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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왕자산(天安 王字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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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 강역 탐방 스크랩 천안 작성산성(鵲城山城, 498m)
오심죽(吾心竹) 추천 0 조회 27 11.01.06 19: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천안시 목천 작성산성...天安市 木川 鵲城山城 > 

 

 

 

 

 

 

 

 

 

 

 

 

 

 

 

 

 

 

 

 

 

 

 

 

1. 작성산성(鵲城山城, 489m) 개요

 

* 위 치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북면 매송리

* 시 대 : 백제시대(百濟時代) 추정

* 축성방법 : 복합산성(석축, 토루)

 

고문헌에 의하면 목천현(木川縣)의 진산(鎭山)이며, 고을 동쪽 5~10리에 위치하고, 직산 하남위례성에서 동쪽으로 뻗은 일맥인데, 산정위에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였다. 「조선보물 고적조사자료」는 ‘갈전면 매성리·북면 매송리, 작성산정에 있고 내부는 석축이고 외부는 토루이다. 주위 약 220간’이라 하였으며,「문화유적총람」상에는 ‘천안 매성리 성지, 작성산정에 있고 내부는 석축이고 외부는 토루로 주위는 약 1,000m이다’라고 하였다.

<참조 : (사)화성연구회>

 

*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와 북면 매송리를 감싸 안으며 우뚝 솟은 산이며, 암행어사 박문수의 묘와 은석산 은석사가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옛 목천현의 진산인 작성산성이다. 은석산엔 목천현의 기우제 터가 남아있다.

 

동쪽으로 충북 진천과 접하고, 삼한시대 농성(農城)으로 추정되는 동면 화계리 동성산성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청주와 통하고, 삼한시대 농성(農城)인

세성산성과 전의 운주산성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천안경계의 취암산~흑성산(검은성)을 조망하고, 북서쪽으로 성거산과 백제 위례성과 부소산 부소문령(부소치,부소령)과 이어져 백두대간 금북정맥(호서정맥)과 서운산(좌성산,청룡산)을 맞대고 안성으로 통하는 고대 교통의 요충지이며 물류의 길목에 위치한다. 특히 백제 위례성~고구려~신라의 삼국의 요충지로서 삼국의 군웅할거가 심했던 곳이며, 서해의 어염과 내륙의 임업자원이 작성산성 부근으로 이동하는 군사 전략상 요충의 요충이다. 온조왕시대 위례성의 남전(南甸)으로 동사강목의 안정복선생은 <대록지>에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동쪽 계곡으로는 커다란 골프장이 들어서 있고, 남서록에 성민대학교 등이 들어서 있고 남쪽으로 유관순열사의 생가와 아우내 장터가 있다.

 

 

 

2. 작성산성의 고기록(古記錄)

 

(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 제16권- 충청도 목천현 //

 

【산천】 작성산(鵲城山) 고을 동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작성(鵲城)ㆍ세성(細城) 모두 옛터가 있다.

 

 

(나) 순암선생 문집 제20권 : 작성산 기우제문(鵲城山 祈雨祭文) //

 

 

* 작성산(鵲城山) 정유년(정조 원년, 1777년)...안정복(安鼎福)

 

 

삼가 생각건대, 이 산은 백제 위례(慰禮)에서 시작하여 부여씨(夫餘氏) 이후로는 이름이 지리지(地理誌)에 오르고 제사 지내는 법전에도 나타났으니, 실로 신령스럽고 빼어난 기운이 모인 곳으로서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바입니다.

