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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일본 전통사회의 이해 인터넷 학습 자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각 문화의 특징과 시대적 순서
1. 아스카 문화의 특징(성덕태자의 치세를 중심으로 한 약 1세기)
① 최초의 불교문화 ② 중국 육조와 고구려, 백제 등 한반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화
③ 국제색이 풍부한 문화
2. 하쿠호 문화의 특징(덴무, 지토 천황 당시)
① 청신하고 밝은 이미지를 지닌 문화 ② 불교색이 짙은 문화 ③ 초기 당나라의 영향이 강한 문화
3. 덴표 문화의 특징(나라 시대)
① 귀족 중심의 불교 문화 ② 전성기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화 ③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
4. 고닌 조간 문화의 특징(헤이안 시대 초기)
① 귀족 중심의 불교문화 ② 밀교의 영향이 강한 문화 ③ 어둡고 신비적인 이미지를 지닌 문화 ④ 당나라 말기의 영향을 받은 문화
5. 국풍문화 또는 후지와라 문화의 특징(헤이안 시대 중기, 섭관정치가 행하여지던 시기)
① 당나라 풍에서 일본풍으로 전환된 문화 ② 가나 문자의 발달
6. 원정기 문화의 특징(헤이안 시대 말기,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되던 시기)
① 정토교 문화의 지방화 ② 문화의 서민화
@대륙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시기 - 일본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을 쌓았던 아스카, 나라 문화(대륙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일본의 풍토에 맡는 문화로 바꾸어, 뒷날 일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을 쌓아갔다. 특히 문자와 불교의 전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아스카 나라 시대는 대륙에서 건너온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것들을 일본의 풍토에 적합한 것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모색하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문자와 불교의 전래는 일본의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래, 문자를 지니지 않았던 민족이 처음으로 대륙에서 전래된 한자를 접하고 난 뒤, 일본 독자적인 표기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문자의 전래는 그 뒤 율령과 같은 법의 제정과 고지키(古事記), 만요슈(萬葉集)와 같은 문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불교의 전래는 이국의 신을 믿는 것으로, 처음에는 국내에 소란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점차 진정되어 호족들 사이에 사적으로 신앙되기에 이르러, 불교의 사상이 정치에 반영되게끔 되었다. 나아가, 조정과 귀족에 의한 사원의 건립과 신앙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당시 제작된 불상과 사원 건축 등의 불교미술은, 지금도 여전히 나라의 옛 사찰에 신앙과 더불어 그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 시대의 수도인 헤이죠쿄는 나라 시대 이전에 야마토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문화에 대륙에서 전래한 문화를 받아들여서 화려한 수도로 발전하였다. 나라 지방에는 당시의 여러 가지 문화유산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불교와 더불어 번영한 문화 -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 아스카 문화(사원 건축과 불상 등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화가 만개하였다. 그 문화에는 그리스와 페르샤의 영향도 보인다. 세계 여러 지방과의 교류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사원 건축을 위시하여 불상 조각가인 구라쓰쿠리노도리(일명 도리붓시)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아스카테라의 석가여래상과 호류지의 석가삼존상이 구리고 만들고 금으로 도금한 금동불로서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모두 중국 북위 지방의 양식을 전하는 것이다.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다. 또 호류지 유메도노(夢殿)의 구세관음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 이 또한 북위의 양식을 전하고 있다. 한편, 호류지의 백제관음상과 중궁사와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은 유연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한 목조상으로 사색에 잠겨있는 표정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호류지의 다마무시노즈시(玉蟲廚子)는 그리스의 영향이 엿보이는 인동당초 문양에 2500마리가 넘는 다마무시(玉蟲)의 날개를 덧붙인 공예품이다. 또 하단부의 대좌에는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회화가 남아있다. 성덕태자의 죽음을 슬퍼한 부인이 천국의 모습을 궁녀들에게 새기게 한 것으로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수이다. 거기에는 동물, 인물, 태양, 달, 여래상 등이 묘사되어져 중국 육조의 양식을 전하고 있다.
@당나라의 영향이 강하게 표출된 문화 - 중앙집권국가의 형성기에 번성한 하쿠호(白鳳) 문화(대사원의 건축과 불상, 벽화 등을 대표로 하는 불교 문화가 꽃피운 시기로, 그것들 가운데 당시 당나라와의 교류가 엿보인다. 율령국가 형성을 추구하던 시대의 청신한 문화)
아스카 문화에 이어서 덴무 천황과 그 부인인 지토(持統) 천황의 시대, 7세기 무렵에 만개한 문화를 하쿠호 문화라고 한다. 이 문화가 전개된 시기는 중국의 당나라를 모방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형성하고자 하던 시대로, 불교문화에 덧붙여서 당나라 초기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덴무천황이 왕비의 병의 치유를 기원하고자 세운 후지와라쿄(藤原京)의 야쿠시지(藥師寺)는 당나라 양식이 채용된 것이었다(현재의 야쿠시지는 헤이죠쿄로 천도한 뒤에 이축한 것이다). 야쿠시지의 삼중탑은 각 층의 처마에 또 다른 처마 모양을 붙인(이를 모코시라고 한다) 이중 처마 양식을 한, 하쿠호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후지와라쿄에는 이 외에도 구중탑(九重塔)이 있었던 다이칸다이지(大官大寺)와 야마타테라(山田寺), 가와라데라(川原寺) 등과 같은 대 사찰이 건축되었다. 현재 코후쿠지(興福寺)에 있는 불두(佛頭)는 원래 야마타테라의 약사여래(藥師如來)로, 헤이안 시대 말기에 야마타테라가 불타버린 뒤, 코후쿠지(興福寺)에 보관. 둥글고 밝은 얼굴형은 이 시대 불상의 특징으로 야쿠시지(藥師寺) 금당(金堂: 대웅전)의 삼존상(三尊像)과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회화에서는 호류지의 금당벽화가 유명하다. 큰 벽화의 네 면에는 석가, 아미타, 미륵, 약사의 네 개의 보살이 사는 정토(淨土) 세계가 그려져 있고 또 다른 작은 벽화가 있었다. 그려진 내용은 중국의 둔황과 운강의 석굴벽화와 공통점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난 이것들은 194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또한 불교미술은 아니지만, 1972년에 발표된 나라(奈良)의 다카즈카(高松塚) 고분에 있는 벽화에는 천장에는 별자리가, 동쪽 벽에 청룡과 네 명의 남자와 부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서쪽에는 백호(白虎)와 인물상(人物像)이 그려져 있다. 부인은 긴 상의와 긴 주름치마를 착용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귀부인의 모습이라 여겨진다. 이 벽화와 중국의 영태(永泰)공주 무덤에 그려진 여성벽화는 묘사의 방법에 있어 유사점이 많다. 여기에도 당나라의 영향이 보인다.
@ 율령국가 전성기의 문화 - 불교와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화려한 텐표 문화(호국불교 사상에 입각한 국가가 형성되어, 여러 분야에 걸쳐서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불교 문화가 만개하였다. 그것은 웅대하고 화려한 문화였다.)
하쿠호 문화에 이어 8세기에 번성한 텐표 문화는 나라의 수도인 헤이죠쿄(平城京)가 건축되고 호국불교 사상 속에서 형성된 율령국가의 최전성기에 꽃피운 문화였다.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불교와 당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건축에서는 호류지유메도노(法隆寺夢殿)와 도다이지(東大寺)의 법화당(法華堂), 도쇼다이지(唐招提寺)의 금당(金堂)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로 웅대한 균형미를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도쇼다이지의 강당(講堂)은 관리들이 의식을 행할 때 모이던 헤이죠교(平城京)의 히가시쵸슈덴(東朝集殿)을 옮긴 것으로 당시 관청 건축의 양식을 알 수 있다.
조각 작품 중에는 사실성(事實性)이 풍부하고 감정이 섬세하게 표현된 것이 많으며, 소조(塑像), 간시츠조(乾渿像)의 기술이 발당했다. 소조에서는 신야쿠시지 십이신장상(新藥師寺十二神將像), 도다이지(東大寺) 계단원(戒壇院)의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유명한데, 이 사천왕상이 사악한 귀신을 밟고 있는 표정에는 기백이 넘치고 있다. 또한 도다이지 법화당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한 일광, 월광보살상과 채색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약동하는 듯한 집금강신상(執金剛神像)등이 있다. 간시츠조의 기법으로 만든 것으로는 도다이지 법화당의 후쿠켄쟈쿠(不空羂索)관음상이 덴표 조각의 대표적인 것으로, 머리에는 보물로 장식된 관을 쓰고, 3개의 눈과 8개의 팔을 지닌 당당한 모습은 기백에 넘치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 당나라의 강한 영향을 받은 회화
이 시대 예술품 중에서도 특히 회화는 당나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쇼소인(正倉院) 새털로 장식한 옷을 입고 서있는 여인을 그린 도리게리츠죠(鳥毛立女) 병풍(屛風)과 야쿠시지(藥師寺)의 길상천상(吉祥天像)에서 보이는 미녀는 중국과 토루판에서 출토된 나무 아래 서있는 미인의 그림(樹下美人圖)의 미인과 아주 비슷하다. 이 그림을 통하여 진한 눈썹, 가늘고 긴 눈, 작은 입술을 미녀로 생각한 당시의 미의식을 알 수 있다. 도리게리츠죠 병풍은 당 나라로부터의 수입품이라는 설도 있으나, 병풍 아래에 「天平勝宝四年」이라는 문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 덴표 공예의 진수 - 나라 시대의 국제교류를 보여주는 쇼소인(正倉院)의 보물(쇼무 천황의 애용품과 여러 헌상품을 넣어둔 창고는 엄중하게 관리되어져, 당시의 보물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를 위시한 그리스 등의 물건들도 전해지고 있다.)
