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 (※ 모친 초계(草溪) 변씨의 꿈에 시부 (媤父)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한 이조 (異兆)가 있어 그대로 명명) 병정놀이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이 충무공 (1545 - 1598) - 휘(諱)는 순신(舜臣) ,자는 여해(汝諧) , 본은 덕수(德水) 충무는 1643년(인조 21년) 공이 순국후 내린 공의 시호(諡號)임. 증직 과 추증 - 선조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 -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음. - 32세 : 함경도에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됨 (국경경비) - 36세 :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 (포구 수비) - 38세 : 만호에서 파직당함(시기하는 무리때문에 모함으로) - 39세 :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함. - 42세 :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됨 - 43세 :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됨 - 45세 :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함 - 47세 :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하고 권한과 범위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심. - 48세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07일 : 제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 ▷ 5월 29일 :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 ▷ 6월 02일 : 제2차 당포해전 대승첩 ▷ 7월 08일 : 제3차 한산도대승첩- <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 ▷ 9월 01일 : 제4차 부산대승첩 - 49세 :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 - 50세 :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함 - 52세 :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 53세 :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석방, 백의종군함 다시 통제사로 복직, 여병(余兵)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함. ▷ 9월 16일 : 명량해전대승첩,울독목에서 30척 격파 - 54세 :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 시작 ▷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음. ▷ 11월 19일 -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심,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 척만이 남해로 달아나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됨. 유관순 유관순(柳寬順) 1902. 3. 15∼1920. 10. 12 충청남도 천안(天安)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 竝川面) 아우내(竝川)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녀는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그녀는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 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의 수신면(修身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로 대표하는 성남면(城南面)·갈전면들이고,하나는 동면(東面)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와 갈전면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다. 이 두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군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그녀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에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그녀는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 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 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울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찔러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그녀는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그녀는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그녀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그녀는 경성(京城) 복심법원에서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이윤희(李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장보고 장보고의 출신지 장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상 특기할만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생애에 관한 기록은 희소하고 그것도 분명치가 않다. 그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단 그가 ‘해도(海島)’ 혹은 해안지방 출신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삼국사기』(권11, 문성왕 7년조)의 기록을 보면, 문성왕(文聖王; 839~856)의 차비로 장보고의 딸을 맞이하려 할 때 조정의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장보고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오늘날의 완도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해상왕국의 근거지를 하필이면 청해진에 설치하였던가 하는 점이다. 이는 완도가 그의 고향이었거나 연고지였기 때문에 그곳에다 근거지를 두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둘째로 정년이 뒷날 당나라에서 실직하여 사주(泗州)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고 있다가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면서 “기한으로 죽는 것보다 싸워 죽는 편이 나은데 하물며 그것도 고향에서 죽으니 바랄 것이 없노라”고 하면서 청해진으로 돌아오고 있다. 