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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모게시판(오프라인 모임을 갖습니다.) 스크랩 천국의 섬 증도 성지
happy 추천 0 조회 358 17.10.28 00: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국의 섬 증도  


증동리교회와 문준경전도사
증동리교회는 1933년 9월 문준경전도사(43세)님께서 증도에 최초로 세우실 때만 해도 증도는 무안군 지도면에 속하였으며, 도서치고는 비교적 큰 집단 마을인 증동리 면소재지에 사시는 큰 시숙인 정영범씨를 전도하여 정영범씨께서 구한 5원의 빚과 손녀 정옥순씨의 밭에 증동리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한해 앞서 세운(1932년 3월) 임자도 진리 마을에는 문전도사의 남편이었던 정근택씨가 소실과 자식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으며, 이곳을 첫 개척지로 택한 이유는 목회를 하는데 있어 앞으로의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함이었으며, 초가집으로 지은 진리교회에 비해 기와집으로 지어진 증동리교회는 신안 일대의 섬마다 복음을 전하는 본부와도 같은 장소로도 이용되었으며, 증도를 천국의 섬으로 바꾸어 놓는 문전도사님을 통한 하나님의 기적과도 같은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큰 시숙 정영범씨의 별세 시 조사 내용에서...>
인간의 육신이란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아주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이 하찮은 육신의 옷을 입고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다 죽어버리면 그만인 아주 미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전도서에서도 전도자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복락과 부귀영화, 그리고 권세도 죽음 앞에선 다 소용없는 무용지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 앞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왔다 머물고 가는 정거장과도 같은 곳일 뿐 조금도 미련을 둘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저 하늘에 계신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천국만을 바라고 기다릴 뿐입니다.
그 곳이야말로 진짜로 우리가 기거해야할 복 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누워계신 분은 늦게나마 주님을 영접하여 남은 여생 열심히 교회를 위해 봉사하시다가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 천국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의 우리는 이제 다시 못 뵐 줄 알고 애통해하며 슬퍼했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오히려 천국에 올라가신 영혼을 축복하고 기뻐해야 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혼의 안식처로 가신데 대한 감사와 찬양만이 남은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통곡과 슬픔은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예수님의 뜻 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교우 여러분, 그리고 아직 주님을 영접치 못한 분들은 모두 기도하십시다.
하늘 천국에 올라가신 고인의 영혼을 위해 감사를 드리십시다.


<믿음의 동반자 백정희전도사>
평생의 소원이 자식을 길러 보는 것이 원이었던 문전도사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같은 은혜로 딸보다 더 귀한 사람을 보내주셨다. 이 분이 바로 백정희 전도사이다. 성도 틀리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문전도사는 친딸보다 더 애지중지 함으로 사랑을 쏟았다. 이를 계기로 백정희전도사는 문전도사의 수족 역할을 하기까지 이르러 문전도사가 병상에 누으면 탕약을 지어 정성들여 달여서 병간호를 했고 교회에 봉사하며 전도 생활을 쉬지 않았다. 문전도사가 몸이 불편해서 거동을 못할 때는 대리로 임자도로 건너가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일제말기 성전을 빼앗기다.>
모래로 해안선을 두른 47개의 해수욕장이 있는 아름다운 섬 후증도, 그 섬 한가운데에 섬마을 부녀 신도들의 피땀으로 이룩된 증동리교회가 우뚝 자리잡고 있다. 1943년 일제시대 말기 일본인들의 박해와 압박이 극도에 달하던 때 일본인들은 신사참배까지 강요하였다. 기독교인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나 마찬가지여서 십계명에 위반되는 무서운 죄악이었기 때문에 죽도록 항거했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나갔지만 마침내 일본은 성결교단의 해산이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 당시 증도는 현 태평염전지를 중앙으로 크게 전증도와 후증도, 2개의 섬으로 나뉘었음)

1943년 성결교단이 해산됨과 동시에 일제의 앞잡이들이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여 증동리교회 종을 일제에 헌납하고, 교회 건물은 경방단에 강제로 1,600원을 받고 매각시켰으며, 그 대금은 국방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빼앗아 갔다. 해방(1945년 8월 15일) 이후 지방회장이었던 김창근목사는 당시 매도 대금인 1,600원의 100배를 지불할테니 교회를 반환하라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고, 성결교단의 총회장인 박현명목사가 내려와서도 해결이 되지 않자 갖은 고초끝에 법정에서 어렵게 교회를 되찾을 수 있었다.