덴표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불교 예술 이외에, 도다이지의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된 예술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의 보급에 노력한 쇼무 천황은 756년에 죽었다. 쇼무 천황의 유품을 부인인 고묘(光明)왕비가 도다이지에 봉납한 것이 쇼소인 보물의 출발점이다. 이후 여러 가지 헌상품이 첨가되어졌다. 지면에서 2미터 정도 높이에 아제쿠라즈쿠리(나무를 쌓아올려 벽을 만들고, 목재의 습도조절기능을 통하여 방습과 통풍을 기한 건축 양식)라고 하는 일본의 기후에 적합한 창고와, 천황의 허가 없이는 개방할 수 없게 한 엄격한 보존방법으로 보물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안에는 문방용품, 악기, 놀이기구, 불교용품, 행사용품, 무기, 복식품, 약, 문서 등이 들어 있다. 이 물건들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많지만, 그 중에는 당나라의 일류 물품이 포함되어 있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페르시아 양식의 물건도 보인다. 당시, 문화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게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세계 각지의 문물이 일본에도 건너왔음을 잘 알 수 있다.
@ 덴무천황이 추진한 중앙집권국가의 형성 - 천황 칭호의 사용과 신기제사(진신의 난에서 승리한 덴무 천황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왕이라는 칭호를 천황으로 바꾸었다.)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이 진행되는 가운데, 672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전개된 ‘진신의 난’에서 승리한 덴무 천황은 수도를 오미에서 아스카로 다시 옮기고 천황의 친족이 실권을 장악하는 황친정치를 시작, 공지공민(公地公民)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율령을 제정하며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또한 덴무․ 지토(持統)천황 때부터 중국의 「황제」를 의식하여 일본 군주의 칭호를 대왕에서 「천황」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1998년에 나라현의 아스카 연못 유적에서 천황이라고 쓰인 7세기 후반의 목간이 출토된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신사를 숭배하고 제사를 중시한다.
덴무 천황은 또한 태양신이라고 알려진 아마테라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기리는 이세진구(二勢神宮)의 모든 신전을 20년에 한번 다시 짓는다는 「시키넨센구(式年遷宮)」의 제도를 만들었다. 이세진구에서 신으로 모시는 신체(神体)를 인접한 장소에 새롭게 같은 양식으로 만든 신전으로 옮기는 제사이다. 여기서 20년이라고 하는 기간은 목조건축의 내구성을 감안한 햇수임과 동시에 건축 기술을 후세에 전승해 갈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 제도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한때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에도시대 전기에 다시 시작되어 오늘날 까지 행해지고 있다. 또한 천황이 즉위한 후에 천황 집안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제사시내는 다이죠사이(大嘗祭)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율령 제도하에서 신기(神祇) 제사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로 되었다. 정부기구 중에 신기관(神祇官)이 설치되고 전국의 주요 신사를 관사(官社)로 삼아서 국가가 관리하였다.
@신분에 따라 정해진 복식 제도 - 중국을 모방하여 제정한 복식 규정(공공 장소에서 착용하는 복장은 귀족, 승려, 서민 등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서 상세한 규정이 있었다)
●복제의 제정
중앙집권적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정부는 다이호료(大宝令)에 입각하여 복장을 정했다. 나라시대, 조정에 출정할 때 등 공적인 장소에서 착용하는 복장은 궁정복인 예복, 조복, 제복과 민간복, 승복이었다. 예복은 천황 즉위 의례등 중요한 의식에 착용하였는데 문관․무관에 따라, 또한 신분과 지위에 따라 색등의 세세한 차이가 있는 중국의 양식을 이어받은 복장이었다. 메이지 이전 고메이(孝明)천황 때까지 천황즉위 때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들 예복은 현존하고 있다. 조복은 평상 복장으로 후의 소쿠타이(束帶)로 이어졌다. 무관은 겨드랑이가 터진 옷이었고, 제복은 관리이외의 서민이 조정에서 일을 할 때 입는 옷으로 여기에도 세세한 규정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당나라 제도에서 배운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불교가 융성한 시대로 승복도 정비되었다.
@ 나라시대 노래의 집대성
『만요슈(萬葉集)』의 성립
일본인은 고대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만요슈가 완성된 나라시대 말기에는 일본 거의 전역에 보급되었다.
●작자는 천황에서 서민까지
한시는 귀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창작되었으나, 일본의 말을 노래한 와카(和歌)는 서민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노래는 원래 입으로 전해졌으나, 한자의 전래로 문자로서 쓰여 남겨지게 되었다. 노래에 관해서는 일본고유의 말이 한자음에 맞추어 적혀졌다. 현재 단가(短歌)형식인 5,7,5,7,7의 노래 형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것이다. 『고지키(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西紀)』에 쓰여져 있는 약 200여수의 노래 중에는 고대의 형식인 5757를 반복한 후 577로 끝나는 형식의 장가(長歌)가 있다.
나라시대 말기의 노래를 집대성한 것이 만요슈로, 야마토(大和)조정이 국가 기반을 정비하고 대륙문화가 도입됨에 따라 일본인에게 새로운 미의식이 생겨났던 것과 시기를 같이한다. 노래는 전체적으로 만요조라고 부르는 남성적인 가풍이다. 입으로 전해져 온 가집인 『고카슈(古歌集)』와 『가키노모토노아손히토마로(柿本朝臣人麿集)』, 『루이쥬카린(類聚歌林)』을 기본으로하여 가인인 오토모노야카모치(大伴家持)가 편집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집이다. 노래 수는 4500 수 정도로 20권으로 나뉘어 있다. 노래의 형식으로는 장가(長歌), 셋토가(旋頭歌), 붓소쿠세키가(佛足石歌), 단가(短歌)등이 있고, 내용으로는 소몬(相聞:사랑의 노래), 반카(挽歌:죽은 사람을 추도하는 노래), 잡가(여러 가지 노래)로 나뉜다. 가풍으로 분리할 때는 다음의 4기로 나누는데 각각 특색있는 가인이 있다. 그 중에서도 도코쿠(東國)의 생활을 노래한 아즈마우타(東歌), 병사(兵士)들의 마음을 노래한 사키모리우타(防人歌)등은 인간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다. 작자는 천황에서 서민인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었고 지역도, 거의 당시 일본 전역에 걸친 것이었다. 때문에 노래가 국민의 대다수에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요슈』와 『고지키(古事記)』등의 문학작품에 보이는 미신
고대인들은 여러 가지 미신을 믿었고 현대 일본인의 생활에 까지 그 미신의 경향이 남아 있다.
●재채기를 하면 누군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
만요슈에는 당시 미신이라고 생각되는 몇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일본인은 재채기를 하면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당시는 누군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는 만요슈 노래의 한절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또한 속옷의 끈이 저절로 풀린 다든지, 눈썹이 가려울 때도 누군가 자신을 그리워한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이 외에도 해가 질 무렵 길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의 담화를 듣고 길흉을 판단하여 점치는 것도 노래로 불려졌다. 그 외 목표물에 도달하기 위한 발걸음수로 길흉을 판단하는 점이나 물에 물건을 잠기게 해서 점을 치는 수점 등의 노래도 있다.
@ 일본문화의 원점이 된 헤이안시대의 문화
●섬세하고 우아한 것을 추구하였다.
아스카, 나라시대 일본은 중국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하였다. 그런데 헤이안 시대에 들어 견당사가 중지되었는데, 이는 당나라로부터 전당된 문화를 일본의 풍토에 맞추어 일본인의 생활에 맞게 고친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로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헤이안 문화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문화의 근간을 이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 기술이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불교에 있어서 천태․진언의 밀교가 전해져 일본 불교의 중심이 밀교적인 불교로 바뀌어갔고 가지키토(歌持祈祷)가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밀교의 전래로 새로운 불교미술이 발전하였다. 게다가 후에는 신(神)과 불(仏)이 합쳐지는 일본의 독자적인 신앙으로 변화해 갔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한시문은 헤이안시대 초기 활발하게 만들어졌으나, 당나라와의 교류가 끊긴 후에 한자로부터 발생한 가나문자가 성행하게 되어 와카(和歌)와 모노가타리(物語) 등 일본의 독자적인 문학이 창작되었다. 이들 작품은 귀족사회의 성숙과 함께 발전하여 일본인의 미의식과 심정을 남김없이 묘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등의 모노카타리와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을 위시한 와카집 등 지금까지도 읽혀지고 있는 문학이 탄생하였다.
또한 귀족 생활양식은 일본의 기후와 풍도에 맞는 것으로 변해갔다. 귀족의 저택에서는 신덴츠쿠리(寢殿造)라는 일본의 독자적인 건축양식을 낳았다. 의류는 습도에 맞고 추위와 더위에 맞춘 여유있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풍부한 자연과 사계적의 변화를 즐기게끔 되어, 일본인의 미의식은 섬세해졌다. 헤이안시대의 문화는 섬세하고 우아한 것으로 미를 느끼는 정서에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천태종과 진언종의 탄생
헤이안천도와 산악불교의 융성 - 헤이안쿄로 수도가 옮겨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나라에서 유학한 사이초와 구카이가 귀국해 밀교적인 요소가 담긴 새로운 불교 종파를 열었다.
●가지키토(歌持祈祷)가 활발해졌다.
794년 간무(桓武)천황은 수도를 야마시로(山背:지금의 교토)인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겼다. 이것이 헤이안시대의 시작이다. 나라의 헤이죠쿄에 수도가 있을 때, 불교세력이 정치에 크게 개입한 것을 반성함과 동시에 수륙 교통의 요충지인 지역으로 수도를 옮겨 오랜 번영을 누리고 평화가 계속이어지기를 기원하는 일념에서 천도가 이루어졌다.