당에서의 활동 장보고의 유년시절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8세기 후반 경에 완도(莞島), 혹은 그 인근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후 청년으로 성장한 장보고는, 자기보다 10세 가량 어린 동향(同鄕) 후배 정년(鄭年)과 함께, 풍운의 꿈을 안고 당으로 건너가서 30세 쯤에 서주(徐州)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라는 군직(軍職)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무령군이라는 군단명이 805년에 처음 생겼다고 하니, 805년이라는 해는 재당 시절 장보고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에 오른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805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겠고, 그가 당에 건너간 시기는 일단 805년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신라에 귀국한 시점이 828년이었으므로, 그의 재당(在唐) 기간은 9세기초 20여년간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무령군의 주요 임무는 당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치청의 번수 이사도(李師道)가 이끄는 평로군을 소탕하는데 선봉에 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사도가 이끄는 평로군은 819년에 완전 토멸되었다. 장보고는 무령군의 일원으로 평로군 진압전에 참전하여 그 전공을 인정받아 소장직에까지 승진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로치청 번진세력이 반당의 기치를 내걸고 대두하게 된 것은 765년에 고구려유민 출신인 이정기(李正己)가 당 조정으로부터 임명받은 평로치청절도사 후희일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스스로 번수가 되면서부터였다. 이후 819년 완전 진압될 때까지 이정기(765~781년)-이납(李納;781~792년)-이사고(李師古;792~806년)-이사도(李師道;806~819년)로 이어지는 3대 55년 동안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소왕국’을 이루어 군림하였다. 한 때 이정기일가의 번진세력은 산동반도 일원의 15개 주(州)를 영유하고 10만의 대군을 거느리는 최대의 번진으로 성장하여 당 왕조의 지배와 간섭을 배제하였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에 당 왕조를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당 왕조로부터 발해와 신라와의 해상교역을 관장하는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藩使)’의 업무를 위임받아 막대한 재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널리 해운의 요충지에 집단 거주하면서 막강한 경제력을 발휘하고 있던 재당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후원도 이정기 일가의 권력기반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이사도의 평로군도 대당제국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서 결국 분열과 붕괴의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이사도 세력의 진압전에 참전했던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의 저력을 발견하고 이를 확신하게 되면서, 이정기 일가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 대안으로 그들의 경제적 권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갔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국 무령군 소장의 경험에서 나온 군사전략가적 그의 소양은 해적퇴치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게 하였을 것이고, 여기에 두목(杜牧)이 칭찬했듯이 인의지심(仁義之心)과 명견(明見)의 통찰력을 겸비한 빼어난 그의 자질은 재당신라인사회에서 대중적 인기와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신임을 통해서 그는 재당신라인사회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해 갔으며, 이것이 장보고가 당대 최고의 국제 해상무역가로 입신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동북아시아 해상권의 장악 장보고 무역선단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은 크게 세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하나는 중국 산동반도와 경항(京杭)대운하 일대에 일찍부터 진출해 있던 고구려·백제 유망민과 신라인들이며, 다른 한 집단은 한반도 서남지역의 완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주민들, 마지막은 백제의 유이민과 자연재해로 인해 이주한 신라인들에 의해 형성된 재일신라인사회이다. 신라인취락은 산동반도 남안일대에서 해주(海州), 그리고 대운하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다. 이 연안에 산재해 있던 촌락을 연결해 보면 신라와 당의 중심부를 이어주는 자연의 수로가 형성된다. 그리고 운하의 심장부는 초주(楚州)였음을 알 수 있다. 초주에서 35Km 떨어진 연수현(漣水縣)은 옛 회하하류의 북안에 위치한 내륙수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도 신라인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다. 엔닌(圓仁)에 의하면 이곳에 총관과 ‘전지관(專知官)’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초주 신라방의 크기와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운하연변에 거주하던 다른 신라인들처럼 대부분은 운수업·무역·?조선업·상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산동연해안지역을 살펴보겠다. 엔닌 일행은 해주 동해현 숙성촌(東海縣 宿城村)연안에서 하선하였다. 이곳에서 엔닌일행은 밀주(密州)로부터 초주로 목탄을 수송해 가던 우호적인 신라상인들을 만나 이들의 안내로 인근 신라인 마을인 숙성촌으로 안내되었다. 숙성촌은 바다에 면한 마을로 이곳 신라인들은 주로 소금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엔닌도 마을주변에 ‘취염처(取鹽處)’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목탄생산에 관계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은 촌락주변이 산림지대였고 또한 주민들이 목탄업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라인 촌락은 산동반도 남쪽 연안일대에서 가장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평현(牟平縣) 소촌포(邵村浦)와 도촌(陶村), 해양현(海陽縣) 동북의 유산포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들은 해운업·상업보다 농업에 종사한 듯하다. 문등현 청령향 적산촌(文登縣 淸寧鄕 赤山村)은 산동반도일대 신라인들의 중심지였을 뿐아니라 당내륙·연해안 교통과 신라와 당 및 일본 3국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장보고가 건립한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어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법화원은 연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庄田)을 소유하고 장보고 휘하의 장영 등 3인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다음해 1월 15일에 끝난 강회에는 매일 40명 안팎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 강연의 마지막 2일간은 250명과 200명이 각각 참여하였다. 