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테라와다 불교 |
대승불교 |
개인과 대중 |
-개인의 도 -개인적인 문제에만 초점 (상구보리) |
-대중의 도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것 (하화중생) |
분석과 직관 |
-분석적 방법 -교리를 숫자로 표현하여 분석적 |
-직관적 방법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
의식과 무의식 |
-심의식 차이가 없음 -의식을 중요시 -사유, 생각에 초점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하는 것 -신구의 3업 알아차림 강조 |
-내마음은 내마음대로 안되는 것 -식을 6,7,8식으로 나눔 -심층 무의식을 중시 -무의식이 나를 지배
|
아라한과 보살 |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라한 |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 |
이성과 감성 |
-이성에 호소 -논리적, 합리적, 때로 냉정 -지혜롭지 못하면 법을 이해못함(와서보라!) -법을 알아차려 스스로 체득 |
-감성에 호소 -북, 노래, 춤 등으로 신심과 환희 고취 -스스로 체득 안되니 불상, 조각, 탱화 등 감성에 호소 하는 방식 활용 |
표와 같이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는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차이가 많은 서로 다른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결국 ‘믿음의 차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테라와다와 대승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테라와다와 대승 모두 ‘믿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믿음을 빠알리어로 ‘삿다(saddha)’라 한다. 삿다는 맹목적 믿음이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한 확신을 말한다. 그런 믿음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데 여기에 계를 하나 더하여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마성스님은 설명한다.
이렇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불법승계에 대하여 ‘사불괴(四不壞)’라 하는데, 이는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성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진리에 대한 눈뜸이 있을 때 가능하고, 진리에 대한 확신과 체득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음이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대승의 믿음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것
대승의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내가 부처’임을 믿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의 믿음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렇게 내가 부처임을 믿고 나서 그 다음에 이해하고 닦고 증명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대승에서는 이를 ‘신해행증’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믿음이 다르니 수행과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점수와 돈수에 대하여 설명한다.
“열심히 하라!” vs “성불하세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의 수행은 점차적으로 닦아 나가는 ‘점수’라 한다. 단계별로 닦아 성숙하는 것이기 때문에 닦음을 매우 중요시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하는 말은 “열심히 하라!”라고 말하는데, 이는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말이라 한다.
반면 대승에서는 ‘급진적’ 깨달음을 중시한다. 이를 ‘돈오’라 한다. 담박에 깨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을 매우 중요시 한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우리나라 불자들은 “성불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불하세요” 대신 차라리
스님은 ‘성불’이라는 말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불자들 간의 인사말인 “성불하세요”라는 말은 “부처가 되라!(become a Budha!)”는 말인데, 과연 이 말 대로 ‘우리들 모두는 부처가 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하는 것 자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대승이다.
그러나 대승의 성불론은 목표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목표도 정도껏 잡아야 되는데, 실현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잡았을 때 ‘허황’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부처가 되라’는 이야기는 뜬구름 잡기식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초등학교 교실에 붙어 있는 성실, 근면, 정직, 순결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에게 “복도에서 뛰지 마라”라고 하면 잘 알아 들을 것인데, 그들 앞에 성실, 근면 등의 고상한 문구를 붙여 놓았을 때 공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말하기를 “성불하세요”대신 차라리 “정진합시다” “행복하십시요” “건강하십시요”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실천 가능한 말이라는 것이다.
돈오는 한탕주의
담박에 깨닫는 돈오는 전형적인 ‘한탕주의’와 같다고 한다. 진리에 대한 눈을 뜨는 것이 깨달음인데 반하여 대승의 돈오의 경우 깨닫고 나면 인간이 개조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배웠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지금 초등학교 수준 밖에 되지 않는 수학실력을 가졌는데, 돈오 하였다 하여 대학수준의 수학실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영어도 못하는데 담박에 깨달았다고 하여 영어가 술술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방에 개조 된다고 믿는 것이 돈오이고, 그렇게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 테라와다이다. 그렇다면 급진적인 깨달음인 돈오와 점진적인 수행의 점수는 어느 것이 맞을까. 이에 대하여 삼예의 논쟁을 들 수 있다.
