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새 해의 기도 제목
금년들어 나의 기도 제목은 조금은 세속적이다.
많은 바램들이, 지난해의 미진함이 새로운 해로 덤으로 넘어가면서
그래 이것만은 했어야지의 그 이루지 못함의 아쉬움이 새로운 숙제장의 목록을 채우고 있다. 그 숙제장의 첫 머리로 자리한 기도제목..
“ 성령의 기름 부움이 충만케 하소서.”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성직자의 기도제목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금년의 이 폐광촌 돌구지 산골전도사인 나의 기도 제목은
“기름보일러를 돌리게 해 주소서 이다“
오년, 이곳에 거루를 내린지가 어언 오년이다.
경제적인 이유를 제껴두고 라도 연탄의 고장에서 어찌 기름 보일러를 돌릴수 있느냐로 하여 연탄과 기름 겸용으로 보일러를 교체하여 살아 온지가 오년이다. 연탄 가는 일은 내 몫이다.
별로 튼튼치 못한 나의 기관지가 그예 바튼 기침과 가래를 돋구게 한다.
삼구 삼탄, 세 구멍의 연탄구멍에 석장의 연탄을 넣어 연소시킨다.
거기에 3백여 개의 화분의 겨울나기 온실 때문에 별도의 난로를 놓아 하루에 열다섯 장의 오구 삼탄의 풀무간에 연탄을 갈면서 적잖이 탄내에 상한 나의 허파가 기침과 가래를 쏱아 낸다.
다행이 사택의 전화 전기 수도 요금을 교회가 고맙게도 담부하여 주기 망정이지, 한달 450장이라랴 거금 십만원의 우리 에너지 연탄을 빗겨 세우고 그 세배에 버금하는 기름을 때게 해 달라고,,
이게 오른 분별력인지, 겨울은 길고 병약한 내게 태백의 겨울은 10월부터 이듬해 5월 까지이고 보면 이제까지도 모자람이 없이 풍성함으로 늘 가득했었는데,, 지나친 호사를 청구하는건 아닐까??.
하얗게 재가 된 연탄을 예배당 뜨락으로 흩뿌리며 무공해 채소의 싱싱한 여름을 기대한다.
자기를 태워 구들목을 뎁혀 주곤 재로 남은 연탄 같은 인생의 후반을 살아 가느니 이제 나의 머리에도 어느새 하얀 머리카락이 늘어간다.
어찌 대답을 주시려는 지 기다려 보렵니다. 그 분은 나의 아버지십니다.
04년 일월에, 전도사 임 건택
- 12 -
돌구치의 소리 15호 주후 2004년 3월 31일
철암남부교회☏☏☏ 글밭 순서 ♱♱♱.
1), 표 지
2), 빛 가운데로 행하자
3), 돌구르는 소리,,
4), 돌구치의 겨울이야기,,,,
5), 믿음으로 받는 구원,,
6), 화진포 초상 7,
7), 화진포 초상 8,
8),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9), 여호와를 찾으라,
10), 말 씀,
11), 나귀를 타신 예수님,
12), 2002년의 기도 제목,
기다림은 인내의 풀무간에서 자아를 덜어냄으로 성숙으로 가거니와 개으름은 실로 난감한 저주의 길동무가 되어 생명의 빛을 차단하고 빈약한 자화상을 현실화로 가져옵니다. 제데로 발행했으면 2월에 나왔어야할 “돌구치 소식14호“가 한달여의 연착된 셈입니다.
바라기는 폐광지 산골 늙은 전도사의 감성의 이야기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런 삶도 있구나” 라는 고단한 영혼들의 공감하는 작은 기여라도 이룬다면 이 소식지의 몫이 받아지는 것이 될것입니다.
+++++++++++++++++++++++++++++++++++++++++++++++++++++++++++++++++++++++++
“돌구치의소리”짓고 만들고 나눈이, 임 건택
곁에서 끊임없이 군불 잽히는 이, 평화의 마을,빈민운동가 권술용님,
235-210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산1-3, “돌구치마을“
철암 남부교회 전도사 임건택, 033)582-8346,011-9058-4103
+++++++++++++++++++++++++++++++++++++++++++++++++++++++++++++++++
- 1 -
빛 가운데로 행하자. 요한일서1:5-10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물의 밀도 속에 생존 조건을 구비해 주셨습니다.