볕이 나고 비가 내리게 하는 화육(化育)의 권한을 지니고서 수천 년을 흘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한발(旱魃)의 재앙이 있어 보리는 이미 말라 여물지 못하고 모내기 또한 할 수가 없어 백성들이 근심하면서도 호소할 곳이 없었는데 주상(主上)께서 이를 민망히 여기시어 자신을 책(責)하는 교지를 내리자 방백(方伯)들이 명을 받아 옛 예(例)를 닦아 거행하였습니다. 수령이 달려나가 명을 받들어 엄숙히 희생(犧牲)과 폐백을 준비하여 날마다 호소하였는데, 사직(社稷)에 빌자 약간의 비를 주었고 다음으로 흑성산(黑城山)에 빌자 구름만 끼고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천명(天命)을 받들어 조화의 권세를 주도하는 자는 신입니다. 하늘은 만물을 살게 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는데 어찌 이 백성으로 하여금 구렁텅이에서 뒹굴게 하려 하겠으며, 신 또한 어찌 천명을 어기고 그 사이에서 사사로이 주고 빼앗음이 있겠습니까. 재이(?異)가 오는 것은 반드시 느껴 이르게 하는 원인이 있는 법입니다. 실로 제가 재주도 부족하고 덕도 없어 직책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여 천지의 신명에게 어여삐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이 아울러 그 화(禍)를 당한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빌건대, 신명께서는 이 지극한 심정을 살피시어 정령(政令)이 불편하여 이와 같은 재앙을 부르게 된 것이라면 죄는 저의 일신에 그치시고 하루 빨리 단비를 내리시어 이 착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제가 이 비루하고 그릇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문득 보잘것 없는 제수를 갖추어 사람을 보내 산 아래에서 정성을 올리게 하고, 동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니 간절히 기구하는 지극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삼가 고하나이다. <출처-한국고전번역원>

 

 

<다> 대록지(大麓誌...1779년)...순암 안정복 //

 

산천】작성산 : 목천현 동쪽 20리에 있으며 원적산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며, 산 위에 성지(城址)가 있다. 임진왜란시 이복장이 무리를 모아서 험준함을 이용하여 지켰다.

 

(鵲城山 在縣東 二十里 與圓寂連 上有城址 壬辰亂 李福長 募衆守險)

 

 

< 작성(鵲城)의 어원과 전설 유래 >

 

(1) 작(鵲)=잣=성(城)

 

* 충남대 백제어 연구가인 도수희 교수는 '밝지에'[paktsiei]

백제(百濟)의 백(百)은 밝(shining), 제(濟)는 잣(성을 의미)으로 읽는다.

* 양주동박사는 백제를 밝잣(光明城)으로 풀이하였습니다.

 

* 鵲성=잣성=城성=城中城=왕성(王城)...위례성

견강부회 일지 모르지겠만 감히 이렇게 풀고자 합니다.

 

* 천안시 성남면 세성산성(細城山城, 農城)~병천면 작성산성(鵲城山城)은 백제초도 위례성의 남전(南甸)이며, 대백제 첫도읍지 하남위례성의 관문입니다.

 

* 작성산성은 남쪽으로 오창,청주의 정북토성(井北土城, 農城)~상당산성(上黨山城)~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으로 향하는 백제의 남동진로(南東進路)이며, 동쪽으로 진천의 도당산성(都堂山城)과 충주, 문경, 하늘재(계립령)을 잇는 신라의 서북진로(西北進路)인 당항성로(黨項城路)의 중심이며, 삼남대로(三南大路)의 요충지에 천안 작성산성(鵲城山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 천안 목천 작성산과 청주의 진목탄(眞木灘)의 작천(鵲川)의 하천은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며, 고대 마한의 젖줄인 금강의 중상류이며, 광활한 청주~진천~증평~음성~장호원~이천~한강을 관통하는 고대인의 터전입니다.

 

 

 

(2) 작성산 전설 유래

 

(가) 옛날에 대홍수가 나자 이 산으로 피난을 왔는데

까치가 먹을 것을 물어다 사람들에게 주었다하여 작성산이라 이름함.

 

(나) 적군이 몰래 침입하는데 까치가 마구 울어대어 적을 물리쳤다하여 작성산이라 이름함.