헤이안 천도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았을 즈음 당나라에서 천태종을 전파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서 귀국한 사이쵸(最澄)가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천태종의 경전은 법화경을 중시하는 법화경 지상주의(至上主義)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서 지녀야할 계율인 보살계, 선(禪), 밀교를 도입한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한편 사이쵸와 함께 당나라에 건너간 구카이(空海)는 3년간 당나라에 머물면서 진언종의 정통인 관정(기도할 때에 외우는 문구인 진언을 정통으로 배운 사람에게 주는 의식)을 배워 귀국, 819년에 고야산에 진언종의 도량을 열고 보급에 힘썼다. 이로써 새로운 불교의 두 종파가 성립하게 되었다. 예전의 불교가 경전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였다면 이들 새로운 불교는 기도하는 주술적인 요소를 포함했기 때문에 밀교라고 부른다.
●귀족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넓혀갔다.
사이초는 히에잔(比叡山)에 엔랴쿠지(延曆寺)를 세우고 천태종의 본거지로 삼았다. 또한 천태종의 규정을 기록한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을 썼다. 승려에게 계율을 주기 위한 계단의 설립에 임하여서는 남도불교, 즉 나라의 구 불교 세력으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았지만, 뒤에 천황의 칙허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또 헤이안쿄의 귀문(동북쪽)에 해당하는 엔랴쿠지는 수도를 수호하는 절로 인식되어져 귀족들의 신앙을 모을 수 있었으며 이후 전국에 많은 장원을 지닌 대사원으로 발전해갔다. 구카이는 24세 때에 『삼교지귀(三敎指歸)』를 써서 석가의 가르침이 유교의 공자나 도교의 노자보다 훌륭함을 주장하였다.
@밀교의 영향이 짙게 표출된 문화 - 헤이안쿄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닌․ 죠간 문화(밀교의 융성에 의해 밀교적인 건축과 조각, 회화가 많이 작성되었다. 한편,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한시문과 서예도 발전하였다).
●밀교와 함께 성장해간 문화
사이쵸와 구카이가 당나라에서 배워온 밀교는, 예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간무 천황이 세운 헤이안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번성하여 수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러한 헤이안쿄를 중심으로 하여 생겨난, 사가(嵯峨) 천황 때부터 세이와(淸和)천황에 이르는 문화를 코닌(弘仁)․죠간(貞觀)문화라고 한다. 밀교를 배경으로 한 건축과 불상, 회화와 당나라 문화를 흡수한 한시문과 서예(書藝)에 그 특징이 있었다. 건축에서는 무로지(室生寺)의 금당(金堂)과 오중탑(五重塔)을 들 수 있다. 조각에서는 밀교적인 신비성을 띈 불상이 주류로 한그루의 나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각한 소위 이치보쿠즈쿠리(一木造) 양식의 조각이 많았다. 또한 옷의 주름을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게 조각한 혼바시키토호(翻波式刀法)도 이 당시 밀교 조각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밀교회화로서는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그림인 만다라가 많이 그려졌다. 인간이 보살의 구원을 받아 깨달음을 얻는 것을 표현한 태장계 만다라와, 인간의 온갖 번뇌를 깨트리는 부처의 힘을 묘사한 금강계 만다라가 있는데, 이 두 개를 합쳐 양계 만다라라고 한다. 이 만다라 앞에 밀교의 의식에 사용하는 도구들을 진열해 놓고 기도와 같은 의식을 행하였다.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다 - 예술로 표현된 정토사상(염불을 외우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정토사상이 크게 유행하여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였다).
불교는 병의 치료와 현세에서의 이익을 기원하는 기도의 효과를 믿었던 귀족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갔는데,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서방(인간이 사는 세계의 저 먼 서쪽에 위치한 곳)에 있는 극락정토에 산다고 믿었던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고조되어, 내세에 아미타정토에 왕생하는 행복을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정토교가 성행하였다. 또 당시 사람들은 석가모니가 사망한 지 2000년이 다 되면, 말법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때마침 당시 일본의 국내에서는 치안이 어지러워지고 자연재해가 발생, 전염병의 유행 등 말법의 도래를 의미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정토교는 급속히 퍼져나갔던 것이다.
염불만 외우면 아미타불이 있는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사상은, 문학 부문에서도 나타났다. 문인으로 출가하여 쟈쿠신(寂心)이라 칭하였던 요시시게노 야스다네(慶滋保胤)은 염불을 외움으로써 왕생한 성덕태자를 비롯한 45명의 전기집 “일본왕생극락기”를 저술하였다. 이것과 같은 해에 천태종의 승려인 겐신(源信)은 “왕생요집”에서 염불로 극락왕생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책은 널리 보급되어져 정토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귀족들은 정토교에 깊이 빠졌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섭관집안에서는 후지와라 미치나가가 법성사를 세웠으며, 그 아들인 후지와라 요리미치는 평등원에 아미타여래상을 안치하는 아미타당을 세웠다. 미치나가는 법성사의 불당에 있는 아미타불과 연결한 실을 손에 쥐고 염불을 외우면서 운명하였다고 전해진다. 평등원은 1052년이 말법에 들어가는 첫 해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요리미치가 가지고 있던 우지의 별장을 절로 바꾼 것이었다. 이 내부의 아미타여래상은 불상 조각가인 죠쵸(定朝)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회화로는 아미타여래가 성중(극락정토에 있는 보살 들)을 거느리고 자신을 맞이하러 온다고 하는 정토사상이 표현된 “내영도”가 그려지게 되었다. 평등원 봉황당의 문에 그려진 내영도는 야마토에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귀족들은 이들 불상과 회화를 앞에 두고 내세에서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신에 대한 신앙과 불교와의 융합 - 신불습합과 슈겐도(불교는 예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의 모습에 변화를 가져왔다).
불교는 일본의 정치와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불교가 전해짐으로 해서 일본인의 신앙의 형태에 변화가 생긴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불교가 전해지자, 일본의 원시종교인 신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윽고 불교가 신도를 포함하는 형태로 신도와 불교가 융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신불습합의 사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신불습합은 나라시대에 신사의 경내에 사원을 세운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뒤, 동대사(도다이지)에 큰 불상을 만들 때, 우사하치만이라고 하는 일본 전래의 신을 수호신으로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원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하지 않았던 신상(神像)이 불상을 모방하여 제작되게 되었다. 약사사의 승려의 모습을 한 하치만 신상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헤이안 시대 이후는, 신불습합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본지수적설이 유행하였다. 이 본지수적설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인 부처가 임시적인 모습인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으로, 대일여래가 임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라고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도는 불교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원래 이론적인 사상을 지니지 않았던 신도가 불교의 교리에 영향받아서 여러 신들의 세계를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신도가 확립, 이세신도와 미와신도라고 하는 교학이 발전해갔다. 신불습합의 사상은 완전히 다른 종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하나가 된다고 하는, 일본인의 종교적인 관용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산속에서 고행과 기도 등을 행하는 슈겐도가 발생하였다. 일본인은 원래 속세와는 다른 세계인 산에 대한 영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산속에서 수행한 사람에게는 하늘을 날거나 불을 밟거나 하는 특이한 주술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신과 불의 습합에 이 슈겐도적인 요소도 첨가된, 신도 부처도 또 슈겐도라고도 할 수 없는 신앙형태도 생겨났다.
@다음은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을 시험 문제의 형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반드시 알아두도록 합시다.
1.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적갈색을 띤 토기로 원통형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다. 고분의 바깥에 나열하여 장식하였는데, 제작 동기로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혹은 장례행렬을 본뜬 것, 순장을 대신하는 것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2.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고분 시대를 대표하는 분묘 형식으로, 원형 분구의 한쪽에 장방형 내지 사다리꼴의 시설을 덧붙인 형태이다. 3세기말 내지 4세기초에 기나이 지방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홋카이도, 도호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일본 열도의 대부분에 분포하고 있으며 야마토 정권의 대왕을 정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의 수장들의 묘제로 채택되었다.”
3.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원래 이름은 우마야도 황자로 마굿간에서 태어난 왕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592년에 황태자가 되어 당시의 정치를 섭정하였다. 외래 종교인 불교를 최초로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불교가 민간에 퍼지면서 최초의 불교 숭앙자로서, 특이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여겨져 일반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에서 심심치 않게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4.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스이코 천황 원년인 593년 이후부터 670년까지 약 80년동안이다. 이 시대에는 대왕의 궁이 주로 나라 분지의 남쪽 지역인 이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지방의 이름을 따서 ⒳ 문화라고 한다.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이면서 한반도 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성립된 문화이다.”
5. 천황과 일본이라고 하는 명칭은 무슨 천황때에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가?
6. 다음은 무슨 문화에 대한 설명인가?
“당나라 초기 문화 및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청신한 문화로 평가받고 있다. 시대적으로는 불교를 보호하는 한편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여 국가 불교의 확립을 지향하던 때였다. 다이칸다이지, 야쿠시지 등 국가가 주체가 되어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는 한편 금광명경 등 호국경전을 강경하는 법회가 전국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문화의 배경에는 진신의 난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한 덴무의 강력한 전제 왕권이 존재하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재로는 재건된 호류지의 금당, 오층탑, 중문, 회랑 및 야쿠시지 동탑, 부드러운 표현 속에 당당한 위엄을 갖춘 야쿠시지 금당약사삼존상, 고후쿠지 불두 등을 들 수 있다.”
7. 다음은 무슨 문화에 대한 설명인가?
“나라 시대에 헤이죠쿄를 중심으로 발달한 귀족 문화를 쇼무 천황 대에 사용된 연호를 따서 지징한 문화이다. 당시의 귀족들은 견당사 및 신라와 발해의 사신단을 통하여 전래되는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문화는 당나라 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의 영향 위에 성립된 국제적 색채를 띤 문화였다. 이 시대의 유산으로 사찰을 비롯한 각종 건축물과 조각, 미술 그리고 정창원 등에 보관되어 있는 미술 공예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천황가나 귀족 그리고 일부 승려 등 제한된 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8. 다음은 누구에 관한 설명인가?
