일날은 늘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는 ‘어린이 선교회’라는 곳에 찾아가서 어린이 선교 일을 시작하였다.
무디는 기쁨과 감격으로 열심히 선교했다. 처음 시작할 때 12명의 어린이와 16명의 교사였던 선교회가 어린이 100명, 500명 그리고 1,000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무디가 경영하고 있는 어린이 선교회를 방문하였다.
▶무디는 친구인 핸더슨이 죽음으로 대 사업가가 되려던 꿈을 포기한다. 영혼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아이들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남북전쟁 때는 군목으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영국에까지 가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생키를 만나 무디는 설교하고, 생키는 찬송으로 영국과 미국을 돌아다니며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했다. 5천명, 7천명, 1만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무디 성경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1899년 12월 22일 그는 죽기 한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오 이 세상은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하늘 문이 열리는 구나. 오!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하구나. 나는 평생 이 면류관을 받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무디는 이 말을 하고 아내를 위로하고 잠든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07)
믿음의 사람들(07)
인물: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영국)
연대: 1832-1905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와 아주 가까이에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이다.중국에도 공산주의의 벽이 무너지면서 점점 자유롭게 가고 올 수 있게 되었지만 100-150년 전에는 마음껏 중국을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들고 가서 외쳤던 많은 선교사들 중에서도 중국 선교사 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다. 그 분은 다름아닌 허드슨 테일러이다.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5월 21일에 영국 요크셔주 반슬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약사인 동시에 평신도 설교자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 그의 어머니 아멜리아 역시 훌륭한 신앙을 소유했고, 목사님의 딸로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사랑과 칭찬을 받고 자랐다.
▶이렇게 허드슨 테일러는 부모님의 훌륭한 신앙 정신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나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다섯 살의 나이에 중국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신앙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13살 때 학교를 그만 두었다. 15살이 되었을 때 은행원으로 취직했으나 선배 동료들의 나쁜 영향을 받아 더욱 타락된 생활로 빠져들게 되었다.
▶17살이 되었을 때 구원을 다룬 책 한권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을 깨닫고 의료선교를 위해서 의술을 익혔으며 중국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1853년 9월 19일 아침에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출발하여 무려 5개월 15일이나 걸려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중국에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허드슨 테일러는 전도를 위해 학교를 운영하며 복음을 전했다. 또한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들을 찾아다니며 의술로 병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했다. 조롱과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인 복장을 하고 머리도 중국인들과 같이 길게 땋아 내렸다.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중국의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외쳤다.
▶1865년 7월 27일에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공식적으로 만들고 100여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공급받으며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엇고, 후원자들도 점점 많아져서 선교하는 일들이 커지게 되었다.
▶1950년 5월에는 ‘의화단 폭동사건’으로 많은 선교사들과 자녀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몸이 약해져서 스위스에서 쉬고 있다가 1905년 2월에 중국에 다시 가게 되었다. 그는 아픈 몸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1905년 6월 3일 저녁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중국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그는 중국 땅 호남성에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중국 땅에 뼈를 묻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08)
믿음의 사람들(08)
인물: 5만번 응답받은 죠지 뮬러 (독일)
연대: 1805-1898년
▶죠지물러는 1805년 독일 북부에 있던 프로이센 왕국의 크로펜스다드에서 태어났다.
▶세무원으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자녀들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죠지 뮬러와 그의 형은 쉽게 많은 죄악의 길로 빠져 들어갔다.
▶죠지 뮬러는 10살이 되기도 전에 습관이 될 정도로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져 돈을 훔치는 나쁜 짓을 했고, 14살 때에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날 밤에도 새벽 2시까지 카드놀이를 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놀았다. 어머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하였고 뮬러는 점점 더 나쁜 길로 빠져 들어갔다.