돈오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난 사항
794년 티벳 삼예(samye)사원에서 논쟁이 있었다. 그때 담박에 깨닫는다는 중국 선불교의 돈오론과 점진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인도의 점수론이 격돌하였다.
이 논쟁에서 돈오론를 주장한 선사가 패하게 된다. 그 후 티벳에서는 돈오의 선불교 대신 단계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인도불교가 각광받는다. 이처럼 단계적 깨달음에 대한 것이 티벳불교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 ‘보리도차제론’이다.
이처럼 돈오논쟁은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난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로 보여진다.
심성불정설 vs 본래청정설
다음으로 ‘번뇌’와 ‘보리(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심성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든가 악하든가에 대한 논쟁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이를 ‘번뇌’와 ‘보리’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번뇌와 보리 역시 테라와다와 대승에서 보는 입장이 다르고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다. 즉 테라와다에서는 인간은 본래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닦아서 제거 해야 하는 것으로 보지만, 대승의 경우 따로 닦을 것 없이 본래 청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심성불정설과 본래청정설의 대결인 것이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한 것이고 본래 부처인 것으로 다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누구나 다 깨달은 부처이기 때문에 맑은 하늘에 덮여 있는 구름을 걷어 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광막한 푸른 창공을 보면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성층권의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 하얀 뭉게 구름 위로 펼쳐져 있는 창공은 광대하다. 이를 한자식 표현을 빌리면 검을 ‘현(玄)’이고 영어식 표현을 빌리면 ‘vast’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비행기 속에서 본 푸른 창공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광막하다.
그런데 비행기가 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하기 위하여 구름을 뚫고 내려 가야 하는데 이때 하늘은 뿌였타. 잔뜩 흐리고 비라도 뿌릴 듯한 날씨이다. 불과 몇 분 전에 보았던 푸른 창공과 딴 판이다. 이처럼 대승에서는 본래 우리마음이 청정하고 본래 부처이지만 구름이 낀 것처럼 오염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구름을 걷어 내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나 테라와다의 경우 ‘고’에 초점을 둔다. 그래서 고를 일으키는 번뇌의 해결을 해야 하는데 그런 수행방법은 매우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빠사나를 들 수 있다.
이렇게 테라와다에서 고와 고의 소멸, 번뇌의 소멸에 중점을 두며 번뇌에 대하여 주로 이야기 하지만 대승에서는 ‘본래 번뇌는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렇게 있는 번뇌를 없는 것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기가 차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승에서는 없는 것이라 할까.
‘에드워드 콘즈’가 한 말 중에
여기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너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 좋아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치를 적용하는 것이 대승이라 한다. 인간이 번뇌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든가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말을 듣기 좋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라고 한다.
사람들은 칭찬 받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똑 같은 사람에게 ‘사모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아라 하고, ‘아지매’라고 부르면 싫어한다. 그래서 높은 것처럼 불러 주면 좋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는 많이 있다.
여성불자에게 ‘보살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아라 한다.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또 남자불자에게 머슴의 이미지가 풍기는 ‘처사’보다 유마거사를 떠오르게 하는 ‘거사님’이라고 불러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는 모두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 주는 것이다.
‘내가 부처’라든가 ‘본래부처’라는 말은 다 듣기 좋은 말이고 듣고 싶은 말이다. 위안으로 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반야부에 대하여 30년간 연구한 영국의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가 한 말이라 한다.
좋은 말만 듣고자 하는 이들을 위하여
인간은 나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듣기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는데 이는 순간적으로 위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테라와다 에서는 이와 같은 위안을 주는 말 대신 철두철미하게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아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에 가득찬 미완성의 마음을 완성된 마음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이와 반대로 말한다. 열반사덕에 대하여 ‘상락아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잘못된 견해이다. 그래서 ‘사전도견(四顚倒見)’이라 한다.