<1950년 8월, 제 2의 수난>
빨치산부대가 이웃 섬에까지 침입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온갖 만행을 서슴치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문전도사는 범선 한 척을 대절하여 함께 지내던 백정희전도사와 양도천전도사를 미리 다른 섬으로 피난시키려 하였으나 어머니와도 같은 자애로운 보살핌에 두 전도사는 감동하여 눈물로 호소하면서 같이 피하자고 간청했지만 목자가 신자들을 보살펴야하며 교회를 비울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일제시대 앞잡이였던 모(某)와 그 일당들은 다시 공산당 빨갱이의 앞잡이가 되어 빨갱이들과 함께 감금·위협·공갈·협박 등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하도록 구타하고, 문전도사와 백전도사 그리고 양전도사를 연행하여 비밀리에 계속 예배를 드렸다는 죄몫으로 무수한 고문과 악형을 가했다.

<백사장에 핀 한송이 백합화>
9월 27일 밤, 양전도사와 문전도사 그리고 이성봉전도사가 함께 같은 선편으로 목포 정치보위부로 앞송되었는데, 9월 28일 새벽 목포에는 이미 국군이 상륙하여 공산당들은 모조리 철수하고 없어 풀려났었지만 증동리 교인들을 생각하여 이성봉전도사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증동리교회를 찾아왔다가 수개월간 구금되어 있던 백전도사와 동네에서 잡혀 온 유지들과 함께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 두 손을 뒤로 묶이고 눈을 가리운 채로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깔려있는 아름다운 섬 증동리 앞 솔무등에서 눈부시게 새하얀 모래보다도 더 고운 심성을 가진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랑의 사역자 문준경전도사님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닭”이라는 죄명으로 공산폭도들의 만행앞에서 날카로운 단도와 죽창 그리고 총탄에 맞아 힘없이 쓰러지면서 까지 제발 백정희 전도사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말을 끝으로 장렬하고 성결한 순교로 인생을 마쳤다.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전남 신안군이 한국 최고의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꽤 많이 알려져 있다.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35%로 전국 평균의 배에 이르는데, 그 중에서 증도는 주민의 90% 이상이 예수를 믿는다. 마을 사람 거의 대부분이 크리스천으로, 주민 2,200여명인 작은 섬 마을에 교회만 11개가 세워져 있다. 이쯤 되면,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섬 사람들로서는 바다의 신, 바람의 신, 태양의 신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사는 이런 오랜 전통과 불편한 교통편 때문에 섬은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가장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어떻게 개신교가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을 만들 수 있었을까? 증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람, 신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교회를 세운 사람, 그 사람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 연약한 한 여인이었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섬마을을 천국의 섬으로 만든 신앙의 어머니였고, 한국 교회가 배출한 대표적인 여성 순교자이며, 한국 성결교회가 낳은 위대한 목회자였던 문 전도사는 1891년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17세에 증도로 시집을 간다. 그러나 혼례를 치른 첫날밤부터 생과부가 됐다가 우연히 집을 찾아온 전도부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다. 당시 목포 북교동교회 이성봉(목사) 전도사에게 은혜를 받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전도부인으로 변신한다. 훗날 48명의 순교자를 낸 임자도 진리교회와 증도의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곳곳에 기도처를 세우고 리더들을 양성한다. 이런 과정에서 처절한 고난을 맞으면서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나가다 6·25전쟁 중 섬에 들이닥친 공산당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를 당하셨다.

증도 성지순례
증도로 가는 동안 시원한 서해바다 특유의 갯바람과 청정지역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옹기종기 둘러앉은 평화로운 마을들을 지나면서 바닷물이 가까이 다가온 허리 잘룩한 지형들과 다도해(多島海) 크고 작은 섬들의 자유로운 비경(秘境)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발길로 정겹게 다가서게 된다.

