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당.조영동 고분군
사적 제516호.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과 남천의 사이에 형성된 해발 50∼70m정도의 얕은 구릉에 입지하고 있는데, 가장 서쪽에 남북으로 말안장처럼 뻗은 구릉정상에 위치하는 임당토성(林堂土城)을 중심으로 그 남서쪽에 임당동 고분군, 북동쪽으로 구릉을 달리하여 조영동 고분군, 부적동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내부구조는 대체로 청석인 기반암(基盤巖)을 파고, 그 안에 목곽(木槨)을 안치한 목곽묘이며, 적석목곽묘, 횡혈식석실묘, 석곽묘, 옹관묘 등도 다수 확인되었다.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은 구조가 일열주부곽식묘(一列主副槨式墓)라는 점과 금공품의 형태 등에서 신라와 매우 친근한 사람들의 무덤으로 규정된다. 곧 출자형 입식을 가진 금동관을 비롯하여 귀걸이, 관모 앞 세움장식인 관모전입식(冠帽前立飾), 허리띠장식, 장식 신발[飾履] 등에서 특히 경주적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점에서 신라의 한 지방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 유적이다.
▶ 신상리 고분군
경주지역 중심묘제인 적석목곽묘가 다수 확인되었다. 신상리유적에서 적석목곽묘가 처음 출현하는 시기는 5세기 중엽으로 출현 배경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경산 임당 유적에서 확산되어 채용되었을 가능성인데, 임당 유적의 경우는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전반까지 고총(高塚)의 내부 시설로 적석목곽묘를 채용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고분군을 조영한 집단들이 경주지역의 장송의례(葬送儀禮)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주부곽식의 배치가 경주 사라리나 안계리 등과 매우 유사하고, 이혈명자식의 경우 임당 유적과 유사하나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고분군은 5-6세기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고분의 규모나 출토유물의 질과 양으로 보았을 때, 경산지역 최대유적인 임당유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일대를 다스린 읍락의 지배자들 무덤이라 판단된다. 특히 다수가 조사된 적석목곽묘는 경주지역의 중심묘제인 점에서 경주지역의 장송의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 경산병영유적지와 마위지
경상북도 경산에는 과거 신라의 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현재 경산 압량면은 신라 파사왕이 압독국을 취하여 군(郡)을 두었고 다시 선덕여왕 11년에 김유신 장군이 군주로 다스렸던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의 군주로 있을 당시 군졸의 무예를 훈련시킨 군사 훈련장으로 사적 제218호로 등록이 된 경산 병영유적과 그가 말들의 물을 먹인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마위지 공원이 그러한 곳입니다.
경산 병영유적은 구릉상의 대지 위 상부를 평탄하게 해 축조된 고대식 광장과 동남쪽에는 무덤처럼 흙을 쌓아 올려 높은 대를 만든 토축 고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식 광장은 타원형의 평탄면으로 병사들이 무술을 익히던 곳이라 보고 있으며 토축 고대는 김유신 장군이 지휘를 하던 곳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마위지 근린공원원 기마연무장에서 훈련한 기마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말을 위한 저수지를 축조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압량면 부적리 일대의 아낙들이 이곳에서 말을 이끌고 와 귀를 씻어주며 남편과 아들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하여 이를 마이지(馬耳地), 마위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 문화재. 유적
▶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31호.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팔공산(八公山) 관봉(冠峰, 해발 850m) 꼭대기에 만들어진 5.48m 크기의 석조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 윗부분에 갓 모양의 모자가 얹혀 있다고 하여 ‘갓바위 불상’이라고 한다. 병풍석과 같은 여러 개의 바위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 불상과 대좌를 하나의 돌에다 조각하였다. 갓으로 보는 머리 위의 자연 판석은 상당 부분 부서진 상태이다. 관봉석조여래좌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불두(佛頭) 위의 갓으로 불리는 자연 판석은 불상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깎아서 환조(丸彫) 기법으로 조성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통일 신라시대에 조성된 대부분의 불상들은 이러한 경우 환조가 아닌 마애(磨崖) 기법으로 불상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환조 기법으로 불상을 조성할 경우, 불상과 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합하는 것이 상례인데, 여기서는 하나의 돌에다 새겼다는 것이 특징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 대구카톨릭대학교, 하양읍 은호리 )
스트로마톨라이트는 화석이 전해주는 생물의 진화 증거로 46억 년의 지구 시간을 간직한 지층에서 지구에 산소가 존재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기록들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란 시아노박테리아(남세균류) 부르는 원핵생물이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스스로 석회질을 만들어냄은 물론 물속에 떠 있는 퇴적물들을 붙잡거나 부착시켜 시아노박테리아 군집체의 성장 형태가 퇴적층의 형태로 남겨진 기록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반구형 또는 원통형의 모양을 가진다.