“그는 백제에서 도래한 집안 출신의 승려이다. 15세에 출가하여 불교를 배웠으나 스승을 따라서 각 지역을 다니면서 농민의 곤궁함으로 직접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절에서 나와 향리로 돌아가 민간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설법과 활동은 빈곤과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민중을 그의 주변에 많이 모이게 하였으므로, 정부는 그와 제자의 포교활동을 여러 차례 금압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존경과 지지를 두텁게 받았던 그는 토지의 개간과 토목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노년에 이른 그는 쇼무 천황의 대불 건립 사업에도 참가하였으며 그 완성 전인 749년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국가 진호의 관사 불교가 전성기를 지나 지도력을 잃게 되었을 때 최초의 민중 불교의 지도자였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 최초의 민중불교를 퍼뜨린 그는 신라 원효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9. 다음은 누구에 관한 설명인가?
“그는 중국 출신의 승려로, 일본 유학승려의 열성적인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갈 뜻을 굳혔으나 도항하는데 5번이나 실패하고 6번째에 마침내 성공하여 일본으로 왔다. 그는 도다이지에 계단원을 세우고 당초제사를 건립하여 거주하면서 일본 불교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컸다.”
10.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진신의 난을 승리로 이끈 덴무는 제왕들의 역사와 선대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711년에 히에다노 아레가 암송하는 내용을 오노 야스마로가 채록한 것이 이 책으로, 이 책은 신들의 시대를 다룬 1권, 진무천황에서부터 오진 천황까지를 다룬 2권, 닌토쿠 천황에서 스이코 천황까지를 다룬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화와 전승, 고대 가요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일본 고대의 언어, 습관, 민요, 신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1.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720년에 편찬한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이다. 전체 3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신대 2권과 인대 2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대는 진무천황에서 지토 천황까지를 편년체에 입각하여 순한문으로 기록하였다. 재료로는 제기와 구사를 비롯하여, 한반도와 일본의 고기록, 사원이나 개인의 기록, 씨족의 가전 등 다양한 사료를 망라하였다. 특히 6세기경까지는 한반도 관계 기록이 많은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일본 고대사의 근본 사료일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의 연구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2.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현재 나라시 동쪽에 있는 사찰로 화업종의 총본산이다. 화엄경의 교리에 입각하여 비로자불 대불을 만들 것을 발원하면서 745년부터 조영이 시작되었으며 752년에 인도의 승려 보리선다, 당나라 승려 도선 등이 대불 개안식을 행하였다. 현재에도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법화당, 정창원, 8각등롱 등을 비롯하여,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남대문, 금강역사상, 에도 시대에 재건된 대불전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특히 대불전은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가장 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3.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나라 시대에 세워진 사찰 내에 있는 창고로, 쇼무 천황이 죽은 후, 그 부인이 천황의 유품을 기진한 것을 중심으로 하여 나전제품, 악기, 무기 등 다양한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당나라나 신라의 물품만이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하여 들어온 서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물품도 포함되어 있어서 8세기대의 각종 물품의 타임캡슐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물품을 통하여 당시 궁정생활의 수준이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그 속에는 신라금, 즉 현재 우리가 가야금이라고 하는 신라의 악기를 비롯하여, 신라에서 만들어진 놋그릇, 가위, 모전 등이 전하고 있어서 당시 신라의 생산기술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신라의 지방 통치에 관한 중요한 사료인 신라 장적문서 역시 이 곳에서 보관되어 있는 불경의 표지 속에서 발견된 바 있다.”
14.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성립 초기에는 천황가의 우지가미라고 하는 색채가 강하였으나, 8세기에 신기 제도가 성립되면서 전국의 신사 중에서 최고의 지위가 부여되었으며, 국가적인 성격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이것은 고대 천황제의 확립과 병행하여 확정되어 갔다. 이 과정은 일본 민족 신앙에 있어서 아마테라스오미카기가 원래 한 씨족의 조상신이었는데, 야마토 정권이 정치 지배권의 확대를 통하여 일본 전체의 최고신으로 격상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15. 다음은 무슨 문화에 관한 설명인가?
“①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중국 문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가 성행하였고 한시문집이 편집되었다. ②가나 문자가 생겨나고 목조 조각 기술이 발달하였다. ③ 천태종과 진언종 등 새로운 불교가 나타났다. ④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독자적인 밀교예술이 나타났다. ⑤한시문의 융성은 당나라 문화를 흡수한 전대(前代) 문화와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천태종과 진언종의 전파는 나라 시대 불교의 특징인 진호국가, 즉 호국불교로부터의 탈각을 꾀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 다음은 누구에 관한 설명인가?
“그는 804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천태교학과 선과 밀교를 배워 805년에 돌아왔다. 그는 사람은 누구라도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어떤 가르침도 최종적인 진리는 하나라고 하는 일승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 종래의 3계단의 계가 250계에 달하는 엄격한 것임에 대하여 재가자(在家者)를 위한 비교적 덜 엄격한 계를 대승계로 정하였다. 그는 천황에게 천태종의 계가 3계단에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히에이잔 엔랴쿠지에 대승 계단이 설립되는 것은 그가 죽은 뒤의 일이지만, 대승 계단의 설립으로 인하여 천태종의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계를 받기 위해 나라의 도다이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천태종이 성립하였다. 그가 세운 히에이잔 엔랴쿠지는 이후 불법 연구의 최고학부로서 많은 인재를 키웠다. 뒷날 가마쿠라에 들어가 전개되는 정토종, 선종, 일련종의 모태가 된 것이다.?
17.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이는 인도의 기층 신앙을 통합한 신비적인 성격이 강한 불교이다. 7세기에 성립한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으로 체계적인 사상과 실천법을 정비한 뒤, 서역에서 티벳트, 중국으로 전해진 것이다. 당시 일본의 귀족들은 이 종교의 신비적인 의례 의식을 받아들여 중국 문화의 체현자인 구카이를 존경하였다. 인도의 기층 신앙을 받아들여 성립한 밀교는 이상한 모습을 한 명왕상에 대하여 예배를 올리고 하여 일본의 신도 신앙에도 형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
18.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진언종은 모든 것에서 신성(神聖)을 발견하는 애니미즘, 그리고 신과 일체가 되어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샤머니즘과 같은, 종래의 토속 신앙과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일본의 토속신앙과 결합한 것으로, 부처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믿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 다음은 무슨 문화에 관한 설명인가?
“헤이안 시대 중기에 전개된 문화로, 이 시기의 문화는 일본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 문화였다. 일본이 국가적인 사업의 하나로 주력하였던 당나라 문화의 모방이 중단되자, 예전에 도입하였던 당나라 문화를 일본 고래의 문화에 동화시켜서 일본적인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문화는 전대의 문화와 비교해서 강력함은 없었지만,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적 감각이 뛰어난 문화였다. 바로 일본 문학의 발달과 야마토에의 성행, 신덴즈쿠리 건축 양식의 성립, 궁녀의 정장에 해당하는 쥬니히토에와 같은 일본적인 복식의 출현 등이 바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20. 다음 건물들은 어떤 사상과 관련이 있는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호조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평등원 봉황당, 시라카와 상황이 세운 로쿠쇼지.”
21. 불교의 종말관으로 일종의 역사적 말세관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22.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극락 정토에 왕생하고 싶다고 바라면서 공덕을 쌓은 사람은 죽을 때에 아미타여래가 맞이하러 온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에 입각하여 아미타여래가 맞이하러 오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23. 다음에 열거한 것들과 관련이 있는 문화는?
“고킨와카슈,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이세모노가타리, 우쓰보모노가타리, 겐지모노가타리, 도사닛키, 마쿠라노소시, 사라시나닛키, 쇼몬키, 무쓰와키, 에이가모노가타리”
24. 다음은 무슨 문화에 대한 설명인가?
“①이 시대에는 귀족 문화가 지방으로 파급되었다. 오슈 후지와라씨는 수도인 교토의 문화를 받아들여 본거지인 히라이즈미에 주손지와 모쓰지, 우지의 평등원을 모방한 것으로 평가되는 무량광원을 각각 건립하였던 것이다. ②서민들이 처음으로 문화부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설화 문학인 곤쟈쿠모노가타리슈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③야마토에의 완성을 들 수 있다.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 등이 그 대표작이라고 할 수있다.
25.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연속되는 화면의 오른쪽(과거)에서 왼쪽(미래)으로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서 사건의 전개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감겨 있는 것을 펼치는 동작이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만화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시간을 단축하여 같은 화면에 서로 다른 시간에 발생한 시간을 묘사하는 이시동도법이라고 하는 표현 수법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26.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나타나 이후 남북조 시대에 걸쳐서 성행한 예능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큰 음악 소리에 맞추어서 종횡으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기하학적인 무용을 하는 것이다. 민간의 모내기 행사 때 행하는 예능이 교토에 들어와 성립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27.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사람 얼굴의 묘사법의 하나로, 이야기 등을 그림으로 그린 두루마리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눈을 ‘-’자로 그리고 코는 ‘L’자를 비스듬히 한 것처럼 단숨에 그리는 것이다.
29. 다음은 무슨 문화에 관한 설명인가?
“①문화의 이원적인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②문화에 서민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③적극적인 문사의 기풍을 반영한 생동감있고 실용적인 문화가 생겨났다. ④송나라와 원나라의 문화가 활발하게 도입되었다.”
30. 다음은 무슨 건축 양식에 관한 설명인가?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 온 중국 송나라의 건축양식으로, 규모가 큰 건축에 적합한 견고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규격화된 부재가 많기 때문에 공사에 있어서 불필요한 노력을 줄일 수 있었으며, 또 그만큼 빨리 완성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송나라의 사원 건축을 모델로 한 웅대하고 호장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31. 도다이지 남대문의 금강역사상은 많은 목재로 만든 요세기즈쿠리로, 높이가 8미터 이상이나 된다. 강력한 육체의 표현, 조화잡힌 자세는 가마쿠라 시대의 불상 조각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금강역사상을 조각한 두 사람의 불사, 즉 불상 조각가의 이름을 쓰시오.