이는 바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승에서 부처의 경지에서 본다면 상락아정은 맞는 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본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려 주는 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본래부처다든가 번뇌는 본래 없다든가 열반은 상락아정이라든가 등의 말인데, 스님은 이처럼 듣기 좋은 말의 대표적 경전으로서 화엄경을 들 수 있다고 하셨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엄된 연화장 세계
화엄경은 부처님에 삼매의 경지에서 본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그래서 화장세계, 연화장 세계라 하는데, 중생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보살들에 대한 찬탄과 찬양 그리고 향기롭고 온갖 것들로 화려하게 장엄된 엄청난 스케일의 세계이다. 화엄경의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타화자재천궁(他化自在天宮)의 마니보장전(摩尼寶藏澱)에 큰 보살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 보살들은 모두 최상의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은 이들로서, 저마다 다른 세계에서 여기에 모여든 것이다. 그들은 보살이 지혜로 증득한 경지에서 머물고, 여래의 지혜를 거울 삼아 부지런히 수행하여 쉬지 않으며, 여러가지 신통에도 능하였다.모든 중생을 교화하되 그 시기를 잃지 않으며, 보살의 큰 원을 이루기 위해 어떤 세상에서 나 어떤 겁(劫)에서나 어떤 불국토에서나 여러가지 행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화엄경, 화엄경십지품)
화엄경은 중생의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를 묘사 한 것이기 때문에 화려 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화엄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었다는 말인데,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식된 세계를 말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장엄된 연화장 세계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 대한 묘사를 보고 환희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엄경 바깥으로 나오면 역시 고통스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전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런 경전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도에서 ‘영화’의 예로 설명될 수 있다.
발리우드(Bollywood)영화
미국에 허리우드가 있다면 인도에 ‘발리우드(Bollywood)’가 있다. 발리우드는 인도의 영화산업을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그런데 발리우드에서 만들어 내는 영화의 수는 할리우드 보다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리우드 영화는 인도국내용이라 한다. 인도사람들이 보고 즐기는 영화라는 것이다.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짧은 것이 3시간 짜리이고 길면 5시간이라 한다. 그래서 도중에 휴식시간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무희가 출연하여 춤추고 노래하는 즐겁고 행복한 장면 위주라 한다. 괴로운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현실도 괴로운데 돈주고 또 괴로움을 맛보는 영화를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가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한 ‘판타지’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영화를 봄으러서 마치 자신이 그 환상의 세계에 있는 듯하고 더구나 그 환타지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 역시 현실은 현실이다. 소똥으로 가득한 거리에서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보고 싶은 것만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화엄경과 인도영화
그런데 화엄경도 인도영화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은 것 등이 모든 면에서 인도영화와 유사한 것이 화엄경이라 한다. 이는 대승경전 자체가 대부분 이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부처, 본래 깨달은자, 본래 청정함, 열반은 상락아정과 같다는 말이 모두 듣기 좋은 말, 듣고 싶은 말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례’ 또한 발달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새벽예불
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간 차이점 중의 하나가 ‘의례’에 대한 것이다. 대승에서는 의례가 매우 발달하여 의례로 시작하여 의례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테라와다의 경우 의례라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스님이 1987년 스리랑카에 갔었는데, 첫날 아침 예불 때문에 몹시 긴장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잠도 잘 못자고 새벽 예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새벽 3시가 되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4시가 되고 5시가 되어도 새벽예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7시가 되자 비질 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 하였지만 끝내 새벽예불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새벽예불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새벽 3시가 되면 도량석이 시작 되고 잠시 뒤에 북소리가 나는 등 요란 하지만 스리랑카의 경우 너무나 평온하였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의 전통대로 생활하기 때문이라 한다.
수행 따로, 삶 따로
이처럼 의례가 대승과 테라와다의 큰 차이점이다. 의례를 중시하는 대승에서는 북, 종, 목탁 등 갖가지 도구가 등장한다. 또한 육법공양이라 하여 향, 초, 꽃, 과일, 차, 쌀을 올린다. 특히 사시마지에서 부처님에게 밥을 올리는 장면을 보면 그 정성이 지극하기 이를데 없다. 마치 살아계신 부처님에게 공양올리는 듯하다.