시아노박테리아는 광합성을 하며 산소를 배출하는 생물임으로 지층 속에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발달 되어 있음을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 산소가 존재하였음을 말해주는 간접적인 기록이 된다. 경북경산 대구카톨릭대학교 내 중생대 백악기의 얕은 호수에서 만들어짐. 약 8천 만 년. 천연기념물 제 512호
▶ 난포고택
‘난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곡란리(谷蘭里)입니다.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919번 도로 좌측 바로 옆에는 1546년(명종1년)에 건립했다는 ‘최해근 가옥’으로 알려진 경북 유형문화재 제80
난포고택의 난포는 영천 최씨의 시조인 최한의 14대 후손인 최견철(1525~1594)의 호입니다. 난포 최견철은 조선의 문신으로 청주부사, 전라도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70세의 호인 난포고택(蘭圃古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령으로 손자인 최인수와 증손자 최준립과 향리에서 의병을 직접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했습니다. 또한 영천의 권응철 장군과 함께 영천, 경주 등에서 싸웠고 아화산성 싸움에서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난포고택은 그의 호 난포에서 온 이름이다.
난포선생이 지은 이 고택은 바로 1929년 조선총독부의 촉탁에 의해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사한 전국의 풍수적 길지에 자리한 대표적인 주택 36개 중 하나로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 집이다. 그가 이 조사보고서를 1931년 책으로 펴낸 '조선의 풍수'에서는 이 집에 대해 지형이 부용화(芙蓉花)같아(무궁화꽃을 닮은 식물꽃 이름) 거주지로서 가장 좋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
경북 경산시 하양읍 환성로 392-30.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동화사를 세운 심지(心地)왕사가 창건하였다. 예전에는 돌기둥만 넷 있었는데, 근년에 이 돌기둥으로 이렇게 일주문을 지었다고 한다. 수월관(水月觀). 대개의 경우 누(樓)라는 이름이 붙는데, 특이하게도 관(觀)자가 붙었다. 예전에 대웅전 앞 연못에 잠긴 달을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월관 2층 누각 아래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앞에 대웅전 마당이 있고 정면에는 대웅전, 좌우에는 심검당과 요사채가 자리 잡고 있다.
배치 또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 가람 배치이다. 보물 제562호 대웅전은 석축기단 위에 권위 있게 서 있다. 몸체에 비해 지붕이 매우 크다. 그 무게를 버틸 수 없음인지 네 귀퉁이를 활주로 받쳐놓았다. 석탑. 2층으로 된 구성, 하단부가 둥근 괴임돌의 형태 등 매우 특이하다. 원래 이렇게 생긴 이형(異形) 석탑인지 나중에 변형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낯설어서 정이 안간다.
대웅전 내부로 들어가 보자. 섬세하게 짜여진 우물천장 안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대들보 위에는 운궁형 닫집이 세 분 부처님 위로 길게 설치돼 있고 이제 환성사 대웅전의 하일라이트를 감상할 차례!!