▶신앙고백과 성찬식이 있을 때에는 죄를 고백하는 대신 거짓말을 하였고, 19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돈만 허비하고 술을 좋아하여 계속 나쁜 생활을 하며 살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무서운 질병을 앓기도 했다.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책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수년간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1825년 11월 중순 어느 토요일 저녁 친구의 초청으로 한 모임에 참여한데서 뮬러의 생애 놀라운 전환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모임의 성경공부를 하면서 뮬러의 생활은 변화되고 있었다. 그후 뮬러는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여 6개 나라의 언어를 능통하게 다루는 재능을 소유하게 되었고, 문서 선교 활동을 펼치며 선교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후 1835년 영국에 선교사로 가서 브리스톨에 있는 애슐리 다운에서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기도 하였다.
▶그가 고아 사역을 하게 된 원인은 시편68:5에 기록된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라는 말씀 앞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언약으로 잡고 길거리에 내버려진 가나한 고아들을 위하여 일평생 헌신하며 살았다.
▶그는 수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데 정부의 힘을 빌린 적도 없었으며 돈이 많은 부자들에게 손을 내민 일도 없었다. 단지 하나님만을 믿고 기도하여 그 응답을 통해서만 그들을 먹이며 양육했을 뿐이다.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매일 세끼씩 먹여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오히려 뮬러는 그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을 더 키우게 되었다. 뮬러는 고아들을 굶기지 않고 항상 기도의 응답으로 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었다.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죠지 뮬러가 기도할 대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필요한 것들이 다 채워졌다. 그리하여 그는 죽을 때까지 15만명 여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었고 그 영향이 엄청나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를 “고아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고아원 뿐아니라 “성경 지식 보급원”을 만들어 성경 보급과 복음 책자를 통해서 선교 활동에 힘썼으며, 여러 교회와 신학교를 지원하고 선교사들까지 지원하였다.
▶1875년 이후 노년의 뮬러는 세계 42개국을 돌아다니면 약 30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1898년 3월10일 아침, 9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잠들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09)
믿음의 사람들(09)
인물: 화니 크로스비 (미국)
연대: 1820-1915년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십자가로 가까이,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나의 갈길 다가도록...”등을 비롯하여 살았는 동안 8000편의 찬송시를 쓴 사람이 있다.
▶생후 6개월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부르실 때까지 눈이 보이지 않았던 여류 시인 화니 크로스비이다.
▶그녀는 1820년 3월 24일 뉴욕 퍼트넘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눈에 작은 염증이 생겼는데 의사가 부주의하게 돌본 결과 그만 시력을 잃고 말았다.
▶화니는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열살이 되었을 때는 구약성경의 첫 네권과 사복음서를 암송할 수 있었다. 화니에게도 정상적인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에 1835년 3월 3일 그녀의 어머니는 뉴욕에 있는 유명한 시각 장애인 교육 기관으로 화니를 데려갔다. 그녀는 학교 내에서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44년 그녀는 최초로 시집을 출간해 냈고, 구원의 확신을 얻은 것은 1850년 11월 20일 뉴욕에 있는 브로드웨이 성막 감리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하고서부터이다.
▶크로스비는 자신이 앞을 못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래들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가 평생동안 시각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은혜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시력을 잃게 한 의사를 만난다면 자기를 눈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 준 일에 대하여 오리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눈이 보일 수 있는 길이 열린다해도 그 길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858년에는 알렉산더 반 알스틴과 결혼했다. 그는 화니와 함께 교사로 일하였고 재능있는 음악가였다.
화니 크로스비는 찬송시를 쓸때마다 “나는 좋으신 주님께서 내가 시작하고자 하는 일에 영감을 불어 넣어 주실 것을 기도 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찬송시를 짓는 일에 착수하지 않았다”라고 종종 이야기했다.
그녀는 시상이 떠오를 때까지 기도하며 명상에 잠기곤 했다. 때로는 몇 개의 찬송시들을 읊조려 보면서 시상이 떠오르면 그것을 우선 마음속에 적은 후 그것을 그대로 기억해 두었다가 후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받아 적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출판업자에게 전해주었다.
▶1864년에는 유명한 찬송가 작곡자이자 출판업자였던 윌리엄 브래드버리를 만남으로 찬송시를 쓰는 시인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후 51년동안 8000편이 넘는 찬송시를 쓸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다.