잠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통해 한 폭 그림같은 도서(島嶼)의 조용하면서도 신비한 풍경에 온통 마음을 뺐기고 만다. 사람들은 증도를 “보물섬”이라고도 하며 “천국의 섬”이라고도 부른다. 아마 보물섬이라 한다면 약 700여년 전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의 각종 보물을 싣고 가던 배가 침몰된 방축리 검산마을 만들 앞바다에서 많은 해저(海底)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천국의 섬이라는 말은 특히 미신과 우상을 숭배하던 섬마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6,25 전쟁 때 공산당의 학살로 순교(殉敎)하신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영성으로 증도의 복음화율(率)이 높아 인구 약 2,200여 명의 작은 섬에 11개 교회가 마을마다 세워져 교회만이 존재하는 섬이고 크리스찬들이 많아 하나님을 노래하는 섬이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늘 다니면서 느낀바 어느 지역의 섬보다 특별히 아름다운 천사의 섬이자 신비의 섬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준경 전도사의 묘(墓)가 있는 순교 터는 증도면 소재지(所在地)인 증동리에서 바닷가 쪽의 양지 바른 곳 동산(東山)에 위치하는데 솔무등 공원과 짱뚱어다리가 앞에 바라다 보이고 이 갯벌 다리를 건너면 명사십리 우전해수욕장인 은빛 백사장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순교지와 순교기념관 건립부지로 이어진 바로 위에 있는 산 상정봉을 올라가 보면 우연찮게도 남과 북이 하나로 합해진 한반도 모습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북한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바로 이 솔무등공원 백사장에서 북한 공산당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하신 문준경 전도사님께서 용서와 남북 통일을 염원하듯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바 크다.

과거 이곳 솔무등공원 백사장을 지나면 나뭇가지 사이에 순교 기념비가 외롭고 쓸쓸하게 세워져 있었고 바로 앞 백사장에 순교지를 나타내기 위한 십자가를 표시해 놓은 시멘트 증거물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순교기념사업회를 통하여 순교 동산이 눈에 띄게 커졌고, 아름답게 조성되어 졌으며,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기념비도 새로 세우고, 봉분(封墳)도 석관(石棺)으로 깔끔하게 꾸며졌고, 여러 조형물이 조화를 이루고, 순교 터 앞 해안도로도 포장이 되어 한결 안정감이 들어 보인다.

마침 바닷물이 밀려와 단장된 도로 벽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기념비엔 길고 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의 출생에서부터 젊은 시절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그리고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순교하시기까지 아래와 같이 그 분의 약력(略歷)인 셈이다.

1891년 신안 암태도에서 출생했고, 1908년 증도면 정씨 가문으로 출가(出嫁)했으며, 1927년 목포 북교동교회에 입교(入敎)하였고, 1931년 서울성서학원(現,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어 1933년에 임자 진리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1935년에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와 방축리교회, 우전리교회와 사옥교회를 개척하였고, 병풍교회는 나중에 순교기념교회로 세웠다고 한다.

증언의 글
인근 도서(島嶼)의 섬들을 나룻배로 순회하며, 고무신 신은 도보(塗步)로 전도자의 길에 수고로이 복음을 전하며, 여러 교회들을 개척하였는데 그의 복음전도와 헌신적인 신앙과 삶(生活)의 이야기는 성결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김준곤 목사와 정태기 교수 등이 증언(證言)

당시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6,25 전쟁 중에도 공산당에 의해 목포로 끌려 다니며, 여러번 생사의 고비를 겪다가 포승줄에 묶여 지도(智島)로 압송되어 사형장인 터진목 모래사장(現, 순교 터)에서 죽창(竹槍)에 찔리고, 공산당원들의 발길에 채이고, 총 머리로 맞으며 창(槍)으로 온 몸이 잔인하게 찔려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죽지 않자 목에 총구(銃口)를 대고 총살(銃殺)하였는데, 자신의 못 다한 사역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고 신앙을 지키다 공산당의 총탄에 맞아 순교함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만성 목사와 김두학 장로가 증언)

증동리 순교지
전라남도 서남단 해상에 흩뿌려진 114개(유인도8/무인도106)의 섬으로 형성된 증도면(曾島面)은 1983년 2월 15일 신안군 지도읍 증도출장소에서 면으로 분면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서가 제방(방조제)으로 막아지면서 현재는 99개(유인도6/무인도93)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새로운 군이라는 뜻으로 분군된 신안군(新安郡/1004개 섬) 소속의 1개읍 14개면 중 크게 5개리로 작게는 14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사는 면소재지인 증동리(당시 무안군 지도면 증동리)에 문준경(文俊卿·1891∼1950) 전도사님께서는 1933년 9월 증도 최초로 증동리교회를 개척하셨다.