나무에게는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과 하늘을,,
그러면,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생존 조건으로 주셨을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빛을 생존 조건으로 하여
사랑과 나눔의 영적 가치위에 삶의 터를 열어 주셨습니다.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굄이 있고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 일서 1장 7절
예수님은 빛 그 자체이시며 본질이십니다.
“창세기에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드러났고
이 빛은 세상의 모든 존재의 생존 조건인 동시에
하나님의 빛은 영적인 생존 조건으로
선과 의를 실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태입니다.
착한일 선한 일, 이런 의로움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시도도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선과 의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바뀌고 변합니다.
선과 의는 하나님 그 자체이기에 유전 하거나 변합이 없으며
하나님을 믿는 그 자체가 선을 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진리이시고 선이며 의로움이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의 그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 기 도 > 빛이신 예수님,, 우리로 빛 가운데 이끄심을 감사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 보게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2004,2월에 - 2 -
나귀를 타신 예수님 마태복음21장 5-11절
사람은 아주 정치적인 동물 입니다,
선을 그어놓고는 금 안의 무리와 금 밖의 사람들이 되어 살아갑니다. 한번의 부라만은 영원한 부라만이 되어 운명의 罪業(죄업)을 뒤집어 씌우곤 부리며 학대하고 천히 여기기를 서슴치 않습니다.
그런 계급의 사회 속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나귀를 타신 하나님의 섬김과 낮아지심이며,
그리고 천국백성의 삶의 質(질)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는데 지금 나는
이천여 만원에 버금가는 스타렉스 승합차를 타고 다닙니다..
아귀가 맞아 떨어 지는 얘깁니까.
훨씬 더 비싼 고급차를 타는 이들이 얼마던지 인데,,,
속물스런 변명과 자기 합리화가 나를 뻔뻔하게 합니다.
시대를 따라 빠르게 변하는 가치들 속에서 불변의 진리가 깨웁니다.
노동과 밭갈이와 짐 나르기로 일생을 묵묵히 살아가다
마침네 살코기와 가죽 조차도 모두 주어버리는
왕궁의 짐승이 아닌 가난한 자의 고단한 삶의 동반자인 나귀,
나귀처럼 섬기는 예수님은 너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라 하십니다.
나귀처럼 권위를 버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교만을 내려 놓으라 십니다.
나귀처럼 살과 가죽을 나누신 예수님께서는 너도 이렇게 살라 십니다.
그리고,
그리고 천국을 무등태우는 삶이 나귀의 삶 속에 있습니다.
짐 나르기로 못이 백힌 나귀의 등짝 같음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우리의 등에 태울 수가 없습니다.
주후2004년 3월14일 주일에--
- 11 -
말 씀, 에레미야서 33장1-3절
3월 4일부터 5일 두 날을 눈이 퍼부어댔다,
산도 나무도 폐광촌의 을시년스런 지붕들도 지난해의 태풍으로
잘려나간 산자락도 하얗게
하얗게 싸매고 안아서 순결한 겨울의 정취가 흠벅 취하게 합니다.
희다는 것 검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분별력입니다.
이 인본주의의 분별력의 희생자가 되어
선지자 예레미야는 궁정 뜰의 지하 감옥에 영오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저를 감옥에 가둔 자도 나름의 논리를 가짐니다.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불온 분자라는 죄목을
선지자의 목에 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편임니다.
왤까??
예수님을 정죄한 가야파나 바리새인의 무리들도
예수님을 정좌하면서의 명분은 나라와 민족이 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義(의),,,”가 누락되면 사이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적 유대를 통해서 만이
그 본래적 眞面目(진면목)을 누리게 됨니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居(거)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주후 2004년 3월 7일 주일에,,,
<생명 바구니 연탄 100장,25,000원 쌀10Kg27,000원 김치 외
우체국201178-02-018965임건택)
- 10 -
-- 감성의 편지-- 돌구르는 소리
처음으로 컴퓨터의 창에 글을 올렸습니다.
글의 세계에 담아지는 생각들이 날개를 달아
새해 아침에 까치 연을 날리듯 사랑하는 이들과 그리고,
미지의 이웃들과 한 시대를 共有(공유)하게 되었슴을 감사합니다.