▶1915년 2월 12일 아흔 다섯 번째의 생일을 겨우 몇주 남겨놓고 그녀가 자신의 시 속에서 자주 소원했던 하늘나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0)
믿음의 사람들(10)
인물: 조지 윗필드 (영국)
연대: 1714-1770년
▶“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당신의 귀하신 독생자를 위하여. 아무쪼록 내 이름이 높여지지 않게 하소서” 이것은 22살의 젊은 선교사였던 조지 윗필드가 기도한 내용이다. 자신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기 위하여 몰려오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1주일에 40-60시간 정도 설교했는데, 34년동안 18,000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미국과 영국, 스코틀랜드 등을 수없이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몸이 건강하지 않아서 심하게 토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지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였다.
▶조지 윗필드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의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글로스터에서 가장 훌륭한 여관이었던 벨 여관을 운영하며 부유한 생활을 했으나 윗필드가 2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8년 후에 재혼을 했는데 이 재혼으로 그의 가정은 불행이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지의 돈을 훔치기도 했으며 카드놀이와 내용이 좋지 않은 책들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목사가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15살이 되었을 때는 여관 일을 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그후 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기 위해 부유한 학생들의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는 조건으로 수업료와 식비를 면제 받으며 공부했다.
거기에서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를 만나게 되었다.
한동안은 구원받은 비밀이 자신의 노력과 열심, 그리고 경건하게 살아야만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어떠한 방법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쏙, 1735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생명을 체험하게 되었다.
▶1736년 6월 26일에 첫 번째 설교를 했는데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설교하는 윗필드의 능력있고 영적인 지혜에 놀랐다.
7월에는 옥스퍼드를 졸업했고, 런던에서 설교를 했을 때 수천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러 왔다.
▶1739년 1월 14일 윗필드는 영국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교회들은 야외에서 설교하는 그를 싫어했으나 윗필드는 미국에 가서도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어떤 사람들은 윗필드가 설교하지 못하게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조지 윗필드는 높은 자리도 원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신경을 기울였다. 야외에서 3만 혹은 4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감리교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많은 액수의 헌금을 모았으며 여러 교육기관들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1770년 9월 30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베리포트에 있는 장로교회의 목사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갔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1)
믿음의 사람들(11)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 (미국)
연대: 1703-1758년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 목사와 어머니 에스더의 열한 명의 자녀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어요.
조나단이 유일한 아들이었으므로 부모의 많은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랐어요. 그의 가문은 좋은 청교도 가문이었고, 그는 신앙이 좋은 부모님으로부터 청교도적인 영향을 받고 자라났어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지벵서 교육을 받았는데, 6세때 아버지로부터 라틴어를 배웠고,그 다음에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어요. 10세에는 영혼에 관한 글을 지었으며, 11세에는 자연계와 곤충들을 관찰하고 논문을 쓰기도 했어요. 13세가 되었을때는 예일 대학에 입학, 1720년에 수석으로 졸업을 하였고, 졸업후 2년 더 머물며 신학을 공부했어요.
▶17세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그는 하나님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기를 원했어요.
▶1723년 1월 12일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엄숙하나 서약을 하기도 했어요. 그는 실천해야 할 것들을 기록하고 매일 매일 순종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했어요.
1727년 2월 15일 조나단 에드워즈는 목사로 임명을 받고 외할아버지의 목회를 돕는 일을 했어요. 그해 7월에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았어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한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하였고, 그의 자녀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훈련 받았어요.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과 약 1시간에 걸친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언약을 자녀들에게 전달했어요.
▶1729년 2월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회중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교회들이 영적인 비밀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않고, 세례만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 교회는 마음 속에 예수 생명을 체험하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의 비밀을 전하기 시작했고, 영적인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도와 주었어요.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그 도시에서 유명한 몇몇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되었어요. 복음의 비밀을 모르는 목사와 교인들은 사탄의 종이 되어서 그를 교호에서 해고하였어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매사추세트주 스톡브리지로 이사를 하였고, 그곳에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곳에 있는 동안(1751년-1758년) 중요한 책 몇 권을 쓰기도 했어요.