32.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사실적(寫實的)인 조각을 추구하던 가마쿠라 시대의 불사들에게 있어서 불상의 표정, 특히 눈의 광채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발명한 것이 교쿠간이라 부르던 기법이었다. 이것은 눈을 파내어 안에서부터 요철의 렌즈 모양으로 다듬은 수정을 박아 넣는 기법으로,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본 독자적인 기법이다.”
33. 가마쿠라 시대, 무사들의 도서관 기능을 하던 곳을 무엇이라 하는가?
34. 불교적인 무상관(無常觀)을 토대로 헤이케 일족의 눈부신 발전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한자오 가나를 섞어서 기록한 가마쿠라 시대를 대표하는 군기물은 무엇인가?
35. 다음은 무엇에 관한 설명인가?
“가모노 쵸메이가 가마쿠라 시대 전기인 1212년에 저술한 수필로 1권으로 되어있다. 전반은 큰 불, 스지가제, 후쿠하라 천도, 대기근, 대지진 등의 다섯 가지 재앙으로 인한 삶의 무상함을 서술하고 있다. 후반에서는 속세를 떠나 히노산에 세운 조그마한 암자에서의 안일한 생활을 한자와 가나를 섞은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 은자(隱者)문학의 대표작이다.”
- 일본 전통사회의 이해
1. 다음중 가마쿠라 신불교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말법(末法)의 세상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표였다.
② 정토교의 염불, 선종의 좌선, 일련종의 제목(題目)처럼 각 종파가 특정방법을 선택하였다.
③ 신불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구불교는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하였다.
④ 선종 그중에서도 에이사이(榮西)의 임제종(臨濟宗)은 막부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2. 다음중 일본 정토교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정토 사상은 나라 시대에 도입되어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큰 세력이 되었다.
② 초기부터 정토교는 귀족이나 승려는 물론 농민이나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앙이었다.
③ 인도나 네팔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밀교의 시대가 끝난 뒤에 정토교가 번성하였다.
④ 귀족들은 임종시 정토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여 아미타여래상과 자기 손을 실로 연결하였다.
3. 9살에 아버지가 살해당하나, 복수를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승려의 길을 걷다가 정토종을 개종한 사람으로, “지금까지의 불법은 전쟁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서로 죽이고 죽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지금, 예전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불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입으로 소래내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외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인물은?
① 호넨(法然) ② 신란(親鸞)
③ 잇펜(一遍) ④ 도겐(道元)
4. 인간은 유한하고 죄 많은 존재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타력(他力) 즉 아미타여래를 믿고 염불을 외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에 극락왕생이 결정된다고 설법하면서, 계율을 범한 죄 많은 악인이야말로 아미타여래가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악인정기(惡人定機)설을 주장한 인물은?
① 호넨(法然) ② 신란(親鸞)
③ 잇펜(一遍) ④ 도겐(道元)
5. 지방 호족 집안 출신으로 히에이잔에 올라가 승려가 되었다. 매일의 생활을 항상 임종 때라 생각하고 염불을 외우는 ‘임명종시종(臨命終時宗)’을 주장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녔고, 1279년부터는 춤추며 염불을 외는 ‘오도리넨부쓰(踊念佛)’로 포교하였던 인물은?
① 호넨(法然) ② 신란(親鸞)
③ 잇펜(一遍) ④ 도겐(道元)
6. 다음중 선종(禪宗)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헤이안 시대 초기에 중국에서 임제선과 조동선이 전해져 선종이 유행하였다.
② 선은 불교의 근본 사상인 공(空)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가르침이다.
③ 막부의 싯켄 호조씨는 일․송 교류의 일환으로 중국의 선(禪)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④ 무로마치 시대에는 선종의 유력 사원을 중심으로 오산 문화가 꽃피게 된다.
7. 다음중 에이사이(榮西)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히에이잔에서 천태교학과 밀교을 배웠으며, 중국의 천태산에서 유학하였다.
② 선(禪)이야말로 말법의 가르침이라고 하며 선에 의한 천태종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③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저술하여 자신의 불교 철학을 체계화하였다.
④ 박해를 맏고 가마쿠라로 내려가 무사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8. 에이사이가 개종한 선종의 일파로, 스승이 낸 문제(公案)를 해결함으로써 진리를 체득하는 선이라는 뜻으로 간화선(看話禪)이라고도 불렸으며, 막부의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발전해 무로마치 시대에는 교토 오산, 가마쿠라 오산 등 유력 사원을 중심으로 오산문화(五山文化)를 꽃피우는 종파는?
① 임제종(臨濟宗) ② 조동종(曹洞宗)
③ 일련종(日連宗) ④ 시종(時宗)
9. 공경(公卿)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와 사별,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했으며, 송나라에서 5년 동안 선종을 배웠다.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좌선만이 깨우침에 이르는 길임을 주장, ‘불립문자(不立文字) 지관타좌(只管打坐)’를 주창하였으며, 염불이나 가지기도(加持祈禱)를 부정하였던 인물은?
① 호넨(法然) ② 신란(親鸞)
③ 잇펜(一遍) ④ 도겐(道元)
10. 니치렌(日連)이 저술하여 호조 도키요리에게 제출한 것으로, 당시 천변지이(天變地異)․기근․전염병으로 많은 이재민이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올바른 불법이 행하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며 당시 교세가 뻗어나가고 있던 염불신자(念佛信者)를 탄압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문서는?
①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 ②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③ 『오죠요슈(往生要集)』 ④ 『정법안장(正法眼藏)』
11. 다음중 가마쿠라 신불교의 공통점이 아닌 것은?
① 나라와 헤이안 불교의 귀족적 경향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다.
② 불경연구나 사원에 대한 기진 등이 왕생이나 성불을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하였다.
③ 왕생이나 성불을 위해 오로지 하나만을 열심히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 무사중심적인 경향이 강해서 농민이나 상인들과는 거리가 먼 종교였다.
12. 남북조 시대가 되어 사회가 크게 변화하고 하극상의 풍조가 눈에 띠게 되자, 낡은 질서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을 풍자하거나 졸지에 출세한 사람들이 잘난 척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는 예능이 생겨났는데, 서민적인 희극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 예능 중의 하나인 이것은?
① 분라쿠(文樂) ② 가부키(歌舞伎)
③ 교겐(狂言) ④ 노(能)
13. 다음중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전통적인 공가 문화와 신흥 무가 문화의 융합이 특징이다.
② 학문과 문학에서는 송․원의 영향을 받은 오산 문학이 주류를 점하였다.
③ 건물의 내부는 쇼헤키가(障璧畵)라고 하는 벽화로 장식되었다.
④ 민족 예능인 사루가쿠노(猿樂能)가 예술적인 완성을 보았다.
14. 기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일층은 신덴즈쿠리 양식, 이층은 와요(和樣)의 불당 형식, 삼층은 선종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당시가 종래의 공가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스스로 그 정통적인 후계자임을 과시함과 동시에 송․원의 문화를 도입하여 선종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무가 문화를 구축하고자 모색하고 있던 단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① 로쿠온지(鹿苑寺) ② 은각(銀閣)
③ 천수각(天守閣) ④ 금각(金閣)
15.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성립한 예능 중의 하나로, 원래 익살스러운 흉내를 내는 예능을 총칭하는 것이었으나,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오자 가무(歌舞)와 촌극(寸劇)적인 요소가 부가되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간아미와 제아미 부자가 구세마이(曲舞)와 덴가쿠(田樂) 등을 가미하여 완성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노(能)라고 불려졌던 것은?
① 분라쿠(文樂) ② 가부키(歌舞伎)
③ 교겐(狂言) ④ 사루가쿠(猿樂)
16. 헤이안 시대 후기에서 남북조 시대에 걸쳐 성행한 예능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을 한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음악에 맞추어 종횡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기하학적인 무용을 연출하는 것을 말한다. 민간의 모내기 행사 때의 예능이 교토에 들어와 성립한 것이라고 하는 이것은?
① 덴가쿠(田樂) ② 가부키(歌舞伎)
③ 교겐(狂言) ④ 사루가쿠(猿樂)
17. 다음중 오산(五山)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중국 남송의 관사 제도(官寺制度)를 모방하여 오산제도를 채용하였다.
② 막부는 관사(官寺)의 업무 일체를 관리하기 위해 승록(僧錄) 제도를 만들었다.
③ 정권과의 연계보다는 민중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④ 오산 문학이라는 한시문이 성행하고, 선승들은 교양으로 주자학을 공부하였다.
18.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에치젠․가가․노토 지방을 기반으로 조동종을 확립한 사람으로, 조동종과 밀교를 결합시켜 민중들에게 포교하여, 조동종이 하급 무사들과 농민들 사이에 뿌리내리는데 기여한 인물은?
① 도겐(道元) ② 게이잔 조킨(瑩山紹瑾)
③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④ 기도 슈신(義堂周信)
19. 다음중 무로마치 시대 시종(時宗)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선종과의 결합을 강화해 무사 층에 포교하였다.
② 시종의 영향을 받아 전개된 독자적인 문화는 히가시야마 문화이다.
③ 제아미와 소아미 등과 같은 예능자와 문인이 나왔다.
④ 무로마치 말기가 되면 정토종의 발전에 압도당해 쇠퇴해간다.
20. 신란의 정토진종을 이어받은 것으로, 제8대 교주인 렌뇨의 활약에 의해 큰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렌뇨는 쉬운 문장으로 교리를 설명하고 염불을 통한 현세 이익을 긍정하는 방침으로 농민 층으로 파고드는데, 이들 신자 세력의 확대가 결국 가가지방의 잇코잇키에까지 이어지는 종파는?