 

(다) 작성산 <개목이고개-구항(狗項)> 유래

 

옛날 어느 사람(주인)이 술에 만취하여 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산불이 나서 잠자는 사람에게 접근하자 개는 근처의 냇가에서 털에 물을 흠뻑 적셔와서 불을 껐는데, 그만 개는 털이 너무 많이 그을려 지쳐서 죽었다함. 술에 깬 사람은 목숨을 구해준 개의 은공을 생각하여 의구비(義狗碑)를 세워 의리를 추모하였다함.

 

*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고기록에는 <작성산 은석사>라 기록되었는데 최근에는 작성산, 은석산이 2개로 분리되어 불리우며, 작성산엔 작성산의 표지석, 은석산엔 은석산의 표지석이 따로따로 설치되어 있어 고문헌의 기록이 퇴색하여 <목천현 진산 작성산>의 위상이 축소되었고, 대규모의 골프연습장과 대학시설, 교육원들이 자리하여 <작성산성>의 유무조차 낙엽속에 파뭍혀 세월의 무함을 느낄뿐임.

 

 

 

* 천안 병천면...작성산성 지도...

 

 

 

 

 

 

 

 

 

 

 

 

 

 

 

* 천안 작성산(현재, 은석산) 암행어사 박문수의 묘소 //

 

 

 

 

 

* 김시민장군 생가 터(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와 김시민장군의 묘소(충북 괴산) // 

 

  

 

 

 

 * 동성(銅城,구리성...천안시 동면 화계리)에서 바라본 작성산성의 모습 //

 

 

 

 

 

 

 

* 수안이씨 숭모비...정려각...효자 이복장 작성산 수성 사적비...천안시 병천면 매성리 // 

 

 

 

*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수안이씨 이복장 정려각에서 본...동성(銅城, 구리성)의 모습 //

 

 

 

*** 천안 세성산성에서 본 목천 독립기념관과 흑성산성(검은성)의 모습 //

 

 

 

* 탐방일시 : 2010.11.9(화), 12/31(금), 2011.1.2(일)...3차례 탐방 //

 

1. 작성산성은 해발 498m이며, 옛 목천현의 진산이다.

 

옛 고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산 정상에 옛 성터 있다라고 기록되었고,

<동사강목의 안정복>의 대록지에는 임진왜란 때 학자 이복장 의병장이 작성산성의 험준함을 이용해 적을 지켜냈다고 기록되었고, 안정복선생이 목천현감으로 재직시 <기우제문>을 지어 이곳 작성산에서 비를 기원했었는데, 현재는 작성산과 은석산으로 분리되어 불리어지고 있으며, 옛 작성산의 기우제단은 현재의 은석산 정상에 남아있다. 또한 목천현은 4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1.<상왕산=흑성산> 2.<취암산> 3. 중구봉(연춘리 뒷산...복구혈-伏龜穴=거북이 엎드린 형상...현재 복구정이 있음) 4. 작성산이 그곳이다.

 

2. 작성산성은 현재의 정상 표지석 있는 곳에서 북쪽 능선을 타고 약500m 구간에 걸쳐 있으며, 작성산 정상에는 토석혼합축이 발견되며, 중간 산성 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폭 20~30m, 길이 약 100m 정도의 토석혼합형 축성이 보이며, 둥근 원의 건물지와 평평한 곳이 있어 이곳에서 사방을 조망하며, 적군을 감시하고, 공격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북쪽 정상 역시 비교적 넓고, 평평한 지형이 자리하여 중앙 작성산성을 기점으로 날개모양의 익성, 토루,망루, 목책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작성산 정상의 험준함을 이용해 남북의 퇴뫼식 혹은 망루,보루,목책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대비했던 산성으로 보이며, 이곳은 우물, 식수가 없어 장기간 적과 대치하며 공방을 벌인 산성이라기 보다는 적의 공격시 방어에 용이한 산성으로 추정됨. 또한 동서의 산줄기는 급경사 지역으로 가히 난공불락의 천험을 최대한 이용한 산성(대록지:수험-守險)으로 보임.