법화원은 이외에도 고국에서 온 여행자라든가 무역관계종사자들을 위한 숙박소로도 제공되었던 듯하다. 한편 8세기 중엽을 고비로 하여 신라와 일본간의 국교는 사실상 단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공무역의 길이 막히게 되자 양국간에는 사무역에 대한 욕구가 크게 증대했다. 당시 일본측은 중국 물품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었는데 이는 주로 신라상인들의 중개무역에 의해서 충족되고 있었다. 신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나·당·일 삼국간의 무역에 유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에 있어서 당시 일본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처럼 신라인사회의 존재가 주목된다. 신라인은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일본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신라인이 끊임없이 일본의 각 지역 즉 하모야국(下毛野國)·무장국(武藏國)·미농국(美濃國)·근강국(近江國)·준하국(駿河國) 등에 이주하여 신라인사회를 형성하여 신라인의 성(姓)을 갖고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인사회의 명칭은 신라군(新羅郡) 또는 도전군(度田郡) 등으로 불려졌다. 이러한 신라인사회를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신라의 승려나 관리들이었다. 재일신라인사회와 신라본국간의 연락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견당일본사절사선(遣唐日本使節使船)에 동승한 신라 역어(譯語, 신라출신 통역관)와 재당신라인들이 긴밀히 협조하여 중국과 외교절충을 하거나 일본사절이 귀국하기 위하여 초주에서 배 9척과 선원 60명을 마련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재일신라인들도 재당신라인들처럼 주로 무역에 관련된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재일신라인들은 일본정부가 필요로 하는 각종 고급인력을 제공해 주었다. 엔닌의 일기에 나타난 역자·선원·승려·노젓는 사람 등은 재일신라인들이었다. 이외에도 귀국할 일본조공사선(日本朝貢使船)의 준비·항해의 지휘·재일신라인사회 주위에 있는 일본인에 대한 기술지도 등을 수행하였다. 청해진이 설치된 후 장보고의 대일무역활동은 본격화되었다. 그가 당시 일본에 보낸 무역사절단은 회역사(廻易使)라 했는데, 이들의 무역활동은 다자이후(大宰府)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의 묵인 아래서 이루어졌다. 한편 장보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신라와 일본간의 분쟁을 통해서도 대일무역의 번성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장보고는 재일신라인사회와 청해진 및 재당신라인사회를 연결하는 일련의 무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완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항로를 장악하여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장보고의 암살과 해상왕국의 붕괴 장보고의 몰락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중앙정치에의 진출 야망, 특히 납비(納妃) 문제가 유산된 데 있었으나, 이 밖에도 서남해안지방의 군소해상세력들의 장보고에 대한 반발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청해진의 설치로 말미암아 장보고의 통제 아래 들어감으로써, 종전에 자신들이 누리던 해상무역의 이익을 대부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해 왔던 해상 세력가들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그간 신라 조정에 대해서 노예무역을 다시금 허가해 줄 것과 청해진의 무역 독점 행위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보고의 사망연대에 대해서는 국내자료와 일본측 자료와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846년 봄에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반하여 일본측 기록에는 841년 11월중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지난날 장보고의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로서 중국에 가서 무역을 한 바 있었던 청해진 병마사(兵馬使)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이 ‘국란(國亂)’을 당해서 845년 7월 현재 중국 연수의 신라방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국란’이란 바로 장보고 암살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측 자료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그의 암살사건은 841년 11월중의 일로 판단된다. 장보고가 암살 당한 뒤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염장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한동안 청해진은 염장(閻長)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에 장보고의 심복들은 중국 혹은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한편 장보고를 따르던 완도 주민들은 염장의 압제에 끈질기게 저항하다 탄압만 받았다. 결국 851년(문성왕 13년) 2월에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곳 백성들을 벽골군(碧骨郡, 오늘의 전라북도 김제)으로 집단 이주시켜 청해진은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고 말았다. 청해진이 폐쇄되어 장보고에 의한 무역통제력이 제거되자, 각지에서 군소해상세력들이 독자적으로 대중국무역을 전개하였다. 강주(康州, 오늘날의 경남 진주)의 왕봉규(王逢規), 금주(金州, 오늘날의 경남 김해)의 이언모(李彦謨), 개성지방의 왕건 집안, 나주의 오씨집안, 울산의 박윤웅(朴允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활동은 후삼국시기를 거쳐 고려의 벽란도(碧瀾渡) 활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신라는 패강지역에 진을 설치한 이후 주로 해안지역에다 여러 개의 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당성진(唐城鎭; 흥덕왕 4년, 829), 혈구진(穴口鎭; 문성왕 6년, 844), 장구진(長口鎭)이 바로 그것이다. 당성진은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혈구진은 강화도에, 장구진은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 근처에 위치하였다. 이처럼 해상교통의 요지에 대규모의 군대가 주둔하는 진영을 설치하였다는 점에서 신라는 일차적으로 안전한 해상교통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해안지역에 진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청해진의 성공에 고무된 신라조정이 직접 무역에서 나온 이익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
첫댓글 연주 너 대단하다.어쩌면 너 최우수가 될 것 같아.
그건아니당...설마..~~~
설마가 사람잡는뎅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