이렇게 갖가지 도구와 공양물을 올리는 법당은 성스런 장소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법당에서 예불드릴 때 가사를 입는다. 가사를 입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임을 뜻한다. 하지만 법당을 벗어나면 더 이상 가사를 입지 않고 승복을 입고 생활 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대승불교가 ‘수행 따로, 삶 따로’ 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성스런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법당이라 한다. 법당에 올리는 공양물은 ‘꽃’ 하나로 족다고 한다. 그것도 꺽은 꽃이 아니라 땅바닥에 떨어진 꽃을 물로 깨끗이 씻어 올려 놓으면 그만이라 한다.
그런 법당은 신도들 뿐만 아니라 거지도 들어 올 수 있는 곳인데, 심지어 개들이 들어와 ‘헐레’를 하기도 하는 장소라 한다. 또 비구들의 복장은 우리나라 스님들처럼 승복따로 가사따로가 아니라 가사자체가 승복이고, 생활복이고, 잠옷이어서 항상 걸치고 다닌다고 한다.
왜 테라와다와 대승은 정반대의 입장일까
그렇다면 왜 대승불교는 테라와다 불교와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반대급부의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테라와다불교가 이성에 매달리다 보니 반대급부로 대승에서는 감성에 호소 하게 되었고, 둘째, 테라와다불교가 번뇌와 그 소멸에 치중하다 보니 반대급부로 대승에서는 보리(깨달음)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셋째, 테라와다불교가 교리에 치중하다 보니 반대급부로 대승에서는 믿음을 유도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비교표를 만들 수 있다.
테라와다에 대한 대승의 반대급부 논리
구 분 |
테라와다불교 |
대승불교 |
도 |
개인의 도 |
대중의 도 |
수행 |
점진적 수행 |
급진적 수행 |
방법론 |
분석적 방법 |
직관적 방법 |
심성 |
번뇌측면으로 인간이해 |
보리(깨달음)측면으로 인간이해 |
내세관 |
현실세계에 초점 (지금 여기서 행복) |
이상세계 중시 (정토, 극락왕생) |
의례 |
의례를 중요시 하지 않음 |
의례를 중요시 함 |
성격 |
합리적, 이성적, 논리적 |
감성적, 신비적 |
이처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이다.
열반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위 비교표 중 내세관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대승의 경우 죽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극락 또는 정토를 매우 중요시 한다. 하지만 테라와다의 경우 매우 현실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 수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N131, 전재성님역)
이것이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의 행복관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 diṭṭha-dhamma, 現法에서 삶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라와다와 대승을 왕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염하면서 위빠사나수행을 한다든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니 초기불교 신봉자들이 절에서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또 한편으로 초기불교를 교학과 수행을 겸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짬뽕’처럼 어찌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네~” 하며
이렇게 1시간 30분에 걸친 마성스님의 열정적인 법문이 끝났다. 법문 도중 스님은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내 말 뜻 이해하시겠어요”하며 물어 본다. 그러면 경청하고 있는 여성재가불자들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네~” 하며 맞장구를 쳐 주곤 하는데, 이런 호응은 대승불교 불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한 것이었다.
서로 무릎을 꿇고 앉아
법회가 끝나고 난 후 남은 의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시간이다. 이를 식순에서는 ‘공덕회향’이라 하였다. 공양물을 스님들께 올린다음 3배를 드린후 제자리로 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해 온 공양물을 들고 스님들 앞에 앉아 있는 불자들을 볼 수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자세이었다.
