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은 높이를 헤아릴 수 없고 견줄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의 무등(無等)이다. 그렇다고 결코 위압적이지도 거칠지도 않다. 동서남북 어디서 보아도 호남 들녘에 솟은 달덩이처럼 넉넉한 인상을 풍기는 산이다. 완만한 산세로 육산을 이루고 있는 무등산은 마치 커다란 둔덕과 같은 홑산이다. 무등산의 특징은 너덜지대인데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다. 천태만상의 암석들이 정상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널려 있어 그 웅장함으로 인하여 도민의 신앙대상이 되어온 신산으로 알려졌다. 특히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암석미는 대단하다.
무등산의 삼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를 일컬어 무등산 삼대석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봄이면 용추계곡과 원효계곡에서 진달래꽃을 피우고, 장불재에서 규봉암으로 가는 길에 철쭉이 장관이다. 가을에는 단풍과 억새가 겨울에는 가지마다 얼음꽃이 만발해 그 자태를 뽐낸다. 옛날부터 유명한 문인들의 시적 영감을 주는가 하면 그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던 무등산은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규봉암 등의 사찰과 산의 북쪽 기슭인 충효동에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 누정 등의 유적이 있다.
수정병풍(水晶屛風) 장불재의 고산초원을 헤치고 동북쪽으로 약700-800m쯤 올라가면 마치 거대한 병풍을 둘러 쳐 놓은 것 같은 장엄한 돌무더기가 펼쳐지는데 여기가 유명한 서석의 수정병풍(水晶屛風)이다. 서석대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있어서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강한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서석의 수정병풍'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육당 최남선과 노산 이은상도 다같이 '수정병풍'이라 불렀다.
동쪽으로 약 400m 쯤 올라가면 정상의 서쪽 해발 1017미터 지점에 입석대가 있다. 석축으로 된 단을 오르면 5-6모 또는 7-8모로 된 돌기둥이 반달 같은 모양으로 둘러 서 있는데 이렇게 기이하게 생긴 돌모양은 다른 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무등산만의 절경이다. 높은 것은 15-16미터 대개는 10미터 이상 되는 것이 혹은 한덩어리로 혹은 3-4단으로 겹쳐 세워져서 마치 석수가 먹줄을 퉁겨 깎아 세운 듯 돌기둥이 줄줄이 열을 지어 늘어 서 있다. 산의 동남쪽 해발950미터의 층암괴석을 규봉이라 부른다. 원래는 규봉사 입구에 우뚝 솟은 세개의 돌기둥을 규봉이라 했다하는데, 이 바위를 삼존석 이라고도 한다
지산유원지
무등산 북서쪽 자락에 위치하는 지산유원지는 광주시민의 휴식처다. 35만평의 부지에 리프트 카, 모노레일, 옥외수영장, 회전목마, 동물원, 보트장 등 각종 위락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무등산도 놓치기 아까운 조망이다.
중심사 신라 법흥왕 시절 철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한국전쟁 때문에 500 나한전만 남고 소실되어 건물을 나중에 다시 지었다.
규봉암 규봉의 입석 사이에 자리잡은 아담한 절로, 신라 의상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바위 사이로 언제나 일정한 양의 물이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원효사 신라시대 원효국사가 창건했다. 규모는 작지만 고찰의 면모가 물씬 풍긴다. 한국전쟁 당시 불타서 대웅전은 다시 지었고 조선시대의 범종과 사리탑이 남아있다.
충장사
충효동을 지나 원효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광주 충효동에서 출생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선봉에 섰다가 1596년 8월, 옥사한 뒤에 충장공 시호를 받았다.
충효동과 지실마을
호남정맥의 중심인 무등산 북쪽 기슭에는 내를 사이에 둔 두 마을이 있다. 김덕령을 낳은 충효당과 정철 후손들의 관향지실이다. 충장공 김덕령은 석저촌에서 1567년에 났다. 그를 빼놓고는 무등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가 삼을 심어놓고 높이뛰기 훈련을 했다는 삼밭실, 담력을 길렀다는 지왕봉의 뜀바위, 칼을 만들었다는 주검동, 말을 달린 백마능선 등 무등산 곳곳에 그의 전설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잘 싸웠으나 도중에 역모에 걸려 스물아홉 나이로 옥에서 죽은 비운의 의병장을 광주사람들은 무등의 수호신으로 승격시켰다.
지실마을은 송강 정철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동네로써, 족보로 따지자면 충효동의 사위동네 쯤 된다. 정철은 김덕령의 종조부 김윤제와의 만남을 인연으로 환벽당에서 십년 공부 후 문과 장원급제를 이루어냈다. 급제 후 벼슬길에 나선 송강은 치열한 당파 싸움을 뚫고 욱일승천, 좌의정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세상살이가 힘들 때마다 그이는 늘 자신을 키워주었던 고향 지실을 찾곤 했다. 그리고 무등의 품에 안겨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작품을 남겼다.
무등산 ( 1187 m )
광주, 전남 담양 남면, 화순 이서면
빛고을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은 높이를 헤아릴 수 없고 견줄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의 무등(無等)이다. 그렇다고 결코 위압적이지도 거칠지도 않다. 동서남북 어디서 보아도 호남 들녘에 솟은 달덩이처럼 넉넉한 인상을 풍기는 산이다. 완만한 산세로 육산을 이루고 있는 무등산은 마치 커다란 둔덕과 같은 홑산이다. 무등산의 특징은 너덜지대인데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경관이다. 천태만상의 암석들이 정상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널려 있어 그 웅장함으로 인하여 도민의 신앙대상이 되어온 신산으로 알려졌다. 특히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암석미는 대단하다.