겨울눈의 무계에 가지가 부러지는 소나무의 비명에
영혼의 잠이 깨는 산속의 겨울입니다.
함께 깨인 산이 밤새도록 바람이랑 함께 울어줍니다.
그렇습니다.
밤은 소리들의 강이 되어 또 다른 영혼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바람 소리, 물 소리, 돌 굴으는 소리,
소리의 음계가 어둠으로 휘돌아 흐릅니다.
베들레헴의 목동 다비데는 어둠의 강에서 생명의 약동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계를 들었습니다. 별이 쏱아지는 베들레아의 한 밤에,,
그래서 다비데의 하프에서는 생명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병든 사울이 정신을 일깨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가슴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면,
하나님의 생명이 물래가 돌면 빛 부신
넉넉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지천으로 누워있는 돌밭 돌구치에 삽니다.
돌들이 일어나 아브라함의 자녀가되어 이 세대를 고발하기 전.
돌들을 깨우는 하늘의 기척이 들려오기 전,, 사랑 하는 이여 어서
겨울잠을 털고 봄으로 오라!! 2004 2월1일에, 임건택 오전11시
- 3 -
< 돌구치의 겨울 이야기 >
산속중의 산골인 여긴 상기도 살을 저미는 겨울 바람입니다,
병약한 내게는 겨울보단 여름이 늘 선망의 계절입니다.
소금처럼 짠 추위를 몸으로 받으며 겨울 산새들이
자주 예배당 뜨락으로 내려 강조차 얼려버린 추위를 거뜬히 살아 낸
생명의 신비를 노래합니다. “새들아 함께 놀자꾸나“
아무리 몸짓 말짓을 다 하여도 일정한 거리의 여백 이상은 허락 하지를
아니 합니다. “왤까”인간의 善意(선의)가 용납되지 않음이 무슨
연고란 말인가. 그렇다, “두려움이다”“ 敵意(적의)입니다.
죄의 얼굴을 가진 사람과 자연은 和睦(화목)의 관계를 잃어 버렸습니다.
가슴에 칼이 있고 눈빛에 살기가 서려 있는데 새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자기를 처서 복종시켜야할 겸손의 그것이요
날마다 새로워 져야하는 당위이기도 합니다.
“ 어찌 사람을 죽여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자식을“
“주실 때는 언제요. 이제 제게 살인을 교사 하시는 겁니까”
“나는 못 합니다.” “아니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해괴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굴종이 아닌 순종으로 사람의 잣대를 버리고, 합리성과 이성과 상식과
양식을 버렸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 나라를 살리자던”가야파 일당의 말속에는 민족과 애국이라는
인본주의가 있습니다. 고뇌에 찬 인간의 잣대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눈물을 목격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떨어뜨려지는 나자렛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가야파의 결단 중에 이 시대의 지식인의 대다수는 가야파의
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구별의 눈은 지녔을지 모르나 영의 눈은 감겨 있어서
자기 선에 맹종하는 독선의 미움과 증오로 가득합니다.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있어야 개선의 여지가 있습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먼저는 사랑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엔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고 구원과 생명이 있습니다.
견주어 비교하는 산술적 인본주의는 에덴을 잃고 난 아담 부부이 전유물이요
예수님의 눈물엔 사랑과 구원이 있습니다 주후2004년 3월14일 주일에--
- 4 -
여호와를 찾으라, 아모스5장 4-8절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지녀야할 가치에 대한 깨어있는 意識(의식)을
요구합니다.
오히려 버려야할 허접 쓰레기들로 가득하여 정작 지녀야할 소중한 영적인 가치들로부터 소외되고 이반되어 있씀은
죄로 오염되고 훼손된 우리의 영적 세계의 현주소임을 고백합니다.
금단의 열매를 범함으로 저들이 얻은 소득은
知的(지적) 교만입니다.
驕慢(교만)은 순수한 사랑의 상대적 개념입니다.
自己(자기)中心的(중심적) 사고와 이기심을 그 안에 담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지극히 排他的(배타적)이며 분열적입니다.