 

4. 옛기록에 <내성은 석축, 외성은 토루이며 약 220간(1000m)이다>으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었는데 답사 결과 내성의 존재는 산정에서 찾기는 매우 어렵고, 내성이 존재하였다면 동쪽의 현재 골프장이 들어선 곳에 호리병 모양의 병목을 이용하여 내성과, 산정의 외성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산꼭대기에 내성이 존재하기 어려운 첫째 이유는 우물, 식수의 공급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많은 병력이 이곳에 주둔하며, 장기간 생활하기가 편협하다는 단점이 있다.

 

5. 작성산성의 <내성=석축, 외성=토루>가 있을만한 곳으로는

외성은 산정의 남북 500m 구간 <남=현재의 정상>~<중간=성터>~<북쪽 정상> 구간이 <외성=토루>와 부합하며, 동록(東麓)을 따라 병목 모양의 산형세가 자연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해 구축한 것으로 판단되며, <내성=석축>의 조건에 부합하려면

 

(1) 우물, 식수의 공급이 용이할 것

(2) 많은 인원이 생활할 공간이 있어야할 것

(3) 땔감이 풍족해야 할 것

(4) 적군의 침입시 퇴로가 막히지 말야야할 것

(5) 식량의 조달이 용이할 것

 

위 5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되는데 이런 조건에 충족한 곳은 작성산성 동쪽의 골프장 맨 위에 해당되며, 이곳은 계곡물과 우물이 있고 성터의 바로 아래에 위치해 피난민, 병졸들이 이곳에 머물며 생활하면서 전투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현재는 골프장의 걸설로 상당수 파괴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를 확인하기는 몇차례의 답사와 골프장의 출입이 어려워 사실상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임.

 

6. 작성산성은 기록대로 <산꼭대기에 성터>가 있었다면 장기간 이곳에 머무는 성곽이 아닌 즉 공세적인 성이 아닌, 수성적인 성격의 산성으로 판단됨.

 

청주(상당성)~목천(작성)~직산(위례성,사산성)~안성(서운산성)~양성(무한성)~당항성(평택 안중~청북의 자미성, 용성의 옹포나루 추정)으로 이어진 옛 삼남대로의 첩경이며, 고대 백제 위례성의 남쪽을 지키는 관문으로, 서해 아산만의 어염의 이익과 중부내륙의 임업자원과 곡물이 교역하던 중요 길목에 위치하여 현재는 경부고속도로, 철도, 국도의 자동차가 아닌 우마(牛馬)와 사람이 통행하던 시대에는 청주에서 안성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한 아산~천안~진천을 잇는 교통로상의 최고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그 증거로 세성산성, 동면 화계리 삼한시대(마한)의 농성(農城)으로 추정되는 동성(銅城,구리성이)의 존재와 천안 아산, 진천 청주의 수많이 산재한 고대의 산성 유적과 발굴 유물(천안 백석동토성의 청동기 대규모 촌락 주거지, 청당동의 마한시대 마구류, 용봉문 환두대도, 위례성 타날문토기, 청주의 정북토성, 신봉동 유적, 진천 석장리 철정 등)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7. 작성산성은 고대 삼한시대~백제~신라~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지며 삼남대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삼국시대 이후로 이곳이 국경지역의 요충지로써접경지역으로 군웅할거의 각축장으로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최대의 공방지로 그 중심에 이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 이복장은 누구인가? 임진란 작성산성 주변 인물 고찰 //

 

 

1. 이복장(李福長)의 생애

 

이복장의 자는 중수(仲綏)요,

호는 송담(松潭)

수안이씨(遂安李氏)이다.

 

참판 영견(參判 永肩)의 현손이고, 승지(承旨) 익령(益齡)의 증손이다.