♣ 수미단(須彌壇) : 불상을 모셔놓은 단을 불단(佛壇) 또는 수미단이라 한다. 수미산에서 나온 말이다. 높이가 8만 유순이나 된다는 수미산 위에 불상을 모신다는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불단은 수미산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꾸며진다. 수미단은 보통 장방형이지만 더러는 육각이나 팔각도 있다. 육각은 보살의 수행을 뜻하는 육바라밀을 의미하고 팔각은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팔정도를 상징한다. 장방형일 경우에는 동서남북 네 방위를 뜻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수미단은 상단과 중단, 하단으로 3등분 되며, 각 단에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각종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연꽃과 구름, 만(卍)자 등을 연속적으로 새겨 넣기도 하고, 수미산에 사는 날짐승·사자·호랑이·코끼리·물고기·거북·가재 등을 그려 넣기도 한다. 또한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새기기도 하며, 스님·동자승·비천상·도깨비 등이 조각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여기는 상상의 산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불상을 모신 대좌를 말한다. 경산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은 정면 12칸, 측면 4칸의 가구 수법으로 만들어진 3단의 수미단으로, 크기는 길이 652㎝, 너비 220㎝, 높이 114㎝이다. 전체 형태는 이렇다. 각 단은 모두 12칸으로 돼 있다. 수미단 앞은 사자좌. 큰스님이 법회를 할 때 신도들을 앞에 두고 올라앉는 자리이다.
환성사 수미단은 세로로 긴 사각형의 틀을 12칸 만든 뒤 각 칸 마다 각종 기화요초와 서수, 십장생, 연꽃 등을 조각했다. 수미단 정면 왼쪽부터 보자. 12칸으로 된 수미단 하단은 두 칸씩 한 쌍으로 하여 그 안에 용을 조각하였다. 즉 12칸에 6마리의 용을 표현했고, 왼쪽부터 황룡, 청룡 또다시 황룡, 청룡 순으로 배치했다. 이렇게 투각(透刻)으로 두 칸에 한 마리씩 표현한 장인의 상상력과 솜씨가 대단히 놀랍다. 맨 왼쪽 황룡은 특이하게도 새의 깃털 같은 날개를 가지고 있고 얼굴도 새의 얼굴을 닮았다. 익룡(翼龍)을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 용 위에는 서수(瑞獸)들도 있다. 왼쪽부터 필자 생각에 공작, 불가사리, 기린으로 보인다.
정면 오른쪽엔 새와 사슴이 노닌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가릉빈가(극락조)가 조각돼 있다. 가릉빈가는 날개를 반쯤 편 채 연 줄기를 손에 들고 있다. 생동감이 넘친다. 맨 위 2단으로 된 상단 구조물은 제 짝이 아닌 듯한데 나중에 얹은 것 같다. 여기는 모란이나 국화로 짐작된다. 새와 사슴이 놀고 있다. 아름다운 한폭의 민화를 보는 것처럼 구수하고 정겹다. 개(?) 오리 등. 그런데 이 조각의 꼬불꼬불한 테두리를 무슨 무늬라 하나요?
수미단 왼쪽 측면이다. 하단부터 살펴보자. 네 칸 중 왼쪽 두 마리 용은 입에 금줄을 물고 있다.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오른쪽 두 마리 용은 금줄 대신 연 줄기를 물고 있다. 금줄과 같은 뜻으로 생각된다. 맨 왼쪽은 괴인이 업경대를 든 것으로 생각되며, 맨 오른쪽은 나찰이 부처께 보주를 공양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꽃 아래에서 잉어(붕어) 두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도 아름답다.
▶ 자인계정들 소리
자인면 계정들을 중심으로 불려오다가 1996년에 수집·정리되었으며, 199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005년 7월 28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초대 예능 보유자는 이규한(李圭漢, 1930~2012)이며 제2대 예능 보유자는 이지우(李知雨, 1934~)이다. 보존회는 경북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자인면사무소 내)에 본부를 두고 있다. ‘자인 계정 들소리’ 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 ‘경산 자인 단오제’에 포함되어 있다.