문준경 전도사님께서 증도 최초로 개척하신 김상원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증동리교회 입구에 세워진 "한 알의 씨앗이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순교지석이 우리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증도는 천국의 섬답게 민박집 상호 역시 에벤에셀, 에덴, 은혜 등 그야말로 천국에 온듯한 느낌이 든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17세 결혼 첫날 밤부터 남편의 버림을 받은 고단한 영혼으로 주님을 만나 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으며, 그 분을 만나면 예수를 믿지 않고는 못견딜 만큼 훌륭한 복음의 사역자셨고, 그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시다가 주님의 교회와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60세의 나이로 1950년 10월 공산당의 칼과 총에 맞아 순교의 길을 택하셨다.

고인(故人)의 시신(屍身)은 주변의 솔무등에 가매장되었다가 다음 해 2월 호남지방회장(葬)으로 장례식이 거행될 때 추모인파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 문 전도사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한 밀알의 씨앗으로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순교의 뜻을 기리는 내용으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 서서 장문(長文)의 글을 읽어 내리니 조용히 머리가 숙여지며 숙연(肅然)해 지는 마음을 달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순교 터를 순례하면서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다짐하며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는 기회로 삼고 있는 듯하다. 잠시이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순교자를 추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순교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순교지 주변 대지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전 성결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물섬 증도
증도는 문 전도사님 순교 터만 순례하고 돌아오긴 너무 아까운 마음이 든다. 천혜(天惠) 보고(寶庫)의 섬 증도의 의미는 원래 작은 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여러번의 간척사업으로 하나가 되어 증도(曾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통 문화를 보존 관리해서 차별화된 관광지를 개발하여 지역특성 자원을 국제 브랜드화로 발전시키겠다는 발상에서 청정갯벌과 생태전시관, 해저유물 발굴, 우전해수욕장, 소금박물관, 짱뚱어다리 등 아직 때 묻지 않은 명소가 여러 군데 있다.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명사십리의 우전해수욕장은 몇 년 전부터 리조트(엘도라도)가 들어서면서 여름 성수기뿐만 아니라 년 중 무휴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지역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갯벌축제 등 다양한 이벤트와 갯벌 생태전시관의 운영으로 국내외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짱뚱어가 많이 잡히던 곳에 나무로 만든 472m의 짱뚱어 다리는 증동리 마을과 해변도로까지 연결하여 갯벌과 우전해수욕장까지 갯벌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다리 위를 걸어 중간까지 이르니 물이 들어 있는 시간이라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 드는데 관광객들이 낚시를 하거나 사진을 찍기도 한다. 국내 최대 단일염전인 ‘태평염전’ 에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천일염을 생산하기 시작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소금박물관까지 운영하고 있기에 특히 현장학습을 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또한 송원대 해저유물이 발굴되었던 장소 근처엔 바닷가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기념비 앞 무인도에 군(郡)의 지원을 받아 보물선 모양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데, 유물전시 및 레스토랑으로 활용한다고 하니 또 하나의 명물로 자리 잡게 될 전망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시간에 쫓겼지만 화도(花島)까지 돌아보기로 했다. 화도도 조그만 섬인데 대초리에서 연결된 뚝방의 긴 다리를 건너면서 좌우에 넘실대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화도에 도착하니 TV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고맙습니다) 셋트장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노두(路頭)에 차를 세우고 자세히 보니 좌우에 바윗돌 마다 말뚝망둥어 가족들의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정겨운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천국의 섬에 들어와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도 되지만 성결인이라면 한번쯤 천국의 섬 증도의 성지를 다녀가라고 권하고 싶다.