1758년 그 지역에 천연두라는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그 때 맞은 예방주사가 부작용을 일으켜 3월 22일에 천국으로 가셨어요.
▶그는 성경학자요, 부흥사였으며, 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미국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예요.
그의 후손들 중에 백 여명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나왔고, 75명의 교수, 12명의 대학교 학장, 80명의 작가, 60명의 의사, 75명의 군대 장교, 100명의 변호사, 30명의 판사, 80명의 공무원, 4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1명의 부통령이 나왔어요.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조난 에드워즈의 후손들을 축복하고 계셔요.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2)
믿음의 사람들(12)
인물: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독일)
연대: 1685-1759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날 때에 ‘헨델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재능있는 작곡가이다. 그로부터 나는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고 말했을 정도로 헨델은 음악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게오르고 프리드리히 헨델은 1685년 2월 23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헨델은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법과 대학에 헨델을 보낼 결심으로 응악 공부를 하지 못하게 했다.
▶8살이나 9살쯤 되었을 때 예배 후에 헨델의 오르간 연주를 듣던 공작이 크게 칭찬했다. 이 일로 인해 헨델의 아버지는 정식적으로 헨델에게 음악 교육을 시켰다.
헨델은 12살이 되었을 때에 첫 작품을 썼으며 오르간을 너무나 잘 다루었기 때문에 가끔 자기의 선생님을 대신하여 연주하기도 했다. 헨델은 작곡 뿐아니라 클라비코도, 오보에, 바이올린 등을 계속 익혀 나갔다.
▶헨델은 영국으로 옮겨가서 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많은 실패를 겪었다. 어떤 왕들에게는 인정을 받았고, 어떤 왕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훌륭한 영국 작곡가들과 겨루어야 했고, 까다로운 관객들을 다루면서 파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헨델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영국의 국교회는 헨델이 ‘에스더’와 ‘애굽의 이스라엘인’ 같은 성경적 드라마들을 일반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방해하기도 했다.
마침내는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하면서 1741년에는 빚더미 속에서 감옥에 들어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공식적인 모든 활동으로부터 은퇴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그의 생활을 바꿔 놓는 일이 생겼다. 찰스 제닝스라는 한 부유한 친구가 헨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초로 한 완전히 성경에서 따온 가극대사를 주었다.
헨델은 그의 작은 집에서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음식을 먹으려고 멈추지도 않고 24일동안에 260페이의 악보를 작곡하였다. 의뢰를 받아 작곡한 그 곡의 이름을 헨델은 ‘메시아’라고 불렀다.
▶‘메시아’를 런던의 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에 영국의 국교회에서는 방해를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왕이 그 공연에 참석했다. 승리의 ‘할렐루아 합창’의 첫부분이 울려 퍼지자 왕이 일어섰다. 왕의 행동을 따라 모든 관객도 함께 일어섰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헨델은 개인적으로 30회 이상의 ‘메시아’ 공연을 지휘하였고, 공연을 통해 생긴 많은 수익금들을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 작품은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어떤 작곡가들은 ‘메시아’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이제까지 기록된 모든 신학적인 책들보다도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하이든은 ‘할렐루야 합창’을 들었을 때에 어린아이 같이 울면서 ‘그 분은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다!’고 외쳤다. 헨델은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돌봐 주었으며 겸손했고,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았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나갔다.
▶1759년 4월 14일 금요일 아침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 나라로 갔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3)
믿음의 사람들(13)
인물: 요한 세바스찬 바하 (독일)
연대: 1685-1750년
▶많은 음악가들 중에 기독교 작곡가로 가장 칭찬을 받아오는 음악가가 있어요.
그가 작곡한 작품은 굉장히 많은데, 다른 사람이 이 작품들을 모아 출판하는데 46년이나 걸렸고, 그 양은 책으로 60권이나 되었어요. 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요한 세바스찬 바하에요.