① 진서파(鎭西派) ② 서산파(西山派)
③ 혼간지파(本願寺派) ④ 불광사파(佛光寺派)
21. 겐무(建武)의 신정과 남북조의 동란을 헤쳐 나온 여러 인간 군상을 묘사한 남북조 시기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은?
① 태평기(太平記) ②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③ 바이쇼론(梅松論) ④ 마스카가미(增鏡)
22.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교토 히가시야마의 산기슭에 은각(銀閣)을 쌓는데 협조하여, 오늘날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와후(和風)의 초기 모습을 형성했던 사람들은?
① 마치슈(町衆) ② 도네리(舍人)
③ 도보슈(同朋衆) ④ 쓰와모노(兵)
23. 다음중 은각(銀閣)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다타미를 깔고 치가이다나(違棚)를 설치하였다.
② 건물 내외의 기둥은 금박이나 옷칠 또는 붉은 색으로 칠하였다.
③ 정원은 마치 산수화처럼 물의 흐름이나 바람 소리 등을 바위만으로 표현하였다.
④ 방안에는 이로리(囲爐裏)를 설치하고, 꽃꽂이로 장식하였다.
24. 은각(銀閣)의 쇼지(障子) 즉 미닫이문에 그림을 그린 인물로 역동적인 구성과 힘있는 필체로 유명한 당대 제일의 화가였다. 여러 명의 위대한 화가들을 길러내며 메이지 시대까지 번영한 일본 회화 사상 최대의 유파를 만들어낸 이 인물은?
①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② 마원(馬遠)
③ 셋슈(雪舟) ④ 다와라야 소타쓰(俵屋宗達)
25. 무로마치 문화의 특색인 선종의 영향은 건축에서 잘 나타나는데, 승려․공가․무사의 주택에 도입되어 오늘날 일본식 주택의 근원을 이룬 것으로, 독서를 위해 필요한 창문과 선반 또 도코노마라고 하는 공간과 지가이다나(違棚)를 설치하고 바닥에는 다타미를 깐 방을 의미하는 양식은?
① 가라요(唐樣) ② 신덴즈쿠리(寢殿造)
③ 가레산스이(姑山水) ④ 쇼인즈쿠리(書院造)
26. 무로마치 시대에는 무사와 귀족들 사이에 중국적 문화가 인기를 끌었는데, 가회(歌會)와 주연(酒宴) 등의 모임을 여는 장소로, 중국에서 수입한 비싼 가라모노(唐物)라고 불리는 그림과 가구를 장식했던 곳은?
① 가이쇼(會所) ② 은각(銀閣)
③ 천수각(天守閣) ④ 금각(金閣)
27. 다음중 셋슈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선(禪)을 공부하면서 슈분(周文)의 지도아래 수묵화를 배웠다.
② 명에 유학하였으나, 명에서는 좌선에 열중하여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③ 자연의 박력을 직접 묘사하는데 성공하였다.
④ 중국화의 모방이 아닌 일본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수묵화를 그렸다.
28. 다음중 셋슈의 작품이 아닌 것은?
①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 ② 연자화도병풍(燕子花圖屛風)
③ 진전폭도(鎭田瀑圖) ④ 추동산수도(秋冬山水圖)
29. 선종은 문장을 써서 이치를 설명하지 않으며, 좌선(坐禪)을 가장 중시하여 마음속에서 부처의 깨우침을 추구하기 때문에 화려한 색채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취향을 정원에 반영하여 변하지 않는 돌을 사용하여 큰 산이나 시냇물, 깊은 계곡 등을 표현한 정원은?
① 가라요(唐樣) ② 신덴즈쿠리(寢殿造)
③ 가레산스이(姑山水) ④ 쇼인즈쿠리(書院造)
30. 무로마치 시대 생활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1일 3식의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② 서민의 자제들을 위한 기초 교육 시설인 데라코야가 세워졌다.
③ 교토의 마치슈들은 공중 목욕탕에 가거나 기온마쓰리를 즐겼다.
④ 신사와 사찰을 순례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31. 히가시야마 시대에 들어오면 한적한 실내에서 조용히 차를 즐기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나라의 승려 무라타 주코(村田珠光)가 시작한 이러한 차문화를 무엇이라 하는가?
① 와비차 ② 투차(鬪茶)
③ 가레산스이(姑山水) ④ 릿카(立花)
32. 처음에는 부처 앞에 꽃을 바치는 공화(供花) 의식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종교적 역할보다도 일상 생활속에서 즐기는 예술로 변화한 것으로 다도로 인해 크게 발달한 이것은?
① 와비차 ② 투차(鬪茶)
③ 가레산스이(姑山水) ④ 릿카(立花)
33. 중국 문예에 대해 강한 관심을 모였던 무로마치 시대의 오산 선승중 하나로, 50세 때까지 운스이(雲水)의 생활을 지키며, 스승을 바꾸어 가며 선의 깨우침을 심화했다. 천황과 쇼군의 보호를 받아 가마쿠라와 교토 오산의 주지가 되었으며, 덴류지(天龍寺)를 세웠으며, 중국과 일본의 문화 및 예술에 조예가 깊은 승려들을 배출하였던 이 인물은?
① 센노 리큐(千利休) ② 도사 미쓰노부(土佐光信)
③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④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34. 중세 시대 농촌에 토착하여 거주하였던 무사들의 생활 공간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해자(垓字)를 파고 망루를 세웠던 저택은?
① 혼마루(本丸) ② 거성(居城)
③ 천수각(天守閣) ④ 야카타(館)
35. 다음중 전국시대 다이묘들의 성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지배 지역내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주로 산위에 축조하였다.
② 기본적으로 군사 시설이었으나, 주거 공간이자 권력 과시를 위한 조형물이었다.
③ 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혼마루에는 3층 또는 5층의 천수각을 세웠다.
④ 성의 외곽에는 커다란 돌로 담을 쌓고 해자가 성을 에워싸게 하였다.
36. 다이묘들의 성내부는 호화스러운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되었는데, 가신이 열석하는 넓은 실내 공간의 벽면과 쇼지(障子)에 장식된 벽화로, 웅대한 구도, 힘이 넘치는 필법,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자연 경관, 조수, 화초, 인물 등을 묘사한 것은?
① 야마토에(大和繪) ② 우키요에(浮世繪)
③ 쇼헤키가(障璧畵) ④ 니시키에(錦繪)
37. 가노 에이토쿠의 사망후 가노파가 독점했던 미술계에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처음 불교 미술에 종사하였다가 교토에 올라와 원래 가노파가 담당하였던 지샤쿠인(智積院)의 그림을 그리면서 유명해진 인물로, 대표작이 「풍도(楓圖)」인 화가는?
①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 ② 가이호 유쇼(海北友松)
③ 셋슈(雪舟) ④ 다와라야 소타쓰(俵屋宗達)
38. 속세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질소하게 꾸민 조용한 다실에서 차를 다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가로움을 즐기는 다도의 의례를 체계화하고, 평등의 정신을 형식화시켜 다도를 대성시킨 사카이(堺)의 상인은?
① 센노 리큐(千利休) ② 도사 미쓰노부(土佐光信)
③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④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39. 다음중 난반 문화(南蠻文化)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포르투칼인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개화된 이국 정서의 문화이다.
② 많은 다이묘들이 난반 문화에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③ 일반 서민들에게 서양의 의복을 입고 물건을 소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④ 난반 문화로 일본에서 유행한 대표적인 것이 담배이다.
40.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치세하의 문화로, 모모야마 문화를 계승하고 17세기 후기 겐로쿠 문화의 전제가 되었다. 이 시기는 막번 체제가 확립되는 시기로 이에 걸맞는 무사들의 문화가 형성되었고, 교토의 상층 조닌을 중심으로는 세련된 왕조풍의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① 에도(江戶) 문화 ② 강에이(寬永) 문화
③ 가세이(化政) 문화 ④ 조닌(町人) 문화
41. 차문화가 발달하면서, 쇼인즈쿠리(書院造)와 아주 소박한 양식의 다실(茶室)을 절충한 양식이 등장하는데,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의 별장으로 간소한 미의 극치를 이루는 가쓰라리큐(桂離宮)로 대표되는 건축 양식은?
① 곤겐즈쿠리(權現造) ② 수키야즈쿠리(數寄屋造)
③ 가라요(唐樣) ④ 신덴즈쿠리(寢殿造)
42. 교토의 조닌으로 모모야마 시대의 장식화의 영향을 받아 부드러운 분위기와 장식미가 풍부한 화풍을 선보였다. 순일본적인 기법을 몸에 익혀 회화사에서 전례가 없는 착상과 구도와 기법으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겐지모노가타리 병풍」과 같은 탁월한 작품을 남긴 화가는?
①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 ②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
③ 셋슈(雪舟) ④ 다와라야 소타쓰(俵屋宗達)
43. 도검의 감정과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가문 출신으로 두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막부에 봉사하면서 서도(書道)․마키에(蒔繪)․회화․서적 출판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했던 계몽적 문화인은?
①하세가와도하쿠(長谷川等伯)②혼아미고에쓰(本阿彌光悅) ③셋슈(雪舟) ④ 다와라야 소타쓰(俵屋宗達)
44. 일본을 대표하는 연극 가부키(歌舞伎)를 창시한 여성으로,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의 무녀로도 알려져 있다. 16세기 말 교토의 가모가와(鴨川)의 천변에서 현란한 옷차림으로 춤을 추는 연기를 선보였다고 전해지는데, 가무를 주로 하면서 연극적인 요소도 가미했던 이 사람은?