스님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것을 테라와다 불교 의식에서 처음 보았다. 의식을 시작할 때 수계의식에서 볼 수 있었고, 공양물 올릴 때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탁발의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스님들
그 동안 한국불자들은 스님을 매우 높은 존재로 보아 왔다. 한글삼귀의문에 표현 되어 있듯이 스님들은 ‘승보’로 간주되고, 어느 스님이건 간에 모두 삼배의 예를 올려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스님들은 모든 법회 행사에서 정해진 의식에 따라 법회를 주관하는 역할을 하고 각종 기도회나 천도재에서 마치 사제의 역할 까지 하여 매우 대하기 어려운 존재로 알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님이 법문하러 법상에 올라갈 때 청법가를 부르고, 대선사의 경우 법문할 때 주장자를 들고 ‘할’을 하는가 하면, 법문 도중 ‘아미타불 게송 노래’를 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스님들은 재가자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스님들이다.
단지 하나의 수행자로서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비구들을 보면 우리 재가불자들과 하나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어떤 계급의식이 없음을 말한다. 천주교 신부처럼 ‘사제’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천도재에서처럼 이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해 주는 제관도 아니다. 그렇다고 목사들처럼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생활인’도 아니다. 단지 하나의 수행자로서 보일 뿐이다. 그런 모습을 무릎꿇은 자세에서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부처님 당시의 탁발모습을 보는 듯
테라와다 비구들이 재가자들 앞에서 무릎꿇은 자세는 신선한 충격이다. 재가자들 역시 무릎을 꿇고 공양물을 올리는 모습 역시 아름답다. 탁발정신이 완전히 실종된 한국불교에서 출재가 사이에 마치 부처님 당시의 탁발모습을 보는 듯 하다.
2012-06-23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첫댓글 연광님, 잘 계셨어요...지난 모임에 뵙지 못해 섭섭했습니다...글을 잘 읽었습니다...그런데, 이 글을 쓰신 것이 누구이신지 모르나 모순이 있는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아마도 비교하기 위한 글이라서 그렇겠지만, 대승이 어떻다 하는 비교 부분에서 불교의 핵심사상을 거스르는 듯한 표현이 제법 보여지는군요...그 덕분에 또 다른 부분을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선님 저의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 ..처음에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읽어 볼 수록 현재의 대승불교에 대한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 . .아직 저의 알음 알이가 깊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말씀은 못 드리지만, 관선님의 이해력이라면 좀 더 차분히 읽어 보시면 충분히 알아체리라 생각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종단과 종교형태가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솔직히 저는 부처님의 정법을 이제라도 접하게 된것을 참 다행이라 생각되고, 우리 도반님들도 관심을 좀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내세관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대승의 경우 죽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극락 또는 정토를 매우 중요시 한다..." '대승의 경우 죽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 이것...대승이든 소승이든 다 불교이고, 이 말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거스른다는 생각이 듭니다...부처님의 정법은 진리에 대한 깊고 바르고 완전한 이해...현재 한국불교나 대승권의 불교 시스템과는 다른 문제...대승의 방편을 정법인양 표현한 것에 대한 제 의견입니다...연관님 덕분에 제 공부도 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합니다...열심히 공부하시는 연광님에게 합장드립니다. 다음 월례회때 만나서 한 번 더 이야기해봅시다..._()_...나무아미타불!
네. . .그렇찮아도 공부의 방향에 대해서 의논하고 싶습니다. . .. 시간 날 때 한 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 마하반야바라밀 .. ._()_
잘 읽고 갑니다...나무아미타불_()_
1) 안녕하세요 연광님의 마음충분히 공감합니다 보림이도 첨 공부시작할때 상좌불교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이렇게 쉽게 접근 할수 있는데 왜 우리불교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많은 사유와 고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초기와 대승을 함께 하고는 있습니다 대승은 상좌를 알아야 하고 상좌도 대승을 알아야 한다 저 개인적 견해는 그렇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 않습니까 상좌불교를 접할수 없었던 세대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에 감사해야 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않을수 없는 부분이 있는것 같습니다. 연광님과 관선님 보림 우리법우님들 모두 차안에서 피안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2) 길위에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가시덤불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길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것으로 사료됩니다 예를 들면 말입니다 "모르면 용감하고 알면 식은땀이 흐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알면 용감하고 모르면 식은땀이 흐른다는 말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안다와 모른다' 이 둘을 다 놓으셨습니다. 분별없는 그자리 우리가 가는길은 오직 말과 생각이 떠난 자리 입니다. 그곳이 진리임을... 그 세계를 향해 길을 갈 뿐 입니다 이 부분에 상좌와 대승이 따로 하지 않습니다 신을 믿고 따르는 타 종교와의 비교는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보림은 대승에 회통 이란 말을 참으로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왜 신을 믿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는 가능하다 말하는가? 말과 생각이 다르지 않는가? 보림 보아라 너의 앎이란, 알음알이란 이런것이다 완전할 때까지 철저히 바르게 사유하라!!