▶요한은 9살에 고아가 되어서 형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음악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그는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되었고, 오르간, 바이올린 등 많은 악기들을 연주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었어요.
베토벤이 바하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의 이름은 바하가 되어서는 안된다(바하는 독일어로 ‘시냇가’라는 뜻). ‘바다’가 되어야 한다”고 칭찬을 하였어요.
▶오르간 연주가로서의 훌륭한 솜씨를 칭찬할 때에는 그는 겸손하게 “그렇게 놀라울 것은 전혀 없어요. 그저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음을 치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악기가 다 해주는 걸요”라고 말했어요.
▶그는 “음악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작곡을 시작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는 ‘예수님 도와 주세요!’라고 표시했고, 악보의 끝에다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썼어요.
▶바하는 신앙심이 깊었으며 성경과 많은 신앙서적들을 읽었어요. 바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음악을 통하여 나타냈는데 ‘마태 수난곡’등이 대표적인 곡이에요.
바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 음악가였으며,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어요.
왕궁의 높은 지휘도 버리고,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를 선택하며 살았어요.
▶65세가 되었을 때는 눈이 완전히 멀게 되었어요.
그의 마지막 작품은 침대에 누워 받아쓰게 한 곡인데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라는 합창곡이에요.
▶그는 1750년에 하늘나라로 갔어요.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4)
믿음의 사람들(14)
인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
연대: 1514-1572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게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572년 11월 24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의 음서을 통해 묵상하면서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한 말씀이에요.
▶존 녹스는 1514년 해딩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 앤드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천주교의 신부)로 임명되었어요. 녹스는 어거스틴의 책들을 통해 카톨릭(천주교) 교리들의 잘못된 것들을 알게 되었어요. 그를 기독교 신앙의 지도자로 변화시킨 사건은 당신 녹스가 존경하던 기독교 지도자인 조지위샤드의 순교였어요.
그는 위샤드를 대신해 교회를 셍려고 했어요.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카톨릭 교회 이외에는 어떠한 교회도 허용하지 않았어요.
▶기독교를 제일로 반대했던 사람이 추기경 비튼이었는데, 1546년 5월에 살해되었어요. 기독교인들이 살해했다는 누명과 박해 속에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세인트 앤드류 성으로 피신했어요. 이때 녹스가 목회자로 오게 되었어요.
스코틀랜드 정부는 프랑스와 손잡고 이 성을 공격하여 녹스와 기독교인들을 잡아 19개월동안 프랑스 노예선에 가두고 고문을 했어요.
이런 상황 가운데 녹스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으로 망명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만 최고로 인정하며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복음을 전했어요. 이것은 카톨릭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며,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어요.
▶1559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녹스는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어요.
1560년에는 의회의 귀족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생겨서 기독교를 법적으로 인정했어요. 그러나 카톨릭 교인이었던 메리 여왕의 반대도 심했어요. 녹스는 죽음을 각오하고 메리 여왕에게 담대히 맞섰어요.
메리 여왕이 죽은 후 제임스6세가 1567년에 왕이 되면서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할 수 있는 평화로운 시대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녹스는 스코틀랜드를 위해 신앙의 자유를 이루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났어요.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모튼이라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이 세상의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녹스가 누워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5)
믿음의 사람들(15)
인물: 어거스틴 (알제리아)
연대: 354-430년
▶어거스틴 하면 기독교인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교회 역사속에 그만큼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그를 성인으로 부르고 있다.
▶어거스틴이 태어난 것은 기원 354년 11월 13일, 당시 콘스탄틴의 영유지였던 북 아프리카 알제리아(Algeria)의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였다. 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거스틴이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부터 하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와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세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밑에서 아주 엄격한 신앙생활을 받고 자랐다.