①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 ②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
③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國) ④ 다와라야 소타쓰(俵屋宗達)
45.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교를 수용하여 하극상의 풍조를 시키고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는데, 그때 교토 쇼코쿠지의 승려로 불교에는 없는 유학의 사회 윤리에 매력을 느껴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했던 사람은?
①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② 하야시 라잔(林羅山)
③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④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46. 도쿠가와 막부에 봉사하여 주자학을 뿌리내린 사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부여된 신분을 움직일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정신을 강조했다. 승려출신이었으나 불교를 철저하게 배척하였으며, 자손들이 대를 이어 에도 막부의 문교정책을 담당하였던 인물은?
①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② 하야시 라잔(林羅山)
③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④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47. 주자학의 일파로 도사(土佐) 지방에 뿌리를 내린 남학(南學) 계통으로 엄격한 도덕률을 중시하여 다른 학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일종의 신비주의에 빠져 주자학과 신도(神道)를 결합시켜, 훗날 존왕론(尊王論)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은?
①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②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齌)
③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④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48. 후쿠오카(福岡)의 주자학자로, 직업은 의사였으나 교육․경제․역사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서민 교육에 진력하여 일상적인 도덕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데, 자신의 저서 『야마토좃쿤(大和俗訓)』에서 충․효․여성의 도덕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인물은?
①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② 하야시 라잔(林羅山)
③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④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49. 다음중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군신․부자의 분별을 분명히 하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학문이었다.
② 현실 사회를 비판하고 그 모순점을 개혁하려는 혁신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③ 막부의 정치를 비판하여 탄압을 받아 체계적으로 전수되지 못했다.
④ 일본 풍토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독자적 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한 학자도 있다.
50. 다음중 고학(古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유학의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② 대표적인 학자로는 야마가 소코, 이토 진사이, 하야시 라잔 등이 있다.
③ 현실과 역사를 파악하고 인간성을 존중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④ 야마가 소코는 무국(武國)인 일본은 무국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51. 고학파(古學派) 인물중 하나로, 오경을 중시하여 고문헌의 실증적 연구를 통해 경서를 이해하고자 했다. 일반적인 도덕보다도 정치를 중시하여 예악과 제도의 정비를 강조했고, 『세이단(政談)』를 저술하여 정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오직 무사와 농민의 이익을 위하였을 뿐 상인의 몰락은 개의치 않았던 이 인물은?
①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② 하야시 라잔(林羅山)
③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④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52. 일본 양명학의 시조로 요미(近江)의 성인이라고 불렸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배웠으나 주자학의 규범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양명학에 심취되어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을 규명하였으나, 본래의 양명학이 갖고 있던 실천성이 결여된 특이한 양명학을 주장했던 이 인물은?
①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② 구마자와 반잔(態澤蕃山)
③ 나카에 도주(中江藤樹) ④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53. 다음중 겐로쿠(元祿) 시대의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17세기 후반의 문화로 현실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② 문화의 담당자는 무사들이었는데, 자유스러운 인간성을 추구하였다.
③ 문화의 중심지는 가미가타라고 불리던 교토와 오사카였다.
④ 당시 조닌들은 현실을 우키요(浮世)라는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였다.
54. 제자와 함께 각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긴 『오쿠노호소미치』라는 기행문으로 유명한 인물로, 기존의 단순히 해학적이고 즉흥적인 하이카이(俳諧)의 한계를 극복하고 심오하고 한적함을 핵심으로하는 하이카이를 확립하여, 자연과 합일된 담담한 마음, 넉넉하고 여유로운 운률, 섬세한 감각을 드러내는 작품을 쓴 인물은?
① 가가미 시코(各務支考) ② 에노모토 기카쿠(榎本其角)
③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④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55. 속세에 살면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조닌의 일상생활을 실감나게 소설속에 표현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소설가로, 1682년 『고쇼쿠이치다이오토쿠(好色一代男)』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2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인간의 본능에 대해 긍정하고, 봉건 도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이 인물은?
① 가가미 시코(各務支考) ② 에노모토 기카쿠(榎本其角)
③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④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56. 조루리는 샤미센(三味線) 음악과 인형극이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겐로쿠 시대에는 닌교조루리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다음중 닌교조루리의 대표적인 각본가이자 연출가였던 지가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작품이 아닌 것은?
① 세켄무네산요(世間胸算用) ② 고쿠센야캇센(國性爺合戰)
③ 슛세카게키요(出世景情) ④ 소네자키신주(曾根崎心中)
57. 가부키의 남자 역할로 유명했던 에도 배우로, 호쾌한 동작으로 연기를 하여 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인물은?
① 가가미 시코(各務支考) ②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郞)
③ 사카타 도주로(坂田藤十郞) ④ 요시자와 아야메
58. 사실보다는 어느 정도 추상적인 신선한 구도와 색채로 화폭을 구성했던 겐로쿠시대의 대표적인 야마토에 화가?
①가가미시코(各務支考) ②히시카와모로노부(菱川師宣)③오가타고린(尾形光琳)④오가타 겐잔(尾形乾山)
59. 겐로쿠 시대 풍속화는 미인, 인기 가부키 배우, 유명 스모 선수를 그렸기 때문에 서민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주로 세상의 풍속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서 풍속화가 우키요에(浮世繪)로 불리는데 이바지한 화가로, 편화 기법을 도입하여 작품의 대량 생산의 길을 열었던 인물은?
① 가가미 시코(各務支考) ②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③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④ 오가타 겐잔(尾形乾山)
60. 18세기 후기 유흥가 남녀의 인간상을 날카로운 필치로 묘사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가로, 점차 작품이 저급한 웃음과 호색의 생활에 빠지는 경향이 강해져 막부에 의해 엄하게 단속되기도 했던 인물은?
① 산토 교덴(山東京傳) ② 고이카와 하루마치(戀川春町)
③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④ 짓펜 샤잇쿠(十返舍一九)
61. 권선징악의 사상을 주입한 장편 소설로, 그림보다는 문장을 읽는 것을 주로 하는 역사적인 전기 소설로, 대표작으로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의 『우게쓰모노가타리』가 있는 장르는?
① 요미혼(讀本) ② 샤레본(洒落本)
③ 곳케이본(滑稽本) ④ 기뵤시(黃表紙)
62. 18세기 후반기부터 가부키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다음중 당시 에도의 대표적인 가부키 극장이 아닌 것은?
① 이치무라(市村) ② 나카무라(中村) ③ 오노에(尾上) ④ 모리타(森田)
63. 처음에는 흑백으로만 표현되었던 판화는 점차 기법이 개발되어 여러 가지 색깔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는데, 화가․조각가․인쇄 기술자 등이 협력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 판화양식은?
① 요미혼(讀本) ② 니시키에(錦繪③ 오쿠비에(大首繪)④ 우키요에(浮世繪)
64. 다음중 에도 후기의 우키요에 화가가 아닌 사람은?
①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齌寫樂) ②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③ 기타가와 우타마로 ④ 오가타 겐잔(尾形乾山)
65. 에도 전기의 소설의 한 장르로, 통속적인 가나 문자로 된 소설류를 지칭하나, 수필․지지(地誌)․유녀평판기(遊女評判記)도 포함된다. 작품은 모두가 단편으로 계몽적인 내용과 위안적인 내용이 많은 것이 특징인 것은?
① 요미혼(讀本) ② 샤레본(洒落本) ③ 가나조시(假名草子) ④ 기뵤시(黃表紙)
66. 다음중 에도시대 도시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도시 인구는 전 인구의 5 내지 6%를 차지하고 있었다.
② 에도․오사카․교토가 삼도(三都)라고 일컬어지면서 특히 번성하였다.
③ 에도는 전국적인 상품 유통의 중심지였다. ④ 교토는 전통 산업이 발달하였다.
67. 에도 시대에 등장한 상인 가문으로 지금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재벌로 건재하다. 17세기 후반 에도에 에치고야(越後屋)라는 포목상을 내면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여 금융업에도 진출하였다. 막부의 자금도 관리하면서 일본 제일의 부자로 명성을 얻었던 이 가문은?
① 스미토모(住友) ② 고노이케(鴻池) ③ 야마자키(山崎) ④ 미쓰이(三井)
68. 17세기 후기에 출현한 신흥 상인으로 셋쓰(攝津) 지방에서 양조업으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해운업․금유업에 손을 대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특히 여러 다이묘가 연공으로 수취한 미곡을 관리하면서 크게 발전했던 이들은?
① 스미토모(住友) ② 고노이케(鴻池)
③ 무카이(向井) ④ 미쓰이(三井)
69. 다음중 에도시대 상인의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상가(商家)의 규모에 상관없이 대부분 주인이 직접 영업에 관여하였다.
② 종제 제도(從弟制度)를 통하여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였다.
③ 상인이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가업의 존속이었다.④ 점원의 서열이 분명하였다.
70. 17세기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상점의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탐구하여 크게 깨달았다. 이후 사숙(私塾)을 열어 조닌을 대상으로 상인의 도리를 가르쳤는데, 약속과 신용을 지키는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을 것과 검약을 강조한 사람은?
①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巖) ②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③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④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
71. 교토에서 여러 대에 걸쳐 영업을 하는 상점들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훈과 점칙(店則)이 있었다. 다음중 교토의 상인들의 정신이 아닌 것은?