증도를 떠나며
50여년 이상 역사의 흐름 속에 희미한 기억마저도 무의미하게 조용히 묻혀 있었던 천국의 섬 증도와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 그리고 순교신앙의 행적(行蹟)이 근래에 와서 이제야 빛을 보며 꽃을 피우고 있다. 주님 앞에서 행한 한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獻身)적인 실천신앙과 순교(殉敎)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단인(성결인)들 뿐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많아졌음을 보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는 성결교회의 순교지(地)가 여러 곳에 있고 타 교단들도 앞 다투어 자랑스러운 자기 교단 교회와 순교자의 유적지를 발굴하여 크고 작은 순교기념관들을 짓고 있는데 순교영성의 길을 따라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없어 명맥(命脈)만 유지하며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고 있지만 특히 증도에 문준경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천국의 섬” 이라는 책자(임병진 저)가 발간되고 그에 따른 DVD 가 제작 발매되더니 얼마 전에는 CBS에서 방영된 “새롭게 하소서” TV 프로에 대초리교회의 지영태 목사님이 출연(出演)하면서 방송을 통해 알려지고 전국 서점에서 책이 절찬리에 판매되면서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증도 순교지가 더욱 알려지고 있고 수많은 순례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문전성시(門前成市)인데 사명감에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요소요소에 숨어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교회성장이 둔화되어지고 영성(靈性)은 없어지고 신앙과 열심마저 식어진 모습을 보면서 후손들에게 어떤 신앙의 유산(遺産)을 물려주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돌무더기 몇 개의 흔적만 풀숲에 남아있는 소아시아의 초대교회가 될는지, 웅장한 건물은 있지만 형식적인 전통만 자랑하며 예배(禮拜)가 없는 서구(西歐)의 중세교회를 답습(踏襲)하게 될지, 믿음을 지키고 참되게 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가운데 소수이긴 하지만 물량주의에 타락한 현대교회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이대로 고스란히 후대(後代)에게 물려주게 된다면 옹졸해져서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지 모를 일이라 염려가 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어 신앙의 꽃이 활짝 피어올라 민족 복음화를 앞당기는 일에 일조(一條)한 문준경 전도사님과 같은 순교신앙이 절실히 요구되는 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使命)이다.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6,25전쟁 때와 일제(日帝) 치하(治下)의 고난의 시기와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면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고통 속에 신앙생활하던 때에 교회는 오히려 성장했고 신실한 순교자들이 탄생했었다. 지금처럼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살면서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으리라는 이기적인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복음화율 90%를 자랑하는 증도에 사는 성도(聖徒)들과 목회자(牧會者)들의 삶(生活) 자체와 예배를 통해 뜨거운 찬양과 진실되게 기도하는 모습속에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듯하며 모두 순교자들처럼 보여 너무너무 존경스럽기만 하다.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천국의 섬 증도의 낮은 땅에 어스름한 저녁노을에 묻힌 그 섬을 아련히 뒤로하니 자꾸 사랑스러워지고 뒤돌아보게 된다. 급한 마음으로 찾아왔다 황급히 섬을 훌쩍 떠나는 나 자신인데 머지않아 마음을 가다듬고 순교신앙을 이어받을 신실한 성도(聖徒)들을 대동하고 꼭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는 작심(作心)을 해본다.

추모사에서
아래 몇 줄의 글 모음은 추모예배시에 지방회 목사님들의 글임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로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죽을 때까지 말씀을 전하다가 죽는 전도자가 되고자 열망하여 기도하셨지요, 열망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당신의 삶이 되어 1950년 10월, 60세의 생을 마칠 때까지 당신의 매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타오른 불꽃이었으며 그 분의 수난에 동참한 거룩한 헌신이었습니다.”
(김대운 목사의 추도사에서)

“아~ 아~ 해변에 부는 바람이여! 너는 기억하는가? 아~ 아~ 해변에 서있는 늙은 소나무여! 너는 잊지 않았겠구나? 아~ 아~ 언제나 출렁이는 바다여! 너의 품에 배를 타고 복음을 전하던 님의 모습을 너는 아는가? 님의 순교의 피는 섬들마다 복음의 불꽃으로 타올라라...(중략)... 님이여 보소서! 당신이 뿌려놓은 복음의 열매를... 님이여 기뻐하소서! 날마다 자라가는 교회들의 우렁찬 고동소리를... 님이여! 언제나 저의 신앙에 도전이 되소서! 님이여 계절은 지나가고 구름은 흘러가도 당신의 그 순교의 피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고귀함의 결정이어라.” (최인식 목사의 추모시 중에서)

“우리의 신앙의 어머니는 신안의 모든 영혼을 구원코자 21개 섬들을 1년에 아홉켤레의 고무신을 달치시며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나드셨습니다. 나아가 이 땅의 모든 영혼을 구원코자 불타는 구령의 열을 후예들에게 심어주어 한국교회에 귀한 기둥들의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나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열정을 갖지 못했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진성수 목사의 추모예배 기도문에서)