▶어거스틴은 15살에 마다우라에 있는 상급학교에 입학해 착실하게 공부하였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져 1년 남짓 공부하고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마다우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서부터 어거스틴은 교회생활도 하지 않게 되었고 이때부터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살고있는 타가스테는 젊은이들이 타락하기 쉽도록 되어있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어거스틴은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는 나쁜 친구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그들에게 뒤질새라 앞장서서 온갖 못된 짓을 하였고, 그의 부모님도 도저히 어찌하지를 못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옛 친구인 로마니우스가 찾아와 어거스틴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기로 하였다.
어거스틴은 로마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머리가 뛰어나 첫해의 연말 시험에서 1등할 정도였다.
▶17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게 되자 결혼도 하지 않고 같이 살게 되었고, 다음해에 아들을 낳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어려서 죽고 말았다.
그 즈음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기도로 죽음 직전에 회개하고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바로 그 무렵 어거스틴은 마니교도를 만나 마니교(마니라는 사람이 가르치기 시작한 종교인데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조로아스터교를 바탕으로 불교와 기독교와 유대교 등의 가르침을 혼합한 종교)에 빠지게 되었다.
▶기원 383년, 그의 나이 29살 때 마니교의 주장들은 분명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니교를 버리게 되었다. 그해 어거스틴은 어머니 몰래 로마로 가서 수사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심한 병에 들게 되었다.
또한 그는 로마 시장의 추천으로 밀라노에 갈 수 있도록 추천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주고 암부로시우스를 만나 복음을 받게 되었고, 마음이 움직여지기 시작하였다.
그후로 그는 지난 날의 잘못들을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었고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게 되었다(386년 밀라노에서 회심).
수십년 동안의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는 기어코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어거스틴 하면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름부터 떠올리게 된다.
▶밀라노에서 같이 살게 되었던 어머니는 열병으로 5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많은 책들을 쓰게 되었고 41살 때에는 힙포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감독으로 있으면서 ‘참회록’, ‘하나님의 도성’등의 책을 쓰게 되었는데 두권의 책은 후세에 길이 남게 될 불멸의 고전이 되고 있다.
▶그의 신앙은 지금까지도 많은 신앙인들이 바른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을 정도로 성경 말씀 그대로 사는 일에 온 몸을 바쳤다.
어거스틴은 다윗의 참회 시를 가냘픈 소리로 몇 번 외우더니 이윽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원 430년 8월 28일 밤, 그는 76살로 세상을 떠나 아름다운 천국으로 갔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6)
믿음의 사람들(16)
인물: 주기철 목사 (한국)
연대: 1897-1944년
▶한국의 기독교는 복음의 신앙인들이 흘린 순교의 피 위에 오늘날의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인(2000년 현재 5만 교회, 1200만 성도)들이 서 있는 것이라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셔요.
▶순교한 분들 중에서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에 끝까지 신사참배(일본의 수호신에게 절을 하는 것)를 거부하신 주기철 목사님이 계셔요.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사람의 최고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1925년 일본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사가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어요. 주기철 목사님은 이때부터 신사참배를 반대하기 시작했는데, 일본 사람들에게는 문제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었어요.
▶산정현 교회에서 목회할 때였어요.
천주교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하자 기독교 총회에서도 1938년 9월에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 했어요.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님을 감옥에 가두고 위협하며 온갖 고문을 했어요. 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면 목회를 할 수 없다고 협박했어요. 그러나 목사니은 “나는 목사의 성직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니 그럴수 없소. 신사 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할수 없소”라고 담대하게 말했어요.
감옥의 고통스런 생활에서도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나 불안이 없고 오히려 광채가 날 정도였어요.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밤, 평양 형무소에서 “아버지여 나를 붙드시옵소서”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옆에서 지켜본 간수들의 말에 의하면 웃는 얼굴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해요.