① 고객에게 정성을 다흔 정신 ② 가업 제일주의 정신
③ 막번 권력과의 연계를 중시하는 정신 ④ 안분지족의 정신
72. 전국 다이묘들이 자신의 거성 주변에 무사들을 결집시키고, 무사들의 일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상공인들을 유치하자, 다이묘의 성곽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를 말한다. 도쿠가와 막부의 거성 주변에 형성된 인구 100만의 에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구1~2만 정도였으며, 무사가 인구의 절반을 점했던 이곳은? ① 조카마치(城下町) ② 삼도(三都) ③ 구마모토(熊本 ) ④ 구라야시키(藏屋敷)
73. 에도 시대 다이묘들이 연공으로 징수한 미곡이나 특산품을 보관하였다가 매각하기 위해 설치한 창고로 정치와 경제의 요지인 교토․오사카․에도․오쓰․나가사키 등에 설치되어, 어용 상인들이 출입했던 곳은? ① 조카마치(城下町) ② 삼도(三都)③ 요리아이(寄合) ④ 구라야시키(藏屋敷)
74. 17세기 후반에는 막부의 정치 체제가 안정되면서, 농학․천문학․수학 등 실증적인 학문과 기초 학문이 발달하였다. 다음중 인물과 그가 활약했던 분야에 대한 연결이 잘못된 것은?
① 야스이 산테쓰 - 천문학 ② 야마가 소코 - 식물학
③ 미야자키 야스사다 - 농업 기술 ④ 세키 다카카즈 - 대수학
75. 에도 시대에 서양을 향해 열려 있었던 유일한 창구로, 나가사키항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섬이다. 다리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고, 네덜란드의 상관(商館)이 있었던 이곳은?
① 고토(五島) ② 잇키(壹岐)
③ 데지마(出島) ④ 쓰시마(對馬島)
76. 다음중 양학(洋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유럽의 학술 지식은 남만학(南蠻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② 네덜란드가 일본과 서양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③ 주로 중국에서 이미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서적을 수입하여 과학기술을 받아들였다.
④ 막부는 크리스트교의 포교와 함께 양학 연구 역시 금압하였다.
77.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서를 참고하여 실체로 인체를 해부해 본 결과, 서양 해부서의 내용이 정말로 정밀한 데 감동하여, 4년여에 걸친 노력끝에 서양 해부서를 『가이타이신쇼(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인물은?
① 아오키 곤요(靑木昆陽) ② 시볼트
③ 스기다 겐파쿠(杉田玄白) ④ 아라이 하쿠세키
78. 난학이 발달하면서, 난학자들은 서양의 지식․학문과 함께 서양의 사회 구조․사상․문화 등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를 갖는 사람도 생겨났다. 다카노 조에이를 비롯한 난학 연구자들이 막부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고 개국을 주장하자, 막부가 이들을 체포하여 처벌한 사건은?
① 시볼트 사건 ② 반샤노 고쿠(蠻社の獄)
③ 요나오시(世直し) ④ 오오시오헤이하치로의 난
79. 오사카에 인재 양성기관인 데키주쿠(適塾)을 세워, 근대 일본의 방향성을 제시한 하시모토 사나이,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한 양학자는?
① 오가타 고안(緖方洪庵) ② 요시다 쇼인
③ 스기다 겐파쿠(杉田玄白) ④ 아라이 하쿠세키
80. 에도 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면서 여러 지역에 교육 기관이 설치되어 문화 보급에 크게기여하였는데, 오사카의 조닌이 출자하여 경영한 사숙(私塾)으로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정신을 연마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곳은?
① 가이토쿠도(懷德堂) ② 간기엔(咸宜園)
③ 쇼카손주쿠(松下村塾) ④ 번교(藩校)
81. 분고(豊後) 히다(日田)의 사숙(私塾)으로, 무사 및 서민에게도 개방된 교육시설로, 메이지 정부의 중신이었던 오무라 마스지로를 비롯한 막말의 사상가와 지사를 다수 배출한 곳은?
① 가이토쿠도(懷德堂) ② 간기엔(咸宜園)
③ 쇼카손주쿠(松下村塾) ④ 번교(藩校)
82.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지주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제자들을 지도했던 곳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많은 메이지 유신의 지사를 배출한 곳은?
① 가이토쿠도(懷德堂) ② 간기엔(咸宜園)
③ 쇼카손주쿠(松下村塾) ④ 번교(藩校)
83. 다음중 데라코야(寺子屋)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각 영주가 주로 무사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다.
② 어린이들이 학문을 배우도록 사원에 보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③ 20~30명 정도를 수용하는 쇼규모 시설이 대부분이었다.
④ 실생활에 필요한 글과 주산을 가르치는 실용 위주의 교육을 했다.
84. 에도 시대 중기의 지리학자로, 젊어서는 상인으로 재능을 발휘하였으나, 50세가 되어 장남에게 가업을 물려 주고, 천문학과 측량술을 배웠다. 1800년 홋카이도의 측량을 시작으로 16년간 막부의 지원 아래 전국의 연안을 측량하여 『대일본연해여지전도』를 작성한 인물은?
① 오가타 고안(緖方洪庵) ② 모토오리 노리나가
③ 스기다 겐파쿠(杉田玄白) ④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85. 다음중 국학(國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고학자(古學者)들 처럼 중국 고대 성인의 정신을 이상으로 했다.
② 학문의 방법으로 실증적인 문헌학적 방법을 취하였다.
③ 인간관으로는 감정과 정서를 중요시하는 주정적인 인간관을 취하였다.
④ 외래 사상에서 해방되어 일본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파악하고자 했다.
86. 진언종의 승려로, 17세기 후기 일본 사회의 시대적 조류인 인간의 욕망의 긍정과 인간 해방의 정신 속에서 인정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일본 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을 지적하여 국학 연구의 실마리를 열었던 인물은?
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②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③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④ 게이추
87. 신관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 전래의 신도(神道)와 가학(家學)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학문을 형성한 인물로, 국수주의적 감정이 학문의 근간을 이룬다. 국사(國史)․율령․전범(典範)․와카․신도(神道) 등을 주로 연구했고, 막부의 힘을 빌어 국학을 보급하려고 했던 인물은?
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②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③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④ 게이추
88. 『만요슈』를 연구하여 그 속에서 일본 고대의 정신을 파악하여고 했던 국학자로, 언어 속에 내재된 작자의 심정을 추체험하여 그 사람의 정신을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일본 고대의 정신은 외래의 사상에서와 같은 작위가 없는 무위자연의 세계라고 파악했던 인물은?
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②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③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④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89. 국학을 대성시킨 인물로 일본 근세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선배 국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실증적 방법과 해석학적 방법을 동시에 적용하여 고대 일본인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하였고, 『고지키(古事記)』연구를 통해 국학의 기본 사고를 확립한 이 인물은?
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②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③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④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90. 막말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국학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기 보다는 신학화하려고 했던 인물로,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천지 창조와 창조주의 사상, 내세관과 영혼 불멸의 사상 등을 자신의 독자적인 신학 체계를 수립하는데 도입했던 국학자는?
①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②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③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④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91. 에도 말기의 유학자이자 병학자로, 해외 사정을 알리고자 『가이보핫사쿠(海防八策)』을 집필하였다. 양식 화기(火器)의 채용과 해군 육성의 필요성을 건의하였으며, 특히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이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지식인은?
①히라가겐나이(平賀源內)②가이호세이료(海保靑陵)③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④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92.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로, 30대 후반부터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스스로 소라이학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임했으며, 막번 체제의 동요를 타개하기 위해 상업 자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무사도 상업 활동에 참가해 전매 제도로 이익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은?①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②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③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④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93. 문학적․과학적으로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신분 질서에 속박되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채 1779년 사망한 인물로, 모직물 생산이나 기계의 발명을 통해 사회적인 부를 증식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생의 보람을 발견하고자 했던 인물은?
①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②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
③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④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94. 일본에 없는 식물을 외국에서 들여오고, 일본의 산물을 타국에 수출하여 나라의 부를 증식시켜야 한다며, 상거래를 멸시하는 무사의 편견을 비판하고, 상거래는 자연스러운 도리이며, 심지어는 군신 관계조차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상거래라고 주장했던 인물은?
①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②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
③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④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95. 18세기 전반 『시젠신에이도(自然眞營道)』를 저술하여 만인이 평등하게 경작하는 자연 세계를 이상으로 신분 제도를 부정했던 사람으로, 직접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산물을 무상으로 손에 넣는 자는 도적과 다름없다며 정치 조직,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비판했던 인물은?
①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②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
③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④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96. 막말의 농학자로 상품 작물의 재배 기술을 자세히 연구하여 화폐 경제하의 농민 생활을 향상시키고자 하였으며, 농기구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육체 노동의 부담을 경감하고 생산을 높이는 방도를 연구했던 인물은?
①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②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
③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 ④ 오쿠라 나가쓰네(大藏永常)
97. 다음중 존왕론(尊王論)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황실을 높이 받들 것을 주장했지만, 봉건제는 부정하였다.
② 처음에는 천황을 받드는 것과 막부에 충성하는 것이 모순없이 양립하였다.
③ 정국의 변화에 따라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④ 외국 배척 사상인 양이론(洋夷論)과 결합하면서 절대주의적 국가의식이 형성되었다.
98. 에도 말기의 농촌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막부의 부름을 받아 황폐한 촌락의 부흥에 종사하였다. 농업 기술에 관한 지식과 독특한 정신주의적 교화가 결합되어 촌민들에게 근로와 검약의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보덕사법(報德仕法)이라고 일컬어지는 방식을 구사했던 이 인물은?
①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②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
③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 ④ 오쿠라 나가쓰네(大藏永常)
99. 다음중 에도 시대 후기의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문화의 중심이 교토․오사카에서 에도로 옮겨졌다.
② 문화는 선진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③ 전국적으로 도시가 발달하면서 문화도 도시에서 꽃을 피웠다.
④ 농민층 대다수가 문화의 담당자 역할을 하였다.
100. 에도 후기의 문인이자 역사가로, 교토에서 사숙을 열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필생의 대작인 『니혼가이시(日本外史)』의 집필을 계속하였다. 중세 새대의 개막부터 도쿠가와 3대 쇼군 이에미쓰 시기까지 무가 정권의 역사를 독자적 관점에서 기술하여 많은 독자를 얻었던 이 인물은?
① 라이 산요(賴山陽) ②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
③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④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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