9세에 모친이 질병에 걸리매 사당에 자신이 대할 것을 기축하였으며 단지(斷指)하여 화약(和藥)하니 비로소 회소(回蘇)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동(家?) 수 백을 데리고 향린(鄕隣)에 격(檄)하여 창의(倡義)하니 공(功)이 심히 컸다.

 

이복장이 죽으매 정구(鄭逑)가 그의 유고(遺稿)와 예설(禮設)을 찬집(纂集)하였으며, 생전에는 선비들이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세우고 이복장을 원장으로 추대한 일도 있었다. 벼슬은 예조참봉(禮曹參奉)을 지냈고, 사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숙종때 충효로 정문(旌門)을 이려(里閭)에 세워 그의 독행(篤行)을 수범(垂範)하도록 하였다.

 

이복장의 아우 인장(仁長)은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음사(蔭仕)로 세마(洗馬) 벼슬을 하다가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으며, 그의 장자(長子) 성준(成俊) 역시 문행(文行)이 있어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원장이 되었다.

 

<출처-천원군지>

 

 

 

 

2. 이복장의 임진왜란 전공(戰功)...천안시 동남구 병천읍 매성리 비문 발췌 //

 

* 이복장(1546~1611, 66세...碑文, 鄭逑 寒岡集 비교 참조함)

- 매성리 碑文엔 庚午年 正月 十三日(1630.1.13) 卒...잘못됨-

 

“임진란(壬辰亂)에 솔가동수백(率家?數百)하고, 전격향린(傳檄鄕隣)하야, 창의수험우 목천동 작성산서(倡義守險于 木川東 鵲城山西)할새 축보성시(築堡城時)에 군학(群鵲)이 주야취성(晝夜聚城)하야 불거십여일(不去十餘日)이라.

적대군(賊大軍)이 승야입성(乘夜入城)에 성중인 곤매부지(城中人 困寐不知)어늘 군작(群鵲)이 지지선동고(知之先動故)로 성중(城中)이 뇌이어적성공(賴而禦賊成功)하야 능제칠읍지민(能濟七邑之民)하다“ ...<鵲城山 李福長 事蹟碑 中>

 

임진왜란 때에 가동(집안의 노복이나 비첩) 수백인을 이끌고 격문을 이웃고을에 전하여 목천현 고을 동쪽 작성산의 서쪽에 창의(의병을 일으킴)하고, 험준함에 의지해 지키고, 성벽과 보루를 쌓을 때에 까치무리가 밤낮으로

작성산성에 모여들고, 까치들이 10여일 동안 떠나지 않더라. 적(왜군)의 대군이 깜깜한 밤을 틈타서 성안으로 들어오니 성안의 사람들이 피곤에 취하여 모두 잠들어 알지 못하매, 까치 떼가 적군이 침입함을 알고 먼저 날아오르니 성안 사람이 까치의 도움에 힘입어 왜적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까치무리로 인하여 일곱 고을의 백성들은 능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작성산 임복장 사적비 중에서>

 

 

 

*寒岡先生(鄭逑-정구,1543~1620, 78세) 別集 卷之二 雜著

 

五先生 禮說分類 跋

 

余於癸卯春(1603년)。在湖西之木州。亡友李福長仲綏勸令類輯諸先生論禮。以便觀覽。且招呼旁近士子十五餘員。乘筆助役。?半月而草本成焉。仲綏又欲爲之入梓。余以此事。本爲老病便考。何至刊刻傳播。且草率苟簡。尤不合輕出。力止而停之。投置巾衍中。未幾。余還嶺南。而仲綏下世。辛亥秋(1611년)。星山士友輩。請遂?寫。余仍敍顚末而弁其首。甲寅(1614년)春。家?失火。滿架書冊。盡入灰燼。而此書亦不保。徐思遠行甫宋遠器學懋共勉重輯。而余旣遭長子之喪。又?風痺之疾。憊臥床?。與死爲?。然而一念猶未忘也。朋徒往來。或寫或校。至于累年而功今始訖。此禮設編次之前後曲折也。辛勤則已甚。而取舍之舛則恐不免焉。豈不爲可懼。而回思癸卯。忽已十有六載矣。仲綏行甫學懋皆不及覩。俯仰之間。悲感亦係之矣。玆用追記。以備後日之有攷云。戊午(1618년)秋九月丁酉。逑。識。