▶주기철 목사님은 온갖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은 참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큰 감동을 주고 있어요.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7)
믿음의 사람들(17)
인물: 아도니람 저드슨 (미국)
연대: 1788-1850년
▶“기쁠 때나 슬플 때, 건강할 때나 약할 때에도 우리는 앞을 향하여 나가리라. 미얀마의 광야에 씰르 뿌리고, 시온의 언덕에서 추수를 하리라”
아도니람 저드슨은 동남 아시아에 위치한 정글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원주민들을 찾아다니며 30년 동안 복음의 씨를 뿌린 전도자였어요.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 말덴에서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갈등도 많았어요. 그러나 여러 선교단체들과 신학교의 활동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1810년 2월에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2년 후 아내와 함께 저드슨은 인도로 선교하려 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동인도회사의 반대로 선교사역을 할수 없게 되자 미얀마의 랭군을 향해 출발하여 1813년 7월에 도착했어요.
저드슨은 곧바로 미얀마어를 배워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싲가했어요. 불교 나라인 미얀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의 일기를 보면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셨어요.
▶열병을 앓고 아무 일도 할수 없을 때 두 마을에서 온 아홉명이 세례를 받았어요. 험한 산과 무릎까지 이르는 물과 미끄럽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가득한 강을 따라 다니며 구석구석 복음을 전했어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도 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어요.
새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핍박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호랑이의 사랑니를 뽑는 것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성경을 번역하라는 임무를 받고 1820년에 신약 성경을 번역했어요. 1834년에는 구약 성경이 미얀마어로 완역되었는데 번역된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어요.
▶또한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 땅)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전도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그가 미얀마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역을 기록한 책들이 독일에 있는 몇몇 유대인들에게 소개되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기도 했어요.
▶저드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순종하는 충성된 사람이었어요.
아도니람 저드슨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그 땅과 그에 속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시켰어요.
▶아도니람 저드슨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불교의 나라 미얀마에 들어가 37년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며 복음을 증거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모두 미얀마 땅에서 죽어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무지한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 10년에 걸쳐 성경을 미얀마어로 번역하는 것을 완성하고 1850년 4월 12일 하나님의 나라로 갔습니다.
(The end)
어린이 칼럼 - 위인 이야기 (18)
믿음의 사람들(18)
인물: 윌리암 틴데일(영국)
연대: 1484-1536년
▶지금부터 500년 전만 하더라도 성직자들이 아니고는 성경을 쉽게 볼 수 없었어요. 라틴어라는 글로 쓰여졌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읽기가 어려웠어요.게다가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고, 다른 말로 번역하면 사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나는 학식 있는 사람들보다 쟁기질하는 아이들이 성경을 더 많이 알도록 만들겠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영어성경을 번역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바로 영국의 사도라고 불리는 윌리암 틴데일이에요.
▶윌리암 틴데일은 1484년에 영국의 글로세스터 지방에서 부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곱 개의 언어를 잘 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서 어렸을 때 언어학습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어요.
▶옥스포드, 막달랜,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성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번역하기로 했어요.
그러나 카톨릭 국가였던 영국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었어요.
▶부유한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틴데일은 1524년에 독일로 건너가서 번역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틴데일은 독일의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루터를 찾아가 격려를 받고 신약성경부터 번역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년 후에 신약성경이 영어로 번역되어 인쇄되었어요.
▶구텐베르그가 인쇄기를 발명한 덕분에 그가 번역한 영어 성경은 쉽게 보급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영국에서는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을 찾아 내어 불에 태워버렸고 심지어는 몰래 판매하던 책들까지도 반대자들이 사들여 불에 태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틴데일은 계속해서 성경을 인쇄했으며 구약 성경들도 번역하기 시작했어요.
▶1535년에 거짓 친구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빌보르데 감옥에 갇혔어요. 1년 후 재판에서 성경을 번역한 이단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고, 그는 불태워지게 되었어요. 사형 집행장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큰 소리고 기도했어요.
▶그의 기도대로 영국 왕 헨리 8세가 1538년에 영국에서도 영어로 된 성경을 만들어도 된다는 내용을 결정하고 모든 국민들에게 하루 종일 교회를 개방하여 누구든지 성경을 볼 수 있도록 했어요.
▶틴데일의 순교는 시골의 어린아이부터 영국 국왕까지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열매를 맺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