산술적 탐욕을 포함하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변증적 사고를 도입하여 책임을
합리적 유추와 은유적 지혜를 다하여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여자 하와에게로,
다시 한 땀 더 나아가
그 나무의 열매를 거기에 놓아둔 창조주 하나님께로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선악의 분별 자로,
정죄 자로 하나님께 덤태기 씌우기를 서슴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길갈에서 벹엘에서 20세기의 지식 문명 사회에서 저 좋을데로
제 구미에 맞춰 신을 만들고 彫像(조상)하고 그리고 이것이
나의 신이라고, 힘이요 능력이라 하며 마귀의 종 됨을 주저치 아니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내가 새벽 날개를 펴고 바다 끝에가 거할지라도 여호와의 손이 나를,,“
주후2004년 2월 20일에 임 전도사
- 9 -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예레미야17장5-10절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함으로서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자로
교회와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자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온 몸으로 받아 냈던
눈물의 선지자 였었습니다.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 주어야
입에는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축복을 말하는 교회였습니다.
풍요를 위하여 돌덩이가 떡덩이로 바꾸어지기를,
고난과 수고는 예수님께 맡기고 알리바바의 “열려라 참깨를”,
되 뇌이는 거짓의 선지자들 틈에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이 가는 넓은 길을 버리고
남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가라고 우리 주님은 일러주셨습니다.
성경은 모형입니다. 거기 추한 자가 정결함을 받으며
누추한 자가 높임을 받는 생명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본질의 행복이 무엇이냐의 해답이 있습니다..
그 본질의 삶을 살기 위하여 비 본질의 허구와 싸우며 날마다
죽는 삶을 선택하여 세상에서 질고와 슬픔을 오히려 기꺼움으로 인식하는
좁은 길을 가는 자들로 사는 것입니다. 거기 하나님의 종들이 있습니다.
그리도 절구던 겨울 추위도 가고 계절은 봄입니다.
땅속으로 겨우내 피정하였던 씨앗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니다.
하늘이 베풀어 둔 생명의 조건 안에서 잎을 피우고 꽃을 열고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이 안에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말씀의 생명강가에 뿌릴 내리고 환경의 조건을, 죄로 익숙해진
습관의 벽을 절제하여 내고 생명의 주인이 요구하는 의도와 기쁨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궁성 뜨락 땅굴 감옥에 갖혀짐을 당하여도 오히려 예레미야의 영적 눈물은 더욱 짙어만 갔습니다.
그것이 부름 받은 자의 좁은 길입니다. 2004, 3, 21,
- 8 -
믿음으로 받는 구원 디모데전서1장 3-7절
가만히 땅 속을 드려다 보면 왼통 부신 생명의 약동으로,
끓는 쇠 솥의 물처럼 뻗어 오르는 환희가
전류처럼 몸을 관통하여 갑니다.
봄, 봄임니다. 계절의 어머니 봄임니다.
물기 가득한 봄 안개 속엔
생명의 엔돌핀이 무진장으로 포화상태입니다.
그의 입김이 닿아 스치는 곳마다 세상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이름을 받은 날로 부터.
새들은 노래하고
풀들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짐승들은 뛰놀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벅찬 생명의 환희를 망각하고
거리에서 촟불을 켜들고 세상이 어둡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어두운건 거리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인데,
우리의 영혼이 너무 어두워져 볼 수 없음인데도
너의 어둠으로 세상이 캄캄하여라,고
네 탓으로 숨이 막힌다고,, 그래서 어둠을 교살하려고..
촐불의 칼을 갈고 있습니다.
이 칼로 너를 베는 날 내 영혼도 베어질 것임을 왜 모르는가.
마음의 눈이 실명되어 내가 던진 칼에
내 영혼의 찢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쏱아 부어
넓은 길로, 쉬운 길로 가라합니다.
“神話와 끝없는 族譜(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辯論(변론)을 내는 것이라.“
04, 3, 27, 디모데전서 1장 4절에서.
- 5 -
화진포 초상 7,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
고향이 수복되고 떠났던 이들이 돌아온 고향은 전쟁의상채기가 너무도 살벌했습니다.
외가의 팔간 기와집 터는 얼마나 많은 젊은 죽음이 불태워 졌는지 화장터 뼈무덤으로 화하여 있고, .