 

 

 

 

* 임진왜란 작성산성 주변의 인물과 전쟁 //

 

(1) 충무공 김시민장군 : 1554(명종 9)~1592(선조 25)...천안시 병천면 //

 

임진왜란 당시 3대첩(三大捷) 중 하나인 진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군.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2) 황세득장군(1537~1598)...천안시 직산읍 마정리 //

 

황세득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처종형으로서 임진란 발발 당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부하인 장흥부사로서 당포해전과 부산포 해전때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한 뒤 사도 첨사로서 명량 해전에서 쇠사슬 조정관으로서 조선 수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고, 1598년 10월 순천 왜교성 전투에 참전하여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이 육해군 합동 작전을 어기고 공격을 하지 않자 명나라 수군이 조선 수군과의 연합 작전 없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자 이순신의 명으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을 구하기 위해 군관 이청일과 함계 군졸 100여명을 지휘해 진린을 구출했지만 결국 구출대 전원과 장렬히 전사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3) 충무공 이순신장군...1545(인종 1)~1598(선조 31)...충남 아산시 //

 

조선 선조 때의 명장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4) 이덕남장군 (?∼1592)

 

임진왜란 당시 안성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친 이덕남(?∼1592) 이덕남은 영천 이씨로 안성에서 태어났다. 20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훈련원부정이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삼촌인 홍자수와 함께 농가의 농기구를 녹여서 무기를 만들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의병 3천 여명을 거느리고 안성과 진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운산성에 성루를 구축하여 홍계남 장군은 좌성, 이덕남 장군은 우성을 맡아 지켰다.

 

그 후 기호 호서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활약하다 왜군과의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숙종 44년(1718)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장군의 생가(경기도 안성시 서운면)에 정문을 세웠다.

 

 

(5) 홍계남장군

 

홍계남은 어릴 때부터 용감했으며 말달리기 활쏘기를 잘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안성에서 부친 홍자수와 집안의 네 형과 의병을 모아 엽돈령에 머물고 있는 왜적 7명의 목을 단번에 베어 막대기에 달아매니 적을 퇴각시켰다고 한다. 홍계남은 그뒤 목촌땅에 성루를 쌓고 임전태세를 갖추는 한편, 죽산 양지 용인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을 기습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다. 홍계남이 다른 곳에서 싸우는 사이 부친이 전사하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부친의 시체를 찾아왔다.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이 가상하여 수원판관 겸 기호양도 조방장(水原判官兼畿湖兩道助防將)을 제수하였다. 뒤에 영천군수 겸 경상도 조방장으로 있을 때, 왜적이 안강현을 점령하고 많은 재화와 사람들을 잡아가는데도 인근에 주둔한 아군의 다른 장군들은 왜적의 위세에 위축되어 감히 구하지 못하였는데 홍계남이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적을 격퇴하고 잡혀갔던 남녀 사람들과 재화를 찾아옴으로써 그의 용맹을 떨쳤다. 선조가 그의 충절을 기려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판돈녕부사에 추증했다.

 

 

(6) 직산 소사벌 전투...천안시 서북구 성환읍~평택시 소사동 //

 

소사벌 전투는 정유재란 때 직산현 소사벌에서 전개된 전투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북상하던 왜군과 평양성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 한 후 남하하며 왜군을 압박하던 명나라 군대가 소사벌에서 전개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원숭이를 이용한 특이한 전술로 왜군을 대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왜군은 북상의 의지가 꺾였으며 전쟁은 조, 명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독점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된 청나라와 일본이 아산만과 안성천, 소사벌을 사이에 두고 평택과 아산방면으로 나뉘어 벌인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청나라를 조선에서 밀어내고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지금도 평택지방에는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라든가, “맹간교”, “청망평”, “왜몰보”와 같은 지명들이 청일전쟁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 맺는말...이복장 의병장 <의병지휘소>는 어디인가?