‘자인 계정 들소리’는 한 해 풍년을 기리면서 지신을 밟는 <들지신밟기>에서 시작하여 산에 나무를 하거나 풀을 베러 갈 때 신세타령으로 부르는 <어사잉이(어사용)>, 둑을 쌓거나나 다리를 놓을 때 큰 돌이나 목재를 운반하면서 부르는 <목도소리>, 못 둑을 다지는 망깨질을 할 때 부르는 <망깨소리>, 보를 쌓거나 논둑을 쌓을 때 부르는 <보역사(洑役事)소리>, 모판에서 다 자란 모를 찌면서 부르는 <모 찌기소리>, 논에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심기소리>, 논을 맬 때 부르는 <논매기소리>, 곡식을 타작할 때 부르는 <메타작소리>, 다른 논밭으로 이동하면서 부르는 <방아타령>, 상일꾼을 소에 거꾸로 태워 마을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칭칭이>까지 모두 열한 개의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노래 방식은 <어사용>과 <모심기소리>를 제외하면 모두 선후창 방식이다. <어사용>은 혼자서 부르는 독창이며 <모심기소리>는 교환창 방식이다. 이 들소리는 기원 및 과정에 대한 현장론적 연구와 들소리 중 <모심기소리>의 음악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자인 계정 들소리는 타 지역의 영향이 적어 이 지역만의 선율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경상도 지역 사람들의 기질과 말씨의 억양이 그대로 드러나 투박하며 역동감이 넘친다. 경상도 농요의 일반적 특징인 메나리토리와 덧뵈기장단이 잘 드러나 있다. <어사잉이>는 굵게 떠는 소리와 비음이 더해져 신세타령의 구슬픈 느낌이 한층 더하다. 연행 시 대여섯 명의 앞소리꾼이 각 부분을 나누어 앞소리를 한다. 과정이 넘어갈 때 ‘띵가(뜅각)’라는 목 나발을 분다.
▶ 허후, 허조 부자 旌(깃대기정)충각
조선 세종조에 예조 판서, 이조 판서,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정간공 허후와 집현전 수찬을 지낸 수찬공 허조 부자의 충렬을 찬양하는 정려각으로, 정조 16년(1792)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순조 14년(1814)에 정려각을 세우고 현판을 걸었다.
허후는 단종 1년(1453)에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다가 사사(賜死)된 후 영조 23년(1747)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허조는 세조 2년(1456)에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자 자결하였고, 사육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정조 16년(1792)에 복관되고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정조 15년(1791) 부자가 함께 장릉 충신단에 모셔졌다.
정충각은 단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처마 끝을 바치는 기둥인 활주 4개를 세워 처마를 받치게 하였다. *旌(깃발정)閭(마을려): 충신, 효자, 열녀 등의 집 앞이나 동네에 비석, 현판 등을 세워 표창하던 일
▶ 관란[觀瀾물결란]서원 : 물결을 본다
1660년(현종 1)에 지방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도덕과 학문을 추앙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715년과 1743년에 묘우(廟宇)를 중수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서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유생들의 학문을 닦는 곳으로만 사용되어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강당(3칸)·고사(2동 5칸)·대문(1칸) 등이 있다.
강당은 중앙에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었다. 고사의 1동은 향례 때에 제수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며, 또 1동은 제구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경내에는 이언적의 단비(壇碑)가 건립되어 있으며, 지방유림들이 서원으로 다시 복원할 계획을 하고 있다. 또한,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냈으나, 서당으로 명칭이 바뀐 뒤에는 1년에 한 번씩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 조곡서원
서원은 조선 시대에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에 대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설립한 교육 기관으로 지금의 사립학교와 같다. 조곡 서원은 오성군 안우鰲城君 安祐, ?~1362와 그의 4세손 고은 안지皐隱 安止, 1384~146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정조 18년1794에 지역 유림들과 탐진 안씨의 후손들이 세운 서원이다.
안우는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안지는 세종 27년1445에 공조참판으로 권제, 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지금도 조곡 서원에는 안지의 후손이 손으로 베껴 쓴 《용비어천가》가 있다. 고종 5년186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렸다. 이듬해 지금의 자리에 교육 공간인 강당인 상경재尙敬齋가 다시 지어졌고, 1900년에는 상경재 뒤에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지어져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2월에 제사를 지낸다.
이 서원은 현 집안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업적을 기려 국가의 허가와 지원을 받아 건립한 점이 특이하다.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