“전도사님! 사랑합니다, 사모합니다, 너무도 그립습니다, 멀지 않는 날에 우리도 달려갈 길 다 마치고 주님계신 천국에 승리롭게 입성할 때에 전도사님께서 먼저 달려와 저희들을 맞아 주십시오, 전도사님의 모습을 뵈올 승리의 그 날을 기다리며...”
(지영태 목사의 추모사에서)

순교정신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 홀로였고 물론 가족도 없었고 후손도 없었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중한 한 생명을 아낌없이 내놓았던 자랑스러운 성결인이다. 이 시대에 그의 맑고 순수한 신앙계승과 철두철미의 순교정신을 당연히 이어받을 제2, 제3의 문준경이 성결인의 몫으로 나와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사랑하여 이곳저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함으로 도서(島嶼) 사람들의 어머니이셨던 그 분의 흔적이 아직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에 묻어있지만 이 순교영성이 다음 세대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야 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주님처럼, 사도들처럼, 핍박과 고난의 시대에 교회의 명맥(命脈)을 이어준 신앙의 위인(偉人)들 틈에 끼어 문 전도사님은 지금도 살아있는 신앙인이고 그리스도를 본받은 목회자였고 순교자였음을 부인(否認)할 수 없다.

그 순교의 피가 밑거름되어 세운 교회들이 참된 신앙을 지키며 성장하고 순교정신이 확산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감동과 신앙적 각오와 결단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어서 다행스럽다.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에 대한 성결교회사적 평가와 과제
순교는 흔히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 폭정과 부정의에 대한 항거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순교의 거룩성과 아름다움은 신앙의 수호를 위해 총칼보다는 사랑의 죽음을 택했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신앙의 순교는 역사 속에 하늘의 별처럼 찬연히 빛나고 그러한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거룩한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소란스럽던 증동리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갑자기 “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여!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작지만 또렷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공산 폭도들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서 문준경 전도사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외친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오늘도 거룩한 메아리가 되어 수많은 심령 가운데 울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생각해 봄으로써 그 의미를 반추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성결교회의 여성 사역자로는 첫 순교의 자리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성결교회의 역사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께 헌신했던 수많은 여성사역자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수난으로 점철된 성결교회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단의 부흥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40세의 늦깎이 나이에 헌신했지만 유난히도 많은 시련을 겪었던 문준경 전도사 또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섬 지역의 복음화에 헌신하였다. 경성성서학원에 재학 중에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임자도 진리교회는 그 지역 최초의 교회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 지역과 주변은 복음의 처녀지(處女地)였으며, 그녀의 전도에 의해 비로소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공산 폭도들이 문준경 전도사를 무참히 살해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녀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며 “그냥 놔두면 더 많은 새끼를 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성결교회,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도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동시에 그녀는 성결교회 최초의 여성 순교자로서 한국교회 및 성결교회 여성사의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고 있다.

둘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가시밭의 백합화’로 상징되는 성결교회 신앙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는 ‘가시밭의 백합화’라는 상징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 상징에 내포된 뜻 가운데 하나가 찢겨진 상처로 인해 더욱 진한 향기를 발하는 백합꽃의 속성처럼 성결인의 신앙은 세상의 시련 가운데서 더욱 강렬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다는 것이다.

성결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던 선교 초기부터 한국성결교회는 수난의 험난한 행로를 걸어야했다.
때로는 친일파라는 오해로, 때로는 상종 못할 이단사설이라는 오해로 여기저기가 뜯기고 찢어졌다.
더욱이 국가시책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면서 성결교회는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형국이 되었다. 이 와중에 문준경 전도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에 일제에 불려가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역하던 증동리교회도 경방단에 매각되고 그 대금 또한 국방헌금의 명목으로 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수난의 질곡 속에서도 성결인들의 신앙은 쇠하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성결인들의 그러한 신앙은 이 민족의 해방과 함께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일제에 의해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 한편 각처에 새로운 제단들을 설립하면서 힘차게 약진해 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약진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 민족이 동족상잔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아픔을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절정에는 순교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교의 박멸을 꾀하는 공산도배들의 폭거에 항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다 맞게 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도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전쟁의 와중에 저질러진 공산주의자들에 만행은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든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하려 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여기저기서 자행되었으며, 한국 성결인들 또한 그 십자가를 져야 했다.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에서는 48명이,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66명이, 전북 정읍의 두암교회에서는 22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 전쟁으로 성결교회는 110여 개의 교회가 파손되었으며, 목사 9명, 전도사 2명, 장로 5명을 포함해 160여 명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여기에 납북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아진다.