 

가히 천안은 애국애족의 고향이요, 국운존망시(國運存亡時) 견위수명(見危授命)할 줄을 아는 충절의 고향입니다. 고대부터 천안지방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서해 아산만의 어염(魚鹽)과 내륙의 임산물과 곡물이 교류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의 천험지리 얻기 어려운 형세의 땅입니다. 이러한 천혜의 조건은 선사시대부터 문화와 문명을 꽃피웠고,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영토확장에 따른 생존전쟁의 각축장이기도 합니다.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작성산성은 이러한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편리한 육상과 해상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인하여 물류가 오가는 코리아 실크로드(korea silk road) 이며, 당항성로(黨項城路)의 요충지이며, 현대의 경부고속도로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가 관통하는 글로벌 실크로드이기도 합니다.

 

특히 작성산성은 백제초도 위례성의 남쪽 관문으로 청주의 상당산성, 작천, 진목탄...금강을 두고 신라와 패권을 다투던 접경지에 위치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역시 이런 편리한 교통망으로 왜군은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 상주~문경~충주~이천~한양 / 상주~삼년산성~상당성~진천 도당성, 천안 작성산~부소문령~안성~용인~서울로 진격하기 좋은 길목에 위치합니다.

 

병천의 김시민장군, 직산의 황세득장군, 아산의 이순신장군, 안성의 이덕남, 홍계남장군의 활동은 천안의 작성산성 주변이 얼마나 치열하고, 요충지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정유재란의 직산 소사벌 싸움으로 임진왜란은 끝나지만 육상교통로의 중심에 바로 천안 작성산성이 존재합니다.

 

교통망의 발달로 옛 천년고성은 잡목과 잡풀만 뒤덮혀 황량하지만 그 속엔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줄 알았던 선인의 새빨간 핏물이 배여 있습니다.

 

특히 이복남 의병장의 기록이 남아있는 작성산성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임진왜란 전쟁사>에 잊혀질 뻔한 한부분입니다. 가솔을 이끌고 격문을 돌리며, 험준함에 의지해 산성을 수호하고,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는 조선선비의 당당함과 패기가 이곳 작성산 정상의 성터에 남아 있습니다.

이복남장군의 <의병지휘소>가 어디냐? 그곳은 작성산정의 보루와 성터 흔적 특히 <작성산 중심부의 성터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추정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사방팔방 적군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고, 가솔 수백명(數百名)이 생활하며, 보루(堡壘)를 쌓고, 안전하게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천험의 요새>인 것입니다. 아쉽게도 골프장 건설로 내성 추정지의 유물, 유적은 발견 못했지만 좀 더 체계적으로 고증하고, 답사를 통해서 검증한다면 내성의 석축도 일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성산 정상부에서는 도자기류 등 생활유물이 별로 발견되지 않아 오랫동안 성안에 머물며 항전하기엔 식수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졸견(拙見)으로는 작성산성은 공격(攻擊)이 유리한 성곽은 아니고, 수성(守城戰)하기에 안성마춤인 산성으로 보여집니다.

 

고기록대로 특히 <순암 안정복선생>이 목천현감으로 재직시 작성산에서 기우제도 올렸고, 철저한 실증사학을 바탕으로 한자어(漢字語)가 지닌 여러 가지 뜻을 고려하여 깊이 생각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꼼꼼한 순암 안정복선생의 기록대로 <모중수험-募衆守險-무리를 모아 험준함을 이용하여 수성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고, 간결하고, 명쾌한 <작성산성 이복장의병장의 활동기록>으로 생각됩니다.

 

 

 

--- 2011년 1월 5일 ---

 

 

< 吾心竹 尹鐘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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