무등산의 삼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를 일컬어 무등산 삼대석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봄이면 용추계곡과 원효계곡에서 진달래꽃을 피우고, 장불재에서 규봉암으로 가는 길에 철쭉이 장관이다. 가을에는 단풍과 억새가 겨울에는 가지마다 얼음꽃이 만발해 그 자태를 뽐낸다. 옛날부터 유명한 문인들의 시적 영감을 주는가 하면 그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던 무등산은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규봉암 등의 사찰과 산의 북쪽 기슭인 충효동에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 누정 등의 유적이 있다.
수정병풍(水晶屛風) 장불재의 고산초원을 헤치고 동북쪽으로 약700-800m쯤 올라가면 마치 거대한 병풍을 둘러 쳐 놓은 것 같은 장엄한 돌무더기가 펼쳐지는데 여기가 유명한 서석의 수정병풍(水晶屛風)이다. 서석대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있어서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강한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서석의 수정병풍'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육당 최남선과 노산 이은상도 다같이 '수정병풍'이라 불렀다.
동쪽으로 약 400m 쯤 올라가면 정상의 서쪽 해발 1017미터 지점에 입석대가 있다. 석축으로 된 단을 오르면 5-6모 또는 7-8모로 된 돌기둥이 반달 같은 모양으로 둘러 서 있는데 이렇게 기이하게 생긴 돌모양은 다른 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무등산만의 절경이다. 높은 것은 15-16미터 대개는 10미터 이상 되는 것이 혹은 한덩어리로 혹은 3-4단으로 겹쳐 세워져서 마치 석수가 먹줄을 퉁겨 깎아 세운 듯 돌기둥이 줄줄이 열을 지어 늘어 서 있다. 산의 동남쪽 해발950미터의 층암괴석을 규봉이라 부른다. 원래는 규봉사 입구에 우뚝 솟은 세개의 돌기둥을 규봉이라 했다하는데, 이 바위를 삼존석 이라고도 한다
지산유원지
무등산 북서쪽 자락에 위치하는 지산유원지는 광주시민의 휴식처다. 35만평의 부지에 리프트 카, 모노레일, 옥외수영장, 회전목마, 동물원, 보트장 등 각종 위락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무등산도 놓치기 아까운 조망이다.
중심사 신라 법흥왕 시절 철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한국전쟁 때문에 500 나한전만 남고 소실되어 건물을 나중에 다시 지었다.
규봉암 규봉의 입석 사이에 자리잡은 아담한 절로, 신라 의상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바위 사이로 언제나 일정한 양의 물이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원효사 신라시대 원효국사가 창건했다. 규모는 작지만 고찰의 면모가 물씬 풍긴다. 한국전쟁 당시 불타서 대웅전은 다시 지었고 조선시대의 범종과 사리탑이 남아있다.
충장사
충효동을 지나 원효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광주 충효동에서 출생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선봉에 섰다가 1596년 8월, 옥사한 뒤에 충장공 시호를 받았다.
충효동과 지실마을
호남정맥의 중심인 무등산 북쪽 기슭에는 내를 사이에 둔 두 마을이 있다. 김덕령을 낳은 충효당과 정철 후손들의 관향지실이다. 충장공 김덕령은 석저촌에서 1567년에 났다. 그를 빼놓고는 무등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가 삼을 심어놓고 높이뛰기 훈련을 했다는 삼밭실, 담력을 길렀다는 지왕봉의 뜀바위, 칼을 만들었다는 주검동, 말을 달린 백마능선 등 무등산 곳곳에 그의 전설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잘 싸웠으나 도중에 역모에 걸려 스물아홉 나이로 옥에서 죽은 비운의 의병장을 광주사람들은 무등의 수호신으로 승격시켰다.
지실마을은 송강 정철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동네로써, 족보로 따지자면 충효동의 사위동네 쯤 된다. 정철은 김덕령의 종조부 김윤제와의 만남을 인연으로 환벽당에서 십년 공부 후 문과 장원급제를 이루어냈다. 급제 후 벼슬길에 나선 송강은 치열한 당파 싸움을 뚫고 욱일승천, 좌의정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세상살이가 힘들 때마다 그이는 늘 자신을 키워주었던 고향 지실을 찾곤 했다. 그리고 무등의 품에 안겨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작품을 남겼다.
첫댓글 좋은산 가시네요 ^^
시간 나시면 같이 산행하면 좋겠네요
차량관계로 산행하실분은 예약 받습니다 전화 카페에 총무 여 016033406795 남총무 01043650987
토 일 이바로연이어서...줄줄 이틀은 힘드옵니다. 고민되어여~~~울타리는 오래전부터 다녔기에...이번엔 결석을 해야할듯...중산은 처음이거든요...안전하게 잘 다녀오시어요^^
감동...
무리하면 저처럼 병나요 내 몸에 맟추어 다니세요.......
지도요 가고는 싶은데 고넘에 일이 꼬이네요 내고향인디 ..... 아쉽네요 ......
몸 튼튼하신 분은 중산행하시고 울타리산해부탁해욯ㅎㅎㅎ
예 .........알겠습니다
가고싶은 산인데 일정이 빡빡하네여~~ 생각을 좀 해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