셋째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는 십자가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목자 됨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이 모든 목양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를 통해 초기 성결교회 사역자들이 가졌던 그러한 정신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에게는 이 순교를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떼들을 홀로 고통 속에 둘 수 없다는 목자의 심정으로 증동리교회를 찾아갔다가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순교의 사건이 있기 전 문준경 전도사는 양도천, 이봉성 전도사 등과 함께 특별 감시 및 교육대상에 차출되어 증동리에서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이미 목포에는 국군이 상륙하여 공산당들은 모조리 철수하고 없었다. 이에 세 사람을 압송하던 내무서원들은 세 전도사에게 친척집 등으로 가라고 이르고는 도망가 버렸다.

양도천 전도사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포에 머물렀고, 문준경 전도사는 잠시 친정을 방문한 뒤 공산당들을 피해 숨어 있던 이성봉 목사를 찾아가 증동리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그때 이성봉 목사는 증동리에도 국군이 들어가 공산당을 완전히 토벌한 뒤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했다. 하지만 문준경 전도사는 증동리에 있는 신자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제가 죽을지언정 저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백 전도사가 제 대신 남아 모진 수모를 당할 텐데, 어서 돌아가야지요. 한시라도 빨리요”라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증동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이러한 자기희생적 사랑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백사장의 처형장으로 끌려온 양민들의 행렬 속에는 백정희 전도사도 함께 있었다.

백 전도사는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를 어머니처럼 섬기며 따랐고, 문준경 전도사도 백 전도사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이러한 그녀였기에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 폭도들이 자신을 죽창으로 찌르고 총대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백 전도사만은 살려주시오. 제발...” 하며 애원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백 전도사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가 갖는 성결교회사적 의의를 반추해 펴 보았다.
그녀의 순교속에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의 신비와 또 다른 생명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헌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제는 그러한 순교자적 정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고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로 순교자들의 사적과 신앙에 대한 조명 작업이 교단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이러한 사업은 주로 관련 있는 몇몇 사람이나 혹은 기념사업회 등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아름다운 순교자적 신앙전통이 가족사 혹은 개교회사적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후손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순교자들에 대한 조명 작업이 한쪽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교단의 상징인 순교자적 신앙의 전통을 제고하기 위해 교단적인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사실 전통적으로 성결교회는 역사를 만드는 데는 여타 교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정리 보존하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면에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성결교회의 소중한 전통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순교자적 신앙전통의 보존 및 승계를 위해 교단적인 차원에서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순교자들 신앙을 대중화하는 작업을 통해 교단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는 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은 보고 느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와 학생들 그리고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바다를 쉴 사이 없이 클릭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감동시키는 만화, 영화, 공연 등의 볼거리를 찾아 몰려다니고 있다.

교회는 잘만 계발하면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신앙적 자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교자들의 생애와 신앙은 그 대표적인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소재들을 만화나 영화 그리고 인터넷 동영상 등으로 제작하여 널리 보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사적지에 대한 보존 및 복구와 성지화 작업을 비롯하여 순교자기념관 등의 건립이 시급하다. 그리고 개교회의 야외활동, 청년 학생들의 수련회를 비롯한 각종 활동과 이들 장소를 연계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나 장로교 등에서는 이러한 작업들이 많이 진척되고 있다. 가끔 필자에게 성결교회의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몇몇 장소를 안내하기는 하지만 매우 당혹스럽다. 마땅히 추천할 만한 장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성결교단은 이제 창립 1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제 역사의 정리와 보존 그리고 승계를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허명섭 (성결교회 역사연구소 전임연구원)

 

증도 성지순례 안내 및 무료 관광안내는 이종화(전남 신안군 소속 문화관광해설가 / 증동리교회 집사) 011-644-8882번으로 연락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 ^^

 

 

증도 성지순례 안내 및 관광안내(증도사랑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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