등성이 너머 우리 집은 제재소로 변하여 톱밥이 둔덕을 이루고 있었다. 열살 내 팔 아름으로 두 아름쯩이나되던 기둥들,
세월의 때가 낀 검은 기둥들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뿐인가. 마을 뒷산은 온통 엄폐호로 헤처지고 전투호에 버려진 탄피와 포탄을 모아 우리는 사제총을 만들어 전쟁 놀음에 익숙해 있었다. 산 속은 지뢰 매설 지역으로 접근 불가 였으나
우리는 지뢰를 파내어 가지고 놀기도 했었다.
박격포 뒷 꽁무니에 달린 화약 종이를 떼어 불을 댕기면 얼마나 휘황한 불꽃이던가.
화진포 별장, 집들과 오리 떼가 가득하던 곳으로
녹쓴 철조망이 촘촘이 묶여지고,
천년 묵은 소나무들이 군인들의 후생 사업으로 베어져 갔습니다.
황폐한 우리의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통 나무로 얼기설기 세운 위에 억새를 얹은 군인들이 버리고 간 빈 막사를 교실로하여, 대진국민학교가 산학리에 세워져
돌의자 돌책상 교실에서 수복후 1회 졸업생 열 세명 가운데
나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 전후의 어려움 속에서도
겨울이면 유난히도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산 꿩이 먹이를 찾아 중뜰로 함박 내리고 얼음 논에서 빙구를 타던 아이들,
얼어터진 손에서 피가 흘러도 좋기만 했던 날들, 흐르는 코물을 닦아도 닦아도 양 손 팔소매가 코 범벅이 되어, 그래서 내 별명은 코발래기 였었습니다. “코발래기와”
“시계부랄 땍각 땍각” 이어도 그립기만한 유년의 내 별명입니다. 주후 2003년 정월에
- 6 -
화진포 초상 8<남기고 싶은 이야기>
지금 이 순간에도 밖에는 늦 눈이 퍼 붙는다.
몇 시간 새에 발목이 묻히도록 쌓였다.
금년에는 유난히도 여러 번 많은 눈이 내렸다.
“창밖을 함박눈이 내리던 밤은
멀리 두고 온 고향 생각 그립다”
소년 시절에 겨울이면 즐겨 부르던 詩(시)같은 노래이다.
지금은 빠른 박자의 노래들이 젊은 감성을 지배하는 터라 들어볼길이 없다.
우수 경칩이 올 때쯤이면 산 눈이 녹아 속돌(논 사이의 도랑)로 흐르면 화진개로부터 빙어가 올라 저녁이면 밤새 횃불을 밝히고 통살을 놓아 번쩍이는 빙어를 소쿠리 가득 담아 오언 때가 아마 이맘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집 앞 중뜰로 흰 눈이 가득 할 때면 산 꿩이 먹이를 찾아 눈밭으로 내리고 그 겨울밤이면 갈무린 감자를 화로에 굽고 어린애 팔뚝안한 청수궁중무를 깎아 한 입식 베어물던 정말로 두고 온 고향 생각이 간절하다.
전쟁이 나던 그해 겨울일 게다. 그리도 장담하던 인민의 나라대신에
남반부 정권이 잠시간 들렸다간 다시 퇴패하고 다시 인민공화국의 나라가되어 마을엔 남으로 전쟁으로 투입되는 인민군이 하로 낮식 쉬었었다가는 밤에 떠나가곤 하였다. 밀고 당기는 와중에서 두개의 조국이 우리를 혼란시켰다. 그리고 다시 국방군의 진격 소식에 금강산 아래 금장동의 폐갱구로 피난하여 한 두어달 살다 돌아오기도 했었다.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폭격으로 불타던 마을과 산불, 밤새 걸어도 걸어도 산속의 집마다 염병이(장질부사)돌아 쉴 곳이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악몽이다 분명히!!!
나에겐 외삼촌 두 분이 계셨다. 두 분은 무어니(無言) 청각장애인이 셨다.
들을 수 없다고 함부로 놀리고 욕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랐다.
외모 때문에, 가진 것 때문에, 배운 것 때문에, 환경으로 하여
사람들이 구별되고 차별되고 대접을 달리하는 것을 나는 경멸한다.
내가 하나님 앞의 귀중한 존재라면 우리 모두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귀중한 자녀인 너를 피조물들을 내 어찌 내 소견 데로 없수히 여기고 가벼히 여길 수 있다는 말인가. 나를 소중히 여겨 사랑 하듯이 그 지키야 할 우리의 이웃인 것을,,,
-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