3) 부처님의 원음이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상좌불교에도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신의 발달로 인해 검증없는 글들이 넘쳐 남을 깊히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릇이 종지기일때, 대접일때, 바가지일때, 부처님법이 수승하고 희유하여 그릇에 담길때 마다 달라진다는걸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초기불교를 한다며 대승을 비방하고 관세음보살을 창작보살이라 비방하고 폄하하는 기독교 극우파들, 근본주의자들 처럼 번져질까 염려 되는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왜 그럴까 그것도 수행의 재료로 이용해 보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상좌불교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우리는 부처님이 왜 중도를 설하셨는지...
4) 이 팔정도를 잊어선 안될것입니다 첫째 정견을 세운다 라고 있지 않습니까 정견을 세우는 지혜를 계발하는데 정과 혜를 골고루 닦아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연광님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글은 글일 뿐이며 이 또한 제 사견임을 양지 바라며 덕분에 보림이도 공부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행이 길위에서 붓다의 바른길을 찾아가고 있으며 그분이 가르치신데로 하면 행복해 진다는걸 알았기 때문에.. 날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평안하기를 안락하기를 바라며 기회가 되면 함께 나누어 보아요 감사합니다..^^
묘보림님의 긴 견해 잘 보았습니다. .. 모든 부분들 다 이해 합니다. . .결코 어떤 부분에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결론을 돌출하자는 뜻에서 글을 퍼온 것은 아니였습니다.. .다만 .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제대로 공부해 보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나라 불교에 대해서도 좀 생각을 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 한 소식을 위해서 오로지 참선에 매달려야 하는것이 옳은 것인지 .. .. 중생을 위해 법을 제대로 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 .등등 .. 아직은 저의 목소리를 낼 때가 아니라 그냥 이곳 저곳에서 올려 놓은 스님들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 .. 하도 답답해서 우리 도반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하고 글을 퍼왔어요.
물이 흘러가듯.. 법의 흐름에 드신 연광님을 축복합니다. 이런 분위기 참 좋습니다.. 법에 대해 나누고 함께 공부하고... 답답하다는건 목마름을 느낀다는 말도 되지요. 치열한 구도심, 간절함이 들때 공부의 길은 열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승불교권에 있으며 우리가 과연 얼마나 제대로 대승을 이해하며 알고 있을까요. 제대로 아는자, 눈밝은자가 되기 위해 함께 디지털불교의 꽃을 피워보아요.. 그 빈틈을 우리 디지털불교 1세대가 메꿔야 하지 않을까요. 연광님 손내밀면 언제든지 도와 주실거죠..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그 길을 따라가며, 고불고조님들의 번뜩이는 지혜의 칼날을 느끼며 오늘도 길을 나섭니다.. 고맙습니다.
네. . .
그렇습니다. .
한 사람이 어떤 의견을 냈을 때. .
그 의견이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바로 반격하는 것 보다는 묘보림님처럼 공감하고 어떤 부분이 자기가 배운 것과 맞지 않으며 또는 맞는 것인지 하나 하나 짚어 보는 게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라 여겨집니다.
무심하게 흘려 버리는 분들 보다는 묘보림님처럼 자신의 견해를 내놓는 분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집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모양이나 달의 모양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법을 구하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감사합니다.. . 더욱 정진하는 도반이고 싶습니다. . 마하반야바라밀. .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